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잘 모르는 종족, 그러나 축구를 제외한 분야에선 대부분의 경우 우월한 종족이기도 한 '여자' 들과 경기를 보러 갈 때면, 내가 가장 많이 떠드는 절대명제 하나가 '축구란 공이 있는 곳에서 30% 공이 없는 곳에서 70%' 가 이루어진다, 는 이야기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축구란 한 명 한 명의 선수가 아닌 그라운드라는 좌표위 열 한개의 점이 만들어내는 다각형의 완성도' 라던가, '열 하나의 블록으로 만들 수 있는 모형의 아름다움을 측정하는 게임' 등의 표현을 쓰곤 한다.
사실, 이런 부분은 중계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긴 하다. 미드 필더가 공을 잡을 때 포백 수비의 양쪽 사이드 윙백이 어디까지 치고 올라가 미드필더를 도와 주는지, 또 미드필더들이 찔러주는 스루 패스를 받기 위해 두 세명의 포워드가 어떻게 수비 뒷 공간을 치고 들어가는지, 또한 수비수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갈 때 수비에 혼란을 주기 위한 자리바꿈이란 건 또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런 내용성들은 모두 경기장에서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텔레비젼 화면만으로 보면, 어디서 뜬금없이 공격수가 뛰어나와 양 사이드 링커가 띄어올려준 공을 헤딩으로 집어 넣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사실 그 공격수란 애들도 하프라인 부근부터 골라인까지 열심히 뛰어와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일테니까.
말 그대로 '유기적' 이기 때문에 부분만을 보여주는 텔레비젼 중계로는 진짜 축구를 봤다고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사실, 이런 부분이 야구 관람보다 축구 관람이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1루나 3루쪽 좌석 아니면 공도 잘 안 보이는게 야구장인데다 전광판 안내 없으면 외야쪽에서는 타석에 누가 서 있는지도 잘 분간이 안 가니까 말이다. 반면, 축구장에 가 보면, 생각보다 축구장이 넓지도 않을 뿐더러 (텔레비젼 중계로만 보면 축구장에서 무슨 지평선 보이고 이럴 줄 알겠지만) 하나의 선수가 아닌 열 한개의 점으로 움직이는 '전체의 플레이' 를 볼 수 있는데다, 그러면서도 선수 개개인의 개인기 역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대 코트디부아르 전에서, 양팀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 디디에 드록바였다. 그의 활약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맨유나 모나코, 볼턴 정도나 신경썼지, 나랑 별 관계도 없는 첼시의 드록바까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고 있다가, 비로소 오늘 처음으로 그를 주의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왔는데 그야말로 왜 드록신인지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저런 선수 하나 있으면 저 선수만으로 팀이 무서워질 수 있겠다 싶었다. 어떻게 된게, 두 번 이상 트래핑을 하지 않아도 바로 때릴 수 있는 위치에 공을 가져다 놓는건지, 게다가 때리는 슛마다 상당한 정확성, 그리고 엄청난 파워를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은가. 드록바 공 잡을 때 마다 운재형 긴장 탔겠구나 싶었다.
아프리카 선수들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볼 키핑 능력이 정말 장난 아니다. 몸싸움이 일어나도, 다리가 얽혀도 넘어지고 뺏기는 건 한국 선수들이지 아프리카 애들이 아니었다. 유연성이니 파워니 하는 말로 설명은 할 수 있겠지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능력을 쉽게 가질 수 있는 건 또 아니니까,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였다. 그런 애들을 상대로 오늘 수비진, 특히 이정수는 거의 비디치 급으로 드록바를 막았으니 대단하다고 해 줄 만 하다. 후반 중반쯤 부상으로 실려 나갔는데 큰 부상이 아니길 빈다.
우리나라에서 유효 숫을 때려내는 능력중 단연 최고는 박주영이다. 박주영이 청소년 대표 였을 때 부터 내 눈에 띈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어떤 위치에서 어떤 공을 받아도 골 문 안으로 때려넣을 수 있는 능력, 항상 골문 앞에서 대기권으로 공을 쏴대던 전형적인 한국형 스트라이커들에 익숙해졌던 내게 청소년 대표 시절의 박주영은 '아, 저래서 천재라고 하는구나' 하는, 단박에 느낌이 오는 선수였었다. 그건 연습도 연습이지만 타고 나야 하는 감각, 그리고 순간적인 판단력이라는 면에서 하늘이 내린 재능없이는 갖기 어려운 능력이니까 말이다. (과거의 전형적 한국형 스트라이커로는 황선홍도 포함된다. 황선홍, 한 마디로 사람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설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80, 90년대 초에 인터넷 있었으면 황선홍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드록바는 유효슛을 때려 내는 능력이 박주영 위 급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위치에서라도 자세를 잡는 유연성과 개인기에서는 확실히 박주영을 능가한다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파워와 신체적인 우월함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스트라이커였다. 어쩌면, 오늘 드록바가 상대적으로 좀 부진했던 건 운이 좋았었나보다, 라고 감사해야할 일인 듯 하다.
상대적으로 전반 내내 드록바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이동국. 골은 넣었지만 아무래도 이동국은 안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확신으로 더 굳어져 버렸다. 사실, 동국이 넣은 골에서 동국이 보여준 개인 기량은 발리 슛을 때려 넣는 것 하나였고, 위치선정과 볼 배급은 운이었다. 상대 수비수가 헤딩한 것이 동국 발 앞으로 온 것이니까. 허면, 동국의 발리슛이 박주영의 슛 만큼 유효 슈팅으로 이어지는 확률을 가졌느냐, 하면 당연히 거기에 못 미친다는 대답을 해야한다. 그 뿐 아니라 타겟맨으로서의 역할에서 드록바 같은 위압갑이 있었느냐, 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골이 동국의 전부를 말해주는 거라면, 오늘 골을 넣지 못한 드록바보다 골을 넣은 이동국이 더 낫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이동국이 포워드로 뛰던 전반에는 우리의 공격루트가 대부분 미드필더진을 뚫지 못하고 차단당했다. 결과적으로, 이건 패스를 줄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후반 시작과 함께 안느가 들어오자 전반에 비해 월등한 비율로 미드필더를 거친 공이 포워드인 안느, 지성, 쌍용 등에게 공급되는 걸 볼 수 있었다. 서두에 말한대로 축구란 공을 가진 개인의 경기가 아니라 그라운드라는 좌표 위에서 움직이는 열 한개의 다각형이라고 할 때, 다각형의 꼭지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상대방의 수비수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도형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공격해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안느와 지성, 쌍용은 그러한 '변신' 이 가능했기에 많은 패스를 건네 받을 수 있었고, 전반의 근호와 동국은 '변신' 이 불가능했기에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어줍잖은 개인기 시도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근호도 그렇다. 아시아 무대를 상대로 한다면 포스트 박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근호의 경우 드리블을 즐기는 경향까지는 인정해 줄 수 있어도 그 드리블이 효과적인 순간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소속팀이 있는 일본 제이리그에서, 그리고 아시안 컵 정도의 수준에서 밖에는 본 적이 없었다. 순간 스피드와 주력이 좋은 것은 알겠지만 볼 키핑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파를 시도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골 결정력은 평균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공을 주면 되도 않은 드리블로 아시아 수준을 뛰어 넘은 수비수들을 돌파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차라리 안느 처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팀에는 조금의 틈만 벌여주면 그 틈을 잡아 벌려 공간으로 양질전환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성과 쌍용이 있다. 상대 수비수들보다 몸피가 작고 발재간은 떨어질지언정, 머리가 훨씬 좋은 선수들이 있단 말이다. 어줍잖은 드리블은 그냥 어줍잖을 뿐이다.
안느. 동국이 큰 경기에 강하다는 설은 있으나 안느는 늘 큰 경기에 강했다는 사실이 있다.
전반과 후반 경기를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는 확연해 진다. 전반 내내 한국은 '공격 루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느가 들어온 이후 골 에어리어 근처에서, 마치 독일 월드컵 토고 전에서 안느가 넣었던 두 번째 역전골 상황처럼 공간을 잡아 벌리는 장면이 후반을 통틀어 네다섯 차례 이상 만들어졌다. 즉, 전반에 존재하지 않았던 공격루트가 후반에는 존재했었다는 말이 된다. 지성이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보직변경을 한 영향도 있었겠지만 후반에는 지성과 쌍용의 이름이 더 자주 불려졌다. 공 잡을 기회가 훨씬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것이 어줍잖은 드리블러와 어줍잖은 타겟형 스트라이커보다 축구 지능이 높은 선수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한국형 공격 루트다. 스페인이 기술과 조직력의 팀, 잉글랜드가 힘과 조직력의 팀, 아르헨티나가 개인기와 조직력의 팀, 브라질이 완성형 팀이라면, 한국은 축구 지능의 팀, 으로 팀 컬러를 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근호나 동국의 축구 지능이 낮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같은 일반인들과의 축구 지능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신 한국어를 소재로 하는 그 어떤 지능에서도 난 축구대표팀 전체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을. 그렇지만 월드컵에 출전해야할 선수들에게 한국어 능력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 처럼, 그들은 국가대표 선수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높은 축구 지능을 보이는 선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할 필요는 있다는 뜻이다. 한 방을 가졌던 마빈 해글러와 아웃 복싱의 교과서였던 슈거레이 레너드의 경기에서, 승자는 레너드였다. 힘 좋은 놈이 머리 좋은 놈 이기기는 예전부터 힘들었다.
확률적으로, 똑같이 45분간의 출전 시간을 보장 받았지만 동국은 골을 넣었고 안느는 넣지 못했다. 그러나, 동국은 보이지 않았고 안느는 끊임없이 기회를 만들었었다. 이런 경우, 안느를 택해야 한다. 그 편이 박주영, 박지성, 쌍용과의 호흡에서도 상대적으로 나으리라 보인다. 골 자체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면, 오늘의 동국은 드록바를 능가하는 스트라이커겠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드록바가 더 우수한 선수임에는 틀림없는 이유는, 그가 언제나 '골을 넣을 가능성이 더 높은 선수' 인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근호-동국 의 조합은 아닌 것 같다. 주영-안느 조합이 보다 더 월드컵 스러울 것 같다는 게 오늘의 관전평이다. |
출처: Iskraz Rev. Studio. 원문보기 글쓴이: 이스크라
첫댓글 위치선정과 볼배급이 운이었다라는 부분에서 스크롤바 내림.
제목부터 에러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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