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6일 금요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존경 받는 원로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도 없었고, 공적인 일에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남자들과 어울려서도 안 되는 때였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들로 받아주신 것만 해도 파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협력자로 활동하였고 여자제자들도 동등한 협력자로 활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봉사자로 제자로 시중을 드는 사람들로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을 때 여성들의 신분이나 출신은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서 구원 사업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수행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의 활동 방법은 단독으로 하시는 것보다 복음 선교의 효율적인 면에서 탁월하였을 것입니다. 경영학에서 효율적이라는 것은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었고, 제자들은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여자 제자들은 복음에서와 같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드는 일을 아주 잘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요즘 교회나 사회의 원로로서 내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으며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숨어서 묵상을 쓴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사람들의 어려움을 들어준다든지, 봉사 요청이 있을 때 거절하지 않고 봉사하는 시간을 낸다든지 하는 일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봉사하겠다고 본당에 신청했는데 사무장이 본당 신부님에게 신청서를 보여주지도 않고 무시 해 버려서 기분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무척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시중을 들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전혀 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가 보내준 ‘좋은 생각’에는 노인이 되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존경받고 우러러 보는 원로가 되어야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르기를 "죄악 중에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이 없고 재앙 중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보다 더 큰 재앙이 없고 허물 중에는 욕망을 채우려는 것 보다 더 큰 허물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지족상락(知足常樂)이라, 만족할 줄 알면 인생이 즐거운데 그놈의 탐욕, 노탐과 노욕이 뭐 길래 우리들의 인생 말년을 망치곤 하는지요.
보지 않아도 좋은 것 보지 말라고 우리들의 시력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듣지 않아도 좋은 것 듣지 말라고 우리들 청력도 가물가물 해지고, 말하지 않아도 좋은 것 말하지 말라고 늙으면 말수가 적어지는 것도, 먹지 않아도 좋은 것 먹지 말라고 식욕이 떨어지는 것, 모두가 신의 섭리 아니던가요.
그래서 인생 예순/일흔 줄에는 항상 자제와 절제, 모든 일에 지나침이 없어야 하지 않던가요.
돈이나 재산, 지위나 명예 더 욕심 말고 이제는 다 잊고 살면 되고 허망한 꿈이나 못 이룬 한(恨) 이제는 접고 살아도 부끄럽지 않지요.
술이나 좋은 음식을 즐기는 식탐(食貪)도 성인병의 원인이 될 뿐입니다.
예(禮)- 예를 지켜 법도를 넘지 않음을 알아야 하고
의(儀)- 스스로 나서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염(廉)- 청결하여 사악함을 감추지 않아야 하고
치(恥)- 잘못을 쫓지 않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주책과 인색만 있고 존경과 명예가 없는 늙음은 무관심과 냉소의 손가락질만 있을 뿐입니다.
소외되고 외롭다는 푸념도 어쩜 우리들 스스로 자초한 것 아닌가요. 노욕과 노탐 버리고 맑고 밝은 마음일 때 우리는 존경받고 우러러 보는 원로가 될 수 있습니다. 고운 심성, 바른 교양으로 살아야 멋진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좋은 생각 중에서 -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2-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축일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Cornelius)
신분 : 교황, 순교자
활동 연도 : +253년
같은 이름 :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로마(Roma)의 평범한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이 순교한 후 여러 사정으로 14개월 동안 지연되었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극심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중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었다. 그는 배교자들에게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한편,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며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를 끝까지 옹호했다. 그리고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황으로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새 교회를 세운 후 대립 교황이 되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던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여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은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교회회의는 노바티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단죄하여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체포되어 첸툼첼레(Centumcellae, 현재 로마의 항구도시 치비타베키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이듬해 6월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에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루치나(Lucina)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은 라틴어로 새겨진 최초의 교황 비문이다. 교회 미술에서 교황 성 코르넬리우스는 보통 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라틴어 코르누(Cornu : 뿔, 뿔피리, 신호나팔)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곁에 소를 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축일9월 16일 성 치프리아노 (Cyprian)
신분 : 주교, 교부, 순교자
활동 지역 : 카르타고(Carthago)
활동 연도 : 200/210?-258년
같은 이름 :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태어난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연로한 코일리키우스(Coelicius) 사제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얼마 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249년 초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교구에 대한 사목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동안 박해의 여파로 많은 교구 내 신자들이 배교했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며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관한 결정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 엄격주의자로 돌변했다. 로마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노바티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 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 배포하여 신자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마 안 된 252-254년 사이에 아프리카 지역에 몸서리치는 흑사병이 창궐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마련해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했으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신자들은 흑사병을 그리스도교와 성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사람들의 낭설을 반박하고 위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와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했지만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255년 성 키프리아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에서 교회 회의를 열고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해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Curubis, 오늘날 튀니지의 코르바 Korba)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왔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해 박해와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고르넬리오, 치프리아노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