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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 (잠2-87)
2024년 3월24일 (주일)
찬양 : 주님 여기 계시기에
본문 잠22:1-3절
☞ https://youtu.be/dZgx0XLbKFc?si=6GdGktZTj_NuBmcb
거룩한 주일 아침이다. 입안이 헤어지니 참 불편하지만 이런 나를 아시는 주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온전한 예배자로 주님을 예배하는 날 되기를 기도한다.
주일 아침 라마나욧선교회와 함께하는 모두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한다. 이사님들과, 사관생도들, 후배들을 위해 헌신하신 강사님들 그리고 이 모든 사역을 뒤에서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시는 모든 후원자와 우리 팀원들 모두를 이 아침 기억하며 기도한다. 주님 받으소서.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모두가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소서. 그 어떤 인간적인 의도도 무산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이루어지는 거룩한 선교회가 되게 하소서.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은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 선택해야 하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1-2절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오늘 이 말씀을 2절부터 해석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 듯 하다. 2절 말씀은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공존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가난한 자든, 부자든 재물과 보화를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살지 말고 명예와 은총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을 기록한 솔로몬의 삶을 추적하면 그는 이 말씀과는 반대의 삶을 살기도 했고, 이 말씀대로 살기도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더욱 더 실감나게 들려지는 것이기도 하다.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둘 다를 경험해 본 자가 목소리 높여서 외치는 소리이기에 더욱 큰 공명을 주는 소리가 된다. 아멘.
삶을 대하면서 왜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라는 이 둘을 공존시켰을까? 다 부자로 만들면 좋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인간에게 있다. 이런 인간의 생각들에 <너희들 죄 때문이야!> 하시면 우리가 할 말이 없을 터인데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 이 둘 다를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당당히 말씀하신다.
스스로 인간들의 불평을 듣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가난한 자가 부자를 안 만나면 덜 화가 날터인데 또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안 만나면 덜 부담스러울 터인데 왜 이 둘을 함께 살며 만나게 하실까?
지금 이 세상이 추구하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만들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낀다.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재물을 쌓아 부자가 되라고 요청하지만 출발선이 달라 모두에게 불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면, 공산주의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기회를 창출할 이유를 상실시켜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이 둘 다를 만나게 하여 부자에게는 가난한 자를 동등한 하나님의 지으신 사람으로 존중하며 그들의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손으로 역할을 하게 하고, 반대로 가난한 자에게는 부자를 통해 소망을 품고 그들이 제공하는 사랑을 발판으로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역동적 힘으로 일어나도록 하시는 것이다.
특히 이 관계에서 부자든 가난한 자든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을 상대를 이용하지 말고 진정 명예를 택하며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행하라는 말씀이다. 아멘.
부자는 가난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자를 멀리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내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들이 동일한 기회속에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다리가 되라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자는 부자를 경쟁의 상대로나 미움의 상대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동역자로 존중하며 비굴함으로 살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해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이 큰 울림을 주면서 내게 다가온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살면서 백성을 자신의 명예와 부귀와 권력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다스림안에서 그는 왕과 백성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서 다르지 않은 동등한 존재임을 깨달으며 이 말씀을 하는 것이리라.
솔로몬은 어느 시점에서 이 사실을 알았을까? 궁금해진다. 그는 사실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과도한 세금과 노동으로 백성을 힘겹게 만들어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10지파가 반기를 들 만큼 힘겹게 한 장본인이다.
그런 솔로몬의 삶이기에 오늘 말씀은 정말 그의 삶 후반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이기에 언제 잠언이 지어졌는지가 궁금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아마도 나의 생각으로는 솔로몬이 모든 통치를 마치는 즈음에 그동안 자신이 가난한 자인 백성들을 통치의 도구로 여기며 살았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도 완성된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실수 투성이의 삶을 통해 성숙되어져 가는 존재다. 왜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함께 살아야 하는가? 가난한 자도, 부자도 완성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상대가 필요하고 그 절대적 상관관계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지으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 하나를 묵상케 된다. 본문 2절에 나오는 ‘지으신’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아사>를 사용하고 있다. <바라>라는 단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단어라면, <아사>는 인간의 삶속에 하나님이 개입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에덴동산을 통해 알지만,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다만 죄로 타락한 인생들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부자와 가난한 자를 하나님은 당신이 방관하지 않으시고 그런 관계를 창조하시며 개입하셨다는 의미다. 즉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꿈이 있다는 말이다.
누구도 무시되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 존중되어야 하는 관계, 서로의 자리가 무력한 자리가 아니라 의미있고, 가치있는 자리로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리라는 말이다. 아멘. 아멘. 아멘.
이런 자리이기에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하나님의 은총을 더 택해야 하고, 재물이 아닌 명예를 택하는 삶으로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오늘도 작은교회를 방문한다. 내 눈과 마음에 진정 하나님의 지으신 사역자와 소중한 영혼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존중함이 있기를 기도한다. 오늘이란 시간 은혜와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기는 하루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지으신 작품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절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스스로 무시하지 않고, 또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그리고 하늘의 꿈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 그런 삶 되기를 다짐한다.
주님, 이 하루 진정 주님의 뜻을 이루는 주일이 되기를 소망한다. 어떤 자리에 서든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 명예롭게 대하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또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복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중보기도 제목>
1. <웨이브리즈> 플랫폼에 적합한 사람을 보내주사 주님 뜻 이루게 하소서.
2. 목회사관학교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3. 100명의 새로운 후원자와 3억의 출자금이 공급되게 하소서.
4. 박정제 목사와 팀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소서.
5. 스페이스 알 사역을 통해 젊은 세대 사역자를 일으키게 하소서.
6. 땡스기브가 세운 틴케이스 공간이 소중히 쓰임받게 하소서.
7. 2024년 작은교회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