사도 바울은 은사의 시행 원칙인 사랑을 따르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권면합니다(1). 예언은 방언(외국어)보다 더욱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미래적인 것을 내다보는 것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을 말합니다(19). 현대에는 직통 계시가 아니라 1차적으로는 설교와 관련됩니다. 성경이 완성 되기 전에 하나님은 교회 예배시간에 구약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통찰력을 주셔서 그 공동체에 필요한 말씀을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공동체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방언은 기도로써 하나님께 했습니다(2).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방언은 ‘비밀로’ 말한 것이 아니라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비밀스러운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만 알 수 있게 기도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비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감사하며 그것을 노래하는 일종의 송영의 기도입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받기 때문에 자기에게 덕이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 모두가 방언을 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통역하게 되면 그것이 예언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5). 그렇지 않으면 오늘 말씀이 일관성 있게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만약 고린도 교회에 가서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예를 들어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 전혀 유익이 안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방언을 은사로 받은 사람은 그것을 통역하는 은사를 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의 은사만 받고 그것을 통역하지 못하면 그 말을 하는 당사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마음 모두로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15). 예배 시에 방언으로 송영(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고 영광을 돌려 드림)한다면 그것을 말한 사람은 잘한 것이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통역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고 아멘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은 유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16). 그래서 방언을 많이 말하는 것 보다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로 권면하는 것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데 더 유익한 것입니다(19).
이어서 바울은 방언의 사용에 있어서 유치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20).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방언을 한다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방언을 하려고 노력하고 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자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방언으로 백성에게 말해도 백성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21-22). 그래서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정적 의미에서 표적이 됩니다. 방언이 통역 되지 않으면 불신자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믿음을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모였을 때 모두가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불신자 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미쳤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3-24). 하지만 다 예언을 한다면 믿는 자들이나 방언을 통역하지 못하는 자들도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받고 판단(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음의 숨긴 죄들이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계신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24-25).
이어서 바울은 어떻게 교회 안에서 모일 때(공예배 시)에 질서 있게 방언과 예언을 해야하는 지 말합니다(26).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방언의 은사의 남용으로 교회에서 모일 때, 예배시에 무질서해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배시에 찬송시(시편과 예배를 위한 찬송가)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설교)도 있고, 계시(당시에는 직접 계시도 가능함), 방언도 있고 통역함 등 예배의 다양한 요소들이 있는데,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하라고 합니다. 방언은 두 사람, 혹은 많으면 세 사람(두 가지 언어, 혹은 세 언어)이 한 사람씩 순서에 따라서 하되 통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하라고 합니다. 예언하는 자도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이 구약의 말씀과 일치하는 지 살펴야 합니다. 예언도 한 사람씩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자기의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언이 어떤 황홀경이나 통제할 수 없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32).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은사가 예배 중에 사용될 때 질서 가운데 사용되기 원하십니다. 만약 누군가 이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공예배시에 여성들이 침묵할 것을 권면합니다(34). 교회에서 여자들은 말도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공예배시에 여성도들 중에 일부가 불필요하게 자기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 성도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거나 예언을 받았다고 함으로 예배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유의 복음을 듣고 남녀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자 스스로 선지자나 신령한 줄로 여기는 여성도들이 예배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했던 것 같습니다(37). 그래서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먼저 남편에 물어서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함을 먼저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정에서도 질서가 바로 서고, 교회에서도 질서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에 고린도 교회(특히 스스로 선지자로 여기고 신령한 자로 여기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들)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주님의 명령임을 힘주어 말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시하면,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자신도 주님께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38).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짧게 요약합니다(39-40).
오늘날 방언과 예언은 예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감사하며 찬송하고 설교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미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사용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어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하나님의 큰일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외국 목사가 전하는 설교를 듣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통역).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읽으며 깨달은 것으로 서로를 권면합니다(예언). 오늘날은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은사인지 모르고 사용하지 않거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권면함으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 권면을 듣고 마음이 찔리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한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이나 다 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찬송해야 합니다. 예배는 질서 있게 순서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형식주의를 피해야 하지만 무형식주의도 피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많은 은사를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며 예배를 질서있게 드리는 우리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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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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