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분데스리가에서 선수생활 및 지도자 수업을 마친 차범근은 그후 국내로 귀국, 현대 프로축구팀의 감독을 맡았다. 국내축구를 선진축구로 끌어올리기 위한 오랜 소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감독생활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축구계 40대 기수론'의 선두주자였던 그는 얼마 뒤 현대팀에서 성적 부진을 이유로 쫓겨났다.
국가축구대표선수 출신인 유재성 현대투신 법인본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차범근식 선진축구를 이해하는 이들이 국내에 없었다. 한 예로 차범근 감독은 지든 이기든 경기가 끝나면 반드시 선수들을 모아놓고 미팅을 하며 그날 경기내용을 상세히 분석하곤 했다. 선진축구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게 문제였다. 어느날 경기에서 패한 뒤 한창 미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선수가 손을 들고 "감독님, 차라리 화끈하게 '빳따'를 쳐 주십시오. 그게 차라리 속이 편합니다"라고 말했다. 죽자사자 뛰고 들어와 파김치가 된 판에 무슨 놈의 강의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차범근 스타일은 이처럼 곳곳에서 충돌을 빚었다. 당시는 전반전 경기상황이 나쁘면 하프타임때 선수들 라커룸에서 퍽퍽 빳따 치는 소리가 들리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전술이나 체력 등과는 달리 '정신력'이 강조돼던 개발연대였다.
차범근 스타일이 결정적으로 국내축구계와 충돌한 것은 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차감독은 주변의 질시속에 월드컵 대표팀 감독에 발탁됐다. 당연히 그에게 거는 일반국민과 언론의 기대가 컸다.
그러나 98년 프랑스 월드컵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두 게임에서 연속으로 져 16강 탈락이 확정되자, 비난여론이 들끓었고 이에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은 세번째 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차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차감독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지독한 모욕'이었다.
차감독은 그후 중국 프로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한 시사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승부조작까지 일삼는 국내축구계의 어두운 이면을 폭로, 국내 축국계로부터 완전히 '미운 오리새끼'가 돼버렸다. 차감독은 더이상 국내 축구계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될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 것이다.
월드컵 지역예선까진 분위기 좋았죠..^^ 5승 1무였나 그랬던거 같은데... 본선에 올라가서 선수들이 너무 긴장한탓에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한것이 문제였는데.... 히딩크는 그 문제를 강팀과의 친선경기를 많이 하면서 풀었죠..^^ 어쨋든 차감독 능력있는 감독이란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 좋겠네요
첫댓글 에흐...
월드컵 지역예선까진 분위기 좋았죠..^^ 5승 1무였나 그랬던거 같은데... 본선에 올라가서 선수들이 너무 긴장한탓에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한것이 문제였는데.... 히딩크는 그 문제를 강팀과의 친선경기를 많이 하면서 풀었죠..^^ 어쨋든 차감독 능력있는 감독이란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 좋겠네요
차범근이 체계적인 선진축구를 도입하려했던 노력들이 기억나는군요. 히딩크도 했던방법이지만 차범근은 스스로 노트북을 항상 달고다녔죠...항상 연구 고민...정말 많은 노력을 했는데 항상 축협이라는 벽에 부딪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