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선창으로 경진도 술잔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 갔
다.
“경진공!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소!”
“전하! 하명만 하시옵소서!”
경진이 입에 가져가려던 술잔을 조심스럽게 상에 내려놓고 세종
대왕의 말을 기다렸다.
“후세에 짐이 어떤 왕으로 평가되는지가 궁금하오!”
“예, 태조왕으로부터 시작해서 500년 왕업의 왕 중에 최고의
왕으로 평가되고 칭송받고 계시옵니다.”
경진이 존경어린 눈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말이오?... 하하하하! 내게 그런 거짓은 안 해도 괜찮
소! 혹시 영상이 시킨 것 아니오?”
“아니옵니다. 전하! 소인이 누구 안전이라고 거짓으로 고하겠
사옵니까?”
“그렇진 않을 것이오. 공이 내게 들으라고 좋은 말을 하는 것
일거요. 그럼 내가 실망이 크오!...”
세종대왕의 의외의 말에 경진은 적지 않게 당황이 되었으나, 갑
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저고리 속에 들어있는 지갑
을 꺼내어 만 원짜리 지폐를 똑바로 펼쳐서 세종대왕에게 공손히
건넸다.“
“이것이 무엇이오?”
“예! 종이로 만든 지전이옵니다. 전하!”
세종대왕이 만원짜리 지폐를 앞뒤로 돌려서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종이로 돈을 만든다 말이오?”
“예! 그렇사옵니다. 금액이 큰 것은 종이로 만들고, 작은 것은
동전을 사용합니다.”
“음!... 그런데 이것이 어째서 나와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예! 그 지전의 인물이 대왕님의 초상화이옵니다. 대왕님의 공
덕을 기리고, 그 은덕을 거울삼아 나라의 발전이 되게 함이옵니
다.”
“허허! 이 인물이 진실로 짐이라면 짐보다 더 잘생겼소 그려!
하하하! 허면 진실로 500년 이씨 왕업 중에 짐이 가장 위대하단
말이오?”
“예! 그렇사옵니다. 왕가뿐만 아니라 모든 문무 관리를 모두
포함해서 가장 위대하십니다.”
“허허....”
세종대왕이 경진의 답을 듣고는 못미더운 눈치와 더불어, 표정
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경진은 임금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유를 모르
고,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지폐를 보여준 것을 막연히 후회 했
다.
“그렇다면 우리 후손 중에 짐보다 나은 현군이 한 사람도 나오
지 않았다는 말인데,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오! 참으로 안됐도
다!”
‘아! 세종대왕님! 백성을 당신의 몸같이 두루 살피시고, 후손
의 번영을 걱정해 주시는 깊은 마음에 저는 탄복합니다.‘
경진은 세종대왕의 깊은 탄식소리에 스스로 깊은 존경심을 느끼
고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넓은 편전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종대왕이 상에 있는 지전을 흘낏 보며 침묵을 깼다.
“경진공! 보아하니 그 지전에 쓰여 있는 것이 글인 듯싶은데,
명나라 글도 아니고, 어디의 글이오?”
“예에?....”
경진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놀라며 반문했다.
“뭐를 그리 놀라오? 무엇이 잘못됐소?”
세종대왕이 경진의 놀람을 보고 약간 불쾌한 듯, 퉁명스럽게 물
었다.
“상감마마! 이 글씨를 정녕 모르신단 말씀이옵니까?...”
경진이 의아한 눈으로 세종대왕의 눈을 보며, 말을 받았다.
“글쎄!.. 짐은 도통 모르겠소. 짐과 관련이 된 것이 무엇인가
있소?”
경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계속 자신에게 반문하자, 세종대왕은
약간의 호기심을 보이며 경진에게 가까이 갔다.
“예, 그러하옵니다. 이 글은 한글이라 하옵고, 전하께서 심혈
을 기울이시어 창제하신 것이옵니다. 해서, 만백성들에게 깜깜한
눈을 일깨워 주시고,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배우고 익힘에
따라 나라 문화가 많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짐이 창제했다는 말이오?”
“예! 전하! 조선시대 4대왕이신 세종대왕 재위 25년 12월에 창
제가 된 것이옵니다.”
“허허! 나도 모르는... 내가 만든 일이 있다하니...영문을 모
르겠구려!...?
‘아! 어떻게 이런 일이?....그렇다면 지금까지도 세종대왕께서
는 한글에 대한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계셨다는 말인가?....‘
경진 자신도 강한 의문이 들어, 자조적인 독백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뇌리에 스치는 생각하나가 떠올랐다.
“전하! 아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지금이 재위 몇 년이시옵니
까?”
“음...글쎄요? 아마도 24년일까 하오!”
“하하하하!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경진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감히 세종대왕 앞에서 예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경진공 그 말이 무슨 뜻이오?”
“예, 전하! 이 글은 대왕마마 재위 25년 12월에 완성된 글 이
옵니다. 바로 명년 12월에 만든 글입니다.”
“음! 그렇다면 명년이겠구먼! 그런데 그 글이 그렇듯 훌륭하다
는 말이오?”
경진은 세종대왕의 반문에 할 말을 잃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
을 열었다.
“전하 그렇사옵니다. 전하시대에 백성들의 태평성대도 있었고,
장영실이란 출중한 발명가가 있어서 위대하심도 있으나 최고의 왕
으로 칭송되옴은 훈민정음 창제 때문이옵니다. 만백성이 어려운
한문 때문에 글을 남기고 싶어도 알 수가 없어 못 남기었고, 전달
도 할 수 없었거늘 한글로 인해 큰 편안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허!...그렇겠구먼! 그렇겠어!”
세종대왕의 눈빛이 큰 빛을 내며 경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
었다.
편전의 공기가 출렁거렸다. 세종대왕의 강한 의지의 기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경진공! 오늘 짐이 무척 즐거웠소. 그리고 많이 유익했소...
오늘 저녁에는 맑은 정신으로 훈민정음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자 하오!”
“예, 전하! 소신에게도 그 무엇인가의 소명의식이 따르옵니
다.”
세종대왕이 천천히 경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반쯤
구부린 경진을 바라보며 신뢰감이 가득 찬 눈으로 경진을 굽어보
았다.
“상선! 게 있느냐!”
“예. 전하 여기 대령하고 있사옵니다.”
상선이 조심스럽게 편전의 문을 열고 들어와 손을 모으며 다소
곳이 서있었다.
“여기 경진 공을 처소에 안내하게! 그리고 신심이 두둑한 내관
을 한명 딸려서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게!”
“예이, 전하!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하오면 전하께옵서
는...”
“다녀오게! 짐은 상선이 다녀올 동안 편전에서 생각할 것이 있
네!”
세종대왕은 큰 일이 생기거나 처리할 일이 있으면 혼자서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합당한 관료를 모아 토론하고 의견을 경청하며, 최종
적으로 결정하는 과묵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진 현명한 군주였
다.
“경진공! 상선이 안내해주는 처소에 가서 쉬도록 하오. 새벽
시각까지 짐을 보필하느라 피곤하겠소.”
“전하! 황공하옵니다. 오늘의 은덕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지
니겠사옵니다. 영광이옵니다.”
경진의 인사말에 세종대왕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상선을 보았
다.
“경진공! 처소에 드시지요. 안내하겠사옵니다.”
“전하! 소신은 그만 물러가옵니다.”
경진이 세종대왕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상선을 따라 밖으
로 나왔다. 밖의 공기가 싱그러웠다. 깊은 가을밤의 정겨운 풀벌
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마치 경연하듯이 들려왔다. 그는 숙취로 인
해 머리는 조금 무거웠으나 정신은 맑았다.
경진은 상선을 따라 중문을 거쳐 조그만 연못이 있는 곳에 다다
랐다. 고운 달빛을 받은 아름다운 누각이 연못에 우아하게 떠 있
었다. 그리고 좁은 길을 조금 더 따라가자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숙소에 다다랐다.
상선의 뒤를 따라가던 경진의 오른 팔에 하나의 팔이 감기었다.
그리고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졸려 죽겠어요.”
하품에 가까운 목이 쉰 미자르의 작은 음성이 그의 귓바퀴에 울
렸다.
경진이 앞에 가는 상선의 눈치를 보며 왼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찾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경진공, 오늘 밤엔 이 처소에서 거하실겁니다.”
조금 앞서가던 상선이 문 앞에 멈추어 기다리며 안내 말을 했
다. 아름다운 단청의 대문 앞에는 내관 한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손님일세! 잘 모시도록 하게! 그리고 아까 누누이 당부한대로
아무도 접근해서는 아니 되네! 알겠는가?”
“예! 명심하겠습니다. 상선어르신!”
상선의 깊은 당부에 비교적 젊은 내관이 허리를 조아렸다.
“경진 공, 나는 이제 그만 전하께서 계신 곳으로 가봐야 하
겠소. 불편하시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내관을 불러 하명
하십시오. 그럼 이만...”
상선이 경진을 내인에게 급하게 인계하고 촘촘히 사라졌다.
산자락 끝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집이었다. 어두운 밤임에도 불
구하고 새벽 달빛에 비추어진 예쁜 단청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경진 공, 드시옵소서! 방은 깨끗이 정돈해놨습니다.”
“알겠소! 오늘 밤에 전하께 보고할 일이 있어, 깊이 생각할 것
이 많으니 방 가까이에 근접하지 마시오!”
“예! 알겠사옵니다.”
경진은 내관이 어둠속에 감추어진 것을 확인하고 빈손으로 허공
을 더듬었다. 바로 옆에서 미자르가 만져졌다.
“미자르!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지요? 어서 들어갑시다.”
경진이 그동안 기다리느라 지쳐있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어 그녀의 손을 찾았다. 곧바로 그녀가 그에게 손을 주었다. 그리
고 경진이 앞장서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자르! 양반 촌에 머물던 곳보다 방이 더 예쁘네요?”
“그럼요! 당연하죠. 여기는 궁궐인데요.”
미자르가 방문을 닫고는 모습을 나타냈다.
경진은 그녀를 보자 가슴이 아리고 반가운 마음이 일어났다.
“혼자서 벌 많이 섰지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투명인
간으로 혼자 자리를 지켰으니 많이 힘들었겠어요.”
“후후! 알기는 아나 보네요? 내가보니까 주연 분위기에 푹 빠
져서 내 생각일랑 손톱만치도 안 해보이던걸요? 맞죠?”
경진은 피곤한 듯 보이는 그녀의 퀭한 눈을 들여다보며 지청구
를 들었다.
“미자르! 지금 내게 바가지 긁는 건 아니죠? 하하!”
그는 그 말과 함께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미자르가 경진에게 가볍게 안기었다.
“세종대왕님께서 무척 외로우신가 봐요.”
경진은 그녀의 행동에 마땅히 말할 구실을 찾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변명하듯 말을 했다.
“기껏 그 말이에요?”
그녀가 삐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살짝 밀쳐내고는 이부자리에
파고들었다.
“화가 단단히 낫군요. 그럴 만도 할 거예요....”
경진이 이부자리 속에 숨어있는 미자르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피곤해요. 그리고 자기도 자야죠. 오늘 저녁에 할 일도 있으
니까요.”
“그렇긴 해도 미안해서...”
그가 말문을 열다가 이내 닫았다.
“아니에요. 그냥 심통 한 번 부려봤어요. 자기가 내게 얼마나
관심이 있나 테스트 해봤어요. 호호!”
“이런 개구쟁이!...하하하!”
두 사람은 이부자리 안에서 꼭 끌어안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경진씨 불 좀 꺼줘요!”
경진이 구석에 있는 등잔불을 멀리서 입으로 불어서 껐다.
“옷을 입고 자는 여인!... 하하하!”
두 사람은 피곤에 지쳐서인지, 서로를 조금씩 만지다가 이내 잠
이 들고 말았다.
멀리서부터 문틈과 창문의 문풍지를 타고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
가 그들의 깊은 잠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의 해를 향해
서 깊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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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샘터
콩다칸 팥다칸(장편소설) - 세종대왕이 10,000원짜리 지폐에서 자신을 만나다(14회차)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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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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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휴일에는 쉬면서 하시지요.
세종대왕이 왜 현군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네요..지폐에 새겨진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후손중에 자신보다 더 나은 현군이 나오지 않았다고 걱정하는 마음...가슴 뭉클한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