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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나는 살아남은 양들이 다시 모아들여 그들은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예레미야서의 말씀 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 제2독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지식의 크기가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외딴곳’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치셨기에 그들은 음식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빵과 물고기가 많아지는 기적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양 떼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 비유한다면 그 뒤 빵의 기적은 ‘성찬의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천상 ‘지식’을 넓히는 시간이고 성찬 전례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성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체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는 반면, 말씀과 지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명축일과 같은 때에 신자분들이 바친 기도를 보면, 미사 몇 대, 묵주기도 몇 단 바쳤다는 것은 있지만, 교리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성경공부나 영성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성체성사를 몇 번 했는지 혹은 묵주기도를 몇 단 했는지만을 강조할 때 그것을 통해 오는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는 간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영적 지식을 넓혀주시고 성체성사는 단 한 번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옷 유다는 올바른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에 성체성사를 하고도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습니다.
모든 은총엔 그릇이 있고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배운 다음에 그것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자동차부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용법도 몰라 낭비되는 은총만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체는 아무리 많이 영해도 그 은총이 제한됩니다.
쥐가 매일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배운 사람만이 그만큼 은총을 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 사라소타의 54세 노숙자 도널드 굴드.
그는 미군 해병대 밴드로 전역 후 음악 교사의 꿈을 꾸며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아내가 사망합니다.
그 슬픔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중독자가 되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8년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눈을 뜨면 지붕이 있고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 앞에 놓은 피아노가 눈에 보였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누군가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노숙자로 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맨 ‘도널드 굴드’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재활 치료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음악 대학의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들과 재회하고, 미국 4대 스포츠 중 ‘내셔널 풋볼 리그’ 오프닝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앨범도 발매가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눈을 뜨면 천장에 지붕이 있고 따뜻한 커피가 있다는 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출처: ‘피아노 치던 노숙자, 정상의 무대에 우뚝 서’, 유튜브 채널, ‘파인딩 스타’]
은총은 그 은총을 담을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옵니다.
그 그릇이란 ‘지식’입니다.
만약 도널드 굴드 씨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올 새로운 세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배운 것들이 그것에 합당한 세상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 지식과 합당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은총의 가치를 깨닫는 지식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아야지 성체성사가 참 은총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죽는 것입니다.
영화 ‘킨: 더 비기닝’(2018)은 고철을 팔아 생활하는 한 입양된 일라이라는 흑인 어린아이가 외계인의 엄청난 무기를 지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백인 형을 그 무기로 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기는 일라이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무기는 외계인이 사용하는 무기였는데 일라이도 그 외계에서 온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성체성사의 효과를 어떻게 자아내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을 배우지 못한다면 성체성사는 그저 비타민의 효과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될 때 그 성체는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이 됩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색맹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경이 개발되어 그것을 선물 받고는 감동하는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이 색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진정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해 줍니다.
말씀의 전례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속한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전례입니다.
계속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어 행위만 강조하는 강론만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천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만 천상의 양식이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성경, 영성의 지식이 쌓이지 않으면 은총을 담을 그릇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로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과 <호세아서> 말씀의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호세 2,16-22)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 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몸살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쉰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니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바삐 지냈습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 삼아 보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가 지낸 하루의 시간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시간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을 선택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에 쉼은 꼭 필요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 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가족, 이웃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챙기는 것도 훌륭한 쉼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 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며칠씩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휴가를 내서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단식원에 들어가 단식기도를 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성심상이나 성모님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쳐야 합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에 부끄러운 하루입니다.
오늘 만큼은 외딴 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마련하시기 바라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정의, 우리의 평화, 우리의 목자인 주님>
오늘 독서 예레미아서는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하고, 에페소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하고, 화답송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정 나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이신지, 나는 세상에 대해 주님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인지 성찰케 되는데, 역시 저는 부끄럽고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이신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주님이 그런 분임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진정 내게 그러한 분이신가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기보다는 제가 종종 세상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의 정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의한 사람으로 몰았을까요?
다행히도 저는 본당 신부를 별로 해본 적이 없지만 제가 본당 신부였다면 얼마나 많은 주님의 양들을 저의 정의로 못살게 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고 얘기하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의 정의로 세상을 다스렸다면 주님의 양 떼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않았을 것이고, 주님께서 그렇게 가엾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는 우리의 정의와 달리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실 정의의 근본이 사랑이고 정의의 완성이 사랑이지요.
주님은 모두를 공정하게 사랑하기에 내 맘에 드는 사람에게는 잘해주고 내 편이 아닌 사람에게는 불의한 그런 정의가 아니라, 모두에게 정의롭고 그래서 세상이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하는 정의였으며,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평화이시고 우리의 평화이셨지요.
그러나 이런 주님을 목자로 모시는 우리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산업화를 위한 독재를 하였을 때 그래서 저도 민주화 운동에 조금 발을 담고 불의에 대항하여 당시 민주화 인사들과 같이 싸운 적이 있는데, 저는 그분들과의 관계에서 내적 갈등이 없지 않았습니다.
인사들 중에는 성직자들도 많이 있었고, 독선적인 정의를 가진 분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분들은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기보다는 불의의 고발에만 치우치는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는 싸움의 동력이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아닌 불의한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잘못을 자주 범하는 것입니다.
진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어렵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든든히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랑으로는 사회 정의와 평화는 물론 자기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 것도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쉽게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붙들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정의와 평화와 목자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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