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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저녁 어스름에 새끼 양을 잡아라.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탈출기의 말씀 11,10─12,14>
그 무렵
10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12,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9 그것을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면이 텅 빈 사람들, 자기 성찰이나 영성이 결핍된 사람들이 보이는 한 가지 특징이 있으니, 가장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식별력의 부족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혼돈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 체 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나 나환우들이나 그릇된 신앙인들과는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 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 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웃기는 짬뽕’ 같은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 복음 12장 7~8절)
보란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 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 살레시오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매일 안식을 얻는 법: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의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강호씨 연기를 떠올려 봅시다.
송강호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자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유학 시절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나 자신을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주무르길 기대하나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자비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서로에게 철두철미하고, 사나워지지만 신앙인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법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대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나요?
사람에게 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날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안식일의 과거에 묶이지 않고 주님의 날에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인다운>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 12,8)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예수님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일까요?
안식일의 주인은 우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알고부터 저는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꼭 주일이라고 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이라고 하였던 것을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안식일 다음 날을 주님의 날로 정하고 거룩하게 지냈는데, 그것은 신자들끼리 모여 성찬례와 말씀의 전례를 통해 주님을 기억하는 거였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니 주님을 주인공으로 모시는 날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주일이 그런 날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룰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일을 그렇게 지내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말로는 주일 또는 주님의 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날들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고, 그리고 거룩히 지내는 것은 그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 안에서 거룩히 쉬는 것이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이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호칭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칭하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안식일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바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날을 주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주신 이 날을 우리는 다시 주님을 위해 주님께 봉헌하는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주인다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안식일의 주인다운 것인지 이제 봐야 하는데, 그것은 우선 우리가 일의 노예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는 데 돈이 중요하고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내가 있어야 돈도 있고 일도 있는 것이라는 배짱으로 한 주일에 하루는 나를 위해 빼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이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어쨌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인 의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안식일의 주인답게 안식일을 보내는 것은 일이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의미있게 이 날을 보내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사랑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이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생산적이라고 함은 내가 행복하자고 다 사는 것이니 일을 하건 쉬건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인데, 사랑만이 일을 하건 쉬건 행복에 이바지하게 하고 날들을 의미있게 하지요.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안식일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거룩한 안식일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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