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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일 연중 제8주일
제1독서 : 집회 27,4-7
제2독서 : 1코린 15,54-58
복 음 : 루카 6,39-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사랑밖엔 길이 없다
-순수, 지혜,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자주 겪는 일입니다만 어제의 일도 잊지 못합니다.
면담고백성사 중 시간이 허락되면 저는 네 가지는 꼭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기도시와,
“행복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도록 하고 저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이어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을 써드리고 마지막으로 사죄경 후에 강복을 드립니다.
그런데 어제 참으로 침착하고 강인해 보였던 50대 초반의 자매가 행복기도를 읽던 중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져 한참 중단했다 전부 읽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와 “행복기도” 낭독 시 자주 목격합니다만 어제의 느낌은 각별했습니다.
-“주님/사랑합니다/찬미합니다/감사합니다/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첫 부분 이 대목에서 목이 메어 울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다음 부분에서 목이 메어 멈추기도 합니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사랑/저의 기쁨/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또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사랑뿐입니다.
참으로 고질적 마음의 병이 무지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무지에는 사랑뿐 약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나와 이웃을 사랑하여 알아 가게 됩니다.
이처럼 삶은 ‘사랑의 여정’이자 ‘앎의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빛이요, 사랑과 앎이 깊어갈수록
비로소 무지의 치유,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사랑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무지에 눈먼 이가 무지의 눈먼 이를 인도하면 함께 구덩이에 빠집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눈이 열린 순수하고 지혜롭고 겸손한 눈 밝은 이만이 이웃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 예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배워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스승 예수님처럼 눈 밝은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평생과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몰라서 판단입니다. 자기를 알면 알수록 판단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정말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이 자기를 압니다.
이런 이들은 자기 눈의 들보를 알기에 자기 눈의 들보부터 빼낸 다음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순전히 사랑의 행위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진 자만이 이웃의 눈에 티를 빼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반발을 살 수 있습니다.
“네가 뭔데---”, “너나 잘 해---” 이 두 말마디를 들어도 속수무책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결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결코 우연의 요행은 없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사람으로, 삶으로 바꿔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사람이, 삶이 좋아야 열매인 생각과 말과 글과 행동도 좋습니다.
이런 열매들을 보면 그 사람을, 그 삶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좋은 삶일 때 생각과 말과 글과 행동도 참되고 좋고 아름답습니다.
맑고 향기롭습니다. 어떻게 좋은 사람, 좋은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끊임없이 마음곳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수련에 항구 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참으로 사랑할 때 진선미眞善美의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마음에 말과 행동들입니다.
절로 향기롭고 따뜻한 분위기도 형성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악한 자는 그 마음 곳간에서 오물 같은 말이나 행동들을 쏟아냄으로
악취나 독기毒氣를, 살기殺氣를 발산하기도 할 것입니다.
분위기도 어둡고 차고 무거울 것입니다. 말과 행위마다 두려움과 불안을, 상처와 아픔을 줄 것입니다.
참으로 피하고 싶은 분위기입니다.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됩니다.
그러니 대화를 위해 잘 듣는 경청(傾聽, 敬聽)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대화의 전제조건이 바로 ‘경청(傾聽, 敬聽)의 사랑’입니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달변이, 청산유수 같은 것이 말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나온 진정성 가득 담긴 말이 어눌해도 잘 하는 말입니다.
생명을 주는 말, 영혼에 食이 되고 藥이 되는 말입니다.
하여 말하기 전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경청이 필수입니다.
얼마 전 왜관 수도원에 정주하고 있는 경애敬愛하는 도반道伴의 서재에 걸렸던
족자 안의 사자성구의 한자가 생각납니다. 방문했던 중국 신학생들이 선물했다 합니다.
“飮水思源(음수사원)”
물을, 차를 마실 때 마다 물의 원천을, 물의 원천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을 할 때 마다 말의 원천이신 말씀이신 로고스 예수님을, 하느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 찬미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시편92,2-3)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를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 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시편92,15-16)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았기에 바오로 사도의 다음 확신에 넘친 고백도 가능할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을 압도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통쾌, 유쾌, 상쾌한 삼쾌의 고백입니까?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된 바오로 사도의 승리의 고백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답이 없습니다.
무지와 허무, 죽음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참으로 품위 있고 향기로운 진선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15,58). 아멘.
나무의 열매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제 1 독서는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에서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에서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오늘 복음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자연과 인디언들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 백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 떠올렸습니다.
마이클 블레이크의 원작을 케빈 코스트너가 기획, 각색, 감독, 제작, 주연한 작품입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이 영화를 기획했지만 제작자들의 호응이 없어 자신이 직접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제작했습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이 감독 데뷔 작품으로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아카데미 7개 부문(작품, 각색, 감독, 편집, 촬영, 음악, 음향)을 석권했고,
골든 글로브 3개 부문과 베를린 영화제 곰상을 수상하면서
로버트 레드포드, 워렌 비티, 리처드 어텐브로에 이어 배우 출신으로 4번째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남북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863년이지요.
부상을 당한 후, 다리 절단의 위험에 처했던 북군 장교 존 던바(케빈 코스트너 분)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전투를 벌이고 있는 군인들 사이를 말을 타고 질주합니다.
양팔을 벌리는 그의 모습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처럼
처절하면서도 자유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전혀 의도와는 달리 이 사건으로 북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던바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게 됩니다.
존 던바가 원한 곳은 인디언 부족들 간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어
기병대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나올 수 없는 다코타 평원이었습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관에게 그는
"그 국경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므로, 그 이전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던지고 떠납니다.
저는 상관이 존 던바를 보낸 후 왜 자살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안내하는 마차꾼의 도움으로 도착한 곳은 국경지대의 세지윅 요새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며, 집 한 채만 달랑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곳을 안내해 준 마차꾼은 오는 길에 포니족(Pawnee) 인디언들에게 처참하게 살육당합니다.
던바는 황량한 통나무집에서 혼자 기거하면서 오기로 되어있던
후속 부대 기병대를 기다리지만 전혀 연락이 없습니다.
던바는 계속 일지를 기록해 나가며 전쟁의 소용돌이를 잠시 잊고 현실을 떠나
평화의 평원에 도피해 있는 사람처럼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관찰하며
노동과 명상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벗이라곤 갖고 간 한 필의 말과 가끔씩 문 앞에 찾아와
경계의 눈빛으로 어슬렁거리는 늑대 한 마리뿐이었지요.
늑대가 바라보는 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을 즐기던(현실 도피의 상징으로 느껴졌습니다.) 던바는
말을 도둑질해 가려던 수우족 인디언 한 사람과 조우하게 됩니다.
던바는 자기의 목숨을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부딪친 인디언들이라 무척 겁을 냅니다.
던바는 후속 부대를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인디언을 찾아보기로 결심하고 오두막을 떠나는데,
우연히 부상당한 인디언 복장의 백인 여자를 발견하고는 인디언 부락에 데려다줍니다.
수우족 인디언들은 부족회의를 한 후 다시 그 백인을 만나러 가기로 합니다.
수우족의 거룩한 사람으로 불리는 제사장인 차는 새 (Kicking Bird)는
던바를 찾아와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잘 통하지 않지요.
그러나 버펄로의 흉내를 내는 몸짓 언어로 서로 통하게 되는
그들은 곧 서로가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관계를 맺어 나가게 됩니다.
던바가 구해준 백인 여자는 어려서 붙잡혀와 거의 영어를 못했지만
다시 기억을 되살리며 그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됩니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현명한 인디언 추장 '열 마리 곰(Ten Bears)',
인자하고 너그러운 '차는 새 (Kicking Bird)', 용감한 청년 '머리에 부는 바람(Wind In His Hair)',
그리고 인디언이 된 백인 여자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
이들 인디언들은 어느 백인보다 서로를 아끼며 가정과 부족에 충실한 사람들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백인들의 침략을 늘 두려워하며,
언제 백인들이 올 것인지를 던바에게 묻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백인들은 그냥 지나갈 뿐이라고 얼버무려버리지요.
버펄로 떼를 기다리는 수우족은 식량 걱정에 빠져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잠을 자던 던바는 땅의 진동소리를 듣고 나와 보니, 수많은 버펄로 떼가 나타난 것을 발견합니다.
그 장면은 정말 장관이지요.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새벽안개 사이로 달리는 버펄로 떼.
그는 즉시 수우족에게 알려주게 되어 던바는 그들과 버펄로 사냥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미국 장교 존 던바가 아닌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의 인디언이 되어
그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됩니다.
던바가 집 근처에 자주 나타나는 늑대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을 본 인디언들에 의해
던바는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수우족은 아주 선량한 인디언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버펄로 떼를 사냥하여 겨울을 지내지만, 대자연 속에서
하느님이 주신 자신들의 땅을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지요.
수우족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드디어 백인들의 진짜 야욕을 '늑대와 춤을'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늑대와 춤을'은 이제 진정한 인디언들의 친구로서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다 털어 놓습니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많은 백인 기병대들이 머지않아
이 평화로운 인디언 지역을 침범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족장 열 마리 곰은 오랫동안 가보로 간직해온 물건을 꺼내 보입니다.
그건 옛날 포르투갈 군인들이 쓰던 투구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도 백인들은 우릴 공격해왔다.
그때 우리들은 용감하게 싸워 그들을 물리쳐냈다.
그러나 백인들의 침략성은 끝없이 이어져 내려온다."
족장 열 마리 곰은 이제는 백인들에게 대항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겨울을 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늑대와 춤을'은 자신이 그동안 써왔던 소중한 일기장을 두고 온 것을 알고,
뒤따라가겠다고 약속하고, 오두막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인디언 복장을 한 던바는 그곳에 와 있던 미국 기병대에 포로로 잡힙니다.
그리고 배반자, 밀정이라는 낙인과 함께 온갖 폭행을 당하고 후방으로 후송되어갑니다.
'늑대와 함께 춤을'이 며칠째 돌아오지 않자, 추장은 몇 사람을 보내지요.
수우족 인디언들은 기병대들이 통과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습격하고
'늑대와 함께 춤을'를 구출해냅니다.
'늑대와 함께 춤을'은 수우족 인디언들에게로 돌아와 아내와 뜨거운 재회를 하지요.
그들은 기병대를 피해 계속해서 눈 내리는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늑대와 함께 춤을'은 자신 때문에 수우족 인디언들이 결국 기병대에 붙잡히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수우족을 떠납니다. 그 후의 일은 자막으로 처리됩니다.
"13년 후, 그들의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그들의 버펄로도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수우 족(Sioux)은 네브래스카 로빈슨 요새(Fort Robinson, Nebraska)에서 백인에게 항복했다.
평원의 위대한 기마민족 문화(The Great Horse Culture)는 사라지고, 서부 개척(the American Frontier)은 역사 속으로 소리 없이 묻혀갔다."
북미평화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트럼프의 독특함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결렬된 것은 생각하며 많은 상념이 떠오릅니다.
먼저 생각이 드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는 어떻게 되는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미국이 더 이상 백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진정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진정한 United States, 다양한 민족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들이 왜 고향 땅에서 쫓겨나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고,
결국 오늘날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대부분이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야 하는가?
사실 백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총으로 세웠으니, 그들의 문화라는 것이 총의 문화일 수밖에 없고,
영화도 대부분이 총질을 하는 정부가 이제는 인디언들을 보호 구역에 살게 하면서
생활비를 주어 알코올 중독자가 되게 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아름다웠던
그들의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제 이태리 순례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내일이면 비행기를 타고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는 순례,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은 만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요?
한 가지 공지사항을 말씀드리면, 내일 3월 4일 묵상 글은 올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을 시간이고 저녁 시간에 한국 도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월 4일 묵상 글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3월 3일 연중 제8주일 묵상 글 시작합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지금 제가 있는 성지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친구는 성지를 방문했다가 저를 보았고, ‘혹시’라는 생각으로 “이름이 조명연 아닙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거의 30년 만에 만난 친구였지만 얼굴을 유심히 보니 누구였는지 어렴풋이 기억나더군요.
항상 조용히 공부하는 모범적인 친구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커피 한 잔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 솔직히 고등학교 때 네가 정말 싫었어.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아무리 기억해 봐도 누구를 괴롭힌 적이 없습니다.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았는데, 또 누구한테 맞아본 적은 있어도 때려본 적은 없는 저입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는 열심히 공부하는데 저는 맨날 놀고만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시험 성적이 늘 좋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싫었다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상처 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의 선의가 상대방에게 오히려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풀어 나가면서 스스로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람을 향한 지나친 심판과 비판을 하지 말아야함을 강조하십니다.
심판과 비판을 하는 것은 위선자의 모습으로 너그러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든 상처를 주는 죄 많은 우리입니다.
따라서 겸손의 덕을 잃어버린다면 더 많은 죄를 우리의 삶에 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삶을 통해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우리가 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선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이미 주어진 선함을 잘 간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6,42)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한 자기성찰만이 우리에게 이웃의 잘못 앞에서 자비롭고 인정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남의 허물을 보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선함을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노랫말에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가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아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안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위선을 경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 앞에 서게 될 때 손발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미 게와 아기 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 게가 아기 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 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그러자 아기 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 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 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 집니다.
남의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 스승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 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 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내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
“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부터 하여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는 이미 선한 곳간입니다.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분에 넘치지 않습니다. 선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자신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되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참된 인간이 되도록
제자들의 내면을 보여 주십니다.
복음은
우리 모두를
인격성숙으로 이끕니다.
인격성숙은
내적인 태도 변화입니다.
성경의 지도자들은
한 결 같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자신을 모르면
모든 것은 허사입니다.
남을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들보를
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우리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 중심적인 삶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활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내놓아야 할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로
우리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냅시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연중 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말”입니다.
<제1 독서>에서는 “사람의 말은 그 사람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 27,6)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이처럼, 말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격을 드러내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오늘 <제2독서>는 “말씀”이 이루어짐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줍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1코린 15,54)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썩고 죽는 우리 몸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심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듣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1코린 15,57)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에 대한 두 개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먼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느냐?(루카 6,42)
그리고 ‘나무와 열매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이는 모두 먼저 맑은 눈, 맑은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제대로 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제 눈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심어준 당신의 “호의”(헤세드)로 보는 일입니다.
곧 그를 위하는 마음,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곧 자애와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실, 선을 지향하는 호의의 마음을 지니게 되면, 심판을 불러오는 “들보” 가 빠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볼 수 있는 것 그것을 ‘호의로 보는 일,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준 당신 사랑으로 타인과 세상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갈라 4,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래서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말씀이 가득 차 있으면, 생명의 말씀이 번져날 것입니다. 아멘.
말과 행동이 어떤 나로 끝내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란 무거운 주제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판타지 영화 ‘헬보이’(2004)를 만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오른 팔이 크고 뿔 잘린, 지옥에서 온 헬보이가 주인공입니다.
헬보이는 아기 때 우연히 지옥에서 나와 항상 묵주를 들고 다니는 인간 아버지에게 키워집니다.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나온 자신과 같은 괴물들로부터 인간들을 지켜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지옥의 괴물들과 결탁함으로써 지구는 다시 위험에 빠집니다.
그 인간은 지옥의 힘으로 자신과 애인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헬보이는 그 사람 속에 들어간 악의 세력과 싸워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의 세력은 헬보이도 자신과 같은 지옥 출신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애인의 영혼이 지옥에 갇히게 되자 그도 정신을 잃고 지옥문을 열려고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괴물들이 나와 지구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묵주의 십자가가 손바닥에 새겨지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깨닫습니다.
출신은 지옥이지만 천국의 사람이 되겠다던 결심을 다시 되새기며
애인의 영혼을 포기하고 지옥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지옥문을 열면서 다시 생겨난 자신의 뿔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버립니다.
지옥이 주는 힘을 스스로 거부하고 인간들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자신의 여자의 영혼도 되찾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감독은 또 묻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가?’인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결심’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이 아닌, 어떻게 끝내야하는 가에 대한 결심이다.”
한 인간은 지옥에서 태어났지만 천국에서 끝내려는 결심으로 천국 시민이 됩니다.
한 인간은 천국에서 태어났지만 지옥에서 끝내려는 결심으로 지옥 시민이 됩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끝내야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렇듯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는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나의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사실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이 어떤 목적지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말과 행동이 내가 한 결정에 대한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며,
그 열매가 나무를 증명해준다고 하십니다.
열매란 행동입니다. 나의 행동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나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느님으로 끝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남의 눈의 티를 빼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그 나무가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가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들보란 옛 본성을 의미하는데 본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믿음은 내가 누구인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면 여전히 들보는 내 눈 안에 들어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다른 새 본성이 들어와야 옛 본성이 보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옛 인간의 본성이 보이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옛 본성인 들보가 눈에 들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살아보려고 해야 옛 본성이 걸림돌로 작용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으로 끝내려고 결정하면 결국 그 들보를 빼낼 수 있습니다.
말도 하나의 열매입니다.
본성이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것을 내놓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십니다.
본성이 변했는지 아닌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열매가 바로 ‘말’이란 뜻입니다.
부산교구의 한 신부님이 계단을 내려오시다가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가셨습니다.
마침 은퇴하신 부산교구장 고 최재선(요한) 주교님이 병실에 입원하실 때였습니다.
돌아가시기 한두 주 전이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먼저 주교님 병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무릎이 찌릿찌릿 한 걸 보니 당신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흔이 훨씬 넘어 임종을 앞두신 주교님께서 혀를 차시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쯧쯧쯧. 죽으면 썩어버릴 육신 아끼면 뭐할라꼬!”
주교님은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방에서 주무실 정도로 극기하셨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이에 신부님도 치료를 받지 않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날 저녁부터 무릎이 쑤시지 않더랍니다.
본성에서 행동과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이 나의 본성입니다.
몇 마디 잘 해보려고 해봐야 결국 내 본성 안에 있는 것들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조금만 나눠보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저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시면서도 계속 “예수-마리아-요셉”만을 반복해서 중얼거리시는
한 할머니 신자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내 안에도 오직 주님만을 모시고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세상 것들로 쌓여있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로 끝내기로 결심했으니
조금씩 하느님으로 더 채워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어떻게 끝내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주는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동창들이 제게 정해준 별명이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성이라서 그런 것도 같고, 제가 신학교 매점에서 일을 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매점 열쇠를 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제게는 과분한 별명이지만 조자룡처럼 의리 있고, 충실하며, 맡겨진 일이 있다면 잘하고 싶었습니다.
가까운 선배와 후배가 저를 기억하는 것은 저의 체력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운동 신경이 없어서 축구나 농구를 거의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저를 기억하는 것은 저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치회장에 출마하는 동창신부가 제게 지지연설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이사야 예언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인용해서 지지연설을 하였습니다.
자치회장이 되었던 동창신부는 제게 곱창볶음을 사주었습니다.
전교생이 성당에 모여서 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다지 떨리지 않았던 기억입니다.
제가 자치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 한 번 선배와 후배가 저를 기억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황님의 권고로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게 되었고,
제가 속한 지역에서 사제성화의 날에 발표할 사제를 정해야 했습니다.
사제가 사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다들 사양하였습니다.
작은 성당에서 사목하던 저는 발표하면 응분의 사례를 한다는 말에 혹해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제목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거창했던 ‘사목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신문에서 보았던 한시(漢詩)를 몇 가지 정리하였고, 본당에서 있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학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저의 삶을 나누었기 때문에 신부님들은 재미있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저는 그 뒤로 사목국 교육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고,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저곳에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말을 들어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게 말할 기회를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저의 말이 부담이 되었던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돌아보면 저는 제가 한 말을 저의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끄럽고, 아쉬운 날들이 많았습니다.
나름대로 말을 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변의 작은 것들이라도 유심히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들이 그냥 넘어가는 것들 중에도 의미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구름도, 나비도, 작은 벌레도, 신문에 난 미담도, 아이의 웃음도 유심히 보면 말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말은 강연과 강의가 아니기에 줄거리가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상물을 이용한 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에게는 더 큰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원고는 충실하게 준비하지만, 말을 할 때는 가능하면 원고는 보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보험을 하는 분들도 원고를 보지 않고 상담을 합니다.
스마트 폰을 파는 분도 원고 없이 제품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도 원고를 보지 않고 대화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원고를 보고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자꾸 하면 가능해집니다.
적당한 유머가 필요합니다. 의자에 앉아서 듣는 분들은 5분 이상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도 강의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심어린 이야기입니다.
말을 듣는 사람은 10분이면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됩니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말로 평가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으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말 때문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도 듣기보다는 말을 먼저 하면서 실수를 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여러분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까?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 놓습니다.
마음에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위선과 가식의 말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과오는 없는지 살피라고 하십니다.
고백소에서도 본인의 잘못을 고백하기보다는 이웃과 가족의 죄를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성사는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장례미사의 독서에도 봉독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진실과 정의를 선포하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별처럼 빛나도록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