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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과 우리의 응답 (고난주간 월요일)
찬송 :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일시 : 2024년 3월 25일(월)
성경 : 눅19:45-48
☞ https://youtu.be/emWabOGpapk?si=TsNX03yoxrzKCKUs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묵상의 순서를 바꾸어 주님의 행적을 따르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한다. 종려주일에 왕으로 입성하시며 세상의 왕과 다른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이른 아침부터 사역을 시작하시며 시장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마21:18절)
아마도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보다 사역의 소중함을 감당하기 위해 시장하신 주님을 이 아침 잠시 묵상해 본다. 그렇게 시작된 오늘 주님의 가장 주된 사역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는 것이다. 눅19:45-46절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일 왕으로 입성하셨던 주님이 이날은 성전의 주인이 자신임을 드러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시고 계신 것이다. 특히 <장사하는 자들>로 표현된 성전에 있는 생각지 못한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분명히 성전의 주인이 자신임을 명확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성전은 물건을 나르는 곳이 아니다. 특히 매매하는 곳이 아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곳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시며 다시 한번 자신이 성전의 주인임과 동시에 성전이 어떤 곳인지를 명확하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말씀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마가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장사치들이 돈 버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을 사용하셨다.
분명 이 때에 성전에서는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가고 있다고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예배가 성도들의 편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소중한 헌신과 진실을 놓치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예배에 장사치들에게 이익이 보이기 시작했고, 예배의 편의를 빌미로 강도들이 들어올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보여야 하는 그 시간, 오직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회개해야 할 시간, 장사치들과 제물을 놓고 흥정을 벌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싼 것으로 예배를 해치워야 하는지를 흥정하는 자리로 만들어 놓았으니 어찌 강도의 소굴로 만든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주님 ~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
인생의 주인이시며, 내 영혼의 성전주인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뭐라 하실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시장끼를 느끼시며 성전을 향해 달려가신 예수님 ~ 내 영혼의 성전에 좌정하시며 온갖 편리와 이익의 재료만 가득찬 곳으로 보시고 안타까움에 채찍을 휘두르시는 것은 아닐까?
누가는 이 장면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7-48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은 이곳에서 날마다 가르치셨다고 하신다. 그분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자신의 자리를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자신이 오신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수행하시며 어떤 고난이 와도 심지어 죽이려 해도 상관없이 그 길을 걸어가셨음을 말씀하신다. 아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주님은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향해 당당하게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도 말이다.
성전의 주인으로서 성전 본래의 기능을 회복시켜 만민이 아버지께로 돌아올 길을 만들고 계신 것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가?
내 영혼 성전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너의 사명을 향한 발걸음이 이익에 변질되지 않았느냐고 물으신다. 아울러 오늘 너의 성전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향한 발걸음에 이익과 편리를 추구하느라 본질이 훼손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물으신다. 이 물음에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어서 오셔서 보시옵소서. 주님 ~ 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문득 이 찬양의 가사가 생각난다.
‘주께 네 혼 맡기겠나 최후 승리 믿으며 걱정 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 덮을 때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이것은 예전 찬양의 가사다. 지금은 현대적으로 이해가 쉽도록 순서를 바꾸었는데 작사자와 작곡가의 영감이 이전 것이 나는 좋다.
<걱정 근심 어둔 그늘이 내 삶을 둘러 덮어버린 오늘도 내 삶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내 영과 혼과 몸을 주께 맡기며 맡기신 사명을 향해 오늘도 사랑과 충성을 바치겠사오니 주님 당신의 형상을 만드소서.>하는 이 고백이 오늘 아침 고난주간 월요일을 지내신 주님의 발걸음을 묵상하는 결론으로 내게 들려진다.
주님이 걸으신 걸음, 충분히 맛난 것을 잡수시고 쉬시며 폼나는 자리에 서실 수 있지만, 주님은 오직 하나 아버지가 맡기신 그 길을 묵묵히 걸으신 주님 ~
주님, 이 하루가 사랑과 충성으로 맡기신 사역을 향해 묵묵히 걷는 날 되길 결단합니다. 이 종을 인도하사 오직 주님의 뜻만을 이루며 주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