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떠나시는군요...결국은...
암울했던 격동기 80년대 그때...당신 떄문에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 혹시나 웃기지 못하면 어떡하냐란 고
민으로 하루에 3갑씩이나 피며 몸을 상하셨습니다.
당신의 수지큐와 콩나물은...영원히 사람들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무명의 설움과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던었떤 아픔들 모두 잊으시고...
60인생...
늘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당신의 그 설움 섞인 코메디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코메디의 황제이며 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
삼가 故人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편안하십시요.
<펌>연합뉴스
27일 별세한 이주일(62ㆍ본명 鄭周逸)씨는 지난 30여년간 대중을 웃기
고 울렸던 대표적인 코미디언이자 한국 코미디 역사의 산 증인이었
다.
1980년 이씨는 구봉서ㆍ곽규석ㆍ배삼룡ㆍ이기동 등 기라성같은 코미디
언이 군웅 할거하는 한국 코미디계에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
어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했다.
자그마한 키에 거무튀튀하고 주름많은 얼굴, 벗겨진 대머리에 더부룩
한 수염자국, 야트막한 코. "무명 시절에는 얼굴이 쥐어뜯고 싶도록
미웠다"고 술회했던 이씨는 그런 외모를 오히려 전매특허로 만들면서
대중들에게 이름 석자를 각인시켰다.
이주일씨의 인기를 사회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삐딱한 광대-이주일
論」(1987년이영수ㆍ박성태 공저)는 "특유의 못생긴 얼굴과 우스꽝스
런 몸짓은 당시 `80년의 봄'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그 누구도 잘나
지 못한 우리 대중들의 모습을 대신 비추어주는 듯한 친근미를 갖게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씨는 동시대 코미디언들이 서서히 잊혀질 때 매번 다른 모습으로 등
장해 사람들의 뇌리 속에 머물렀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라는 유행
어와 함께 `수지큐'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뒤뚱뒤뚱 걷는 `오
리춤'은 후배 코미디언들이 두고두고 따라할 정도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코미디 황제'의 왕좌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남다
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코미디 공부
를 하고 돌아왔는가 하면 개인 스크립터를 고용하기도 했다.
85년 소재 빈곤 등으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제2의 도약'을
위해 등록금 전액을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대학생 개인스크립터를
공개 모집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연예계에 입문, 코미
디언으로서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는가하면 돌연 정치인으로 변신해
숱한 화제를 뿌렸다.
올 초에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도 `금연홍보대사'로 나서는 투혼을
발휘했고, 휠체어와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면서도 월드컵 기간 경기장
을 직접 찾아 한국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인은 1940년 북한 강원도 고성군의 한 선비 집안의 5대 독자로 태어
났다. 1948년 월남한 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의 아버지가 좌
익으로 몰리면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시절부터 축구부에서 활약하면서 뛰어난 운동 실력을
발휘하던 그는 춘천고 축구부에서 동급생이던 박종환(朴鍾煥ㆍ65ㆍ여
자축구연맹 회장)감독을 만나 각별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박감독과 함께 당시 축구명문이던 신흥대(현 경희대)
에 나란히합격하지만 이씨가 입학금을 노름판에서 날린 뒤 군에 자원
입대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씨는 이후 군대에서 `끼'를
발휘하면서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씨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숱한 수모와 역경을 겪으면서 20여
년 가까이 지방 쇼단 MC와 서울 변두리 극장 무대를 전전하는 무명 시
절을 거쳐야 했다.
71년 베트남 파월 장병 위문공연 길에 오르면서 `웃기는 코미디언'으
로 조금씩 이름을 알렸고, 당시 최고 스타였던 가수 하춘화쇼의 단
골 사회자가 돼 지방공연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하씨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에서
이씨가 하씨를 등에 업고 폭발현장에서 구해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
다.
이후 마흔살이 되던 해인 7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로 비로소 TV
에 데뷔했지만 못생긴 외모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
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기회는 곧 다시 왔다.
80년 1월 19일에 방송된 TBC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우연찮게 이름을 알렸던 것.
"윤수일씨가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나와서 타잔놀이를 하고 있
는데 전 그 옆에 대사 한마디 없이 서 있는 엑스트라였습니다. 그런
데 처음 TV에 나가게 돼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타잔이 줄을 타고 연못 위를 지나가게 됐는데, 조연출자가 나한테 손
가락질을 하면서 `큐!' 한단 말예요. 난 `큐'를 처음 받아 봐서 날
보고 이리 오라는 줄 알고 그쪽으로 가다가 줄타고 내려오던 타잔하
고 부딪쳐 연못 속에 빠지고 말았어요. 실수로 물 속에 빠졌다가 당황
하고 얼굴을 드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제가 스타가 된
것은 순전히 실수였습니다."
훗날 이씨는 자신의 데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
로 이씨는 이주일 만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그의 예명은 `이주
일'이 됐다.
이후 탄탄대로를 달리는가 싶더니 80년 8월 연예인 숙정작업과 함
께 코미디언 배삼룡, 가수 나훈아, 탤런트 허진 등과 함께 `저질' 연
예인으로 낙인찍혀 하루 아침에 방송사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맞았다.
그러나 이듬해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브라운관에
다시 복귀 하고 유흥업소에서 `밤무대의 황제'로 떠올랐다. 서슬 퍼렇
던 시절, 그는 밤무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를 코미디의 소재
로 삼으면서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했다.
그런 그를 하늘이 시기하기라도 한 걸까. 91년 11월 자신이 그토록 아
끼던 28살의 큰아들 창원(昌元)을 교통사고로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맛봐야 했다.
그의 인생행로가 정치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이 무렵.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이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고(故)정주영 회장의 권
유로 우여곡절 끝에 92년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씨는 "정책을 연구
할 시간에 경조사에 불려 다녀야 했다"면서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
고 갑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코미디언으로 복귀, 제2의 전성
기를 누렸다. 굴곡 많던 그의 인생은 올한해 극에 달했다.
평소 건강했던 그는 지난해 10월 말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힘겹게
투병하면서도 `금연홍보대사'로 나섰던 것. 평생 남을 웃기며 살아온
그가 병상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
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주일 신드롬'과 함께 금연 열풍이 불어닥쳤
다. 한번도 은퇴를 선언한 적이 없었던 그는 아픈 육신마
저도 대중을 위해 쓴 천상 코미디언이었다.
<이주일씨가 남긴 유행어와 와 어록>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 이주일씨가 지방 공연 무대에서 내뱉은 인
사말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봐 주십시오" 혹은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못생겨서 연예계에 나왔으니 한번 잘 봐
주시십시오. 자세히 보시면 더욱 못생겼습니다"의 줄임말.
이 말은 관객들에게 폭소를 자아냈으나 그에게는 한과 설움이
쌓인 의미심장한 말이기도 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 80년 2월 TBC(동양방송)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의 녹화 도중 단역을 맡은 이씨가 사회자 곽규석에게 다가
가 불쑥 내뱉은 말.
훗날 그는 "답답해서 미치겠더군요. 내가 나가서 그걸 하면 참 잘하겠
는데 내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때의 기분을 그대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라고 술회했다.
▲"요즘 아이들이 커가니까 혼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큰애 결혼
시킬 때, 딸 가진 집에서 `이주일 집안과 사돈합시다'하고 기쁘게 딸
을 줄까, 또 우리 딸을 시집보낼 때 뉘집에서 우리 딸을 기쁘게 며
느리로 맞아 갈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누가 이주일네 집인데 `아이고 좋소' 한다면 나는 잘 살아온 것
이고, `아이고, 이주일네와 어떻게 사돈 맺어'하고 고개를 젓는다면
나는 잘못 살아온 겁니다." = 8
7년 2월 「월간조선」과 인터뷰.
▲"인기를 사절합니다" = 80년 영동고에 재학 중이던 이씨의 아들이
친구와 싸워 병원에 입원하자 탄식조로 내뱉은 말.
▲"정치도 잘돼야 코미디도 잘됩니다" = 정치와 코미디의 관계를 말.
▲"제가 방송 출연이 금지된 것은 다 중계방송을 잘못해서 그런 겁니
다. 연 날리기 대회였습니다. `네 많은 연들이 날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연들입니다. 한 년,두 년, 세 년 참으로 많은 년들입니
다. 한국년, 중국년, 일본년도 있습니다. 온갖 잡년은 다 모였습니
다. 턱 나온 년도 있고, 까진 연놈도 있습니다…'" = 80년 8월
전두환 정권하에서 방송출연이 금지됐을 때 밤업소에 출연해 펼쳤던
개그.
▲"만약 당신 집이 양조공장을 하고 직원이 50명인데 당신이 출마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직원들이 오지 않으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 14대
총선 당시 경기 구리시에 출마한 이씨의 유세장에서 상대방 후보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을 보고 `현대 직원들을 동원한 게 아니냐'고
말하자 이씨가 응수한 말.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 = 92년 14대 총선에서 통일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남
긴 말.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깐여?" = 밤무대 업소 CF에 출연하면서.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
▲"담배를 끊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 지난해 10월 말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뒤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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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디의 황제 故이주일씨를 기리며...부디 편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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