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쓰기] 쓸쓸한 독백 몇 조각 / 박정원 (시인)
'어떻게 시를 쓸까'라는 질문이 늘 떠나지 않는다. 내 사모하는 이가 詩이므로, 그가 곧 나 자신이므로.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그가 왔을 때 내 삶이 윤택해짐을 느끼므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금이라도 놓친다면 나와 그의 삶은 이내 황무지가 될 터이니. 그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면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으니까. 기왕이면 재밌게 살다 가야지. 우쭐대지도 풀이 죽어있어도 안되지. 가난하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기. 그처럼 물같이 살기. 스미듯 스쳐도 그냥 또 흐르자구. 있는 그대로 그가 시키는 대로 펼치기만 하자구! 보여주자구! 무한한 상상만으로도 그저 행복하지. 그와 내가 한통속이니까.
“시 속엔 사랑도 없고 육체도 없고 해질 무렵도 없다. 당신들이 쓰는 시는 그저 언어일 뿐이다. 섹스도 없고 구두도 없고 나팔도 없다. 하물며 무슨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생명이 있는가? 시는 그저 시이고 언어일 뿐이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아 아무 것도. 달팽이 기차 염소도 없고 백지 위에 글씨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하시오. 검은 옷 입은 남자가 지나가며 말하네.” - 이승훈의 「검은 옷 입은 남자가 지나가며 말하네」의 전문.
금강이나 화엄처럼 그가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를 치고 캘리그라피를 하면 캘리그라피를 하고 다육아트를 하면 다육아트를 하고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타고 산책하면 산책하고 아파하면 그와 함께 병원에 가고 맛있다면 맛있어하고 자라면 자고 먹은 대로 잘 싸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의 생각대로 쓰고 터치하며 그리라면 그리고 덧칠하라면 덧칠하면 될 것. 언제나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기 때문.
물론 그처럼 살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게 대수인가. 물 한잔이면 족하다. 그가 곧 물이니까. 사람의 길도 결국엔 물길 따라 나므로. 하지만 그는 결코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뭔가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낸다. 말장난 하지 않고 남의 것 좋다고 흉내 내지도 않으며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처럼 소쇄원 같은 지구를 거닐다, 노닐다 갈뿐이다. 줏대가 있으라는 이야기. 절대적 자아는 결코 내게서 떠나지 않기 때문.
모든 삶이 서럽게 살맛나며 그 애조가 아름다운 것 아닌가. 그에게 사랑과 이별은 영원한 숙제이면서, 후훗! 영원한 사랑 내지 이별이라는 건 없지. 그의 죽음은 늘 새롭게 태어나거든. 그래서 그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역설적으로는 그와 나에게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 그가 내게 왔을 때 그가 그의 것으로 나를 만들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그와 내가 있지. 타인의 인생이 곧 나의 인생이니까.
그를 품에 안으면 그가 나를 왜 내동댕이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품은 언제나 따듯하니까. 세월이 가도 그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의 삶에 나를 대입하여 그 대신 고독하고 그 대신 사랑하고 그 대신 슬퍼하다가 가면 된다.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 꽃을 피우라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데, 행복한 순간은 잠시일 뿐인데. 그러다가 사라지면 그뿐인데.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고 우리 모두는 꽃이란다.”(졸시 「꽃의 말이 꽃마리에게」부분)처럼 사랑과 이별, 행복과 불행은 자웅동체. 그것을 거슬리면 이내 비문이 되고 만다. 자비와 사랑은 슬픔과 고통의 모체이기 때문.
“나 죄가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란 김종삼 시인의 「라산스카」처럼 그와 나도 영원한 죄인이다. 백 년을 살아도 죄인은 죄인일 뿐이다. 미안한 마음이 그와 나를 지탱시켜 준다.
미안하다 나를 따라다니던 그늘에게 그 그늘을 밝혀준 빛살에게 내 더러운 땀을 받아준 키스에게 섹스에게 살아있으니 더 따가웠던 아픔에게 고통에게 상처에게 화해와 용서의 모태인 트집에게 허물에게 반목과 질시에게 매일 밤 내 뒤꿈치를 핥아준 아내에게 꽃에게 강아지에게 밥을 먹여준 숟가락에게 젓가락에게 푸성귀 반찬에게 미안하다 내 관념을 모조리 삼켰던 추상에게 구체적이지만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자존에게 잎잎이 문자화되어 낙엽처럼 흩날리는 외침에게 아우성에게 사물의 이름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몽매한 무지에게 무지에서 무지로 다시 무지를 일으켜 세우던 무지의 뿌리에게 먼 곳에서 찾으려는 내 어여쁜 애인의 애인에게 미안하다 제대로 몰랐구나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지 못하였구나 울안의 낙엽색깔이 모두 다르구나 낙엽 밟히는 소리가 제각각이구나 핏줄을 드러낸 몸뚱이가 야위었구나 사람과 사람사이가 낙엽과 낙엽이었구나 눈부신 가을빛을 온몸에 받아 적는 이파리 한 장에게 나는 미안하고 미안하다 언제쯤 나도 가을빛을 내뿜을까 젊은 내가 낙엽보다 먼저 낙엽이 되는구나” - 졸시 “미안하다” 전문
아무튼 그는, 나는 그를 통해서 새로운 인식과 발견을 한다. 내 자신에 대해 말할 때도 타인의 언어로 얘기한다. 제3자적 관점은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는 뭍 생명들의 모습이다. 그와 나의 우주관이랄까. 남이 볼 수 없는, 알아챌 수 없는 낯선 촉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린다. 성찰의 연속이지. 그의 시선이 항상 나를 감시하듯 주시한다. 주먹 불끈 쥔 나눔의 고통도 함께 읊조리고 얼싸안고 울기도 한다.
풀에 빠졌다 빠지는 것에 미쳤다 미친 그들의 함성을 굵고 짧은 작대기에 묶어놓았다 미칠수록 무성해지는 종족, 개처럼 돼지처럼 손가락 하나로도 쉽게 해칠 수 있는 목숨이라고 치부하던 미친 풀의 언어 풀의 걸음걸이 풀의 복장 풀의 속내를 생각의 허리에 친친 감는다 그럴수록 번져가는 것들, 예초기가 지나갈 때마다 폭탄테러의 도회처럼 피비린내가 물씬하다 점점 하늘을 뒤덮는 그들의 사고방식, 영원히 죽지 않는 풀들이 지구를 지배할 것이다 기계가 풀이 되고 풀이 기계가 되는 세상이 올 것이므로 마침내 생각의 잡초들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므로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는 문맥 속엔 불소통의 은밀한 거래가 숨겨져 있다 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이 곧 아주 작은 생각의 공간의 안과 밖이려니 바야흐로 그들 또한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없을지니 미치면 미칠 것이다 풀은 계속 자란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 졸시 「잡초를 뽑으며」 전문
無受想行識 ;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미친놈은 계속 날 뛸 것이고 미쳐야 미칠 것(不狂不及)이므로 이놈 저놈 분별없이 지나갈 것. 그와 나의 존재 또한 미치다가 미치리라. 그때가 언제든 그곳이 어디든 모든 것이 바람처럼 지나가리라.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없다. “없다”라는 그 자체도 없을 것이므로 “오유지족(吾唯知足)”, “있을 때 잘 해!”,YOLO(You only live once)”라는 斷章이 스스럼없이 울린다. 그러니 머물지 마라. 그에 대한 애정도 따지고 보면 오갈 데 없는 집착이다. 몇 만권의 장서도 다 버려라. 돈도 명예도 한순간일 뿐이다. 내일을 예측 못하듯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볼 것을 주문한다.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들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와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가리키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 소리
결국엔 물이었다 한 바가지 들이켜지 않겠는가 - 졸시 「고드름」전문
그러나 그는 햇살에 고드름이 녹는 순간 문득 깨닫는다. 그 날카로운 고드름도 결국 물이라는 사실을. 가해와 피해와, 공격과 방어와, 사랑과 용서가 결국 한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의 시는 이 깨달음의 바탕위에 깊게 무위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본질을 외면하고 잡다한 외형에 치우쳐온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눈! 본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물의 눈! 그 눈이야말로 시인 박정원의 눈이다.(정호승 시인)
물속에서 피아노를 치기는 처음 건반을 터치할 때마다 맺힌 소리들이 방울방울 솟아오른다
마름 줄기 사이로 성량 풍부한 알토 참붕어 벙긋벙긋 고놈 참 입 모양도 예쁘게 소리방울 굴린다 물속으로 뛰어든 개구리 여기서 개 저기서 굴, 개굴개굴 받더니 개구리밥 쪽으로 패스 물거울 속 산 그림자 언제 내려왔는지 몸을 배배 꼰 나사말을 한번 툭 치고 소금쟁이라고 물 위를 걷기만 하나 왼발 오른발 번갈아 토스 토스 킥킥킥, 도넛처럼 허리를 구부린 미꾸라지가 되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화들짝 놀란 물방개 다시 한 바퀴 팽그르르 돌고 도는 소리방울 여러 알 주운 거머리가 이음줄로 요리조리 태댕탱탱
소리 없이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똥을 좇다가 다시 연못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만다 아하하하 우습다 하늘도 두 쪽이 나는구나
그들은 하나같이 내 연주의 협연자 고여 있던 소리들이 죄다 날아갔다
다음 연주를 위하여 물비늘이 파르르르 지워버리고 사라진다 - 졸시 「완주(完奏)」전문
“물속”은 시인의 내면 깊이에 있는 무의식의 공간 또는 상상이 이루어지는 감성의 영역이요 협연자들은 그 속에 억압되어 있는 욕망의 실체들일 것이다.(김석환 시인)
시인이 피아노를 치는 주체보다는 협연자에 중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시는 본질적으로 탈중심적이다. 물의 역동성과 생명성은 박정원 시의 원형적 표상이며 상상력의 원천이다.(박남희 시인)
커다란 연잎에 자리 잡은 빗방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방울지구 같다
아하 바로 내 코앞에서 지구가 뒹굴다니
하늘아래 저편 북극곰이 보이고 아메리카 대륙이 보이고 마다가스카르가 보이고 시리아가 보이고 한반도 아 내 나라 대한민국 한쪽, 깨알보다도 조그만 점 하나
예봉산 자락에서 노트북을 켠 나
대지진의 결과물을 생생하게 그려낸다면 침몰된 배 한 척의 이면을 자판으로 두드린다면 대단한 그이의 그림자를 똑바로 세운다면
산산조각 나겠지 먼지처럼 보이지 않게 떠돌아다니겠지
물방울 속에서 살짝 찌르면 터져버려 물거품이 될 인생들
- 졸시 「물방울지구」 전문 상상력을 통해 무소불위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상력 속의 물방울 지구는 초미세입자 구성원인 나나 너처럼,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일 뿐이다. '물방울 속에서/ 살짝 찌르면 터져버려 물거품이 될 인생들'이라는 결말에서 시인의 의식이 허무감과 하강의식에 젖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혜선 시인)
모든 재산을 다 버리면 부자가 될 수가 있고, 모든 명예를 다 버리면 진실해질 수가 있고, 모든 권력을 다 버리면 자유인이 될 수가 있다. 마음의 부자가 되면 진실해질 수가 있고, 진실한 인간이 되면 자유인이 될 수가 있다. 상상은 자유를 먹고 자라고, 자유인은 이 상상의 힘으로 그 꿈을 펼쳐나갈 수가 있다. 상상력의 대가인 박정원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은 다 부질없고 쓸모없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처럼 ‘상상력의 혁명’을 통하여 ‘버림의 미학’을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반경환 문학평론가)
그렇다. 몰입을 통한 상상력은 내게 무한한 자유와 행복감을 선사해준다. 그것은 무생물에게까지 생명을 불어넣어 우주공간으로 내보낸다. 파리채를 갖고 파리를 죽이면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같듯. 아주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생명이란 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내 시는, 내 정신은, 내 하찮은 육체가 서서히 스러질 때까지 그는 그답게 머물지 못하다가 나와 함께 고요히 사라질 것이다.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 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 졸시 「징」전문 울고 싶어도 “녹슨 밥”이 목울대에 걸려 울지 못하고 살았기에, 때로는 절대 울어선 안 되기에, “징”이라도 되어 제대로 한 방 맞고 징징 울고 싶은 것이다.(김필영 시인)
그동안 내 삶과 연관되었던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 졸시 “미안하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면 이러한 미안함은 반목과 질시와 무지 속에서 타자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밖에 없었던 내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그를 통해 화해와 용서를 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저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모두 귀한 존재들이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이 세상의 모든 타자들은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예속시킬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임으로, “눈부신 가을빛을 온몸에 받아 적는 이파리 한 장”처럼 타자에게 ‘가을빛’을 내뿜는 일이 진정한 사랑임을 고백한다. 졸시 「징」에서처럼 나름의 삶을 반추하며 피아노를 두드리고 캘리그라피를 치며 상처입고 멍울진 내면을 제대로 한번 맞아보려고 애쓸 뿐이다.
나는 그의 속에 내재해 있는 카오스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길어 올려 새로운 시세계를 창출하려 노력한다. 문명보다는 자연의 토대 위에 서있고, 수목과 같은 전형적인 형식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리좀의 시학으로 탈중심주의를 지향한다. 전통 시의 문법과 실험시의 새로움 사이에서 길항하면서 열거와 병치, 패러디, 행 걸침 등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치려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분방한 물의 역동성과 생명성은 곧 그와 나의 원형적 표상이며 상상력의 원천이다.
어머니 가슴에 맺힌 종양을 병원에서 덮어버린 그날부터 아버지는 곡기를 끊으셨다 아버지, 어머니 가시던 날 아침 어머니보다 먼저 꽃잎처럼 지셨는데 사막이란 사막은 죄다 우리 집으로 몰려와 웅성거렸다 꽃 두 송이가 같은 날 같은 시각 사막 한가운데 이슬처럼 맺혔다고 그런데 그 꽃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고 - 졸시 「동심초」 전문
비극이야말로 그와 나의 출발점이다. 웃고 떠드는 대중 사이에 외로움을 즐기는 것이 강점. 그것들을 불러내어 마음을 살필 때 속이 후련해진다. 그만큼 우리 둘 사이에 약점이 있다는 것. 하지만 거리낌 없이 한량답게, 한통속으로 밥 먹고 똥 싼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사는 요즘에서야 비로소 어깨의 힘을 빼다니. (♣)
- 《시문학》 2017년 9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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