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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OST 비격진천뢰
1591년, 좌의정 정철(左議政 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세자 책봉문제)를 제기하며
광해군(光海君)을 세자(世子)로 추천했다가 선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罷職)되어
진주(晉州)로 유배(流配)당했다가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는데
이때 강계부사(江界府司)는 정철을 고상(故相)의 예(禮)로 대우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정철을 미워하는 동인 조정의 여론을 자극(刺戟)하였고
그 결과 강계부사는 탄핵(彈劾)을 받아 관작이 삭탈되었습니다.
1592년 3월,조선 조정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로 하여금
열읍(列邑)의 무비(武備)를 점검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신립은 파직된 강계부사를 막하(幕下)의 도총제(都摠制)로 삼고
그를 관서지방(關西地方-평안도)에 보내 순시(巡視)하게 하였습니다.
1592년 4월 17일 오후, 조선 조정에 일본군의 침략(侵掠)을 알리는 파발(擺撥)이 당도하니
이에 조선 조정은 경장(京將)들을 경상도(慶尙道)에 파견(派遣)시켜
서울로 북상(北上)하는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크게 3개로여서 경장들도 이에 맞추어
가장 큰 관문(關門)이자 가장 통행(通行)이 많은 새재(조령-鳥嶺)을 지나가는 영남대로(嶺南大路)쪽은
순변사 이일(巡邊使 李鎰)을 보내어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막게하고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길을 통해 죽령으로 이어지는 길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慶尙左防禦使 成應吉)과 조방장 박종남(助防將 朴宗男)을 보내고
죽령(竹嶺)은 조방장 유극량(助防將 劉克亮)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으며
경상우도(慶尙右道)의 길을 통해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지는 길은
전 강계부사를 경상 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로 임명하고 양사준(梁思俊)을 조방장으로 삼아 보내니
이때 순변사는 서울에서 정예병(精銳兵)을 선발하기 위해 3일간 더 머물다가 남하(南下)하였고
경상 좌방어사와 우방어사는 곧바로 종사관(從事官)들과 군관(軍官)들을 급편(急便)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경상우도를 지키러 내려가는 전 강계부사이자 경상 우방어사는 조경(趙儆) 이었습니다.
이때 서울에서 출발하는 조경의 군대는 불과 20여명에 불과 했으나
그의 휘하에는 자원한 종사관 이수광(李睟光)과 군관 정기룡이 있었으며
그외에도 종사관 정눌(鄭訥), 군관 김태허,좌막 송건(佐幕 宋建, 좌막-비장裨將)등이 있었습니다.
조경은 경상우도로 내려가면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보내니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왜적(倭敵)과 싸우게 되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나이다.”
그러나 조경의 굳은 의지와 달리
그의 의지를 수행할 휘하 병력은 경상우도 금산(金山-금릉金陵,김천金泉)에 이르렀을 때에는
겨우 100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순조롭게 서울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으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의 1번대는 부산진(釜山鎭)과 동래성(東萊城)을 함락하고
황산잔도(黃山棧道)의 조선군을 돌파(突破)하며 대구(大邱)를 통해 계속 영남대로를 따라 진격하여
4월 25일에 상주 북천(尙州 北川)에서 순변사 이일의 군대를 몰살(歿殺)시키고
4월 28일에는 조령을 넘어 충주(忠州)로 진격하여
탄금대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군대를 전멸(全滅)시켰습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등청정)의 2번대도 부산에 상륙하여
울산(蔚山)과 경주(慶州)를 함락하고 영천(永川)을 거쳐
경상좌도의 좌로(左路)를 따라 진격하여 문경(聞慶)으로 북상하니
경상 좌방어사 성응길은 대적(對敵)하지 못하고 마침내 조령을 넘어 달아나버렸습니다.
그 결과 경상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방어선은
경상우도의 우로(右路)로서 추풍령으로 가는 길을 막는 것 뿐 이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전)의 일본군 10000여명이 그 길을 통해 북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4월 20일에 김해성(金海城)을 함락시킨 후 우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영산(靈山)에서 나뉘어
본대는 창녕(昌寧),현풍(玄風)을 거쳐 성주로 진격하였으며
또다른 부대는 초계(草溪)와 합천(陜川)을 거쳐 거창(居昌)을 함락시키고 지례(知禮)로 북상하였으니
이들은 금산에서 합류하여 추풍령을 넘고
최종적으로 서울로 북상할 계획 이었습니다.
4월 27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본대가
현풍에서 성주에 이르니 성주의 조선군은 일본군이 성주 경계 내(境界 內)으로 들어오기 전에
소문만 듣고 장졸(將卒)들 대다수가 달아나버리고 백성들도 집을 비우고 달아나니
성주목사 이덕렬(星州牧司 李德悅-문관 출신 이었습니다.)이 직접 남은 군사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며
어떻게든 성주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성주성을 포위하고 다음날인 4월 28일 저녁에 성주성에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성주판관 고현(星州判官 高峴-무관 출신 이었습니다.)은 먼저 멀리 달아났으나
목사 이덕렬은 일단 일본군을 피하되 끝까지 성주에 남았습니다.
일본군은 성주성 안과 성주성 밖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방화(放火)와 약탈(掠奪),살인(殺人),납치(拉致) 등의 만행(蠻行)을 저질렀고
백성들은 그들을 피해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니
이때 성주에 살고 있던 도씨 일가(都氏 一家)도 일본군을 피해 피난하였는데
그 일가의 암곡 도세순(巖谷 都世純)이란 사람이 이 전쟁동안 겪은 일들을
용사일기[龍蛇日記-이노의 용사일기와 동명이기同名異記]라는 제목의 일기로 기록하였으니
그는 4월 28일과 29일에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과
일본군이 성주 곳곳에 불을 지르며 저지른 악행(惡行)들을 적었습니다.
한편 조경이 서울에서 남하하여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 고개(국역 매헌실기는 조령이라고 하고
그외에 추풍령이라는 말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습니다.)에 이르렀을 때에
일본군 선봉부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가 이르니
이에 조경은 사졸(士卒)들을 모아서 회의(會議)를 하는데
조경이 마지막으로 어느 군관에게 물으니 그 군관이 대답하길
"제가 나이도 젊고 재간(才幹))도 노둔(魯鈍)하며 또 전쟁도 겪지 않았으니
어찌 적군을 제어(制禦)하고 공격하는 방법을 능히 알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이 왜적(倭敵)은 천하의 강한 군사로서 남의 나라를 칠 계획을 하고 있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출동하였으니 군대를 훈련하고 무기를 수리하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잘 만들었을 것이며
더구나 대포(大砲)와 조총(鳥銃)은 쏘는 것이 그들의 장기(長技)이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태평한 세상의 훈련되지 않은 군졸(軍卒)을 거느리고
갑자기 강성한 적군을 만났으니 이기기 정말 어려울 것이옵니다.
허나 왜적은 원래 보졸(步卒)로서
평탄한 들과 너른 벌판에서 이리저리 달리며 돌진하여 싸우는 것은
결코 기병에 미치지 못할 것 입니다.
어리석은 저의 계책으로는 건장한 말을 뽑아 말 탈 기수를 훈련시키고
또 지혜와 용기를 겸한 사람을 뽑아서 돌격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군대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적군을 평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적이 생각치도 못할때에 나아가 그들을 친다면
적군은 반드시 놀랄 것이며 놀라면 흩어질 것이며 흩어지면 대오(隊伍)가 어지러워 질 것이니
이와 같이 된 후에 아군(我軍)의 보졸이 그 뒤를 쫓고
기병(騎兵)이 보졸과 합세(合勢)하여 적군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으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만약 다만 보졸을 데리고 선두(先頭)에 내세워 교전(交戰)케한다면
무익(無益)한 죽음만 당할 뿐이오니
이 밖의 기묘한 계책은 제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옵니다."
라고 하니 조경이 좋은 계책이라 칭찬하고 그 군관을 선봉돌격장(先鋒突擊將)으로 삼으니
그가 31세의 무관 정8품 훈련원봉사 정기룡(從八品 訓鍊院奉事 鄭起龍)이었습니다.
이에 여러 무관(武官)들이 조경에게 말하길
"이 사람을 쓰신다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빨리 달리는 말을 가지고 있으니
위급한 상황에서 반드시 먼저 달아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계책을 낸 것은 자기 혼자 살아남으려는 것 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조경은 듣지 않았고 또한 정기룡도 선봉장의 직책을 사양(辭讓)하였으나
조경은 끝내 정기룡을 선봉돌격장으로 삼고 수십 명의 기병을 주어
조경의 본대(本隊)보다 앞서 나가게 하니
정기룡의 기병대는 금산을 거처 지례를 지나 거창(居昌)의 우치현(牛奇蝶-우척현,우두령)넘어
4월 23일 신창(新倉)에 이르렀습니다.
정기룡의 기병대가 거창 신창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선봉대 500여명이 이미 신창에 진을 치고 3군 대형(隊形)으로서 다가오니
이에 정기룡은 곧바로 기병들을 데리고 나아가자 기병들은 자기들보다 훨씬 수가 많은 일본군을 보고
두려워하며 감히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기룡 혼자 일본군 중군(中軍)을 향해 돌격을 하고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를 너댓번 왔다갔다 하자
정기룡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 병졸은 거꾸러지고 정기룡 주변의 일본군은 흩어져 달아나니
그 것을 본 조선군 기병들이 공격할 수 있음을 알고 용기 내어 일본군에게 돌격하자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진으로 물러났습니다.
이어 정기룡이 적진(敵鎭)을 자세히 살펴보니
적진이 2개였는데 그 중 하나는 일본군이 잡은 조선인 포로들이 있는 진영(鎭營)이었으니
이는 일본군이 조선인 포로들의 반항(反抗)을 의심하여 따로 만들어 둔 것 이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정기룡은 기병들을 데리고 일본군 진영을 집중공격하니
이 전투에서 정기룡 혼자서 100여명의 적을 격살(擊殺-쳐죽임)했다고 전하며
신창의 일본군은 결국 정기룡의 기병대에게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정기룡이 돌아가려고 하는데
일본군 4명이 길가의 우거진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정기룡이 지나서 뒤를 보이자마자
바로 칼을 휘둘러 정기룡의 뒤에 칼날이 미치니
정기룡은 재빨리 몸을 뒤치고 활과 화살을 꺼내어 연사(聯射)하자
일본군 3명이 사살(射殺)되고 1명은 달아났습니다.
이 거창 신창 전투는 정기룡이란 영웅(英雄)의 업적(業績)이 시작된 첫 전투였으나
정기룡은 이 첫 전투에서 막부(幕府)에 전공(戰功)을 보고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언제 일본군 대병력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수급(首級)을 하나도 챙기지 않고 기병대를 인솔(引率)하여 복귀(復歸)하였습니다.
이 당시 조경의 본대는 우치현 북쪽 수십리 밖에 있었기 때문에
정기룡 기병대의 전투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고
전공의 증거인 수급이 없었기에 조경은 전투 보고(戰鬪報告)를 듣고 나서
"어찌 적병의 수급을 바치지 않는가?"라고 물었고
정기룡을 믿지 않는 무관들은 정기룡이 없는 사실을 꾸며 공을 요구한다고 비난하니
정기룡과 함게 신창 전투를 수행한 기병들이 이에 분개(憤慨)하고 원망(怨望)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정기룡은 그저 고개를 숙인채 어떠한 변명(辨明)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말려서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대규모의 일본군 병력이 거창에 모이니
조경은 지례에 군대를 주둔(駐屯)시키고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기룡은 단독으로 군관 김태허(金太虛)와 8명의 기병을 데리고
우지현을 넘어 거창으로 내려와 거창군 내에서 일본군을 체포(逮捕)하고
밤에 객관(客館)에서 투숙(投宿)하면서 난간(欄干)에 말을 매어두고는
앉아서 철릭(天翼)을 입은 상태에서 잠을 잤습니다.
밤이 깊어질 무렵, 정기룡은 일본 정탐군(偵探軍)이 객관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김태허와 기병들을 흔들어 깨우니 그들은 사실을 알고나서 놀라 두려워하며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달려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기룡은 그들과 생각이 달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군의 정세를 추측하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날이 밝기를 기다려
그 실물을 보고나서 행동해야 할 것이오."
그리하여 정기룡의 일행들이 날 밝아질때까지 기다리니
날이 밝아오자 적병(敵兵)들이 백보(百步) 밖에서 객사(客舍)를 둘러싸고 있는데
떠오르는 아침해에 창칼의 날이 반사(反射)되어 눈처럼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정기룡이 객관 주변의 지형(地形)을 살피니
객관의 문을 통해서 뛰쳐나가기에는 말 재갈을 풀고 나가기가 불편할뿐더러
가로막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반드시 객관 앞의 담을 뛰어넘어야 나갈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에 정기룡은 자신의 생각을 일행에게 전하니
일행(一行)들이 말하길
"담이 높은데 어찌 말이 뛰어넘을 수 있겠소?"
라고 하니
정기룡이 대답하길
"한 필의 말이 먼저 뛰어넘는다면 뒤에 오는 말들은 당연히 따라서 넘을 수 있을 것이오.
그대들이 타는 말들은 모두 잘 달리는 좋은 말들이니 어찌 안된다고 근심하겠소?"
라고 하고 정기룡이 먼저 말을 탄 상태에서 고삐를 당기고 채찍질하여
한 번에 담을 넘어 객사 밖에 서니 여러 기병들도 정기룡을 따라 뒤이어 담을 넘었습니다.
이때 한 명이 담을 넘다가 말에서 넘어져서 담 안에 떨어지니
정기룡이 말을 탄 상태에서 다시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서 떨어진 기병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시 담 밖으로 나와 일본군의 포위망으로 돌격하니 그 기세가 마치 별똥별과 같아서
칼을 빼어 모여 있던 일본군은 순식간에 바람앞의 풀처럼 쓰러지고 살별같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객사를 겹겹이 포위(包圍)하고 있었으나
정기룡이 타고 달리는 말 앞에는 포위망(包圍網)이 열리니
이에 여러 기병들은 오직 정기룡을 따라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기세를 타고 일본군을 공격하여 각각 일본군 너댓명을 쳐죽였으나
그들은 적지(敵地)에서 빠져나가는 상황인지라 수급을 거두지 않았고
다만 정기룡만 일본군 수급 두서너 급을 얻어 말에 매달아놨습니다.
거창의 객사에서 일본군의 포위를 돌파한 정기룡 일행은 북상하여
우치현에 올라 산 중턱에서 말을 쉬게 하였습니다.
이때 정기룡이 주변을 둘러보니 갑자기 일본군 깃발이 길을 메우고 함성(喊聲)이 일어나니
함성을 일으키는 자들은 거창에서 정기룡 일행을 추격해온 일본군 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기룡 일행으로부터 10여보 떨어진 산 위에서
매복(埋伏)해있던 일본군이 함성에 응하며 일제히 일어나 내려오니
정기룡 일행은 앞뒤로 포위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정기룡의 생김새와 복색(服色)을 보고 반드시 그를 사로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정기룡은 또다시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니
일행들이 말하길
"이는 매우 안전한 계책이 아니오."
라고 하니
정기룡이 대답하길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매우 안전한 계책이 있소?"
라고 하고 마침내 말에 올랐으나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말하기를
"단병기(短兵器)는 이런 곳에서 쓸 수 없다."
라고 하고 길 옆의 상수리 나무로 말을 달려가니
정기룡은 상수리 나무 밑에서 말 위로부터 솟구쳐 나무가지를 꺾고
그 나무가지를 쥐고 말을 달려 일본군을 향해 돌격하여
상수리 나무 몽둥이로 일본군 대가리를 내려치니
상수리 나무 몽둥이가 바람을 일으킬때마다
일본군 대갈통은 박살나고 두개골(頭蓋骨)이 부서졌습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다시 정기룡은 일본군 포위망을 뚫었고
일행들은 정기룡의 뒤를 따라 포위망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계속 정기룡의 뒤를 쫓아오니
정기룡은 나무 몽둥이를 버리고 활을 꺼내고 몸을 뒤로 비틀어 활을 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앞서서 추격하던 일본군 병사들은 화살맞고 쓰러지고
이에 일본군이 추격을 멈추자 정기룡은 말을 되돌려 일본군을 향해 돌격하여
적병 대여섯명을 쳐죽이고 수급을 챙기니 일본군은 모두 산을 올라 달아나버렸습니다.
이리하여 정기룡과 그의 일행들은 무사히 조경의 본대에 복귀하게 되었고
정기룡은 거창에서 지례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확보한 수급들을
모두 자신의 일행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훗날 김태허는 정기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운(景雲-정기룡의 자字)은 적병을 많이 볼수록 용기가 더욱 많이 나서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면서 범이 성낸 듯이 용맹한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그래서 매양 그를 따라서 싸울 적에는 비록 갑자기 일어난 변고(變苦)를 만나더라도
그를 믿고 있었기에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벤 적병의 수급은 모두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가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항상 적병의 머리를 잘 베고 있으니 마땅히 뒷날을 기다릴 것이다.'
라고 하고는
뒷날에도 다시 이처럼 하였다.
우리들이 오늘날에 금관자(金貫子)와 옥관자(玉貫子)를 다는 것은 모두 경운의 은혜 덕분 이다."
1592년 4월 29일,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은 성주에서 금산(김천)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난중잡록에는 4월 28일에 일본군이 금산으로 쳐들어왔다고 기록하였으나
정만록이나 도세순의 용사일기에는 4월 28일 저녁에 성주가 함락되었다고 기술했으므로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이 금산과 추풍역에 쳐들어온 시기는
4월 28일 밤이거나 다음날인 4월 29일일 것입니다.)
또한 일본군 별대(別隊)는 지례에서 우치현을 넘어 지례로 다가왔습니다.
이에 조경은 지례에서 금산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3번대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니
이때 조경의 군세는 서울에서 남하하여 왔을 때의 병력 100여명에
경상감사 김수(慶尙監司 金睟)의 지원군(支援軍) 400여명을 합쳐서 약 500여명 정도 되었으나
그가 상대해야할 일본군은 무려 10000여명에 달했으니
결국 조경의 군대는 금산에서 추풍역(秋風驛)으로 후퇴하였으나
조경이 추풍역에 이르러 군대를 재편성(再編成)할 때에는
이미 많은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난 뒤 였습니다.
결국 조경의 군대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가 추풍령을 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로서 경상우도에서 일본군을 막는 조경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조경은 일본군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고
남아있는 병력을 재정비(再整備)하여 다시 금산으로 남하하였습니다.
1592년 4월 30일,조경의 군대는 금산으로 남하하여
금천역(金泉驛)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일본군 5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음날인 5월 1일,조경의 군대는 전라방어사 곽영(全羅防禦使 郭嶸)의 군대의 지원을 받은 상태에서
금산군 내의 일본군을 포위공격하여 일본군 30여명의 목을 베었으며
곽영의 군대도 일본군 포로를 획득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50여명이나 되었으니
이무렵 조경의 군대가 불과 110여명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큰 타격이었습니다.
1592년 5월 3일,일본군이 금산으로 쳐들어오자 조경의 군대는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이때 조경의 군대가 겁을 집어먹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니 조경이 직접 병사들을 독전(督戰)하여
나아가 싸우게 하니
정기룡은 앞장서서 일본군 선봉대와 맞서싸워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니
일본군 50여명을 작살(斫殺-베어 죽임)했다고 전합니다.
이에 일본군이 후퇴(後退)나자 조경은 기병들로 그들을 추격(追擊)하게 하고는
자신은 몇 명의 기병을 데리고 뒤에서 있었는데
일본군이 다른 길을 통해 공격하니 조경의 군대가 무너져 흩어지고
조경은 달아나다가 풀숲에 숨어 있던 일본군 3명을 먼저보고 활로 2명을 사살하자
1명이 뒤에서 칼로 쳐서 허리와 겨드랑이와 머리에 부상 입히고
조경을 무력화시켜 일본군 진영으로 끌고갔습니다.
한편 정기룡은 조선군이 패퇴(敗退)하는 상황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다가
조경의 말이 적진에 있는 것을 보고 칼을 휘두르고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적진으로 돌격하면서 좌우에서 가로막는 적병들은 격살하니
그 기세(氣勢)에 일본군은 기가 질려 그저 피하거나 가만히 있을 뿐 이었습니다.
정기룡이 적진에 돌입(突入)하여 조경을 발견했을 때는 조경이 살해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으니
조경은 일본군 병사가 그의 목을 치려고 하자(혹은 그를 결박結縛하려고 하자)
적병을 껴안아 꼼짝못하게 하였고
일본군 병사는 조경과 몸싸움을 하다가 겨우 왼팔로 조경의 목덜미를 껴안아
헤드락(Headlock)을 걸고 오른손에 칼을 잡고 조경의 목을 베려고했습니다.
이때 정기룡이 칼을 휘둘러 적병을 베어버리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조경을 겨드랑이에 낀 다음
신속히 말에 올라타고 다시 가로막는 적들은 쳐죽이며 적진 밖으로 빠져나가니
일본군은 도저히 그를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정기룡과 조경은 탈출하였습니다.
이때 조경의 상태는 오른손의 손가락 3개가 끊어지고 옆구리를 칼에 찔린 상태였으나
정기룡은 이미 조경의 손가락 3개를 적진에서 챙긴 상태였습니다.
정기룡은 일단 조경을 금천의 직지사(直指寺)에 옮겨서 응급처치(應急處置)하였고
조경은 부상으로 인해 더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군대를 경상감사 김수에게 넘겼으며
경상도 전역(全域)이 전장화(戰場化)되자 호남의 구례현(求禮縣)으로 이송(移送)되어
조섭(調攝) 받았습니다.
이후 조경은 치료를 받으면서 장계를 작성하여 조정에 올리고
정기룡과 그의 군대는 경상감사 김수의 군대에 합류하여
그의 휘하에서 근왕군(勤王軍)으로서 서울탈환작전에 투입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조선 조정이 경상도에 파견한 경장들은
죽령에 파견된 조방장 유극량을 제외하고 모두 패배하였으나
조방장 유극량은 충주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죽령 방어를 그만두고 퇴각함으로서 그 역시 패배하니
마침내 일본군은 1592년 5월이 되기도 전에 연일 이북의 동해안 지역과 일부 북부,내륙 지역을 제외한
경상도의 지역들을 함락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가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된지 보름이 될 무렵 이었습니다.
1592년 4월 22일~5월 3일 경상우도 전황도
붉은색 실선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밀양(4월 18일)-청도(19일)-경산(20일)-대구(21일)-칠곡,인동(4월 22일)-선산,장천(24일)-상주,함창(25일)-문경(26일)-충주(28일)-여주-
주홍색 실선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3번대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김해(4월 20일)-창원,칠원,영산(21일)-초계,합천/창녕(4월 22일)-거창/현풍(23일)-지례(4월 말)/성주(28일)-금산/추풍역(29일)-황간,영동(30일)-청주-
파란색 실선은 전라방어사 곽영의 군대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전주(4월 말)-남원,운봉,함양(27일)-금산(30일)
노란색 실선은 경상감사 김수의 군대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영산(4월 17일)-초계(18일)-합천(19일)-고령(21일)-지례(22일)
초록색 실선은 경상우방어사 조경의 군대의 진격방향을 나타냅니다.
서울(4월 18일)-금산(22일)-지례,거창 신창(23일)-금산,추풍역(29일)--금천역(30일)-금산(5월 1일)
하늘색 실선은 경상도 북부 조선군의 이동방향을 나타냅니다.
상주-성주-석전,금호,고령(4월 19일?20일?)
흰색 원은 조선 의병들의 거병지를 나타냅니다.
순창(유팽로 거병,4월 20일),거창(김면 거병)
임진년 4월 육상전황도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국역 매헌실기
포저집
정만록
임진전란사
도세순(성주 도씨)의 용사일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DCN산하
첫댓글 글을 읽다가 "헤드락"에 빵터지고 말앗습니다. .ㅋㅋ 아 다음편이 너무 기대 된다능
정기룡의 벼슬이 생각보다 많이 낮았군요. 8품......
정기룡이 통제사까지 오른 것이 더 신기한 1인.. 모진 풍파가 있었을텐데.
카이사르 마그누스:당시 조경이 처한 기록을 보니 적병이 조경의 목을 왼팔로 감쌌다는 기록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유명한 [헤드락]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정기룡의 돌격으로 인해 그 적병(아시가루 혹은 하급 사무라이)의 꿈은 사라졌지요.
으흐흐:저때 정기룡의 나이 31세 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급상승하여 이 전투부터 약 6개월뒤에 상주판관 겸 가목사 직위를 받습니다.
사쿠에몬:이 금산 전투부터 시작해서 무술년(1598년)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사천왜성을 버리고 달아날때까지 정기룡은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하여 전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고뇌와 슬픔도 있었지요.
스샷은 엠파이어즈 인가요? 하고싶었으나 끝내 못해본 게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