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표류
주관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추천 순서는 랜덤입니다.
최진영 장편소설
단 한 사람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최은영 단편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권여선 단편소설집
각각의 계절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꼬박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숲속 식당의 마당에 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을 권하듯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 테고 우리는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돌아갈 것이다.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목정원 사진산문집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이때 기억은 애도를 위한 것이다. 장례에 영정 사진이 필요한 까닭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사진 속 얼굴을 마주할 때 실감한다. 당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사진에 대고 절한 뒤 몇 개의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길어 낸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당신이 있었던 먼 장면들을. 당신이 있었던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백수린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장류진 단편소설집
연수
⠀이찬휘는 앉자마자 A4용지를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방향으로 돌려서 바닥에 내려놓더니 ‘조장’이라고 적힌 빈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 조장을 정해야겠는데요?”
⠀그러고는 조원들을 좌로, 우로 한번씩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조장이 하고 싶은 분?”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때 이미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반질반질한 얼굴 옆으로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붙인 채 스윽 올리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바로 그애가 조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배수아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마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그런 일들.
이은규 시집
무해한 복숭아
문득 종이 한 장을 절반으로 나눠
편지를 주고받던 그 풍경을 기억이라 부르자
지나간 문장을 읽을 때 차오르는 무엇을
구슬 같은 눈물이라고 부르지 말자
텅 빈 동공에 풍경이 차오르고 있으므로
조예은 연작소설집
꿰맨 눈의 마을
⠀히노, 나는 그 무수한 별의 수만큼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해. 우리의 손에 묻은 피와 파이를 먹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걸 생각해. 우리가 지금껏 믿어온 것에 대해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오늘은 꼭 파이를 완성하고 싶어.
⠀할 수 있겠지?
-
2023년에 나온 여섯 권의 소설책
두 권의 시집
그리고 산문집 두 권을 모았어
모두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거야
자신의 글들이 조각조각 유명해져도
누구의 글인지도 모른 채 소비되고
손에 잡히는 건 없어서 슬프다는 어떤 작가의 말을 봤었어
이 글 속 한 문장, 한 단어라도
여시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기를 바라
마침내 책으로도 만나게 되기를 바라
여시 새해 복 많이 받아!!!
늦었지만 여시도 새해 복 많이 받길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실 저 문장은 어딘가에 작가의 말이라고 적혔다기보다는 많은 작가들이 토로하는 슬픔을 내가 축약해 말한 거라서 누군가를 특정하기 힘들 것 같아
@히가시나 레즈고 응 맞아 여시도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다면 책으로도 만나보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