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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돈의역사 을 읽었다. 저자는 피할 수있다면 좋지만 불가피하다면 유랑도적보다 정착도적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라고 한다. 장기간 착취하기위해 죽이지는 않기 때문에. 하지만 정착도적도 나름이다. 구체적으로 로마제국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세금을 징수했지만 도로 등을 건설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기여자에 대해 민족을 차별하지않고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일본제국은 착취를 위한 최소한의 사회투자만을 하고 2등시민으로 조선족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쳇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다. 유랑도적이 피해범위가 커질 수있지만 정착도적도 장기간 지속적인 피해를 줄 수있기 때문이다. 30
역참제도(驛站制度)는 옛날 국가가 공문서 전달과 관료·사신·군대의 이동을 위해 설치한 공식적인 교통·통신망이다. 길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역(驛)이나 참(站)을 설치했다.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역참에 도착하면 말을 갈아타고, 식사와 숙박을 제공받고, 필요한 경우 안내 인력이나 수레를 제공받고, 다음 역까지 이동했다. 특히 긴급한 국가 문서를 전달할 때 중요했다. 역참제도가 잘 갖춰지면 중앙정부가 먼 지방까지 빠르게 명령을 전달하고, 지방의 상황을 중앙에 신속하게 보고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역참은 단순한 여관이 아니라 국가의 행정·군사·통신을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역참제도가 중요한 국가제도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역(驛)을 중심으로 역마와 역리 등이 배치되어 관료와 공문서의 이동을 지원했다. 흥미로운 점은 역참제도가 사람과 정보의 이동을 빠르게 만든다는 점에서 현대의 우체국·고속도로·통신망이 결합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루 주파거리인 40키로 정도마다 역참을 설치하여 새 말을 상시 준비했다. 몽골제국은 공무원은 물론 14세기에는 상인들에게도 개방해서 후순위지만 활용가능하게 했다. 그들도 급히 운송해야 하는 상품이 있었고 이는 사회효용의 증가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44 저자가 흑사병이 산업혁명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둘은 직접 연결된 사건은 아니지만, 유럽 사회의 구조를 크게 바꾼 두 개의 거대한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14세기 흑사병은 유럽을 강타했다. 유럽 인구의 상당한 비율이 사망하면서 노동력이 크게 줄었다. 그 결과:
* 노동력이 귀해져 농민·노동자의 협상력이 커짐 * 임금 상승 압력이 생김
* 봉건적 농노제가 약화되는 계기가 됨 * 토지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짐 * 사회·경제 구조가 크게 흔들림 즉,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노동력이 부족해진 것이 중요한 경제적 변화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기계·공장·증기기관을 중심으로 생산 방식이 크게 바뀐 과정이다.
* 농업 중심 → 공업 중심 * 수공업 → 기계 생산
* 농촌 → 도시 * 생산량 급증 *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계층 확대
즉 흑사병→ 인구 감소→ 노동력 부족→ 임금·노동 조건 변화→ 농노제 약화와 경제구조 변화→ 시장경제의 확대→ 수백 년에 걸친 경제·기술·사회 변화→ 산업혁명
산업혁명에는 석탄, 증기기관, 자본 축적, 과학기술, 무역, 제도, 인구 증가와 시장 확대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구감소에 따른 인건비상승에 대해 대응하기위해 기계화 유인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건비가 낮은 프랑스보다 높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흑사병은 ‘사람의 급격한 감소’가 사회를 바꾼 사건이고, 산업혁명은 ‘기계와 에너지의 급격한 증가’가 사회를 바꾼 사건이다. 49
장궁(長弓)과 쇠뇌(弩)는 둘 다 활의 원리를 이용한 무기지만, 사용하는 방식과 장점이 크게 다르다.
| | 장궁 | 쇠뇌 |
| 구조 | 긴 활을 손으로 당김 | 활을 가로로 장착하고 방아쇠로 발사 |
| 사격 속도 | 빠름 | 느림 |
| 훈련 | 많은 훈련 필요 | 상대적으로 적은 훈련으로 사용 가능 |
| 사거리 | 매우 긴 편 | 종류에 따라 다양 |
| 관통력 | 강력 | 강력한 화살을 사용할 수 있음 |
| 휴대 | 비교적 간편 | 상대적으로 무거움 |
| 장점 | 숙련자가 빠르게 연속 사격 | 조준하고 장전한 상태로 대기 가능 |
장궁은 사람의 힘과 숙련도가 중요하고, 쇠뇌는 훈련은 적게 필요하지만 기계적인 장력 유지 장치가 있기에 직접제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즉 장궁은 활시위를 당긴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근력이 필요하지만 쇠뇌는 시위를 당겨서 걸어놓은 뒤 방아쇠를 당겨 발사할 수 있다. 그래서 쇠뇌는 상대적으로 짧은 훈련으로도 강력한 사격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숙련된 장궁병은 매우 빠른 속도로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 두 무기는 상당히 다른 군사적 역할을 했다. 특히 영국 장궁병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기사와 싸울 때 유명해졌다. 장궁은 숙련된 병사가 대규모로 운용할 경우 매우 강력한 원거리 화력을 제공했다.
쇠뇌는 성벽 방어, 보병전, 용병 등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되었다. 장전해 놓고 기다릴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장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것이 더 강한가?”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느 쪽이 유리한가?”다.
* 빠른 연속 사격 → 장궁 * 강한 장력과 조준 편의 → 쇠뇌
* 짧은 훈련으로 운용 → 쇠뇌 * 숙련된 병사의 지속적인 원거리 사격 → 장궁
즉, 장궁은 사람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무기이고, 쇠뇌는 기계적 장치를 이용해 사람의 힘과 숙련도에 대한 의존을 줄인 무기라고 이해하면 쉽다. 역사는 영국 장궁부대가 대륙 쇠뇌부대를 제압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에서 장궁부대를 육성하지 못한 이유로 저자는 내부 반란제압이 필요했던 대륙의 왕조가 외부침략보다 더 왕권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누군가의 생각은 알 수없다. 다만 행동을 보고 유추할 수있기에 나도 동의한다. 59
현시선호(顯示選好, revealed preference)란 말로 표현한 선호가 아니라, 실제 선택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추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 A와 B 중에서 A를 실제로 선택했다 * 두 상품을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 그런데 A를 선택했다 → 경제학에서는 그 사람이 당시에는 A를 B보다 선호했다고 ‘행동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한계가 있다. 실제 선택에는 가격, 소득, 건강, 습관, 정보 부족, 다른 사람의 영향 등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한 번의 선택만으로 그 사람의 진짜 선호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중세유럽에서 약한 쇠뇌선호는 장기간 지속되었다. 64
신대륙에서 막대한 은을 확보한 스폐인의 현실은 그리 좋지않다. 핵심적인 이유는 “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스페인이 은을 생산성과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 신대륙의 은이 물가를 폭등시켰다; 16세기 이후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양의 은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포토시 은광 같은 거대한 은광이 있었다. 은이 갑자기 많이 풀리면서 유럽 전역에서 물가가 크게 상승한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 일어났다. 즉, 은 증가 → 화폐량 증가 → 물가 상승이 일어났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해외에서 물건을 사는 비용도 올라갔다.
2. 은으로 국내 산업을 키우기보다 수입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스페인은 은을 가지고 네덜란드·영국의 직물 북유럽의 곡물 무기 선박 각종 공산품 등을 사들였다. 따라서 아메리카 은 → 스페인 → 외국 상품 구매 → 은이 다시 해외로 이동하는 흐름이 강했다. 반면 영국·네덜란드 등은 무역과 제조업을 발전시키면서 생산능력 자체를 키웠다.
3. 전쟁에 엄청난 돈을 썼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쟁 비용 등이 막대했다. 그래서 은이 들어와도 은 → 군사비 → 국고 고갈이라는 구조가 반복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페인이 은을 담보로 외국 금융업자들에게 돈을 빌렸다는 것이다. 결국 은이 들어오는 순간에는 부유해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빚 부담이 커졌다.
4. 제조업 경쟁력이 약해졌다; 은이 풍부하면 국내에서 힘들게 물건을 생산하기보다 외국에서 사오는 것이 쉬워진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국내 제조업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네덜란드와 영국은 상업 → 금융 → 제조업 → 해운 → 식민지가 서로 연결되는 구조를 발전시켰다. 스페인은 상대적으로 은과 군사력에 의존하는 구조가 강했다.
5. 네덜란드와 영국이 새로운 경제 모델을 만들었다; 17세기로 넘어가면서 패권 경쟁의 중심이 바뀐다.
스페인 → 네덜란드 → 영국으로 해상·상업 패권이 이동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같은 조직은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자본·무역·해군·식민지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였다. 영국 역시 이후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생산력의 폭발을 경험한다.
스페인의 사례를 단순화하면 천연자원 = 부가 아니다. 생산능력을 잃으면 자원이 오히려 경제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와 연결해서 생각한다. 석유가 엄청나게 나는 나라가 반드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반대로 일본이나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교육·기술·제조업에 투자하여 부유해지는 경우도 있다. 결국 부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그 부로 무엇을 만들어냈느냐다. 그래서 자산상속보다 지식상속이 중요하다. 84 저자는 기온강하가 미혼여성을 증가시켰고 일부는 결국 노처녀로 사회의 부담이 됨으로서 마녀사냥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1. 16세기 유럽의 기후; 보통 소빙기(Little Ice Age)가 시작·진행되던 시기다. 기후가 나빠지면 농업 생산량이 줄고 곡물 가격이 상승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히 큰 타격이 된다.
2. 미혼여성이 증가한 이유; 16세기 이후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결혼하지 않는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혼하려면 보통 직업 + 일정한 소득 + 독립적인 가구를 만들 능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아예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다.여성의 경우에는 결혼하지 않고 하녀·가정부·방직 노동자 등으로 임금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3. 기후와 미혼여성의 관계; 여기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기후 악화 → 흉작 → 식량가격 상승 → 실질임금 하락·생활비 상승 → 가구 형성 비용 증가 → 결혼 지연이라는 경로가 가능하다. 이것이 유럽의 인구 증가를 제한하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 인구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하다. 94
스위스 용병이 특히 유명했던 이유는 중세 말~근세 초 유럽에서 “싸움을 잘하는 보병”이라는 명성이 실제 전투력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1. 산악지역의 생활환경; 스위스 지역은 작은 공동체들이 오랫동안 자치와 군사훈련을 중시했다. 젊은 남성들이 민병대 형태로 무기를 다루는 전통이 강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빠르게 동원할 수 있었다.
2. 장창 밀집대형이 강력했다; 스위스 용병의 대표적인 무기가 장창(Pike)으로 수천 명의 병사가 밀집대형을 만들었다. 그래서 기병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중무장 기사의 기병 돌격을 보병이 정면에서 막아내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인상적인 일이었다.
3. 공격적인 전투 방식;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밀집대형으로 빠르게 전진하면서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위스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후 스위스 용병의 명성이 유럽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4. 용병으로서의 신뢰성; 스위스 사람들에게 용병은 상당히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 스위스 각 주와 용병대는 외국 군주와 계약을 맺고 병력을 제공했다. 따라서 단순히 개인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병력으로 계약에 따라 움직이는 전문 군사력이었다.
5. 교황청 근위대; 오늘날까지도 스위스 용병의 명성을 상징하는 조직이 바로 스위스 근위대(Pontifical Swiss Guard)다. 1506년부터 교황을 경호해왔다. 다만 오늘날의 스위스 근위대는 역사적인 용병대와 역할과 선발·훈련 체계가 다르다.
스위스 용병의 전성기는 화약무기와 총기, 포병이 발전하면서 점차 끝나게 된다. 장창 밀집대형은 강력했지만, 장창 + 총병 + 포병이 결합되면서 전쟁의 중심이 점차 화약무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보병으로 이동했다. 즉, 기사 중심 → 스위스 장창병 중심 → 총병·포병 중심으로 유럽 전쟁의 양상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스위스 용병의 역사는 “개인의 용맹보다 조직·훈련·전술이 군사력을 결정한다”는 군사사의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106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발생한 이유로 저자는 막대한 무역이익, 도시국가간의 경쟁, 그리고 전쟁을 통해 용병에게 분배된 자금, 용병들의 과시소비라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다. 르네상스는 한 가지가 아니라, 경제력·도시국가 경쟁·고대 로마의 유산·정치적 후원·지중해 무역이 한꺼번에 결합했기 때문이다.
1.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다는 점; 이탈리아에는 로마 제국의 유적과 문헌이 많이 남아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도 로마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건축물·조각·비문·도로·공공시설 등 고대 유산이 일상적인 공간에 훨씬 가까이 존재했다. 그래서 14~15세기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스·로마를 다시 연구하면서 “고대의 인간과 문화를 다시 살려내자”라는 생각을 발전시키기 쉬웠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핵심인 인문주의(humanism)와 연결된다.
2. 이탈리아 도시들이 매우 부유했다; 특히 피렌체·베네치아·제노바·밀라노 등이 중요했다.
중세 후기에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동방에서 들어오는 향신료, 비단, 귀금속, 사치품 등을 유럽에 공급하면서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피렌체는 금융업과 모직물 산업으로 부유해졌다. 그 결과 상인들이 단순히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미술·건축·학문에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3. 도시국가 간 경쟁이 엄청났다; 이탈리아는 당시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교황령, 나폴리 등이 서로 경쟁했다.
각 도시의 지배자 입장에서는 “우리 도시가 다른 도시보다 아름답고 위대해 보여야 한다.”는 경쟁심이 생겼다. 그래서 최고의 화가·조각가·건축가를 서로 데려오려고 했다. 이 경쟁이 예술 발전을 폭발적으로 촉진했다.
4. 부유한 가문이 예술가를 후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다. 또한 도시국가간 전쟁에서 발생한 졸부 용병들도 예외가 아니다.
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했다. 용병도 평생 써도 사용할 수없었던 부를 과시소비에 사용했다. 예를 들어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인물들이 피렌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거대한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후원자(patron) 시스템 덕분이었다. 인기절정인 화가의 그림으로 집을 장식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부의 과시였다.
5. 동방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와도 활발하게 교역했다.
특히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면서 그리스계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많이 이동했다. 이들이 그리스어 원전과 고대 철학·문학을 가져오면서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다. 다만 “1453년에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와서 르네상스가 시작됐다”는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다. 르네상스는 이미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6.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후원자가 있었다; 로마에는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교황청이 있었다.
교황들은 자신의 권위와 로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성당, 궁전, 회화, 조각, 건축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그래서 로마가 다시 유럽 최고의 예술 중심지 중 하나가 된다.
7. 흑사병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이탈리아에서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냈다.
역설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커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부 생존자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종교·예술·건축에 돈을 사용했다. 다만 이것 역시 르네상스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변화시킨 요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120
해적과 해군은 겉으로는 정반대 조직처럼 보이지만, 경영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특히 권한 배분, 성과보상, 위험관리, 정보의 가치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1. 기본적인 경영구조; 여기서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18세기 카리브해 해적들이 생각보다 상당히 '현대적인 기업'과 비슷한 제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항목 | 해적 조직 | 국가 해군 |
| 조직 목적 | 약탈을 통한 이익 | 국가의 안보·전쟁 수행 |
| 자본 제공 | 선원·선장·투자자 | 국가 |
| 의사결정 | 비교적 분권적 | 강한 위계적 구조 |
| 인력 확보 | 자발적 참여·전리품 기대 | 급여·신분·복지 |
| 보상 | 전리품 분배 | 급여·승진·연금 |
| 위험 부담 | 개인이 크게 부담 | 국가가 상당 부분 부담 |
| 규율 | 선원들 간 계약·규칙 | 군법·상명하복 |
| 조직 생존 | 성과에 매우 민감 | 장기적 국가 지원 |
2. 해적은 의외로 '주주 민주주의'에 가까웠다; 유명한 해적선에서는 선장이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일부 해적 조직에서는 선원들이 선장을 선출하고, 선장을 해임할 수도 있었다. 해적에게 선장은 회사 CEO와 비슷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선장이 무능하면 배가 잡히고 모두가 죽거나 재산을 잃는다. 따라서 선원 입장에서는 "선장이 마음에 드느냐?" 보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전리품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자본제공자이자 위험부담자로서 성과가 나쁘면 교체할 수 있었다. 현대 기업으로 치면 주주가 성과가 나쁜 CEO를 교체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전투중에는 교체할 수없었다.
3. 해적선에는 '헌법' 같은 규칙도 있었다; 해적들은 출항 전에 articles(선원 규약)라는 일종의 계약을 만들었다.
여기에 전리품 배분* 부상 보상* 선장의 권한* 근무 규칙* 처벌* 휴식* 전투 시 행동 등을 정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해적 조직의 본질이 계약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처럼 강제력을 가진 정부가 없으므로 "우리가 잡은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사전에 명확히 정하지 않으면 조직이 유지되지 않는다.
4. 성과보상도 상당히 정교했다; 해적의 보수는 단순한 월급이 아니었다.
전리품을 일정 비율로 나누었다. 그리고 위험이 높은 직책에 더 많은 몫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선장이나 항해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두배까지 더 큰 몫을 주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해군은 10배까지 차이가 났고 현대 사장은 수백배에 달하고 있다. 또 전투에서 다친 사람에게 상해 보상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현대 기업의 성과급 + 위험수당 + 보험과 비슷한 개념이다.
5. 반면 해군은 '대기업 + 정부기관'에 가깝다; 해군의 가장 큰 차이는 돈을 직접 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해군은 적을 공격해서 전리품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전투에서 당장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국가가 계속 돈을 투입한다. 현대 기업으로 비유하면 해군은 정부가 장기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전략적 공기업에 가깝다.
6. 해군은 왜 관료적일 수밖에 없었나? 해군은 수천~수만 명의 사람과 수십~수백 척의 함선을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제독 → 함대사령관 → 함장 → 장교 → 부사관 → 수병이라는 명확한 지휘체계가 필요하다. 전투 중에는 "회의해서 결정합시다."라고 할 수 없다. 명령이 내려오면 즉시 실행해야 한다. 그래서 해군은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계층적 조직을 발전시켰다.
7. 그런데 해적이 더 '혁신적'인 부분도 있었다; 여기서 경영학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역설이 나온다.
# 해적; 작은 조직 + 높은 자율성 + 강한 성과보상
# 해군; 큰 조직 + 강한 규율 + 안정적인 보상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높고 빠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해적식 조직이 유리할 수 있다. 반대로 대규모 조직을 장기간 운영하고 복잡한 작전을 수행할 때는 해군식 조직이 유리하다.
8. 정보의 가치도 완전히 달랐다; 해적에게 정보는 거의 생존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어떤 상선이 언제 지나오는가?* 화물이 무엇인가?* 호위함이 있는가?* 항구의 방어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야 한다. 잘못된 정보 하나 때문에 배와 목숨을 모두 잃을 수 있다. 따라서 해적은 현장 정보와 네트워크에 매우 의존했다. 현대 기업으로 치면 시장정보와 경쟁정보를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보는 조직이다.
9. 그런데 해적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장기적인 규모의 경제다.
해적은 한 번의 성공으로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새로운 배 건조* 항구 건설* 대규모 보급망* 장기 연구개발* 지속적인 인력훈련 같은 것은 하기 어렵다. 국가는 세금을 걷어서 이런 비용을 지속적으로 부담할 수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해적 → 단기 고수익·고위험 조직
*해군 → 장기 저수익·대규모 전략조직이라는 차이가 생긴다.
10. 경영학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결론; 해적과 해군의 차이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해적은 '성과가 생존을 결정하는 스타트업'이고, 해군은 '국가가 자본을 공급하는 대기업'이다. 해적은 생존을 위해 효율적이어야 했고, 해군은 국가전략을 위해 지속가능해야 했다.
그래서 해적은 자율성 → 빠른 의사결정 → 높은 성과보상을 발전시켰고,
해군은 규율 → 표준화 → 대규모 운영능력을 발전시켰다.
# 현대 기업에 적용하면; 가장 좋은 조직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의 장점을 결합하는 것이다.
*해군식; 명확한 전략* 자본력* 시스템* 교육* 장기 투자
*해적식; 현장 자율성* 성과에 따른 보상* 빠른 의사결정* 작은 팀의 책임* 실패한 리더의 신속한 교체
이 조합이 오늘날 말하는 '대기업 안의 스타트업' 또는 '분권형 조직'과 상당히 닮아 있다. 137
사업·투자·부동산처럼 자금이 필요한 시점이 명확한 경우에는 ‘소득의 크기’보다 ‘필요한 시기에 얼마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고 저자는 인구와 세수가 작은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원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다만 핵심은 “얼마나 많이 빌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상환 가능한 범위에서 필요한 때 빌릴 수 있느냐”다. 예를 들어:
* 연소득 1억 원인데 필요할 때 5천만 원밖에 조달하지 못하는 사람
* 연소득 6천만 원이지만 신용·담보·자산 구조가 좋아 필요할 때 2억 원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산을 크게 늘릴 기회가 있는 상황에서는 두 번째 사람이 더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부채가 많으면 금리 상승, 소득 감소, 자산가격 하락 때 위험도 훨씬 커진다. 그래서 실제로는 다음 순서로 보는 게 좋다. 소득 → 현금흐름 → 신용/담보 → 필요시 조달 가능한 부채 → 부채의 비용과 상환능력. 즉, 소득은 평소의 체력이고, 부채 조달능력은 기회가 왔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레버리지라고 보면 된다. 148
대출액보다 낮은 금리가 더 중요하다. 대출이 많아도 금리가 그 이상 낮으면 이자부담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영국은 안정적인 세수와 상환의지를 과시함으로서 더 낮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할 수있었고 이는 더 많은 대출이 가능하게 했기에 경쟁국인 스페인이나 프랑스에 비해 군사력은 물론 이를 지지하는 금융역량도 뛰어났기에 패권을 차지할 수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도 동감한다. 153 중앙은행은 이러한 국가재정수요를 충족하기위해 설립되었는데 미국의 경우 1차는 독립전쟁, 2차는 1812년 미영전쟁, 그리고 3차이자 지금까지 지속되는 경우는 남북전쟁에 기인했다. 미국 중앙은행, 즉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Fed)의 역사는 단순히 “미국에도 중앙은행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금융위기 → 중앙은행 설립 → 권한 확대 → 통화정책의 현대화 과정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1. 첫 번째 중앙은행 — 1791년; 미국은 독립 직후부터 중앙은행을 둘 것인지 논쟁했다.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778년에는 1대륙달러의 가치가 90%하락하여 10센트에 불과했고 1780년에는 2센트수준으로 하락했기에 스페인은화가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가 1791년 설립됐다. Alexander Hamilton이 강하게 추진했다. 목적은 크게: 정부의 재정 안정* 정부 부채 관리* 통화와 신용의 안정* 미국 금융시스템의 정비였다. 하지만 20년짜리 인가(charter)가 1811년 만료되면서 사라졌다.
2. 두 번째 중앙은행 — 1816년; 1812년 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다시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가 1816년에 설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유명한 정치적 충돌이 발생한다. Andrew Jackson은 중앙은행을 거대한 특권기관으로 보고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1830년대에 인가가 연장되지 않았고, 미국은 다시 중앙은행 없는 시대로 들어간다.
1840년대에 주마다 은행정책이 다르고 지급준비금도 주정부채를 기반으로 했기때문에 뉴욕주의 1불은 가치가 단지 1%할인된 수준이었지만 테네시는 10%가 할인되었고, 앨러바마는 30%에 달했다. 부동산폭락으로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생기자 현재 유럽연합에서와 같이 그리스에 독일이 재정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3. 중앙은행 없는 시대와 금융위기; 19세기 후반 미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금융시스템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은행들이 난립했고, 금융시장에서 뱅크런(bank run)이 발생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지원해줄 중앙은행이 없었다. 특히 1907년 금융공황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당시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J. P. Morgan이 민간 금융가들을 모아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미국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한 명의 민간 금융가가 중앙은행처럼 금융위기를 해결해야 하는가?” 이 문제가 연방준비제도 창설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4. 1913년 — 연방준비제도 탄생; 마침내 1913년 Federal Reserve Act가 통과된다.
그리고 1913년 12월 23일, 현재의 Federal Reserve System이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Fed가 다른 나라 중앙은행과 구조가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의 중앙은행 건물만 있는 형태가 아니라 12개의 연방준비은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주요 역할은: 금융시스템 안정* 은행에 대한 최종 대부자 역할* 통화정책* 지급결제 시스템 운영* 금융기관 감독등이다.
5. 대공황 — Fed 역사에서 가장 큰 실패로 평가되는 시기; 1929년 주식시장 붕괴 이후 대공황이 발생한다.
은행들이 대규모로 파산하고 통화량이 급격히 감소했는데, Fed가 금융시스템 붕괴를 충분히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경험은 이후 중앙은행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꾼다. 즉, "중앙은행은 단순히 금리를 조절하는 기관이 아니라 금융위기 때 최종적으로 금융시스템을 지켜야 하는 기관이다."라는 인식이 강해진다.
6. 1970년대 —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1970년대 미국에서는 높은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된다.
특히 Paul Volcker가 1979년 Fed 의장이 된 이후 강력한 긴축정책을 시행한다. 금리를 매우 높은 수준까지 올리면서 경제에 큰 고통이 발생했지만, 결국 미국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꺾는 데 성공한다. 이 시기는 중앙은행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제성장과 고용에 단기적인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7. 1980~2000년대 — 현대적 Fed의 형성; 이후 Alan Greenspan 시대를 거치면서 Fed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다.
특히 금융시장에서는 Fed의 금리 결정이 주식 → 채권 → 부동산 → 환율 → 기업투자 → 소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는다.
8. 2008년 금융위기 — Fed의 역할이 폭발적으로 확대; 2008년 금융위기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이다.
Ben Bernanke가 이끌던 Fed는 기준금리를 거의 0%까지 낮추고, 양적완화(QE)를 실시한다. 즉, 금리를 더 이상 낮추기 어려우니 중앙은행이 채권 등을 대규모로 사서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Fed가 돈을 푼다”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9. 2020년 코로나19 — 다시 한번 대규모 유동성 공급; 코로나19 충격이 발생하자 Fed는 다시 금리를 0% 수준으로 낮추고 대규모 자산매입을 실시했다.
이후 경제가 회복되면서 2021~2022년부터 인플레이션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러자 Fed는 방향을 완전히 반대로 바꾼다. 금리 인상 + 양적긴축(QT)을 통해 유동성을 줄이고 인플레이션을 낮추려 했다.
# 한눈에 보면;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는 이렇게 볼 수 있다. 1791년 제1미국은행->1816년 제2미국은행->1830년대 중앙은행 폐지->1907년 금융공황->1913년 Fed 탄생->1929년 대공황->1970년대 인플레이션->1980년대 이후 현대적 통화정책->2008년 금융위기 + QE->2020년 코로나 + 대규모 유동성 공급->2022년 이후 인플레이션 + 금리인상 + QT
그리고 이 역사를 “소득보다 필요한 시기에 부채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가?”와 연결하면 상당히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미국 경제에서 중앙은행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도 결국 ‘신용(credit)의 공급’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공급하면 민간의 부채 조달능력이 커지고, 그 돈이 주식·부동산·기업투자 등으로 흘러갈 수 있다. 반대로 Fed가 긴축하면 돈을 빌리는 비용이 올라가면서 레버리지가 줄어든다. 그래서 자산가격을 이해하려면 “소득이 얼마나 늘었는가”뿐 아니라 “그 시기에 신용이 얼마나 쉽게 공급됐는가”를 함께 봐야 한다. 202
16세기의 전쟁이 20세기보다 희생자가 많았던 까닭은 강력해진 화력보다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신대륙 원주민의 경우에도 반복되었다. 228 저자는 식량이 해결되야 도시로 인구가 이동하기에 도시화율은 경제발전의 척도라고 주장한다. 농업생산성이 증가해서 충분한 식량을 보다 적은 인력으로 생산가능하다면 잉여노동자는 기회를 찾아 도시로 이동한다고 한다. 그러자 챗은 다르게 답변한다. 경제발전과 도시화율은 상당히 강한 관계가 있지만, “도시화율이 높으면 반드시 부유하다”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1. 왜 경제가 발전하면 도시화가 진행될까? 경제발전 초기에는 농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
그런데 산업화가 시작되면:농업 생산성 상승→ 농촌에서 필요한 노동력 감소→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 일자리 증가→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 도시화율 상승. 이런 구조가 일반적. 특히 도시에는 기업과 노동자가 모이면서 생산성, 인프라, 정보 교류, 기술 혁신이 집중된다. 세계은행도 도시가 일자리와 혁신을 만들어내면서 국가와 지역의 생산성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현재 세계 GDP의 약 80%가 도시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2.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런 순서가 자주 나타난다; 대략적으로 보면:
농업사회> 도시화율 낮음> 농업 중심> 소득 낮음==->산업화> 도시화 급증> 공장·건설업 확대> 농촌 → 도시 인구 이동==->고도성장> 도시화율 높음> 제조업 + 서비스업 확대> 중산층 증가==->선진경제> 도시화율 매우 높음> 서비스업·금융·첨단산업 중심> 도시화율 상승 속도는 둔화
즉 경제발전 초중반에는 도시화가 경제성장과 거의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3. 그런데 중요한 예외가 있다; 최근 UN의 2025년 분석을 보면 현재 시점에서 국가 간 도시화율과 1인당 소득의 상관관계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왜냐하면 국가마다 도시화가 시작된 시점과 속도가 다르기 때문. 고소득 국가는 일찍 도시화했고, 저소득 국가는 훨씬 늦게 도시화하기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더 빠른 속도로 도시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소득 국가는 이미 1950~1975년에 상당한 도시화를 진행했기 때문에 지금은 도시화율이 높아도 추가 상승폭이 작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현재: 농촌 인구 → 도시 인구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4. 한국이 아주 좋은 사례다; 한국은 이 관계를 관찰하기에 상당히 좋은 사례.
1960년대 이후:농촌→ 서울·부산·인천 등 도시→ 제조업 공장→ 수출산업→ 소득 증가→ 아파트·도로·철도 건설→ 수도권 집중. 이라는 과정이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즉 한국의 경제성장은 단순히 “GDP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람과 자본이 도시로 이동한 과정”이기도 하다.
5. 여기서 부동산과 연결하면 상당히 중요; 부채와 자산가격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 재미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소득 증가* 도시화* 인구의 도시 집중* 일자리 집중* 가구 수 증가* 금융시스템 발달* 주택담보대출 확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도시의 토지와 주택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증가한다. 그래서 부동산을 장기적으로 볼 때는 단순히 “그 지역의 소득이 얼마나 높은가?” 보다 “사람과 일자리가 그 지역으로 계속 모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6. 그런데 도시화가 끝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게 앞으로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
도시화율이 이미 매우 높은 나라에서는 도시화율 상승 → 부동산 수요 증가라는 공식의 힘이 약해진다.
그 대신 인구 증가율* 가구 수 변화* 일자리의 질* 지역별 인구 이동* 교통망* 산업의 집중* 주택 공급이 더 중요해진다. 즉 “한국의 도시화율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서울·수도권 주택수요가 계속 증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제는 “전체 도시화”보다 “도시 안에서 어디로 사람이 이동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지방 → 수도권, 수도권 외곽 → 서울, 서울 외곽 → 핵심지역 같은 2차적인 도시 집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성수동·강남·용산 같은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단순한 서울 평균과 다르게 볼 수 있는 이유도 설명된다.228
현대전은 총력전이고 국민소득의 과반수가 전쟁에 투입되기도 한다. 농촌에서 잉여농작물을 생산하고 이를 도시에 공급하여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대부분의 젊은 남자가 징집되어 생산능력이 감소하고 그나마 탄약 등 비소비재를 생산하면서 농촌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살 수없기에 잉여농작물을 재배할 유인이 사라진다. 그래서 러시아의 경우는 농촌생산이 줄고 해외 러시아인들이 피난을 오면서 수요는 증가했는데 도시로 식량을 수송할 철도마저 군용으로 징집되다보니 심각한 도시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제국이 붕괴되고 공산화가 된 첫 케이스가 되었다. 247
소련은 농촌을 집단화하여 생산목표를 제시하고 인력을 공장으로 강제이동시킴으로서 유인이 아닌 강제적인 수단으로 생산성을 높혔다. 그래서 서방보다 훨씬 높은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댓가는 수백만명의 아사였고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소련의 붕괴였다. 미영은 이러한 생산성 향상을 강제가 아닌 방법으로도 달성했기에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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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 바이킹: 경제를 발전시킨 합리적 약탈자들 793~1066
2 칭기즈칸: 산업혁명의 토대를 마련한 세계화의 아버지 1162~1227
3 군사력의 모순: 왜 일부러 질 낮은 무기를 사용했을까 1066~1450
4 신대륙 정복: 황금이 국가를 가난하게 만든다? 1492~1598
5 마녀사냥: 가톨릭과 개신교의 비가격 경쟁 1484~1700
6 르네상스: 이탈리아 전쟁의 진정한 승자들 1422~1559
7 해적의 경영 철학: 민주주의, 공정 임금, 협력 1650~1722
8 7년전쟁: 두려운 이웃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1756~1763
9 영국 해군의 성공 비결: 연고주의와 부패 1690~1850
10 세포이항쟁: 외부 위협과 내부 위협의 역설 1600~1858
11 미국 남북전쟁: 해밀턴 모멘트와 달러의 탄생 1790~1865
12 현대 경제전: 도저히 반길 수 없는 마르스의 선물 1870~1945
13 세계대전: 승패는 더 이상 무력이 결정하지 않는다 1914~1945
14 독일 공군의 자멸: 명예로 주는 보상의 문제점 1939~1944
15 소련의 몰락: 스탈린 공포정치의 놀라운 성과 1920~1980
16 베트남전쟁: 경제학자의 그릇된 판단이 끼친 폐해 1955~1975
17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잘못된 군사 정보의 대가 2022~
마치며; 감사의 말; 더 읽어보기; 그림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