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罪人입니다"
이번 재·보선 출마 거론?
"市長職 건 것은 잘못된 선택, 정치적 重罪 저질렀는데…
다시 정치할 자격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죠"
"전면 무상복지 반대는 불변"
"南美 국가 어디를 봐도 무차별적 현금 지원은 없어
한국, 선택적 복지가 맞다는 내 소신엔 변함이 없다 "
"자식같은 내 정책들, 줄줄이 제동걸리는 걸 보며 생병 앓았죠"
사퇴 후, 서울市 보면서…
"한강르네상스·디자인서울… 정책 폐기 위기감 들어
마음고생에 대상포진 앓고 허리디스크·위장병까지"
부드럽다? 전 외유내강형
"지나치게 정책 지향적인 정치인이란 말 많이 듣죠
한마디로 정치적 수가 부족… 근데, 이게 단점이자 장점"
이번엔 아프리카 르완다로
"마음공부 아직 부족하고 더 많이 반성해야 한다
넓고 깊은 세상 보면서 자신을 다잡고 돌아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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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 리마시청에서 6개월 동안 도시행정 자문을 하고 최근 귀국한 오세훈(吳世勳) 전 서울시장은“3년 전 무상 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시장직을 사퇴한 것은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이었다”며“리마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 오종찬 기자
"나는 죄인이죠."
오세훈(吳世勳·53) 전 서울시장이 24일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 가서 6개월 동안 도시행정에 대한 자문을 하며 지내다가 지난 22일 귀국했다. 혼자 밥해 먹고 살면서 버스 타고 시청을 오가며 일했다고 했다.
"나는 재선(再選) 서울시장 임기 4년 중 1년2개월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유권자들이 주신 잔여 임기(2014년 6월 말)까지 무슨 염치로 세상에 나서겠나. 시장직 사퇴 이후 내 정치 인생은 올 스톱됐다. 아직 반성하고 성찰(省察)하는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오 전 시장은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45세에 서울시장에 당선됐고, 2010년 6·2 지방선거에선 서울시장 최초로 재선에 성공했다. 3년 전 스스로 서울시장직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재선 임기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판을 떠난 후 3년 가까이 국내외를 떠돌았다. 2012년 5~10월 영국 킹스칼리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연구원으로 지냈고, 이후 중국 상하이로 옮겨 푸단(復旦)대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지난해에는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도시행정론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다시 남미로 떠났다.
◇"더 반성해야 한다"서울 자양동 자택에서 24일 그와 마주 앉았다. 까맣게 탄 얼굴은 예전에 비하면 반쪽이 된 것 같았다. 예전처럼 잘 웃지도 않았다. 여독과 시차(時差) 때문일까. 지구 반대편에서 비행기를 타고 30시간 가까이 날아온 지 며칠 안 돼 그런지 그는 지쳐 보였고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시장 재임 시절 시청을 출입하며 5년을 지켜봤던 기자에게 이날 그의 모습은 영 낯설었다.
―귀국 시점이 미묘하다. 언론에서 7·30 재·보선의 새누리당 출마 후보자로 거론하고 있는데.
"임기를 마치지 못한 죄인이 되어 정치에서 물러났다. 더 반성을 해야 한다. 시장직 사퇴 후 마음고생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마음공부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재선 시장에 뽑혔는데 임기를 마치지 못한 것은 정치적으로 중죄(重罪)다. 내가 다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감히 다시 현실 정치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오 전 시장은 출마 여부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후보로서 그가 당 지도부의 전략 공천 결정에 따라 재·보선에 뛰어들 여지는 남아 있다.
오 전 시장은 2011년 8월 서울 지역 초·중·고교의 전면 무상 급식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무산되자 시장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됐고, 전면 무상 급식이 시행됐다. 여권에서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더니 시장직을 야당에 넘겨주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이후 대중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론도 가급적 피했다.
◇"시장직 사퇴는 크게 잘못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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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 리마의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 오세훈 제공
오 전 시장은 지난해 말 정부 무상 원조 전담 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월드프렌즈 중장기 자문단의 단원으로 6개월 동안 페루 리마에서 일했다. 이 자문단은 해당 분야에서 일하다 퇴직한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우리 경제 발전 노하우를 개발도상국에 전달해 경제·사회 개발, 빈곤 퇴치를 돕는다. 그는 서울시장 경험을 살려 리마의 도시행정 전반에 대해 자문했다.
―남미에 있는 페루의 리마는 우리에게 멀고 낯선 곳이다.
"서울시에서 같이 일했던 이덕수 전 부시장이 지난해 6월 남미 에콰도르에서 보낸 안부 이메일이 마음을 울렸다.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도 있는데 낯선 나라에서 혼자 밥해 먹으며 코이카 정책 자문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낯선 곳에 가서 봉사 활동도 하고, 시민들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나를 갈고 닦으며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세 나라에 신청서를 보냈는데 페루 리마 시청이 내가 와주기를 적극적으로 원해 그곳으로 결정했다."
―내면을 들여다보다니.
"내가 죄인 아닌가. 무상 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건 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크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으니,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필요가 있었다."
오 전 시장의 시장직 사퇴의 발단이 된 무상 급식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들고나와 핫이슈가 되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민주당)과 시의회의 4분의 3(106석 중 79석)을 차지한 민주당 시의원들은 무상 급식을 밀어붙였고, 오 전 시장은 이에 맞섰다. 그는 서울 지역 초·중·고교 '소득 하위 50%까지 단계적 무상 급식'을 주장한 반면 민주당은 '소득 구분없이 전면 무상 급식'을 고집했다. 양측 간 협의가 무산되자 서울시민 51만명(서명자 80만명 중 유효 서명 수)의 발의로 주민투표가 이루어지게 됐다.
민주당은 주민투표를 '나쁜 투표'라고 규정하고 투표 거부 운동을 벌였다. 오 전 시장은 투표를 3일 앞두고 "투표율이 개표 요건(33.3%)에 못 미쳐 투표가 무산되거나 개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 모두 시장직을 걸고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오 전 시장은 '식물 시장'으로 전락해 제대로 시정(市政)을 펼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널리 퍼져 있었다. 2011년 8월 24일 무상 급식 주민투표가 투표함 개봉(開封)에 필요한 투표율 33.3%(279만명)에 미치지 못한 25.7% (215만명)로 끝나자 그는 이틀 뒤 시장직에서 사퇴했다.
―주민투표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나.
"당시 우리나라는 무상 복지를 놓고 논쟁하고 갈등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정당도 정부도 정략에 묶여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은 당장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민주당이 장악한 시의회·시교육청·구청(25곳 중 21곳) 모두 대화가 되지 않았다. 시민에게 답을 구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주민투표를 선택했다."
―주민투표는 야권이 투표 참여를 거부하면서 '단계적 무상 급식'과 '전면 무상 급식'의 찬성률 경쟁이 아니라 투표율이 투표함을 열 수 있는 33.3%에 미치느냐 못 미치느냐 구도로 전개됐다. 이 투표율을 넘길 가능성이 적은데도 밀어붙인 건 아닌가.
"그 주민투표는 우리 사회 복지 논쟁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3무1반(무상 급식, 무상 의료, 무상 보육과 반값 등록금)을 내걸고 이를 시행하지 않으면 시대 흐름에 거스르는 것처럼 선전했다. 이듬해 치러질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위한 정교한 전략이었다. 복지 문제의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데, 서울이 시범 케이스가 되었다. 주민투표를 통해 시민들과 함께 사태를 이해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전면 무상 급식이 과잉 복지로 이어져 나라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설득력이 있다고 해도 정치는 상대방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일 아닌가.
"처음부터 주민투표를 제의할 생각은 없었다. 당초 무상 급식 대상을 '소득 하위 50% 이하'에서 70%로 확대하는 수정안을 내놓고 타협을 시도했지만 민주당은 100% 안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아 대화가 중단됐다."
―주민투표가 실패할 경우 시장직 사퇴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나.
"주민투표는 필요했지만 시장직을 건 것은 잘못이었다. 그 자리는 내가 선택하고 말고 할 자리가 아니라 시민들이 나를 뽑아서 내준 자리인데 내가 경솔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 좀 더 정치적 융통성을 발휘해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전면 무상 급식에 문제 있다는 소신은 불변
―무상 급식 문제와 관련해 3년 전 소신에 변함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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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백팩을 앞에 메고 페루 리마 시내를 걷고 있다. 이곳에는 배낭을 칼로 찢고 지갑이나 귀중품을 빼내가는 범죄가 많아 가방을 앞에 메야 안전하다. / 오세훈 제공
"당시는 무상 복지의 시작점이었다. 누군가의 소신과 결단이 필요했고, 제 소신은 '선택적 복지'로 변함이 없다. 이후 무상 복지는 확대됐다. 앞으로 무상 복지는 국민의 뜻에 따라 확대 여부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 국민이 나에게 시대 흐름을 잘못 읽었다고 질타하면 달게 받겠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우리 사회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정치인의 몫이다."
―무상 급식 주민투표는 정책 문제인데, 너무 정치적 이슈로 전개됐다. 오 시장이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이 질문에 오 전 시장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해 중 오해다. 내가 대선을 노렸다면 시장직을 끝까지 고수해야지, 왜 던졌겠는가."
―당신이 시장직을 사퇴하면서 박원순 현 시장과 안철수 의원이 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르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 됐다.
"박 시장과 안 의원에 대해서는 이 시점에 내가 무슨 언급을 할 수 있겠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큰 부담을 줬다.
"여야 대결로 전개된 주민투표 결과 한나라당 시장이 사퇴해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그는 시장직 사퇴에 관한 질문이 이어지자 "임기도 못 채운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오 전 시장의 중도 사퇴 이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하면서 그가 당초 추진했던 계획들은 늦어지거나 축소됐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장이 1년 연기됐고, 세빛둥둥섬 개장도 2년 넘게 지연됐다. 한강르네상스나 디자인서울 정책 등도 축소됐다.
―시장직 사퇴 이후에 심정이 복잡했을 것 같다.
"시장이 바뀐 후 내가 밤잠 자지 않고 마련해 추진하던 정책들에 줄줄이 제동이 걸리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미어졌다. 산고(産苦) 끝에 배 아파 낳은 자식 같은 정책들이었다. 내가 추진하던 정책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폐기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도 들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몸도 말이 아니었다. 등에는 대상포진이 발생하고, 허리디스크와 신경성 위장병도 생겼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와서 그야말로 생병을 앓았다."
―시장 재임시 디자인서울이나 한강르네상스처럼 외관을 꾸미는 데 중점을 두는 겉치레 정책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2009년부터 서울 성곽을 유네스코에 등재해 달라는 제안을 하는 등 전통과 첨단이 어우러지는 서울을 구상했다. 그 내용을 알리는 방안이 서툴렀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디자인을 통한 국가 브랜드 업그레이드 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나라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다."
◇ "정치적 수가 부족하다"환경 변호사와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오 전 시장은 2000년 서울 강남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부잣집 아들 같은 외모와 달리 어린 시절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아버지는 중소 건설 회사에서 30여년 근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우셨는지 집에서 베갯잇과 방석을 만들어 팔다가 남대문시장에서 조그만 수예점을 하셨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가 거의 쓰러지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월급이 몇달 동안 나오지 않아 며칠 동안 라면이나 시래기 밥만 먹은 적도 있었다."
―법조인이 된 계기가 있었나.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의 회장은 어머니 이모부의 아들, 즉 나에게 외오촌당숙 되는 분이었다. 대학생 시절 집안 어른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지가 회사에서 손아래 동생뻘인 회장에게 깍듯하게 대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건데, 그땐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절대 샐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정치 승부수는 2004년 16대 국회에서 통과된, 정치자금을 엄격히 제한한 '오세훈 선거법(정당법·공직선거법·정치자금법 개정안)이었다. 당시 5·6공 구(舊)세력 퇴진론을 주도하면서 17대 국회 불출마를 선언한 그는 2년 뒤 서울시장으로 컴백했다.
―오 전 시장은 늘 멋있는 것만 하려 한다는 비판이 있다. 2004년 '오세훈선거법'을 통한 정치 개혁과 국회의원 불출마 선언, 2011년 무상 급식 주민투표와 시장직 사퇴 등은 모두 소신껏 밀어붙인 것이라 해도 당이나 뽑아준 시민들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두 사안 모두 정책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를 정치적 이벤트 관점에서만 보니 그런 말이 나왔다."
―부드러운 이미지가 정치인으로 크는 데 한몫한 걸로 보인다.
"외유내강형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다르다. 서울시에서 같이 일한 공무원들도 '그동안 알고 있던 부드러운 인상과 많이 다르다'는 평을 한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든다면.
"지나치게 정책 지향적인 정치인이라는 평을 듣는다. 이는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정치적 수가 부족하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이는 나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봉사 활동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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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전 시장이 6개월을 살았던 페루 리마는 사막 도시라 공기가 좋지 않다고 한다. 식수난과 주택난도 심하다. 대중교통은 불편하고 치안도 불안하다. 오 전 시장은 청바지에 백팩을 멘 여행자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페루의 우리 교민들은 대개 승용차를 이용한다. 내가 매일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리마 시청으로 출퇴근한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란다. 버스엔 잡상인도 많고 소매치기도 있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버스에서 바나나튀김이나 땅콩 등을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었다."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고생이 많았겠다.
"아침·저녁은 집에서 해먹었다. 출국 전에 밑반찬이나 김치찌개·된장찌개 끓이는 것을 배웠고, 현지에서는 인터넷에 나온 레시피를 보면서 생선찌개, 북엇국, 계란말이도 해먹었다. 시장에 가서 생선 사고 야채 고르면서 1주일치 장을 보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주머니가 와서 청소와 빨래를 해줬지만, 일상적인 설거지와 빨래는 혼자서 했다. 몇달이 지나자 오른손 검지에 주부습진이 생겼다. 몸이 고달프기도 했지만 가장 힘든 건 역시 외로움이었다. 일기 삼아 그날 있었던 일을 써서 매일 아내(송현옥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집에서 해먹은 음식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건강은 괜찮나.
"귀국 직전 건강검진을 했더니 혈압·혈당 수치가 환자 수준에 달했다. 페루 음식은 대개 짜고 달았다. 한 끼에 10누에보 솔(약 4000원) 정도 하는 식사는 때로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배탈이 나기도 했다. 집에서 해먹는 한국 음식도 부실할 수밖에 없어 건강을 해친 것 같다."
―라틴아메리카는 복지 포퓰리즘의 원조쯤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처럼 이른바 '보편적 복지'라고 이름 붙여 소득 구분없이 무차별적으로 현금을 지원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금 지원책 중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정책 중 하나로 평가받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정책도 조건부 현금 지원책이었다. 극빈 가정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아이들의 학교 출석, 예방주사 접종, 직업 교육 이수 등을 하는 조건으로 현금을 지원한다. 그쪽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가리지 않고 똑같이 현금을 주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얘기를 하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나.
"올 하반기에 아프리카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가서 코이카 중장기 자문단으로 일할 생각이다. 아프리카는 풍토가 좋지 않고 환경도 열악해 건강하지 않으면 현지에서 일하기 어렵다고 한다. 요즘 혈압과 혈당이 높아 의사 권유로 식단 조절을 하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다. 아프리카에 가서 더 넓고 깊게 세상을 보면서 나 자신을 다잡고 돌아보고 싶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