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으로 삼라만상을 뒤덮는 해질녘, 자그마한 암자 낮은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바람을 따라 뽀실뽀실 피어오른다.
‘황혼의 연가(戀歌)’로 물드는 노을빛 고운 풍경이 참으로 아련타 못해, 추억으로 묻어나와 연가에 지글지글 타오른다.
굴뚝은 천태만상이지만 제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반가운 까치요, 저마다 향기 품은 소식을 건네주는 행복 배달부다.
그대들은 따사로운 훈짐으로 봉함을 풀어주면 그만이지만, 거기, 그대가 한바탕 꿈속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봄이, ‘연둣빛 연서(戀書)’ 촉촉이 입에 물고 실타래처럼 포르르 풀려나온다.
어느 새 정겨움이 묻어난다.
흔적도 없이 한 줌의 회색 연기로, 기억 속에 묻혀 사라져간 지난날의 꿈들이여. 촉촉한 회한으로 삭기 전, 닫힌 빗장을 열고 싫컷 울어 보자니 아직도 그 곳에 홀로 남아 우뚝 서 있네.
나 하나의 모든 그리움, 살랑거리는 꽃바람에 가득 실어 보낸다. 그동안 거의 매일 속앓이를 했던 숱검댕이 속내가, 오늘따라 퍽이나 통통하게 느껴진다.
쌍계사 계곡의 물빛은 여전히 맑다 못해 투명하다. 이에 질세라, 국사암 수풀은 명징한 푸른색, 알싸한 빛깔로 다가오는 존재. 봄뜻을 가득 머금어 분별이 없건만 느끼는 정만큼은 깊고 얕음을 저울질하네.
그대들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햇살로 다가와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앵두빛 자태 고운, 두 볼에 슬픔을 삼킨다. 이내, 동백 향기도 부처님같은 여린 입술을 떨군다. 눈물진 이 생명을 바치겠노라고 속삭이면 무장무애의 법계(法界)가 둥지를 튼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쌍계사 국사암 인법당 뒤뜰 굴뚝이 시시각각 뿜어내는 검은 연기로 야금야금 숲 속을 사위어간다.
5층 높이로 쌓아 올린 기왓장과 진흙의 황금 분할은 뭇사람을 홀리는 꽃뱀같고, 날씬한 제비가 아닌가.
마곡사 굴뚝은 오늘도 수키와들이 아랫 부분을 수십 겹으로 꽁꽁 받쳐주고 있다. 이즈음 암키와들도 흙과 서로 섞인 채 호리호리한 맵씨를 뽐낸다.
누구의 기찬 발상이었을까. 담을 쌓으면서 한 켠에 글씨를 박아 놓은 소쇄원의 풍류와 여유는.
계류(溪流) 위의 외나무다리와 죽교, 아름다운 토석담과 담벽에 새겨져 있는 글씨 ‘오곡문’, ‘애양단’, ‘소쇄처사 양공지려’.
원(園)이 운치를 더하고 있는데다가 울창한 죽림과 배롱나무, 느티나무 등이 계류, 정자 등과 어우러져 시나브로 ‘하늘 닮은 마음’도 멀잖다.
‘소쇄처사 양공지려’라는 검정 글씨는 ‘회사후소(繪事後素)’ 즉,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깔린 다음에 가능하다’는 공자의 말을 현실화한 징표다.
‘‘시경’에 ‘방긋 웃는 그 입술 곱기도 하며, 아리따운 눈동자 샛별 같아라. 얼굴이 희어서 더욱 고와라’ 하였으니 바로 이 말의 뼈대인가’
숱한 인고의 시간은 기본을 청아로이 다듬게 하는 주춧돌이 되고, 거센 비바람과 싸우다가 꽃보다 키 작은 대나무 바자울이 됐네.
대구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는 진흙과 기와를 겹겹이 쌓은 담장에 한송이의 꽃을 새겨 넣는 여유를 지녔어라.
쩝쩝쩝, 부드럽게 목에 감기는 대구사과의 맛이 새록새록 헛담의 기능으로 전이돼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꼭두 새벽, 조용히 내려앉는 이슬에 놀라 부스스 깨어나는 능소화처럼 살갑게 살고 싶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의 바램이 소담스런 주황빛으로 뚝뚝 흘러 솟을대문 앞을 지나는 사이, 사랑도 평화도 탄탄대로가 된다.
‘비단 위에 꽃을 더한’ 금상첨화로, 풍요로움과 편안함의 길이 잔칫날의 멍석마냥 널찍하게 펼쳐졌으면 더 없이 좋겠다.
외암마을 돌담길 모퉁이를 살짝 돌아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숨어 있는 듯 길손을 맞는다.
외갓집의 추억조차 빌딩 무성한 아스팔트길에 두고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흙)돌담길은 아련한 추억보단 이색(異色)에 가까운 오늘에서는.
안보다 밖을 먼저 생각한 꽃담은 삶의 여유이며 타인을 위한 배려의 소산물. 지나가던 발길을 예서 멈춘다.
꽃담은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게 하는 미동(微動)마저 ‘생명의 노래’, ‘환희의 노래’로 승화시키면서 내 삶의 터줏대감이 된다.
‘자진모리’ 격렬한 율동으로 한바탕 신명나게 노닐새. 변화무쌍한 유희가 지금 막 한 옥타브 차츰차츰 내려갈 무렵, 자칫 잃어버릴뻔 했던 보금자리를 찾았다.
이 순간, 이름마저 알 수 없는 나비들이 떼지어 춘정에 잠 못든 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졸지에, 황사로 뒤덮인 들꽃들의 절규와 피울음이 들려온다. 사랑하는 그대! 지금 어디 만큼 지나가고 있는가.
1권 ‘우리 동네 꽃담’이 찹쌀 고추장에, 오방색 고명을 꽃밭처럼 수놓은 푸진 비빔밥 상차림을 선보였다면, 이번 '한국의 옛집과 꽃담'은 고등어 조림과 된장 찌개, 묵은지, 나물 반찬 서너 가지에 불과한 담백한 식탁이지만 고향집 뒤란 같은 정겨움과 무공해 산골 아가씨 같은 수줍은 미소 지음이다.
도도한 물결에 이 조그만 종이 조각배를 접어 꽃담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살포시 띄워 보내는 오늘.
애써 서두르지 않고 한 뼘의 여유를 지닌 채 세상의 파고를 무사히 뛰어넘을 수 있도록 님 오시는 길목에 나지막한 화초담 하나 쌓으며 ‘다운 시프트’(Down Shift)로, 앙증맞은 굴뚝 하나 곁에 두고 나를 버리는 연습을 한다. (한국의 옛집과 꽃담 서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