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서 사는 삶 에4:13-17, 롬14:6-12
사람마다 삶의 목적과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유와 성공을 목적으로 삼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공한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풍요와 보람과 행복과 장래의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우리 돈으로 수천억 이상의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들과 평균소득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여 억만장자가 평균소득을 가진 사람보다 얼마나 행복할까를 실제로 조사한 내용이 있는데 이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억만장자가 더 행복하다고 나왔지만 아주 조금만 더 행복할 뿐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1960년에 비해 1990년 미국인들의 실질국민 소득은 두 배 이상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1960년과 1990년에 조사한 행복지수에 대한 조사결과는 1960년에는 상당히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이 30%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30년이 지나 실질소득이 두 배 이상 오르고 난 1990년도에도 정확하게 30%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이는 행복이란 소유와 명예와 소위 성공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장래에 소망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정말로 가치 있고, 의미 있고, 보람 있고, 장래에 소망이 있는 것이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두 본문을 통해 주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삶의 목적과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주님 앞에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 앞에 사는 삶은,
1.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그리 길지가 않습니다. 모세는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신속히 가니 날아간다고 했으며, 그 발자취를 보면 한 점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바로 살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고백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약 본문 롬14:8에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믿기 전에는 내 중심으로 자기만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외에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좀 바르게 사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빼앗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의 것을 주고 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알고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몸도, 재능도, 재물도, 시간도 내 것이 아닙니다. 주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사신 주의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과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받은 하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7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지라도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본문에 보면 모르드개가 하닥을 통해 에스더를 찾아가서 유다 민족이 한날한시에 모두 다 죽게 될 긴박한 위기 상황을 전해주면서 왕에게 들어가서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부탁을 합니다.(8절) 전갈을 받은 에스더는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하라."(11절)고 답변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와 법은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한 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다른 이유는 에스더는 왕비가 된 후 5년 동안 왕궁생활의 풍요함에 젖어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가 어떤 일로도 손상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만일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 유다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 한다면 자기 신분이 유다 출신 고아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의 왕비 자리가 위태롭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에스더는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만 생각하고 "나는 왕 앞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했던 것입니다.
에스더의 변명하는 말을 듣은 모르드개는 13-14절에서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서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이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고 말하며 하나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에스더의 이기적인 믿음을 일깨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에 대해 말해 준 것입니다. 주님 앞에 사는 삶은 나는 주의 것이라는 고백 가운데 사는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사나 죽으나 주님 위해 살기로 결단하며 사는 삶입니다.
신약 본문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자는 이제 자신을 위해 사는 자도, 자신을 위해 죽는 자도 아닙니다. 사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것이기에 이미 우리는 벌써 주님께 위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찬송가 가사처럼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가 되어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고전6:19-20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했습니다. 고후5:15에서도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이제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요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고, 사랑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가 되고, 그런 자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분명한 소유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로마 황제인 가이사가 주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사자에게 찢겨 죽지 않을 수 있는데도 저들은 한 결 같이 짐승에게 찢겨 죽으면서도 예수님이 나의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본문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로부터 도전이 되는 말을 듣고 난 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16절에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했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에게 어떠한 희생이 있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지위와 명예 부요함을 주신 것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을 때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고, 건강과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에스더가 하나님께 다시금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영향을 주었던 모르드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모르드개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여 앞서 본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생기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사나 죽으나 주님 위해 살기로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 앞에 설 때를 대비하는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생을 가리켜 잠깐 있다 시드는 풀과 꽃으로, 안개로, 나그네로, 외국인 등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약 본문 11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에 주께 속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나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하여 직접 결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대체적으로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심판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해밀톤(Adam Hamilton) 목사의 설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때 뉴욕에 존재하던 드루드회(Druidical Society) 는 36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단체로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이 단체가 극단적으로 기독교를 조롱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불태우고 개에게 세례를 베풀고 개와 함께 앉아 성찬식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날 저녁 드루드회 회장은 눈이 퉁퉁 부어 튀어나오고 혀가 부풀어 오르는 고통을 겪다가 새벽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5년 동안 회원 중 8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2명은 굶어 죽고, 7명은 단두대에서 죽었으며, 1명은 경련을 일으켜 죽었고, 7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5명은 자살하고, 1명은 추위에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로우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책망하는 말을 듣고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하는 것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부름을 받기 전에 왕 앞에 나가 교만한 하만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유다 민족을 구원해 내는 일을 했습니다. 유다 민족은 물론 에스더서를 대하는 많은 성도들이 에스더를 존경하며 흠모하는 이유는 에스더가 미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스더가 왕후로 높아진 가운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에스더를 존경하며 기리는 이유는 에스더가 자신의 안일하고 이기적인 생활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흠모하며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그 복속에 젖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나누고 드리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설 때를 대비하며 살다가 칭찬과 상급을 받는 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두 본문을 통해 주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삶의 목적과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주님 앞에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 앞에 사는 삶은,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 위해 살기로 결단하며 사는 삶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를 대비하는 삶입니다. 아멘.
<2024. 08. 28. 호현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