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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시인의 시론[詩論]
1.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말은 어느 시학교수의 강의실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다.
정확하게는 김인환 교수의 대학원 강의 중의 한 대목이었다는 한 젊은 시학도의 전언을 통해
나는 이 말과 극적으로 만났다.
그렇다. <극적으로>이다. 그 순간 나는 전율했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탄력으로 높게 솟아오르다가 잔잔한 충만의 물살로 가득해졌을 그 강의실의 공간도
그대로 눈앞에 다가왔다.
한 정신이나 감성에 대하여 이렇게 내 몸이 관능으로 활짝 열린 감응을 보일 때가 나는 제일 행복하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내 노트에 옮겨 적었다.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앞의 <시>는 대문자로, 뒤의 <시>는 소문자로 구분해 적었다.
(알파벳처럼 음소 단위로 구분해 적을 수 있는 기호가 없는 우리 문자가 이럴 때는 사뭇 불편하다.)
그 말에 대한 풀이를 더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앞의 <시>는 글쓰기 이전의 시를,
뒤의 <시>는 글쓰기 자체로서의 시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자 이전의 시, 그것은 다만 싱싱한 혼돈일 뿐 시는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빠르게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고,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에서는 글쓰기로서의 시 자체에 대한 가치폄하의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싱싱한 혼돈>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요즈음 우리 시 속의 사물들이나 상황은 너무 글쓰기에 갇혀 있다.
<시>는 없고 <시>만 있을 때가 더 많다. 비유도 그렇다.
좋은 시는 비유로 가두는 시가 아니라 비유로 열어주는 시일 터이다.
그래서 <섬광>이 없다.
설사 그것이 문자 이전의 <시>의 세계에 대한 <반복>과 <유사>, <복제>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원초적 일상의 싱그러움이 있는 시 쪽을 나는 지지한다.
까불지 않는 시가 좋다.
아무리 잘 쓴 시라고 해도 그것은 문자 이전의 <시>를 <배가>시키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미메시스>의 논리를 우리는 외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적었다.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가서 기댈 뿐이다.)
시가 시를 기다리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댈 곳이 거기 있어
시라는 한 담화가 태어날 따름이라 나는 믿는다.
여기서 <기댄다>는 말은 의존이나 구원 따위의 도덕적 관념들과는 사뭇 다른 질감의 것이다.
<기댄다>는 말 속에는 움직임이 있고 <살대임>이 있다.
이쪽의 모자람과 왜소함이 부끄럽게 느껴지게 하거나 그것들 때문에 이쪽이 주눅들게 하지 않는 넉넉함이 있다.
갇힘에서 열림으로 가는 은밀한 통로 하나를 허락받는 은근하고 따뜻한 눈짓이 있다.
혹은 첫 번째로 열리는 산뜻한 새벽공기가 있다.
무엇이 큰 <시>인가.
다음과 같은 시를 읽고 났을 때 나는 차라리 자유롭다.
적어도 원초적 일상의 싱그러움이 거기엔 있다.
우리가 무수히 지어 붙인 이름들로부터 그 상처들로부터 또한 자유롭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가 가서 기대게 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바로 그 <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터질 듯한 사과, 배와 바나나
구즈베리……이 모든 것들이
삶과 죽음의 말을 입 안으로 들이민다……알 만하구나……
어린이의 얼굴을 읽어 보아라,
어린이가 과일 맛을 볼 적에, 먼 곳에서 오는 이것이
그대들의 입 안에서 차츰 이름 없이 되지 않는가?
낱말이 있어 온 곳에 보물이 흐른다, 과육으로부터 느닷없이 해방되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제1부 VII부분
그렇다. 욕망의 이름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곳에 시가 있다.
2. 몸의 말 - 현부玄府를 드나들며 <현부玄府>를 전에 없이 즐겁게 드나들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현부玄府>를 드나드는 일이다.(그렇다면 요즈음 그렇게 즐거울 정도로 시가 아주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는데 작품을 만드는 일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현부玄府>는 어쩌면 그 반대로 작품을 만들지 않는 게으름의 행복을 부추기는 어떤 요소의 것일 수도 있다.) 오래 전부터 <현玄>자字의 그윽함에 매료되어 왔었지만, 이토록 <현부玄府>를 나의 은밀한 또하나의 정부政府로 믿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 <현부玄府>를 드나드는 아름다운(즐거운) 굴종의 신민臣民으로서 요즈음 매우 충실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현부엔 정문이 따로 없다. 담장을 넘거나 문 틈서리로 빠져 들어갈 때가 더 행복하다. 전율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현부에의 드나듦이 허락되는 날은 더없이 운신이 부드럽고 평화롭다. 몸이 말을 제대로 듣는다.(몸이 말을 제대로 듣는 그 일순一瞬속에 <현부玄府>가 수립 탄생한다.) 그렇다. 몸이 말을 제대로 듣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현부玄府>의 삶이다. 밀린 잠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멍든 자리의 어혈을 풀어 낸다. 잘 굴러가는 둥글고 큰 수레바퀴 소리가 아득하게 거기 깔린다. <원융圓融>이 있다. 그게 도대체 왜 <현부玄府>인가. 그 명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에 대한 사전적 풀이를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럴 필요를 나는 느끼지 않는다. 이 말이 내게로 다가온 것은 사전의 어휘로서가 아니라 그 말 자체가 <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현부玄府>라는 말을 쓰기 이전부터 나는 그걸 살고(체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소한 일이기야 하지만 그걸 「현현玄玄」(「몸시·74」)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옮겨 놓은 나의 시가 있다. 그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메뚜기 한 마릴 잡자고 지난 늦가을, 오직 그런 목적으로만 거길 가서(요즈음엔 이런 일도 일이 된다) 나 개골창에 나둥그러지기도 했는데, 너의 손은 날렵했다 백발백중이었다 알고 보니 메뚜기가 너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온몸을 한 손에 모았고, 나는 온몸이 다 보이게 작동했다 그런 온몸에는 잡을 수 있는 손이 없다 온몸만이 있다 그런 까닭이다 그 너는 누구니! 묘덕妙德이다 너는 메뚜기와 함께 살았고 나는 객이었다 몸이 달랐다 아, 까불지 않으리라 이처럼 메뚜기 한 마릴 잡는 하찮은 일상 속에도 <현부玄府>는 자리하고 있다. <너는 메뚜기와 함께 살았고 나는 객이었다 몸이 달랐다 아, 까불지 않으리라>고 쓰고 있는 마지막 대목이 중요하다. 한 몸이 되는 순간 속의 그 적막이 곧 <현부玄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아, 까불지 않으리라>. <나>를 다 내주어야 하리라. 어쨌건 <현부玄府>는 이렇게 내게 왔다. 이런 나의 언술이 억지로 굴절시킨 하나의 궤변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주는 감동의 전율로 새겨진 문신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 한 독서에서 나는 그것을 확인받은 바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십삼경十三經언어가 지닌 축적된 묵계의 마법>을 이루는 궁극이든 또다른 어떤 세계이든 나는 관여치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걸 시를 하는 동안 조금씩 터득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언어는 인간이 발명한 최대의 저의 저주요, 지고의 행복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인간의 언어생성이 고도화되는 작업은 바로 그 욕심의 충족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다. 언어가 추상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심볼리즘 속에 보다 많은 의미체계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진전과 더불어 언어의 추상성과 함축성은 그 약속된 규칙들의 축적된 궤도 위에서 증대의 일로를 걷는다. 그 심볼리즘은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문장에 그치지도 않는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언어 배면의 현부玄府에까지 그 심볼리즘은 확대되어 나간다. - 화이트헤드, 김용옥 옮김, 「이성의 기능」 탈서(脫序) 부분, 통나무, 1999. 명쾌하다. 그러나 뛰어난 이 역자가 주장한 대로 <창진적 요소로서의 자기 규율>에 의해 논리화한 이런 이성적인 글만으로는 <감동의 전율>이 주는 <문신>을 새길 수는 없다. 생동하는 <몸>으로 현장에 다가가야 한다. 거기 <있어야> 한다. 차라리 손에 닿는 대로 따라가 본 한 젊은 조각가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스케치가 훨씬 신선하다. <현부玄府>를 드나들고 있음이 보인다. 365일 유령과 함께. 한 번 이렇게 살다 보면 유령이 어느덧 많은 것을 일러 주기에 이른다. 실체 없이 떠도는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면서 이곳 저곳에서, 이 순간 저 순간에서 이 문 저문을 열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로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면서. 그러나 또 변신……그렇게 틈과 틈 사이는 벌어지고, 또 그렇게해서 틈과 틈 사이의 이어짐-잘/aht 볼 수 있는 그 고무줄-이 마침내 보인다. -정서영, 「스케치」, <현대문학>, 1999. 2. 사물들과 사물들, 그리고 화자들은 이렇게 서로 내통하고 있다. 이른바 <현기玄機>에서 <현기玄機>로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때로는 그 이어짐이 팽팽한 탄력으로 긴장을 계속할 때도 있다. 예술가(시인)들이란 이 <틈>에서 <자유自遊>(정효구, ꡔ한국 현대시와 자연탐구ꡕ, 새미, 1998.)하고 있는 자들이다. <틈>, 그 <경계>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몰입하는 자들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경계를 실감하고 있는 자들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상황에서 시달렸다. 그렇다. 이 상황이다. 이 상황에 시달리면서 나는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의 표제도 고심 끝에 「현부玄府를 드나들며」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드나들며>라는 말 속에는 상주가 허락되지 않는 비극이 있다. 어쩌니 저쩌니 해 보았자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다만 그 순간의 길고 짧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이런 시를 쓴 적이 있었다.)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쿨과 칡순들과 한 그루 목백일홍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 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이 없었다 들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미수에 그쳤다 - 「미수(未遂)·알6」, ꡔ알시(詩)ꡕ, 세계사, 1997. 그 때의 아득했던 소외와 단절을 잊지 못한다. 그간 살아오면서 거듭 당면했던 어떤 현실적인 소외와 단절보다도 깊은 상처로 그것은 남아 있다. <현부玄府>까지는 다가갔으나(거기에 이르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과장을 하자면 명부冥府의 고통이 있었다 할 수 있다.) 나는 상주를 허락받지 못했다. 어디 이 경우뿐이었으랴. 그래서 <드나들며>이다. 또 그러다 보니 조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되기는 했다. 조금은 침착해졌다. 요즈음엔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해 본다. 이미 서로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어떤 하찮은 내 지적 순치가, 혹은 형이상학적 중독이, 그 우월성이 스스로 그걸 거부하는 것이라는. 길들여짐이 가장 무섭다. 우리를 한없이 주눅들게 한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 <자연自然!> 이미 그 속에 십삼경의 판간들이 길로 쌓여 있다. |
2. 몸의 말 - 화자 우월성에 대하여 또 우愚를 범했다. 살아가는 시간 속의 일들이라는 것이 하찮은 욕망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의 이어짐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야 하지만 바로 그것을 또 잊고 있었다. 똑똑한 또 하나의 내가 따로 분리된 자리에서 나를 부리고자 했다. <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월코자 하는 또 하나의 나 속에 나는 여전히 갇혀 있었다. 그간의 내 공부(시집 <몸시>, 세계사, 1994.)가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우월코자 하는 거만한 또 하나의 <나>를 <몸>은 제 몸의 황폐함으로 마른 풀잎들만 굴러다니는 메마른 들판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나는 그렇게 버려졌다. 그것은 가해도, 자해도 아닌 또 하나의 실상이었다. 순식간에 무섭게 화농된 자리를 칼로 째고 고름들을 긁어내야 했다. 열흘이 넘게 나는 병원 침대에 버려져 있어야만 했다. 아프다는 말의 실체를 다시금 깨달았다. 생체험生體驗,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을 <몸>은 그렇게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 내 부끄러운 시간이 거기 그렇게 봉인되었다. 하찮은 내 욕망들, 이것 때문에 나는 흔한 말로 나를, 내 몸을 그토록 혹사했던 거다. 지난해 시월에서 십이월까지가 특히 그랬다. 나는 앞서 가고 싶었다. 칭송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든 길이었다. <가장 우리에게 감동을 주거나 새로움, 놀라움을 주는 것들은 사실 이미 내면에 형성되어 있었던 불가시의 고전들이다. 감동이란 이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 공간과 시간을 구체화하는 상태, 그런 본질의 것이니까.>라고 타르코프스키의 일기 <시간 속의 시간>을 읽었을 때 내 독서 노트에 그렇게 적어 놓고서도 나는 그러하였다. 또는 「몸시」를 한참 생각하고 있었던 그 무렵(1993년)의 내 노트엔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장황한 내용이 옮겨져 있기도 했다. 우리는 사유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유 역시 아마도 하나의 상자를 쌓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일종의 기술, 하나의 <손작업>이다. 는 말 그대로 우리 손의 힘과 기술을 뜻한다. 손이란 독특한 것이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손은 우리 몸의 유기체 중 한 부분이다. 그러나 손의 본질은 결코 쥘 수 있는 기관으로 정확하게 한정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유인원들 역시 쥘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은 모든 쥘 수 있는 기관, 즉 발, 발톱, 이빨과는 완전히 다르다. 양자는 본질의 심연에 의해 구별된다. 말할 수 있는 존재, 즉 생각할 수 있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으며, 손으로 하는 작업을 솜씨 있게 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손의 기술은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풍부하다. 손은 쥐거나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밀거나 당길 수 있다. 손은 어디에 닿거나 쭉 뻗고, 받으며 환영한다. 손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손은 그 자신을 연장하며, 타인의 손이 나타내는 환대를 받는다. 손은 움켜쥔다. 손은 설계하고 신호를 나타낸다. 이는 아마도 인간 자신이 하나의 기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손을 하나로 포개는 것은, 사람을 커다란 하나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제스처다. 손은 이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참다운 손작업이다. 통상 손작업으로 알려져 있으나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여기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손의 제스처는 언어의 모든 곳에 편재하고 있다. 그 제스처가 가장 완벽하고 순수한 경우에는 정확히 사람이 침묵으로써 말할 때이다. 그리고 말할 때만 사람은 생각한다. 형이상학이 지금까지 믿어 왔듯이 인간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의 모든 손놀림은 일관되게 사유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손의 모든 행동거지는 그러한 요소 속에서만 처신하다. 손이 하는 모든 일은 사유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사유가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사유 자체는 인간의 가장 단순한, 그러나 그 때문에 가장 힘든 수작업이다. 정화열 교수의 「신체화/탈신체화」를 분석한 김흥우 교수의 글을 읽으며 <신체화된 자유>에 관련된 주석 부분을 흥분에 들떠 그대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이 밖에도 그 무렵 김형효 교수의 이율곡에 관한 논의, 김용옥 교수의 <몸>을 <기氣의 집합>으로 보는 견해 등은 나의 「몸시」를 괴롭혔고 황홀케 했으며, 내 「몸시」를 직접 다룬 김상환 교수의 지적도 역시 그러했었다. 나의 <몸공부>가 어지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최근 나의 <몸>이라는 것이 그토록 지독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나의 존재론이라는 것이 그 꼴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 상처의 자리에서, 너무도 선명한 그 봉인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데카르트의 애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극복해야 한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내 시를 포함한 우리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자성이 이루어지기를 스스로 촉구하고 있다. 우리 현대시는 아직도 <화자 우월성>의 화법과 사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분리된 또 하나의 <우월한 나> 때문이다. 대상, 그것이 사물이 되었건 상황 또는 일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우리 시의 화자들은 늘 어리석게도 그 밖에 자리하고 있다. 아니,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다. 정현종이 어느 시에선가 말하였듯 <전망>이라는 말을 발음할 줄은 알지만 높은 나무 위에 직접 올라가 펼쳐진 너른 들판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게 훨씬 나은데>도 그런다. 이른바 백면서생의 꼴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몰골이 그 꼴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소월)와 같은 낭만적 투사와 <거리>가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이미지들을 날조해 내고 있다. 이른바 오규원이 틈틈이 내세우고 있는 <날 것의 이미지>가 크게 외면되어 있다. 상상력에 의해 발견되는 대상과의 동일성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다. 대상에의 가담이 결여된 상상력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그러한 <동일성>이란 공소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투명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실제 나무가 되었건, 강물이 되었건, 마른 풀잎들과 풀잎들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 되었건 그들은 그들만의 생동하는 <말>을 가지고 있다. 장자는 그걸 일러 우주의 <천뢰天籟>(하늘피리)라 했던가. 인간의 지시적 언어란 고정된 관념일 따름이다. 관념의 언어만으로는 또 하나의 관념을 가설할 수밖에 없다. 늘 <몸>과 의논해야 한다. 혹 마음이 서둘러 앞서 가고자 지시의 화살표를 긋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결국 추한 욕망이 되고 만다. <몸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사물들의 몸짓을 읽을 수 있을 때, 생명들의 행간을 읽어갈 때 시의 행간 또한 빠듯한 탄력과 넉넉한 평화의, 자유의 충만으로 자리하게 된다. <똑똑한 나>를 앞세우는 <화자 우월성>에서 말끔하게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 <경계 지우기>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이어가 보자. |
박상륭의 소설과 시
그러면, 내가 저 소리에 의해 병들고, 그 소리의 번열에 주리틀려지며, 소리의 오한에 뼈가 얼고 있는 중에 저 새하얗게 나는 천의 비둘기들은 삼월도 도화촌에 에인 바람 드닌 날 날라라리 리루 루러 러르르흐 흩어지는 는는, 는느 느등 등드드등 등드 드드 도동동 동도도화이파리 붉은 도화이파리, 이파리로 흩날려 하늘을 덮고, 덮어 날을 가리고, 가려 날도 저문데, 저문 해 삼동 눈도 많은 강마을, 밤주에 물에 빠져 죽은 사내, 사내 떠흐르는 강흐름, 흐름을 따라 중몰이의 소용돌이, 잦은몰이의 회오리, 휘몰아치는 휘몰이, 휘몰려 스러진 사내, 사내 허기 남긴 한 알맹이의 흰 소금 흰 소금 녹아져서, 서러히 봄꽃 질 때쯤이나 돼설랑가, 돼설랑가 모르지, ......계면하고 있음의 비통함, 계면하고 있음의 고통스러움, 계면하고 있음의 덧없음이, 그리하여 덧없음으로 끝나고, 한바탕 뒤집혔던 저승이 다시 소롯이 닫겨 버렸다.
놀랍지 않은가.
인용한 위의 대목은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서 따온 것이다.
김현도 이 대목을 놓고 박상륭의 문장이 지니는 그 완벽한 구조에 대하여 놀라움,
놀라움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감동의 속살이 있다. 존재의 경련이 피워 내는 아름다운 열꽃이 있다.
그 향기를 따라 조심조심 걷다 보면 우리의 보행은 놀라울 정도로 빨라지고 또는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되기도 하다가 그런다.
춤이 된다.
가락이 있다.
그러다가 고요로 찾아드는 적막의 집 한 채를 속에 간직하게 된다. 뜨락이 정갈한-.
좋은 글은 장르를 초월한다.
포에지가 있다.
위의 대목은 소설의 한 대목이면서 시다.
소설의 주인공이 가야금 소리에 빨려드는 장면인데,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 다시 태어나는 <몸>이 있다.
그게 시의 궁극이지 않는가.
놀라운 것은 흥에 겨운 의성어를 도출해 내는 앞 음절과 뒷 음절의 연결고리,
<의미소>와 <음소>의 넘나들기가 사뭇 자유롭다.
<도동동 동도>의 끝 음절인 <도>가 그 다음 <도화이파리>의 첫 음절이 되고 있음이 그 한 예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내의 <허기>가 <한 알맹이의 흰 소금>으로 객관화하는 그 자리바꿈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미지가 있다. 그것이 다시 가야금 소리와 동일화하는 복합구조의 비유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새하얗게 나는 천의 비둘기들>, <도화이파리>, <물에 빠져 죽은 사내의 허기>,
<한 알맹이의 흰 소금>으로 굴신자재하는 가야금 소리-.
단일 이미지가 아닌 <군群>으로서의 이미지가 이 대목에는 충일하고 있다.
그리고 끝 부분, <한바탕 뒤집혔던 저승이 다시 소롯이 닫겨 버렸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다시 만난다.
그 짙은 적막의 흐름과 함께. 결국 <허무>다.
또 있다. 놀라움이-.
이 대목은 종결어미의 어조로 된 부분이 꼭 한 군데 있으나(<돼설랑가 모르지,> 그것마저 쉼표로 풀어버린),
쉼표까지 합해서 모두 338자로 된 한 문장이다.
그러면서도 단락의 전환이 정확하고 가락이 분명하다.
언젠가 판소리 형식으로 시극을 한번 써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말의 운용이 이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용기를 내어도 될 것 같다.
새들
우리 시에서 가장 빈도 높게, 그리고 깊게 하나의 상징적인 체계를 획득하고 있는 사물,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라고 생각된다.
기록된 문헌상의 첫 시가로 꼽히는 옛 시가 「황조가」에서 박남수의 「새」, 또는 「새의 암장」에 이르기까지
그 <새들>의 대표적인 속성인 비상의 이미지는 우리 시를 동사화하는 여러 모습의 움직임들로
우리 곁을 날아다니고 있거나 우리 시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의 한 무늬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새가 우리 시의 하늘을 깊게 날고 있다.
혹은 이 겨울에도 맨발로 우리 곁을 종종거리고 있음을 만난다.
장석남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 바로 그것이다.
1.
찌르레기떼가 왔다/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검은 새떼들//찌르레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찌르레기떼 속에/환한 봉분이 하나보인다
2.
누군가 찌르레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봄 햇빛 너무 뻑뻑해//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오랜 세월이 지난 후/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찌르레기떼가 가고 마음엔 늘/누군가 쌀을 안친다/아무도 없는데/아궁이 앞이 환하다
<망명>이라는 말이 지닌 농도로 보아 그 표제가 좀 크고 그 때문에 이미지의 누수현상을 빚고는 있지만,
그것은 지금의 척박한 삶으로부터의 적극적인 초월을 현실적인 행위가 있는 말로 자리바꿈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 힘을 새떼들, 찌르레기떼의 움을 속에서 그는 훔쳐 내고 있다.
이 시에서는 물론 그 울음소리가 <쌀 씻어 안치는 소리>, 곧 배고픔(결핍)에 충만을 주는 음성상징으로 처리되어
따뜻하고 밝은 극복의 힘(아무도 없는데/아궁이 앞이 환하다)이 되고 있지만, 이 또한 <여기>에서 <저기>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새>의 원초적인 비상의 이미지에 깊게 닿아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찌르레기떼의 울음 속에서 <환한 봉분>을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주검의 봉분마저 그에겐 <환한> 밝음의 그것이다.
적극적인 만남, 자연과의 화응이 거기에 있다.
모든 상처와 생명의 단절마저 수용하는, 그래서 시는 혁명이다. 시인은 프롤레타리아다.
시는 <환한 봉분>이다.
나도 그렇게 쓴 적이 있다.
<성자 거지 프란치스코가/새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그가 살아 죽어서, 죽어서 살아!/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나도 그럴 수 있을까/살아 죽어서, 죽어서 살아!/뜨락의 작은 나무 하나도 나뭇가지도/한 마리 새를/평안히 앉힐 수 있는/몸으로, 열심히 몸으로!/움직이고 있다>
-「몸시.52-새가 되는 길」부분, 「몸시」, 세계사, 1994.
<새들은 하늘과 땅을 왕래한다 저승의 어머니께오서 다녀가신 날이면 우리 집 새벽 마당에 새들의 발자국이 찍혀져 있다 새들은 어디나 건너다닌다...... 하느님께오선 풀잎들 정갈하게 자라고 풀씨들 까맣게 익는 나라에만 새들을 두신다>
- 「새.2」부분,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
<새>의 2차적인 상징은 극복과 초월을 통한 적극적인 화응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데려가 주는 힘이며 마침내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무속에서 흔히 만나기도 한다.
높은 솟대 위에 나무로 깎아 앉힌 새들이 그것이다.
우리 시는 비극적인 정황과 인식 속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새들>의 그것을 통해
<원초적인 정기가 조금도 부패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최초의 장소와 그 순간>을 꿈꾼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Unheimlich, 드러난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것마저 힘으로 바꾸어 <저기>로 가는 이행 속에 있다.
우리 시의 사상의 <무늬>는 절망의 편이 아니다.
<새들>의 날개짓이거나 그들이 척박한 땅 위에 찍는 발자국이다.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최근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썼다. 썼다라기보다는 <씌어졌다>라고 해야 더 가까운 표현이 될 것이다. 그만큼 이 시에는 시 자체로서의 자율성이 앞서고 있다. <감정의 유로>로 정의되는 낭만주의 시의 본질론과는 다른 생명의 작동 같은 것이 거기 있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시에도 <생태>라는 것이 있음을 나는 근간 적극 동의해오고 있다. 제 스스로 언어의 몸짓을 하는 시와 더불어 나는 이즈음의 내 삶을 이끌고 있다. 내 의지로서의 이른바 언어적 조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언제나 후행의 작업으로 왔다. 그런만큼 퇴고의 시간이 전에 없이 줄어들었다.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 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 ⌈봄비⌋ 전문, 『시인세계』, 2003. 봄. 우이산록에 삼십여 년 가깝게 살고 있는 나는 어지간히 산의 냄새를 맡을 줄 알게도 되었지만, 자연을 느끼는 내 수준은 봄철이면 환경운동가들이 <지금 새들이 알을 품고 있는 중이오니 조용히 하세요>라고 작은 팻말들을 나뭇가지에 내어 걸은 것을 보고는 그저 발자국 소리를 스스로 죽이는 경외감을 가지는 그 정도였다. 그런데 요즈음엔 조금 다른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누구의 말대로 이순의 나이가 되었으니 가는귀가 먹어 이젠 들리는 소리보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더 잘 듣게 된 것일까. 어쨌건 그 발견에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나를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삼십여년 세월로서는 사뭇 늦깎이이다. 이 시를 쓴 지난 3월 하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을 오르다가 푸른 기가 감도는 나뭇가지들에 눈이 갔다. 그런데 나뭇가지들 끝에 물방울들이 조롱조롱 맺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밤 내린 이슬들의 결로結露현상이 아닌가 했더니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다. 시간으로 보거나 물방울의 크기로 보거나 그렇게 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 뽑아 올린 것이었다. 용쓰듯. 의아해하고 있는 내게 지나가던 노인이 봄이 와서 한참 가물다가 봄비가 내릴 징후가 보이면 나무들이 그런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온몸에 찌르르르 전율이 왔다. 식물학적으로 확인을 해 보지는 않았으나 수긍이 감동과 함께 온몸으로 왔다. 생체를 지닌 것들의 관능적인 반응이 모두 저러하지 않은가. <물>로 나타나지 않던가. 절대적인 사랑은 스스로 제 몸을 적시는 실체의 것이 아니던가. 절대적 교감의 실물반응, 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감히 <화엄동체>라는 말에까지 의식의 더듬이가 가서 닿았다. 나무들도 예외가 아니라니! 눈을 돌려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지금 새들이 알을 품고 있는 중이오니 조용히 하세요>라 쓰인 그 작은 팻말들이 나무들에 새로 걸려 있었다. 새들도 나무들과 봄비의 그 <교감>을 생명으로 실체화하는 절대의 시간과 공간 속에 스스로를 고요히 가두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랬던 것처럼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나는 <상징에는 실체가 있다!> 또 한 번 외쳤다. 자연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우주적 화응이 있다. 나무들과 새들에게도 무슨 영성이 있는 것일까. 저러한 모습으로 보아 그들에겐 몸이 영성이자 영성이 몸이다. 우리 사람들처럼 따로따로에 늘 빠져 시달리지 않는 그들에게서 나는 초월의 궁극, 그 실체를 보았던 셈이다. 뛰도록 기뻤다.(호들갑 떨지 말자. 내 안을 흐르는 그간의 번뇌와 갈등, 마음공부의 기류가 막히지 않도록 몸을 잘 간수하자. 내 <슬픔의 중량>이 좀더 나가야 하리라.) 얼마 전에도 나는 <이 세상에 시적인 기골氣骨, 비위脾胃, 폐장肺腸을 갖춘 총명한 사람 가운데, 어떤 시를 먼저 숙독하느라 자신의 심금을 묶어 두고 그런 다음 시를 짓는 자가 어디 있으랴!>라는 고전시화의 한 대목을 인용한 바가 있다. 이 말은 기존의 이론이나 시를 하나의 규범으로 삼아 거기 갇혀 버린 교주고슬膠柱鼓瑟의 답답함을 비판하고 경계한 것이겠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시의 성령으로서의 <몸>을 적극 내세운 말이다. 그러나 저간의 우리 시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이 같은 본체는 뒷전에 밀어 두고 소위 지적인 방법을 앞세우거나 윤리적 주장을 위한 도구로서 시를 전락시켜 왔음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또한 화자의 우월적 포즈에 의한 관념의 화법으로 무엇보다 오염되지 않은 시의 생체를 매장시키고 있는 시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물론 저러함들도 일면 시가 담아야 할 또 다른 모습들이며 시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저 한낱 도구로서 시를 수용할 때 시는 정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무들이 제 몸의 물기를 용쓰듯 뽑아 올려 봄비를 마중하듯, 봄비가 젖은 제 몸을 다시 한 번 적시듯 화응하는 시의 우주적인 울림, 그게 시의 본체요 자유가 아닌가. 저러함은 <만들기>가 아니라 생체를 통한 만남으로 획득되는 <발견>이다.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시의 생태에 온몸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오늘도 산으로 간다. <시경>이자 <산경>을 읽으러 나는 거기 간다. 그러나 놀러 가야 한다. 가서 함께 <잘 노는 것>이 그것들을 잘 읽어 내는, 한 몸이 되는 지름길이다. 어제는 내가 오래 전부터 정해 놓고 놀러 가는 소나무 숲에서 장자가 말한 이른바 송뢰松籟소리를 듣다가 바람이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들이 열어 놓은 <구멍>으로 바람이 지나가느라고 소리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피리가 왜 소리를 내는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비로소 요해了解하였다. 아하, 우주는 큰 <구멍>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참 소나무를 바라보며 무심코 고장난 내 무릎 관절을 쓰다듬다가 소나무는 무릎 관절이 없다는 것도 비로소 알았다. 무릎 관절이 없어 줄창 한평생 제자리에만 서 있는 소나무는 고장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무릎 관절이 있다고 잘난 체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쏘다니고 그래 보았댔자 말이 굴신자재屈伸自在 예저기 피하고 피해다닌 꼴이 아닌가. 그게 내가 아닌가. 부끄러웠다. 쏘다닌 만큼 때는 때대로 묻히고, 제자리를 제대로 지켰다 할 수도 없고 퇴화해 버린 나의 남루. 결국은 나무보다 수명도 짧은 내 허무를 아프게 읽었다.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나는 오늘도 숲으로 간다. |
멕시코엘 다녀왔다. 칸쿤, 카리브해의 옥빛 물결 소리와 희디흰 모래벌판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 원시적 육체성에 아직도 갇혀 있다. 그 곳의 토속주 데낄라를 소금으로만 안주하여 열흘 내내 마신 탓도 있겠으나 어찌 된 일인지 아직도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리마다 강렬하게 피어나고 있는 따바친(나무 이름)의 붉은 꽃잎을 머리에 꽂은 가브리엘라의 크고 착한 눈동자도 자꾸 어른거린다. 그러나 나의 이 숙취는 저들 풍광들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 나의 내면에는 멕시코가 지니고 있는 세 가지의 거대한 은유들이 다른 어느 것도 틈입할 수 없을 정도로 실체 그 자체로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숙취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시티, 구아달라하라 등 내가 가 본 도시에는 대성당들이 운집해 있었다. 지금도 추기경이 세 분이나 있을 정도로 가톨릭은 멕시코의 울타리가 되고 있었는데 그 가톨릭의 대성당들이 멕시코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이것이 그 거대한 은유들 중의 첫 번째요, 치첸이샤의 피라미드 숲을 비롯하여 해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등 180여 개가 넘는 아득한 상승의 제단들이 그 은유들 중의 두 번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르스코의 <불꽃 인간>이 불꽃 그대로 뜨겁게, 그리고 팽팽한 탄력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 거대한 은유들 중의 세 번째다. 이 오르스코의 <불꽃 인간>은 거대한 벽화로 그 곳 역사 깊은 문화부 건물의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이것들 중 문제는 저 대성당들이다. 그 대성당들이 <나쁜 은유>로 나를 누르고 있다. 스페인이 그렇게 했듯이, 나의 또다른 멕시코가 나의 내면에서 피에 젖고 있다. 대성당들은 침탈의 도구였음을 나는 확인했다. 저 아득한 상승의 제단들을 지워 버리기 위해, 멕시코의 정신, 그 밑그림을 소멸시키기 위해 이 <나쁜 은유>의 대성당들이 지어졌다고 했다. <은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낱 수사법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책무요, 시의 책무 그 자체이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삶과 시의 궁극은 만남과 화해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시는 표현의 형식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삶으로 이끄는,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승화시키는 정신의 은유구조를 본질로 하고 있다. 사랑이 곧 그 자체이다. 그러나 저 대성당들은 침탈의 수단이요 도구였다고 하니 어찌 <좋은 은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은유의 정신 그 자체인 종교가 털 달린 역사의 그 큰 욕망의 <아가리>와 야합을 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함에 대한 저항이 곧 오르스코의 <불꽃 인간>이었다. 지금 우리의 삶과 시는 어떤가. 저 <나쁜 은유>의 대성당들이 또 다른 형태로 우리를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만남과 화해를 겉으로만 내세우는 교활함, 거짓됨들이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창궐하고 있지는 않는가. 누구나 시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올해가 <문학의 해>라니 놀랍다. 이 일이 이런 위기를 절감한 참된 깨달음에서 정해진 일이라면 몰라도 어째 좀 찜찜하다. 이 또한 <나쁜 은유>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 일이 저 오르스코의 <불꽃 인간>과 같은 <나쁜 은유>에 대한 저항으로 있어지지 않는 한 그렇다는 이야기다. 오늘의 우리 문학, 오늘의 우리 시는 장구나 치고 북이나 치는 그런 흥겨움만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 문학, 오늘의 우리 시는 그 겉치레들을 벗겨 내야 하는, 어떤 의미에서 본질 회귀의 자리에 놓여 있다. 뜨겁고 매운 에너지를 되찾아야 할 자리에 놓여 있다. 땅에 떨어진 우리들의 삶을 상승시키는 저 피라미드의 숲, 시의 제단을 쌓아 가야만 할 그런 자리에 지금 우리는 있다. 시는 결단코 도구가 아니다. <나쁜 은유>가 될 수 없다.(1996) |
봉인된 시간의 벽에
시의 사닥다리를 걸쳐 놓고
그 아슬한 꼭대기에 서서
한 조각 별밭 하늘 쏟아질 구멍을 뚫기 위해
옹이 박힌 손으로 내리치는
그대의 망치 소리
지금도 들린다
납뚜껑 같은 하늘을 깨뜨리고
부자유의 이마에
징 박는 노여움
예술가는 그 혼을 위기에 내던져야 한다고
한 마디 벼락의 말
세계의 저쪽에서
탄환처럼 날아와 내 심장에 박힌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생각함>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가림 시인의 <봉인된 시간 속에서>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가림 시집, <순간의 거울>, 창작과 비평사, 1995. 2.). 우편으로 보내 온 시집 속의 이 시를 읽은 날,
우연찮게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보았고, 한 권의 책을 받았다.
때아닌 진눈깨비 속을 파카를 뒤집어쓰고 찾아 온 남진우 시인이 직접 건네주고 돌아간 그의 평론집
<신성한 숲>(민음사, 1995. 2.)이 그것이었다.
그 책의 표지에도 타르코프스키의 또다른 영화 <향수>의 한 장면이 흑백으로 자리하고 있어 이채로웠다.
그는 또한 이 책의 권두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묵시록적 시대 글쓰기>에서 타르코프스키를
적극적으로 원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어가다가 <봉인된 시간>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책이 번역으로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곧 서사로 달려가 그 책을 내 품에 넣었다. 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렇게 하나의 사태,
하나의 텍스트가 그것도 다양한 모습으로 한꺼번에 나를 압도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 날은 그렇게 계속 진눈깨비가 내렸다. 나도 하루 종일 비극적으로 질척거렸다.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가 선택한 저 철저한 침묵의 서약,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너는 말없는 철갑상어 같다.> 아, 그렇게 나의 말들은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자정에 이르러서는 어떤 말 하나도 기억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무서움에 시달렸다.
타르코프스키는 죽은 나무에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는 소년을 하나의 상징으로, 신화로 설정해 두고 있었지만
그건 이미 예정된 패배의 그것이었으며,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상징의 구조여서
이 영화가 지니는 전체의 깊이와 무게에도 걸맞지 않는 낭만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오는 진흙길을 낡은 자전거를 타고 비틀거리며 찾아간 주인공 알렉산더와 마리아 사이의 관능이
한 구원의 포즈로서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던 것은 웬일일까.
아무튼 지금 이 시대에 말이란 무엇이며 시란 무엇인가.
<봉인된 시간>. 과연 시는 그 시간의 <봉인>을 떼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인가.
이미 그것은 이 시대에 있어 어리석은 질문에 지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해갈 수 없다.
아직도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거기서 정답을 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충동의 환희와
매혹 같은 것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일 터인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힘인가, 일순의 놀이인가. 이 시대에 시가 행위해야 할 적극적인 선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가림 시인이 인용하고 있는 대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가는 그 혼을 위기에 내던져야 한다>는 그것인가.
이 같은 적극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면서도 또한 적극적인 소련의 영화감독-<희생>을 마지막 작품으로
1986년 세상을 떠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있어 하나의 신선한 <매혹> 그 자체였다.
말이 지니는 원초의 자리에 적어도 내 시선을 돌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의 내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빠른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을 제작하면서 떠올렸다는 푸쉬킨의 시 그 몇 대목과 함께.
하늘의 진동 소리 들리고,
별을 헤치며 날아가는 천사,
바닷속 깊은 곳의 거대한 움직임, 땅 끝까지 늘어진 넝쿨의 손길.
그는 내 목 깊숙한 곳에서
입을 벌려 혀를 뽑는다
교만하고 죄 많고 불안한 혀를,
그리고 놀란 입술 사이로
그의 피투성이 손은
현명한 가시, 뱀을 쑤셔 박는다.
내 가슴은 그의 칼에 산산조각 나고
내 팔딱이는 심장은
그가 앗아가 버리고, 구멍 뚫린 상처에 그는
불타는 석탄 덩어리를 밀어 넣는다.
비극적인 영혼들은 또다른 비극적인 영혼들을 끌어당긴다.
그것이 아무리 먼 곳에 있거나 외압적인 부당한 힘에 억눌려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그 곁에 함께
자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운명적인 힘의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
비극적 진실이란 바로 이와 같은 曳引, 또는 牽引 관계의 그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히 비극을 비극으로 확인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내 집엘 다녀갔다.
『현대시학』의 기획사업인 <인접 예술과의 만남> 그 두 번째 자리가 <스페인, 중남미 음유시에의 초대-
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란 이름으로 마련되고 있다.
물론 그 자리에선 네루다의 시도 불려지고 낭송되겠지만 음유시가 케케묵은 미분화시대의
무슨 원시적 유물이 아니라 엄연한 현대적 장르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거기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네루다가 누군가. 우리에게도 친숙한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현대시인이 아닌가.
음유시가 왜 이처럼 현대적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지닐 수 있는가.
오늘의 문자문학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또다른 향유에의 갈망이 오늘의 삶 속에서 이미 싹트고 있으며,
오늘의 시가 본질적으로 탈환해야 할 요소가 거기 있을 수 있겠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기타가 시에게 말한다
내가 널 종이에서 꺼내 줄게
현의 부드러운 바람이
쇠사슬을 부수면
넌 더 이상
포로가 되지 않을 거야
두 손이 묶여서
흰 초원 위에 버려져
말을 잃어버린...
시야 깨어나라
아침을 열어라
소리의 동지인 내가
널 이렇게 일으키고 있잖니
- ⌈기타가 시에게⌋ 전문
위 시는 니카라구아 음유시인 살바도르 카드데날의 시다(김홍근 옮김).
위의 시가 말하고 있듯 오늘의 시는 적잖이 도구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로서의 자율성을 잃고 있다는 뜻으로 형태적 산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문적 삶의 와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시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이 말은 문자가 없던 시대, 이른바 구비문학의 시대로 퇴행하자는 주장을 전제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 시대는 노래와 시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몸시>의 시대일 수 있었고,
누구나 함께 시를 향유할 수 있는 가장 행복했던 문학의 공존기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원시적 미분화의 상태일 따름이다.
아기의 눈동자가 순수 그 자체이며 아기의 말이 엉뚱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시는 아니듯이 말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제해 놓고 보면 위의 말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문자문학, 문자시로서 오늘의 시는 바로 그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원형질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지나치게 기대 온 반편(모자람, 바보의 뜻도 포함해서)의 양식이었다는 혐의가 짙다고 보지는 않는가.
너무 읽기만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귀>를 위한 또 하나의 기능을
망각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소리! 소리가 없었다.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 현대시는 그간 이른바 말 만들기, 수사법,
이미지 만들기에만 줄곧 매달려 왔다.
그것만이 현대성이라는 생각으로 알맹이 없는 방법적 추구에만 함몰해 있었다.
가시적인 구조물이 모두라고 생각해 온 혐의가 짙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울림>이 없다는 뜻이다. <에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서정성의 상실을 뜻한다.
문자만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논리와 계산을 동반한다는 뜻이며,
소리로 다가간다는 것은 리듬과 멜로디로 다가간다는 뜻이다.
그만큼 생체적이어서 에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에코는 본래 소리의 본질이다.
이 두 개의 세계를 아우르는 자리에 시가 있다. 그게 시의 자율성이다.
음유시는 음유시 대로의 독립된 장르가 되어야 하겠지만 거기엔 바로 소리! 소리가 있다.
나는 최근 한 외국문학자가 번역한 독일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 1929~)의 연극 텍스트 <햄릿 기계>의 한 대목과 김언희의 첫 시집 <트렁크>(세계사, 1995. 9. 1.) 속의 시편들을 거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읽었다. 우선 섬뜩했다. 이건 정확한 내 독서 체험인데 강력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 책들은 그 책읽기의 자리에 어김없이 그의 형제가 될 만한 또 하나의 에너지, 또다른 글이나 책을 내밀한 예인의 통로를 열어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건 비교적 연대와 같은 것이었다. 전혀 내 의지의 작용과 관계지워지지 않은. 이번의 경우가 역시 또 그랬다. 확인한 바 없지만 하이너 뭘러와 김언희, 이 만남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엉뚱하다. 이른바 그의 등단에도 깊게 관여한 나로서 김언희의 시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지만 하이너 뭘러는 생면부지 최초의 만남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보라. 나는 어떤 분석이나 덧말이 없이 내 책읽기 속에서의 하이너 뭘러와 김언희의 만남을 그대로 다음에 인용하고자 한다. 사람과 글이 아니라 글과 글들이 서로를 드나드는 엉뚱한 길트기를, 그 비교적 연대를 은밀히 맛보시기 바란다. 다만 이승훈이 김언희의 시들을 해석하면서 <욕망하는 기계>(하이너 뮐러의 텍스트 제목이 <햄릿 기계>이다.)라는 말로 자본주의 속의 인간들을 정의하고 있었음에 유의하면서. 활씬 벗었어 배때기까지 열어젖혀 놓았어 닭전 골목 평상 위 관능의 닭살 오소소 돋아오른 갓 마흔 나의 누드 헤벌어진 배때기 속에 마늘 대신 쑥 대신 당신 당신을 집어넣고 통째 우겨넣고 끓는 기름의 고요 속으로 투신하고 싶어 자그르르 튀겨지고 싶어, 쉴새없이 가로젓던 대가릴랑 토막쳐 버렸어, 이리 와 당신, 이리 와 배때기째 벌려지는, 이 허기 속으로 - 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 1>, 전문. 오필리어 <합창/햄릿> 나는 오필리어. 강물도 붙잡지 않았던 여자. 교수대 올가미에 매달린 여자. 동맥을 절개한 여자. 약을 과다복용한 여자. 입술 위에는 눈 가스 스토브 안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여자. 어제 난 날 죽이는 일을 중단했다. 나는 혼자다. 내 젖가슴과 내 허벅지와 내 자궁만이 함께 할 뿐. 나는 내 구속의 도구들을 파괴한다. 의자를, 책상을, 침대를, 나는 내 고향이었던 도살의 무대를 부순다. 나는 문들을 부수어 연다. 바람이 그리고 세상의 비명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창문을 산산이 부순다. 나는 피 흐르는 손으로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침대 위에서, 책상 위에서, 의자 위에서, 그리고 바닥에서 나를 필요로 했던 남자들의 사진을 찢어 버린다. 나는 내 감옥에 불을 지른다. 나는 내 옷을 불 속에 던져 넣는다. 나는 내 심장이었던 시계를 내 가슴에서 꺼내 파묻는다. 나는 거리로 나간다. 내 피로 옷을 입고. - 하이너 뮐러, <햄릿 기계>부분. |
파고다 공원에 갔지 비오는 일요일 오후 늙은 색소폰 연주자가 온몸으로 두만강 푸른 물을 불어 대고 있었어 출렁출렁 모여든 사람들 그 푸른 물 속에 섞이고 있었지 두 손을 꼭 쥐고 나는 푸른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색소폰의 주둥이 그 깊은 샘을 바라보았지 백두산 천지처럼 움푹 패인 색소폰 속에서 하늘 한 자락 잘게 부수며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아아 두만강 푸른 물에 님 싣고 떠난 그 배는 아직도 오지 않아 아직도 먼 두만강 축축한 그 색소폰 소리에 나는 취해 늙은 연주자를 보고 있었네 은행나무 잎새들 노오랗게 하늘을 물들이고 가을비는 천천히 늙은 몸을 적시고 있었지 비는 그의 눈을 적시며 눈물처럼 아롱졌어 색소폰 소리 하염없을 듯 출렁이며 그 늙은 사내 오래도록 색소폰을 불었네 - 이대흠, ⌈두만강 푸른 물⌋ 전문 아주 젊은 시인에 속하지만 이대흠의 시가 눈에 뜨인다. 다른 자리에서도 나는 그의 시에는 리얼한 터치의 시들이 빠지기 쉬운 조악한 산문성을 뛰어넘는 굵직한 내면적 울림, 뼈대가 있는 울음이 있다고 쓴 바 있지만, 위의 시 또한 그러하다. 그러한 그의 시들 가운데서(내가 읽은 그의 시는 20여 편쯤 된다. 그는 아직 시집이 없다.) 위의 시가 꼭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를 특별히 다시 읽고자 하는 것은 위의 시야말로 제대로 된 <쉬운 시>라는 생각에서이다. 위의 시에는 눈물겨운 끌어당김이 있다. 슬픈 해학이 있다. 소외된 사람들끼리 서로 드나드는, 그들만의 축축한 화해의 언어가 있다. 이 언어는 어떠한 암호들도 풀어 낼 수 있는 완벽한 결승結繩의 기호들마저 곳곳에 은밀히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런 그들만의 공간이 있다. 한 번 둘러본 사람들에겐 이내 감지되겠지만 위의 시에 나오는 <파고다 공원>이 바로 그런 곳이라 할 수 있다. <두만강 푸른 물>을 온몸으로 불고 있는 늙은 색소폰 연주자의 낡고 한없이 무너져 보이는 그 과장된 모습에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피에로의 그것을 느끼지만, 그 앞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왜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가. <쉬운 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 대상에, 또는 그 공간에 함께 참여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람들이 이미 겪은 바 있는 체험의 공동체적 환기와(추억의 집단화?) 그를 표출하는 시어들 사이의 혈연적 연대 형성, 그 띠 만들기, 혹은 자연스러운 만남, 그런 동일성의 생성에 있을 터이다. 그렇게 될 때 <두만강 푸른 물>은 이미 한낱 유행가의 가사가 아니다. 특히 시어들 사이의 혈연적 연대 형성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읽어 낼 수 있을 때 시의 맛을 제대로 아는 독자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위의 시에 나오는 늙은 색소폰 연주자의 곡목 자체가 <두만강 푸른 물>이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은 <소리>가 <물>로 변용되는 비논리마저 아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놀라움을 빚어 낸다. 그런 몰입, 그런 황홀, 그런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 색소폰 소리 앞에 사람들이 <출렁출렁> 모여들고(모여드는 모습까지 물의 모습이 지닌 의태어로 수식하고 있음이 놀랍다.), <그 푸른 물 속에 섞이고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에 나오는 단어들이 모두 물에 젖어 있거나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이다. 시적 초월의 아름다운 결승結繩, 그 질서가 거기 있다. 하나하나 짚어 보자. <비오는>, <두만강>, <푸른 물>, <출렁출렁>, <깊은 샘>, <천지>, <맑은 물>, <흘러나오고>, <배>, <축축한>, <물들이고>, <가을비>, <적시고>, <비>, <눈물>,.......모두가 물이다. 결국 <쉬운 시>는 시라는 형식마저 지워 버린다. <물>이 되고 있다. <쉬운 시>를 쓰기란 쉽지 않다. |
산시刪詩>라는 말이 있다. 좋은 시를 골라 제자리에 앉혀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일을 뜻하는 말이리라. 아마도 이 말은 그러한 일을 최초로 해 냈던 것으로 보이는 저 공부자孔夫子의 『시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공부자께서 당시 전래되던 시 3,000여 편 가운데서 시 삼백을 간추려 이룩한 것이 바로 『시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시경』. <경經>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국시대 말엽부터라고 하지만, 이 만세불역萬世不易의 상도常道를 뜻하는 경전을 두고도 오랜 역사를 통해 논란이 거듭되어 왔던 것을 기록을 통해 접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논어』의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위정편爲政篇)와 <放鄭聲 達佞人 鄭聲淫 佞人殆>(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야기되었다고 보이는 오직 <사무사>, 사특함이 없는 순수 그 자체일 따름이냐, 아니면 <음시淫詩> 또한 거기 상당수 혼효되어 있다는 주장 등 단순하지가 않다.
공부자의 『시경』이 저러하거늘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랴. 시를 고르고 제자리에 앉히는 일이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임을 실감할 때가 적지 않다. 더군다나 요즈음 우리 주변엔 시가 넘치고 있다. 실제로는 자본주의, 그 욕망의 구조 속에서 날로 시가 지워져 가고 있는 게 사실인데도 그렇다. 아무래도 이변이랄 수밖에 없다. 하긴 그렇게 발표되고 있는 시들을 보면 그 시의 됨됨이에 관계 없이 모두 자본주의가 이 세계에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과 문명의 오염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포즈를 취하고 있기는 하다. 아마 그들도 이 시대의 순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 소박한 신뢰를 탓할 게 없다. 나쁠 것도 없다. 이렇게 두고 볼 때 <나쁜 시>는 있을 수가 없지만 <좋은 시>는 따로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무엇이 <좋은 시>인가. 한 마디 말로 줄일 수야 없지만 <시가 되어 있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가 되어 있지 않은 시가 요즈음 너무 넘치고 있다. 그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시들이 너무 많다. 아마추어의 그것과 프로의 그것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혼효의 극단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산시>가 어렵고, 더욱 엄격한 <산시>가 요구되고 있다.
제도상의 모순과 결함이 있겠지만 해마다 새해 아침의 빗장을 신선하게 뽑아 주는 이른바 <신춘문예>의 시들도 그전 같지 않고 정말 시들하다는 이야기들이고, 하루에 평균 한 권 정도로 우송되어 오는 시집들 가운데서도 <이것이다!>하고 집어들 것이 거의 없다. <산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하기야 갈 데까지 가 있는 이 어지러운 혼효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최근의 자료만으로 두고 보더라도 문예 종합지 17종, 전문지 22종, 동인지 122종에 1년 동안 발표된 시가 시와 시조 합해서 13,000여 편에 이르고 있다(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1년도 심의자료). 어떻게 이것들을 다 읽고 거기서 <좋은 시>를 가려 낼 수 있겠는가. 물론 가려 읽는 사람들의 꾸준한 시 읽기에 따라 제대로 된 <산시>의 결과를 얻어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시인들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시를 쓸 때부터 <산시>의식을 함께 가져야 한다. 그것이 어떤 형편에 놓여져도 알 바 아니라는 투로 쓰인 시가 좋을 까닭이 없다. 좋은 시들을 보면 이 <산시>의 의식이 투철하다. 흔히 자신은 초탈한 경지에 이른 양 전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를 접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단순 영합의 경우다. 누구에게 이 시가 어떻게 읽힐 것인가를 엄정하게 추구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산시>란 시인 자신이 이미 이룬 것을 독자가 다시 만나는 것일 따름이다.
최근 한 젊은 시인은 <남은 빵의 가치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조난자처럼 마지막 한 뼘의 삶에 내기를 걸>듯 그렇게 우파니샤드에 매달려 있다가(그렇게 그의 아트만은, 그의 가시적인 육체는 소멸의 끝까지 와 있었다.) 끝내 이승을 하직했고, 성숙기에 접어든 또 한 시인은 그의 부정적인 언어들이 궁극에 가서는 <싱싱한 육체적 욕구에 대한 긍정적 찬탄>으로 읽혀진다는 아주 뛰어난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을 내놓고 있다. 김혜순이 바로 그다.
왜 이렇게 <우파니샤드>라는 말이 이즈음에 와서 우리 시의 매우 중요한 한 채 정신의 집으로서 그 모습을 가시화하고 있는가. 시에서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몸집>의 것인가.
우파니샤드, 우파니사토 優波尼沙土(曇)라고도 음역되어 전하는 이 말은 알려진 대로 원래는 Brahmanism의 오의서奧義書였다. 천계문학天啓文學Sruti으로서 신성시되었으며, 바라문철학의 연원이 거기에 있었다. 우주의 본체인 브라흐만Brahman, 범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 아我가 일체임을 논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바로 우파니샤드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시에서 보이는 우파니샤드, 이를테면 김혜순이 선택하고 있는 우파니샤드와 같은 것은 무슨 푸른 이끼 같은 것이 창연하게 잔뜩 돋아나 있는 종교적인 명상의 그것도 아니며, 근엄한 초월의 포즈로 머물러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삶과 시는 개인과 전체가, 안과 밖이 따로따로 선택되고 고집되던 상처의 시대를 넘어서서, 그 <대화엄>을 위한 필연적 자양으로서의 <역동적 에로스>를 자연발생적으로 끊임없이 방출해 내기에 이르고 있다. 고팠기 때문이다. 은밀하게는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 그대에게 길을 내어 주는 정신의 광케이블마저 설치되고 있다. <몸의 시학>이다. 그렇게 우리의 좋은 시들은 성숙된 가운데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렇게 우리의 좋은 시들은 세계를 향한 자신의 확대 중첩과 세계의 자기화, 내면화를 위해 각자 비의의 제단까지 열심히 쌓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같은 면에서 본다면 저 우파니샤드는 지금 우리 시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지금 우리 시의 우파니샤드, 그 광케이블은 어디에까지 이르고 있는가. 김혜순의 시를 읽으면 그대로 체감할 수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이라는 표제만 해도 그렇다. 이는 단순히 <서울의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김혜순의 우파니샤드와 <서울> 사이에는 강한 길항이 있음을 우리는 이내 감지한다. 지금의 서울은 그의 말대로 욕망의 총체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우파니샤드 자체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온몸으로 껴안고 그 콘크리트 심장에 길을 내겠다는 몸의 시학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우파니샤드의 세계요 행동의 양식이다.
그의 시 ⌈(비)⌋의 한 부분을 보자. 시어와 시어 사이에, 시행과 시행 사이에 투명한 광케이블이 매우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고 있다. <안>과 <밖>이 서로 드나들고 있다. 길을 내고 있다.
하늘에서 투명한 개미들이 쏟아진다(비)
머리에 개미의 발톱이 박힌다(비)
투명한 개미들이 투명한 다리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비)
밖의 <비>가 안의 <개미>가 되고 있고(이 같은 전이는 개미와 비의 줄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주는 이미지의 동일성으로 가능하다.), 그것들은 투명하다. 안과 밖이 하나로 <드나듦>이다. 길이 열림이다. 우파니샤드가 있다.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열심히 광합성을 하고 있다. 시인이 거기 보이지 않는 광케이블을 놓았음이다. 기쁘다. 이 기쁨을 만들어 낸 김혜순의 손이 보여야 한다. 보이는가. 보여야 한다.
오늘은 활과 활통을 메고 나가/무르팍이 시리도록 달려보기/아주 좋은 날이구나./암소 울음소리 내는 냇물가 숲 속으로/햇빛을 쏘아 꽃봉오리를 터뜨리기/아주 좋은 하루구나./태양의 화살촉 저토록 무궁무진하고/눈부심 온천지 가득하니/저 들판 잠자는 짐승 모두 뛰게 하리라/모든 샘이 흙 위로 흘러 넘치게 하리라. 봄바람에 근질근질한 것들/말씹 터진 암말들 뒤엉킨 들판 높이/오, 태양이여. 네 남성의 날개짓이여./산봉우리에서 큰 대자로 누워 코 고는 이성을 깨워/저 아래 들판으로 합류시키는 네 기쁨 얼마나 큰가./발뒤꿈치에 맥박이 돌아 창공으로 솟구치는/잡히지 않는 숭고한 새가/네 품 안에서 한없이 날아다니는 기쁨 얼마나 큰가.
-조정권, [신성한 숲 4] 부분
위의 시에는 춤의 보법步法이 있다. 한낱 소리로서만의 흐름이 아닌 <몸>이 보이고 그 <결>이 만져진다.
그 <결>들은 흐름을 평면 위에 두지 않고 하나의 입체로 가시화한다.
위의 시에는 그런 힘의 흐름이 있다.
남성적인 생명의 보법으로 세상이라는 무대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어둠과 좌절과 비리와 천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의 것들이
모두 깊게 암장된 거대한 무덤이랄 수밖에 없는 오늘의 도시를 거두절미 직절의 기법으로 압도하는
광합성의 씩씩한 동화작용이 거기에 있다.
일순에 부신 빛으로 열어제치는 강력한 행위의 이미지가 거기에 있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무슨 기승전결의 보수적인 도식으로 지루하게 끌고 갈 필요는 없다.
거기에서 시작해서 끝내버리는 집중적인 묘사가 오히려 탄력과 긴장을 줄 수도 있고,
설득력있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또 이 시의 진행에는 드라마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솟구치는 봄날의 들판과 산봉우리와 하늘이라는 무대가 있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빛의 화살떼를 잠든 것들에 쏘아 날리는 서사적 주인공이 있다.
그 화자의 충일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의 절정에서 태어나는 관능적 생명이 있다.
<말씹 터진 암말>이라는 표현은 상스럽다기보다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언어(말)와 마(말)가 어우러진 음성상징의 역동적 성감대마저 절묘하게 빚어 내고 있다.
답답한 날들이 몇날 며칠씩 이어질 때가 있다.
저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가,
뭐가 내 속에 들어왔길래, 나는 시구로 스스로를 매질하고 시대에 총총히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뭐가 내 속에 들어왔길래, 나는 어깨에 망토 대신 계란을 올려놓고 있는가?
라고 현상의 근원에 대한 반복적인 질문을 계속해 갔던 것처럼 아슬아슬한 의식의 벼랑을 오르내려야만 하는
날들이 있다.
모든 시인들은 그렇다. 그럴 때는 차라리 황폐가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그러한 날, 위의 시를 한 번 소리 높여 읽어 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 되리라. 한결 개운해지리라.
너무 건강하고 희망적인 빛의 이미지만으로는 내면의 세계를 표출해 내기 어렵고,
또한 입체감을 살려 내기가 어렵다고 할지 모르나 이 대목의 집중된 표현은
이미 내면의 세계를 함께 담아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안이 꽉 차 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어둠의 타성에 젖어 있지 않는가.
진실의 표리 가운데 그 어느 한 쪽에만 머물러 과장된 포즈를 잡고 있지 않는가.
산문과 산문시를 구별할 수 없도록 나를 아름다운 혼미 속에 빠뜨린(<아름다운>이란 말이 <혼미>라는 말 앞에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었던 것은 그 혼미 자체가 나를 깊게 감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썩 뛰어난 산문을, 그것도 소설이라는 장르로 읽었다.
최윤의 [숲에서 숲으로](작가세계, 1993, 1993. 가을.)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작가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의 글에 나타나고 있는 감수성과 화법으로 미루어
그가 이른바 해체의 양식에 매우 자유로운 작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선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된 단락들로 되어 있었으며,
그 단락들 앞에 일련번호들을 붙여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50.5.37.42....등으로 배열되어
시간과 공간의 순차적 이행을 처음부터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그가 지닌 이러한 가시적 해체의 양식보다도
그의 산문을 시로 자리바굼하는 상승과 확산의 <힘>에 있었다.
그런 <힘>을 그의 글은 지니고 있었다. 다음 서너 단락을 그대로 옮기어 본다.
42.
1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너와 보낸 약 육 개월 동안, 서울에서는 중구, 종로구, 영등포구, 서대문구(이상 빈도수)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반면 강남구, 강동구, 강성구, 관악구(이 네 구가 모두 ㄱ으로 시작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에는 한 번도 너와 같이 간 적이 없었음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종로구에서는 종로 1가와 2가, 동숭동, 인사동은 자주 다녔던데 비해 도렴동, 체부동, 팔판동, 훈정동은 한 번도 지나는 적이 없다.(......)
18.
잠시 멈춘 고속도로 변에서 네가 한 말을 기억한다. "우리만 모르는 채, 어디선가 전쟁이 난 건 아닐까?"
52.
숲 속이었다. 기억한다. 비가 내리는 숲에는 사람이 없었다. 숲 너머 꼭대기에는 넓은 바위가 있었고 밑으로 보이는 숲 속의 초록은 소나기의 분무 속에서 회색으로 보였다. 몇 달 전 숲을 이루는 모든 초록은 다만 초록이라고 단순하게 불리울 수 없음을, 언젠가는 무한하게 차이 지워지고 정리되어야 할 그런 초록임을 알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타다닥 작은 불똥이 튀기며 내는 소리로 돌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을 기억한다. 바위 밑의 뽀얀 대기 속에 드러나던 절벽을 기억한다.
21.
네가 먼저 전화하지 않았을 때 너와의 통화는 늘 짧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기억한다. 네가 먼저 전화했을 때 너와의 통화는 길었다.) 네가 가끔 사용하는, 늘 기다리는 줄이 있었던 공중전화를 기억한다.
짧은 단락들이지만 모두가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고, <기억한다>라는 동사의 반복적 사용을 통하여
과거라는 사실적 체험의 세계로부터 화자가 분리되어 있는 그 상처와 적막을 환기시키고 있음 또한
매우 재미있다.
저러한 글을 <소설>이란 장르로 발표할 수 있었던 근거가 여기에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역시 내 관심사는 시로 상승 확산시키는 그 <힘>의 발견에 있다.
짧게 마무리하지만, [42]의 사실적 공간이 보이고 있는 음성상징(사랑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부드러움과 거칠음).
[18]의 사랑의 세계, 그 몰입, 현실적 초월과 그 감성. [52]의 사물들의 <속내읽기>,
그 미시적 초점, 혹은 빗방울이 불똥이 되는 그 음성상징(타다닥). [21]의 자기 위주의 인간적 한계에 대한
혐오와 상징적 표현-.
그렇다. 나는 산문시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를 얻을 수 있었다.
비유로 만들어진 정서가 아니라 소설적 체험(리얼리티)의 행간을 통과하면서(빠듯이) 묻혀 가지고 나온 정서,
그 끈끈함이 산문시라고 믿는다.
흰 달빛/자하문//달안개/물소리//대웅전/큰 보살//바람소리/솔소리//범영루/뜬 그림자//흐는히/젖는데//흰 달빛/자하문//바람소리/물소리
목월의 잘 알려진 [불국사]다.
<흐는히/젖는데>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행과 연이 명사, 체언으로 끝나고 있다.
서술어미를 완전히 생략한 극단적인 절제의 시적 운용이 놀랍다.
낱말로만 쓰고 있으면서도 사물의 풍경을 아득하게 열어 주는 부드러운 장력의 그 번짐이 거기에 있다.
이 시는 서로의 경계를 열고 하나가 되어 다시 또 새로운 경계를 열어 나가는 고요한 역동성을 체감케 한다.
그야말로 <흐는히 젖는> 사물들의 <안으로의 모임>이 있다.
빈틈이 없이 빽빽하지만 갑갑하지 않은 사물들의 부피와 그 살결이 만져진다.
물리적 실체들 사이에 관계를 세우고 다시 추상적인 내면의 흐름과도 관계를 세우는,
안과 밖을 이어 주는 아름다운 <운>이 꼬리가 하나의 <통주저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주저음-.
바로크 음악에서 오르간, 탬버린 등으로 연주되기 시작한 저음성부의 부피 있는 그것,
그런 아득한 내면의 이미지를 지닌 소리. 들리지는 않으나 들리고 있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발견되는 소리,
<관음>의 찰나적 꼬리들이 거기 흐르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연결어미나 종결어미, 혹은 조사 따위의 다리놓기, 보이는 <이음새>와 같은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버림으로써 오히려 그것들이 희구하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획득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시들은 이런 <낱말로 쓰기>로부터 엄청나게 떨어진 곳에 팽개쳐져 있다.
질퍽거리고 있다.
연결어미나 종결어미, 조사의 생략은 고사하고 그것들을 무슨 강력한 쇠붙이의 자물통 같은 것으로
주먹 쥐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위악적인 포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만큼 오늘의 우리 삶이 외압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무서운 속도로 저들이 우리들이 비워 둔 자리를 강타하거나 강점해 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소 단위로 줄인다 해도 <어절로 쓰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오늘의 우리 시는 놓여져 왔다.
나는 체언 아래 입을 앙다물고 붙어 있는 어미와 조사의 시들-주인은 없고 객들만이 법석대는 집, 빈사의 시,
그것이 오늘의 우리 시가 지닌 비극이며 드라마라는 생각을 해 왔다.
글쎄, 요즘 우리 시에 선풍이 끼어들고 있는 것도 그런 갑갑함에 대한 성급한 초월의 양식이 아닐지.
아무튼 또 한 번 비애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은 저토록 오늘의 우리 시가 노출된 연결어미를 고집하고 접속어를 고집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스스로로부터 단절되고, 밖으로부터도 소외되는 모순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보라, 한 정직한 시인의 저 상처를 우리는 함께 쓰다듬을 필요가 있다.
바깥은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글쎄,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부분
잔뜩 겁먹은 나도 아직 저 질퍽거리는 몸을 마음 속에 되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머물고 있다.
사과를 손은 따지 못하고 그것을 매달고 있는 <꼭지>만을 잔뜩 움켜쥐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마을 찰 시냇가 징검다리만을 숨어서 밟고 있다.
새 옷 한 벌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