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는 1890년,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상옥 열사의 삶은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완전히 뒤바뀌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리고 10명으로 이뤄진 비밀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의 1차 목표는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동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암살계획은 사전에 누설되고 말았다. 암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상옥 열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서 무력항일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권총과 폭탄을 소지한 채 서울로 잠입했고, 마침내 1923년 1월 12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후 유유히 사라졌다.
김상옥 열사의 최후
'종로경찰서 투탄의거' 이후 김상옥 열사는 혼자서 일본 경찰과 몇 차례의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종로경찰서 투탄의거'가 일어난 지 10일이 지난 1923년 1월 22일. 수백 명의 일본 경찰에 포위된 김상옥 열사는 쌍권총을 든 채로 서울시 효제동에서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당시 김상옥 열사는 무려 3시간 동안 일본 경찰과 수백대 1로 대치하면서 16명을 사살하고 열 발의 총알을 맞았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총알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서 쏘았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있다.
첫댓글김상옥 열사는 조선 애국지사들의 무덤이었던 종로경찰서에 1923년 1월12일 저녁8시 10분경에 폭탄을 던져 일본경찰 3인을 포함하여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1919년 3.1운동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것을 한다면서, 더욱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는 편가르기와 이간책, 민족이 민족의 뺨을 치게하는 가축취급하는 모욕주기등,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조선민중을 개돼지 취급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다 못한 이상옥열사는 독립운동에 제몸을 불사르기로 했다.
그 이전까지의 폭탄은 별 그렇게 성능이 좋지 못했다. 간혹 터지지 않아서 불발이 되거나,살상범위도 강하거나 넓지 못했다 그러나.
김상옥 열사는 의열단에서 제조한 폭탄을 사용했던 것이다. 당시 몽골에서 의료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의사 이태준의 소개로 폭탄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자르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폭탄제조기술을 배워 의열단에서 이전까지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의 폭탄을 만들었는데, 김상옥 열사가 사용한 것이다.
첫댓글 김상옥 열사는 조선 애국지사들의 무덤이었던 종로경찰서에
1923년 1월12일 저녁8시 10분경에 폭탄을 던져 일본경찰
3인을 포함하여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1919년 3.1운동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것을 한다면서,
더욱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는 편가르기와 이간책,
민족이 민족의 뺨을 치게하는 가축취급하는 모욕주기등,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조선민중을 개돼지 취급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다 못한 이상옥열사는 독립운동에 제몸을
불사르기로 했다.
그 이전까지의 폭탄은 별 그렇게 성능이 좋지 못했다.
간혹 터지지 않아서 불발이 되거나,살상범위도 강하거나
넓지 못했다 그러나.
김상옥 열사는 의열단에서 제조한 폭탄을 사용했던 것이다.
당시 몽골에서 의료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의사 이태준의 소개로
폭탄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자르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폭탄제조기술을 배워 의열단에서 이전까지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의 폭탄을 만들었는데, 김상옥 열사가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