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3-2. 우리 곁의 소시오패스
공리주의와 가성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고, 선로 앞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서 있다. 열차를 이대로 둔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명이 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다행히 열차의 선로를 바꿀 수 있는 레버가 나의 눈앞에 있다. 그 레버를 당기면 열차는 다른 선로로 방향을 틀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다른 선로에는 또 다른 한 명이 서 있다. 다섯 명이든 한 명이든 어느 쪽도 대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여기서 레버를 당겨 선로를 바꾸는 게 옳은 행동일까?
‘트롤리 딜레마’라고 불리는 이 문제는 곧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여도 되느냐는 질문과도 같다.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한 명을 희생시켜서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공리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이 문제를 앞에 두고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고민하는 이유 또한 바로 그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문제를 단순히 수치적 이익으로 계산할 수 없다.
사실 공리주의라고 하면 무척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영어로 번역하면 Utility다. 효용과 가성비. 우리가 물건을 사거나 경제적인 결정을 할 때 늘 판단의 기준이 되는 그것 말이다. 조금이라도 에너지와 비용을 아껴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 판단은 옳다. 그러나 가성비가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사람을 사귀거나 관계를 이어갈 때 효용이나 가성비를 따질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시간을 나누고 감정과 정서를 교류한다. 그러나 사람을 도구로만 보고,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있다. 문제는 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스릴러 장르를 통해 ‘사이코패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일컫는 말인데, 영화나 드라마 속 연쇄 살인마의 모습이 바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사이코패스들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나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전두엽에 이상이 있는 경우가 많아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즉흥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번죄를 일으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사실 일반인이 살면서 사이코패스를 만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류는 소시오패스다. 인구 전체의 4%를 차지한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수치면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확률이다. 10년에 한 번 내지는 5년에 한 번은 이들과 마주칠 것이며, 안 좋은 경우엔 아주 가까운 사이로 오래 지낼 수도 있다.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처럼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지배력이나 정복욕이 강하다. 자기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필요한 순간에 친근하게 다가와 두터운 친분을 쌓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린다. 그냥 버리지 않고 다시는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짓밟아 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머리가 좋고 영리하며, 연극에 능하다.
사이코패스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비해, 소시오패스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조절할 수 있으며 타인의 감정 또한 이용할 줄 안다. 목표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엾고 연약한 표정을 짓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치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말이다.
충동적인 범죄를 저지른다기보다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상대를 기만하여 반사회적인 행동을 거듭한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걸렸을 때는 동정심을 이용하여 그 상황을 빠져나가고자 한다.
소시오패스 양성하는 사회
소시오패스는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철저히 보통 사람처럼 위장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걸러 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런 소시오패스를 알아내는 것이 심리학자의 특명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소시오패스,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특정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적이고 본능적인 패턴을 알아낸다면 숨어 있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가정에 성인이 된 자매가 있었다. 어느 날 여동생은 오랜만에 아버지가 홀로 사시는 집을 찾아왔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기에 어렵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놀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119에 신고를 했고, 아버지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버지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니 동생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연락을 받은 언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반적인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말 몇 가지는 쉽게 떠오른다. “거기 어디야, 나 지금 갈게.”라든가 “아빠 괜찮아?”,“너는 좀 어때?” 등 지금 곤경에 처한 사람을 가장 먼저 걱정하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소시오패스 성향이 있었던 언니의 대답은 이와 달랐다.
“너 왜 응급실 들어가기 전에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언뜻 들으면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알고 나면 소름끼치는 한마디다. 아빠의 안위나 동생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연락을 미룬 것에 분노의 초점이 맞춰진다. 그것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심각한 문제는 인간을 도구화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소시오패스를 키워 내기에 적격의 환경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직원을 채용할 때 팔을 걷고 나서서 소시오패스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기업들도 있다. 압박면접을 행하는 회사들이 많다고 한다. 구직자에게 모욕감과 수치심,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말 그대로 압박적인 질문을 통해 순발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런 학교도 있어요? 처음 듣는데?” “외국어는 관심이 없었나 봐요?” “집이 잘 살아서 아르바이트는 안 했나 보죠?” 등 상대적으로 부족한 약점이나 콤플렉스를 들춰내기도 하고, 구직자의 답변을 듣고 대놓고 비웃거나 일부러 일그러진 표정을 짓기도 한다. 누구라도 그 앞에서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모욕감 앞에서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잘 피해 나가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자신의 감정조차 쉽게 속일 수 있는 소시오패스라면 이러한 압박면접 정도야 능청스럽게 통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유리한 사회,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조금은 교활한 것이 곧 능력인 사회,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고 필요하다면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가 바로 소시오패스형 사회다.
100명 중 4명. 소시오패스는 생각보다 많다. 당신 주변에도 분명히 존재할지도 모른다. 당신의 상사나 주변의 성공한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너무 가까이에 있다면 알아보지 못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이 비대면 사회에서 그와 당신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을 것이다. 이럴 때야말로 내 주변의 관계를 점검하기 좋은 시기다. 모든 관계가 나에게 행복을 선사하지 않는다. 나쁜 관계는 가차 없이 끊어 내야 한다. 좋은 관계를 늘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첫걸음이다. 코로나가 만들어 낸 이 상황은 그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3장 ‘팬데믹 이후의 공동체’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