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맛 좋은 시를 위한 몇 가지 당부 / 박정원 (詩人)
1. 구체적인 현실 위에 얹힌 시가 좋다
한편의 수필을 쓸 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절절한 구성이 필요하듯 시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起承轉結의 4단 구성을 염두하고,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한다는 마음으로 전개한다. 이는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읽을 때, 그들이 어떻게 시상을 전개하는지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웃집 / 안도현
이웃집 감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가지 끝에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도 몇 개 데리고 우리 집 마당으로 건너왔다
나는 익을 대로 익은 저 홍시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몇날 며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당장 따먹어버리자고 했고, 딸은 절대로 안 된다 했다
이웃집 감나무 주인도 월경(越境)한 감나무 가지 하나 때문에 꽤나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홍시를 따먹었는지, 그냥 두었는지 여러 차례 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서 홍시가 떨어질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한다 밤중에 변소에 가다가도 감나무 가지에 불이 켜져 있나, 없나 먼저 살핀다고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감나무 때문인가 홍시 때문인가 울타리 때문인가
2. 감성적인 표현은 가급적 자제하라
시어에서 관형어나 수식어를 자주 사용하면 시를 유치하게 한다. 그것들을 삭제해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내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의 행간은 정확해야 하며, 마음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관념어(추상적인 단어나 시인의 마음을 여실히 나타내는 표현)는 피해야 한다.
동심초/ 박정원
어머니 가슴에 맺힌 종양을 병원에서 덮어버린 그날부터 아버지는 곡기를 끊으셨다
아버지, 어머니 가시던 날 아침 어머니 보다 먼저 꽃잎처럼 지셨는데
사막이란 사막은 죄다 우리 집으로 몰려와 웅성거렸다 사막한가운데 꽃 두 송이가 같은 날 같은 시각 피었는데 아무도 그 꽃 이름은 모른다고
3. 같은 어휘를 반복하지 않는 미덕을 가져라
한편의 시에서 같은 말이나 표현이 두 번 이상 중복된다는 것은 어휘력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다. 필요할 경우, 국어사전이나 유의어사전 등의 도움을 받아 비슷한 말이나 다른 표현을 찾아 쓰도록 해야 한다. 다른 시를 쓸 때도 한번 쓴 말이나 표현은 되도록 피하도록 노력한다.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4. 때로는 간접체험이나 상상력을 동원한 시적장치도 필요하다
정서적인 내용(마음의 상태)은 풍경이나 분위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하나의 선명한 그림이 떠오르도록 해야 한다.
열무밭에서 / 박정원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것들에게 몸을 낮춘다 여린 이파리를 들추자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열무
누가 놓고 갔는지 천국영아원 골목엔 아기 혼자 포대기에 안긴 채 울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연락처도 없이 사라진 아기엄마는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내 속 같았을까
돌아가는 모퉁이엔 온통 대못만 박혔으리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할 저녁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을 떨어뜨릴까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5. 시대상황에 맞는 신선한 은유는 시를 맛있게 우러낸다
이미 남들이 쓴 표현을 그대로 빌려 쓴다면 진부한 시가 될 것이다. 다른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나는 이렇게 표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고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 비유 역시 마찬가지인데,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내적 계기가 없는 결합은 신선한 것이 아니라 황당한 것에 그치고 만다.
새 / 정호승
새가 죽었다 참나무 장작으로 다비를 하고 나자 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 겨울 가야산에 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 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새떼처럼 몰려왔다
6. 내가 인식한 것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라
대상을 볼 때, 나만의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남들과 똑 같은 생각을 지니고 사물이나 현상을 본다면 아주 진부한 발상에 불과하다. 가령, 가을이란 계절을 고독이나 결실 등의 내용과 직접 연결한다면 그야말로 진부한 발상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탐색이 필요하다. 이것이 충족되었을 때, 발상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7. 뒤울림은 한동안 먼 산을 올려다보게 만든다
이를 위해서는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아껴야 한다. 시의 앞부분을 읽고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면 뒷부분은 전혀 필요 없는 사족에 불과하다. 보통 시에서 끝 부분에 주제가 응축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고드름 /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들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와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가리키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 소리
결국엔 물이었다 한 바가지 들이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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