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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58,1-9ㄴ
복 음 : 마태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
-사랑과 정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미세미세)남양주신 별내동
최악-절대 나가지 마세요!!!-
요즘 휴대폰을 열면 맨 먼저 떠오르는 메시지입니다.
정말 이런 상태의 사회, 교회, 가정, 우리 내면이 되어선 안되겠습니다.
어제 저녁 모처럼 하늘에 별들이 보이고 공기도 맑아 마스크 없이 끝기도 후 잠시 산책했습니다.
미세먼지가 많이 줄어든 청정한 공기를 숨 쉬니 참으로 살아있는 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 가정도, 우리 내면도 영적미세먼지 없는 청정한 분위기면 참 좋겠습니다.
하여 특별 수련기와 같은 사순시기가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래서 극기와 절제의 수행입니다. 참된 수행을 통한 청정한 삶입니다.
재의 수요일 본기도 내용이 투박하지만 사순시기 수행생활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룩한 재계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전투를 시작하며 주님께 비오니,
악의 세계를 대적하려는 우리로 하여금 극기의 보루로 진을 치게 하소서.”
절제와 극기의 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생활 없이는 마음의 순수도 내적자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절제와 극기의 수행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수행은 사랑의 수행, 겸손한 수행이어야 합니다.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들이 거부하는 단식은 사랑과 정의가 빠진 껍데기 뿐의 헛된 단식입니다.
예언자들이 권하는 참된 단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바로 이런 내용이 참된 수행을 판가름 하는 잣대입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빠진 자기만족의 수행은
주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헛된 수행, 헛된 단식입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의 사람들이 명실공히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참된 수행자이며 주님의 축복이 뒤따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에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통쾌, 상쾌, 유쾌한 주님의 말씀인지요.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구체적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의 주님의 축복입니다.
이처럼 참된 수행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단식 그 자체에는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단식 자체를 비판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예언자들처럼 그 의미의 상실을 나무라실 뿐입니다.
단식은 본디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은 물론 이웃에 활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단식을 하려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단식의 거부가 아닌 때에 맞는 단식을 말씀하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닌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단식의 때에 단식할 것이지
당신과 함께 지내는 축제와 같은 삶 때는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강요할 단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식의 때에 단식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특히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시기에 적절한 단식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단식할 수 있습니다만 철저히 숨겨진 겸손한 단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아ego’를 부풀리는 자기과시의 단식 수행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예전 장상이 말씀하신 유머가 생각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겸손한 수행의 단식,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활짝 열려 있는 단식이 진짜 단식입니다.
분도 규칙에 나오는 두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단식을 사랑하라”(성규4,13), “정결을 사랑하라”(성규4,64)는 말씀입니다.
참 좋은 사랑입니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참된 수행으로 이끄는 사랑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단식을, 정결을, 가난을, 순종을, 노동을, 기도를,
성독을, 침묵을, 고독을, 즉 모든 수행을 사랑합니다.
이런 자발적 사랑의 수행이 참으로 수행자를 겸손하고 건강하고 부요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먹자 추세의 본능적 욕망의 시대에는 더욱 필요한 단식입니다.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얼마나 많은지요. 영양부족이 아니라 영양과잉이 문제입니다.
옛 수도교부들이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악덕 중 첫 자리에 오는 것이 탐식입니다.
1. 탐식의 식욕, 2. 탐애의 성욕, 3. 탐욕의 욕심이요,
4. 분노, 5. 슬픔, 6. 나태, 7. 허영, 8. 교만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자발적 사랑의 단식 수행이 모든 악덕의 뿌리를 근절하는 근본적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자발적 사랑과 겸손의 열린 단식 수행을 통해 가난한 존재임을 통감하며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굶주린 이웃들과 연대감을 깊이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영성적인 단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식을 통해 가난의 한계와 진실을 체험할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그러니 단식으로 인한 육적 배고픔의 가난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영적 배고픔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단식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이런 자발적 사랑의 겸손한 단식을 참으로 권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 모두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겸비한 참된 단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시작한 참회의 생활을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육신으로 닦는 이 재계를 성실한 마음으로 완수하게 하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스페인의 국기인 ‘투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지금은 스페인에서도 동물 학대라는 이유로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스페인에서는 인기 있는 스포츠라고 합니다.
이 투우에 관한 책을 읽다가 ‘퀘렌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는데
이곳을 ‘퀘렌시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소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소에게 왜 이런 장소가 필요할까요?
소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투우장에서 사람들을 환호시킬 수 있는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퀘렌시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곳,
본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퀘렌시아를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것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정한 퀘렌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삶의 굴레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안함이 없어서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기운을 차려서 다시 힘껏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운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렇게 살아갑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남들의 삶에만 관심을 갖고 부러운 눈길을 보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단식 자체에만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머무르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끊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굳이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당신께로 와서 쉬라고 말씀하시지요.
당신 안에서 쉬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것들 안에서는 진정한 위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는 퀘렌시아에 머물러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기쁨의 삶, 어렵고 힘듦 안에서도 진정한 위로와 힘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단식은 왜 하나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인의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법이나 규정 안에 녹아있는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을 흐리는 모든 벽을 허물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마태 9,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랑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단식은
사순을 충실하게 지내려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인 삶의 실천입니다.
실천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단식입니다.
자기입장에서 벗어나
주님을 만나는 것이
단식의 본질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조차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돌이켜 보는 것이
단식의 마음입니다
스스로 응답하고
스스로 선택한
우리의 단식입니다.
단식이 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생명은
구체적인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단식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단식은
회개를 향하고
회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신랑을 되찾는
은총의 단식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처럼 웃고
새처럼 노래하고
구름처럼 자유롭고
하늘처럼 평화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꽃은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새는 둥지 하나에 만족하기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구름은 자신의 틀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늘은 모든 것을 품어 주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회담이 무산되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은 크고, 주고자 하는 것은 작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를까?’라는 말도 있습니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미국이 북한에 대한 재재 완화의 길을 모색한다면
앞으로의 대화는 동상동몽(同床同夢)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이라는 꿈은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이란 말도 있습니다.
겉으로 하는 말과 속의 마음이 다른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이는 표리부동입니다.
동업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다면 이것도 표리부동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다면, 약속한 것을 꼭 지킨다면 표리불이(表裏不二)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겉은 단식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외면하는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식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의 고통을 도와주지 않는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식을 한다고 하면서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는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식을 하면서 삶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식을 하면서 악행, 죄악, 다툼, 못된 주먹질, 불의한 결박, 억압, 모든 멍에를 끊어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식을 하면서 자신의 것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덮어 주고, 도움을 구하는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단식이 표리불이(表裏不二)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느냐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신심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신심행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 바오로 신부 OFM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단식은 잘 알다시피 어떤 목적 하에 일시적으로 먹기를 중단하는 겁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의료나 미용 목적의 단식이 유행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긴 했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교적 행위가 되기도 하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절대자 앞에 나아갈 때
맑고 정갈한 상태를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으로 행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이나 패망,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와병, 민족적 수치 앞에서
옷을 찢고 먼지를 머리 위로 날리며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걸치고 단식했습니다.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예언자를 통해 전해질 때
역시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그분 마음을 돌리고자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인간이 하느님께 통회와 청원의 마음을 담아 취하는
겸손의 표현이고 또 다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단지 굶는 행위라 본다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라는 말이 가능하긴 합니다.
단식의 지향보다 그 빈도수에 관심을 둔다면 그럴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단식을 그 의미나 지향보다 횟수와 형식에 관심을 두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이사 58,4).
그리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이사 58,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풀어 주고, 끌러 주고, 내보내고, 부수어 버리고, 나누고, 맞아들이고, 덮어 주고, 숨지 않는 것"
즉, 가난하고 약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연대입니다.
그저 먹고자 하는 자기 욕구를 절제하는 단식에 그치지 말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제로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행위가 진정한 단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내가 굶고 비워내는 행위에서 타인을 채우고 풍요롭게 해 주는 행위로 승화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진정한 단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단식이 온전히 이타적이기만 한 행위일까요? 내가 굶어 남의 배를 채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움의 행위에 따르는 놀라운 은총을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을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피조물로 이 지상에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빛과 치유, 의로움, 주님 영광의 보호, 주님의 경청과 즉각적 응답...
이렇게 주님과 단단히 결속할 수 있다면, 몇 끼 굶는 게 문제겠습니까,
내 밥그릇 비워 남 주는 게 대수겠습니까!
단식의 가치가 이렇게 놀라운 것이라면 어찌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식은 사랑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실 때
혼인 잔치와 신랑, 잔치 손님의 표상을 사용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르익어 절정을 이루는 혼인 잔치, 그 사랑이 세상에 공표되고 인정받는 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사랑 이외의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신랑은 신부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신부 역시 신랑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듭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소리 높여 축하하며 사랑의 흥을 돋우고, 손님들은 사랑의 포도주에 취해,
저마다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사랑 안에서 헤엄칩니다.
이 자리에선 남녀노소, 빈부격차, 인종, 민족, 그밖에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신랑이 현존하는 혼인 잔치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머지않아 신랑을 빼앗기고 잔치가 끝나고 친구와 손님들도 뿔뿔이 흩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신부는 누구보다 황망히 울며 애태울 것입니다.
님을 잃은 슬픔에 잠겨, 비로소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찾느라,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단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그들처럼 단식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단식을 살지 못한 부끄러움에 다시 처음부터,
단식의 가나다부터, 단식의 ABC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단식 자주 하십니까? 안 하신다구요?
정말 부럽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늘 함께 하시니까요. 그래서 단식할 필요가 없으시니 감축 드립니다.
저는 사순절 시작하기 전부터 단식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요즘 신랑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맘이 너무 짠할 때가 많아서입니다.
그분이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안에서 함께 고통 받고 억압받고 계시니,
어찌 혼인잔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끔 그분과 함께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을 때,
그분을 그리며 가난한 이들과 동참하여 단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사순절엔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기쁨의 잔치도 벌이겠지만,
가끔은 사랑의 단식을 통해 그분을 빼앗긴 이들에게 다시 그분을 찾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보다도 그들의 상처가 아물고,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주님 어전에 가납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아멘.
배부른 눈, 배고픈 눈
전삼용 요셉 신부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에서 나온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콘서트 공연장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방탄소년단’의 공연계획이 잡혔습니다.
9만석이 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스타디움을
방탄소년단이 다 채울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티켓팅 단 90분 만에 전석이 매진되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전 세계 어디든 가장 큰 공연장에서 매진을 이루어낼 수 있는
세계 몇 안 되는 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밴드 뒤에는 그들을 키워낸 프로듀서 방시혁이란 인물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방시혁이란 인물이 큰 꿈을 품고 차곡차곡 실행하여 이런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울대 졸업식에서 했던 방시혁의 축사는 이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습니다.
방시혁은 애초에 꿈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꿈이 없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가족의 바램대로 서울대 법대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위태위태하여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금 낮은 ‘미학학과’에 지원하게 됩니다.
별 생각 없이 지원한 학과였는데 그 어려운 수업이 매우 재미있어 음악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그때 즐기며 사는 스타일 같습니다.
그러면서 왜 다시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대학을 졸업하고 박진영과 함께 제이와이피(JYP)를 설립합니다.
그러다 ‘빅히트’라는 지금의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독립합니다.
당시는 자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SNS나 유튜브를 통하여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팬들과 소통하게 하였고 그것이 큰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또한 방시혁이란 프로듀서가 계획하여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다보니 그냥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시혁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앞으로도 꿈은 가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게 된 비결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이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을 방시혁 자신은 바로 ‘분노’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음악이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환경에 분노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럭저럭 하려는 연습생들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아마도 JYP에서 뛰쳐나온 것도 그런 불만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무엇을 먹으려고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배가 고픈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분노가 그의 힘이었고 배고픔이 그의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단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고파지기 위해서입니다.
배부를 때와 배고플 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짐승의 눈을 보면 잘 압니다.
배부른 짐승의 졸린 눈과 배고픈 짐승의 매서운 눈초리는
그 짐승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지 예상하게 합니다.
배가 고프면 인생이 치열해집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단식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이 차이가 납니다.
배고프고 박해받을 때의 신앙의 자세와 차만 있으면 언제든 성당에 갈 수 있는 지금의 신앙의 자세가 같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은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무뎌져있고 미지근해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고플 때의 신앙이 사라졌기에 미사에 나오지 않고 선교도 잘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배부른 짐승은 잠만 자기를 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갓 혼인을 한 신부가 어떤 이에게 신랑을 빼앗겼다면 밥 생각이 날까요?
단식은 이런 목마름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유학시절 신학생 때 무언지 모를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사제가 되고 싶은 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새벽 4시에 혼자 일어나서 성당에서 기도했습니다.
졸지 않으려 서서 기도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
하루 한 끼 먹었습니다. 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체중도 지금보다 20kg 덜 나갔습니다.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나를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제가 되니 그런 갈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먹고 마시다보니 어떤 때는 배가 고픈 것이 무엇인지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배 좀 고파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도 있었습니다.
배고픔이 없으면 열정도 없고 열정이 없으면 그냥 시간만 흘러갑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방시혁의 분노는 아무래도 자신의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분노가 그 근저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지나버리는 오늘 하루에 분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배고픔을 위해 단식을 해 봅시다.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하는 초식동물의 두려운 눈 대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하이에나의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흐리멍덩한 눈을 날카롭게 새로 장착하라고 기회를 주는 시기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