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신원사(新元寺) 예로부터 계룡산은 신라 5악의 하나인 서악(西岳)으로 지칭되었고, 조선시대에는 3악 중 중악(中岳)으로 불리운 산이다.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산 정산 능선이 마치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에 언급된 십승지지(十勝之地)중 하나이며 동서남북으로 계룡산 4대 사찰이 있다. 상봉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신라 성덕왕 2년(724년) 회의화상이 창건한 동학사(東鶴寺)와 서쪽에 백제 구이신왕(420년)때 고구려의 아도화상에 의하여 창건된 갑사(甲寺), 그리고 남쪽에는 백제 의자왕 11년(651)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신원사(新元寺) 그리고 북쪽에 구룡사가 있다. 불행히도구룡사는 4대 사찰 중 제일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어 구룡사를 제외한 삼사를 계룡산 3대 사찰로 회자한다. 신원사는 일주문이 없고 사천왕문이 일주문을 겸한다. 사천왕문 바로 아래 부도전이 있다. (사천왕문) <신원사 사천왕문주련> 四大天王威勢雄(사대천왕위세웅) 護世巡遊處處通(호세순유처처통) 從善有情貽福蔭(종선유정이복음) 罰惡群品賜災隆(벌악군품사재륭)
사대천왕 위세크고 웅장하여라 세상을 지키려 순유하며 곳곳에 나투시니 선하고 착한이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악한 무리들에게는 벌로 재앙을 내리시도다. (좌로부터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좌로부터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신원사는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계룡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룡산 3대 사찰 중 하나로 불리어지지만 동학사나 갑사에 비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는 신원사는 651년(의자왕 11)에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절을 중창하였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무기(無寄)가 중건하였고, 조선 후기에 무학(無學)이 중창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고, 1866년(고종 3)에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중수하면서 신원사라 하였으며, 1876년에 보연(普延)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향각(香閣)·영원전·대방(大方)·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집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또 향각의 불상은 명성황후가 봉안한 것이라고 전한다. (범종각) 문화재로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인 오층석탑과 부도가 있다. 오층석탑은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상층 일부가 없어지고 4층만 남아 있다. 1975년의 보수공사 때 1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구(舍利具)와 함께 개원통보(開元通寶)·함원평보(咸元平寶)·황송통보(皇宋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고려시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대웅전에서 동쪽 약 50m 거리에는 이 절에서 관리하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본래는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 즉 계룡단이었던 것이 조선 말 고종 때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에 하악단(下嶽壇)을 두고 있었으므로 중악단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앞 석가여래 진신사리탑)
신라 때는 중사례(中祀禮)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에는 향전(香奠:초상집에 부조로 내는 돈이나 물품)을 올릴 뿐이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 팔작집으로 조선 말기 건축 중 우수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중악단의 경역은 612㎡로 둘레에 축담을 둘렀고 전면에 이중의 내외문(內外門)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고왕암(古王庵)·등운암(騰雲庵)·마명암(馬鳴庵)·남암(南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왕암은 660년(의자왕 21)에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중건하였으며, 1928년 청운(淸雲)이 또다시 중건하였다. 암자의 이름을 고왕이라고 한 것은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과 합세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백제의 왕자 융(隆)이 피난했다가 이곳에서 신라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 신원사 소속의 국제선원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 승려들이 모여 동안거를 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로전 @비로전 주련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 (노사나불)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한다. 보통 사원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이 붙여질 경우에도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또 비로전(毘盧殿) 또는 화엄전(華嚴殿)이라고 할 때에는 보통 비로자나불만을 봉안하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다. 법당 안의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신원사의 비로전은 비로자나불 대신 노사나불을 불화로 대신하고 있다.
노사나불은 삼신불(三身佛)의 한 분이다.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나타난 부처님이다. 삼신불은 영원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수행에 의해 부처님이 된 보신불(報身佛),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화신불(化身佛)을 이르는 말인데, 비로자나불은 대승불교에서는 〈화엄경〉에서 시방제불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법신불로 등장하지만 노사나불은 삼신불 중 보신불로 여긴다. 그럼으로 보통 <원만보신노사나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부처님 생존시에는 없던 사상으로 대승불교에서, 특히 화엄을 중시하는 계통에서 삼신불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전각이나 탱화에 삼신불이 표현될 때는 가운데에 석가모니불, 왼쪽에 비로자나불이 위치하고 노사나불은 오른쪽에 자리 잡는다. 신원사의 비로전은 협시불이 없는 노사나불 한분만을 본존으로 하는 불화로 모시고 있다. 노사나불은 ≪범망경 梵網經≫과 ≪화엄경 華嚴經≫의 교주로, 경전에 의하면 이 부처님은 무량한 공덕을 완성하고 무변(無邊:끝없음) 중생을 교화하여 정각을 이룬 부처다. 온 몸의 털구멍에서 화신(化身: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광대무변의 부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부처님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는 종파에 따라 조금씩 그 견해를 달리하나 비로자나와 노사나뷸 그리고 석가모니를 각각 법신(法身:진리의 몸)·보신(報身:깨달은 몸)· 응신(應身:중생을 구제하는 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서도 이 셋을 서로 다른 부처로 보지 않는 천태종의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비로자나와 노사나 및 석가모니를 동일한 불신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노사나불은 ‘진리인 몸(法身)’이기 때문에 곧 삼라만상을 있게 하는 근본원리요 본체임을 뜻한다.
이 노사나불의 형상은 ≪범망경≫에 따르면 천엽연화대(千葉蓮華臺)의 단상에 앉아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그리고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교주이며 우주전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란 해와 달에서부터 수미산과 사천하(四天下), 사왕천(四王天) 등 십계(十界)를 합한 세계를 천배한 소천세계(小千世界), 소천세계를 다시 천 배한 중천세계(中千世界), 그리고 이 중천세계의 천 배를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하는데 이 소, 중, 대의 삼천세계를 다시 삼천배한 크기를 말한다. 이 노사나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 주위에는 천(千)의 꽃잎이 열려 있고 그 꽃잎 하나하나는 각각 일백억(一百億)의 국토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 국토의 주재자가 곧 노사나불로 이 부처님은 현재 색계(色界)의 맨 위층인 대자재천궁(大自在天宮)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독성각 독성각은 신원사 대웅전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향을 한 건물이다. 나반존자와 칠원성군이 모셔져 있으며 조선시대 고종조 보련 화상의 진영도 모셔 있다. 이 전각은 1982년 원융선사의 원력으로 건립되었다. <독성각주련> 松巖隱跡經千劫(송암은적경천겁) 生界潛形入四維(생계잠형입사유) 隨緣赴感澄潭月(수연부감징담월) 空界循環濟有情(공계순환제유정)
소나무 바위에 자취 감추어 천겁을 지내고, 중생계 드러냄 없이 사방의 곳곳에 들어와, 감응은 인연을 따라 연못에 달빛이 내리듯, 허공과 세계를 돌고 돌면서 중생을 건지네. 비로전에서 바라 본 사찰전경 대웅전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집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또 향각의 불상은 명성황후가 봉안한 것이라고 전한다.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과 천하 어디에도 부처님 같은 분 안 계시고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를 둘러봐도 역시 비교할만한 분 없도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세간에 있는 모든 것 내가 보았어도 一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없도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대웅전 법당 안에 모셔진 노사나불괘불탱 <노사나불괘불탱> @괘불탱화(掛佛幀畵)는 탱화의 일종으로 야외에서 법회를 열 때 밖에 내건 행사용 불화로 신원사의 노사나불괘불탱(盧舍那佛掛佛幀)은 1644년(인조22)에 제작 되었으며, 1997년 9월 22일 국보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는 길이 11.18m, 폭 6.88m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괘불탱은 전국에 90여 점이 남아 있는데 신원사의 이 괘불은 석가여래가 영축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묘사한 것으로, 석가모니불 대신 노사나불을 본존불로 하여 노사나불의 좌우에는 10대보살과 10대제자, 제석, 범천,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중심에 커다랗게 그려진 노사나불은 들어 올린 양 손바닥을 펼쳐 설법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과 팔 등은 밝은 주홍색으로 칠하였고, 옷은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을 이용하여 5가지색으로 빛을 형상화하여 주변 배경을 표현하였다. 짜임새 있는 구도, 세밀한 표현, 밝은 색조 등이 뛰어나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특징을 나타내며, 17세기 불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괘불의 주존의 광배에는 <원통보신비로사나(圓滿報身盧舍那佛)>이란 존명이 기록되어 있고, 배경에 화려한 파상문의 서운이 펼쳐진 가운데 시방세계에서 불보살들이 영산회 도량으로 막 강림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특히 수덕사 괘불탱과 함께 주존이 노사나불로 표현된 독특한 도상으로 괘불탱의 도상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불화로 평가되고 있다. 독성각 뒤편에 드리워진 백일홍나무, 제철이라면 붉은 백일홍 꽃이 일품일텐데.. 대웅전에서 내려단 본 사찰전겨. 여래진신사립 양쪽에 2기의 석등이 있다. 천수관음전 중악단 <신원사 중악단(中嶽壇)> 1394년(조선 태조 3년)에 창건한 계룡산 신원사의 산신각이다. 산신은 원래 산하대지의 국토를 수호하는 신이며, 산신제는 민족정기의 고양과 모든 백성의 합일 및 번영을 기원하던 팔관회를 후에 기우제, 산신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제단의 명칭은 계룡산신 제단이라는 뜻에서 계룡단이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경내의 상악단(上嶽壇)과 지리산의 하악단(下嶽壇)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악단이라 불리었으며 상악, 하학단 중악단을 삼악단(三嶽壇)으로 일컬어졌다. 중악단은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궁궐양식을 그대로 축소하여 만든 건물의 안에는 산신도가 모셔져 있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소실되었고 이 제단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2)중악단은 전체적으로는, 구릉지에 동북 ·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외삼문(대문간채), 내삼문(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위치시키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지었다.
@계룡산 중악단은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소슬 삼문에 좌우로 외여닫이문을 달았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지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또한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중간채문, 바닥이 맷돌로 깔린 것이 경이롭다.) 중악단은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93호(1999. 3. 2.)로 지정되었다. 중악단은 국가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으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98년부터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뒷면에는 < 낙은정(樂隱亭)> 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복원된 중악단 산신제는 향교에서 대한제국의 사전에 의하여 고마나루 수신제와 함께 올리고 있다. 산신제는 소사(小祀) 의례로 계룡산 중악단 옆 옛 계룡단 터에서, 수신제는 고마나루에서 중사(中祀) 의례로 지낸다. 고려시대에는 산신제가 중사로 수신제가 소사로 모여졌다. 이와 곁들여 신원사에서 불교식 산신제를, 계룡산 산신제보존회에서 무속식 산신제를 각각 주관하여 올린다. 제의 날짜는 음력 3월 16일을 전후한 토·일요일을 넣어서 잡는다. <중악단 주련> 三日修心千載寶 (삼일수심천재보) 百年貪物一朝塵 (백년탐물일조진)
이는 초발심 자경문(初發心自警文)의. 『내무일물래(來無一物來) 거역공수거(去亦空手去). 자재무연지(自財無戀志) 타물유하심(他物有何心). 만반장불거(萬般將不去) 유유업수신(唯有業隨身).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이란 글에서 따 온 것이다. 번역하면
올 때에 한 물건도 가져옴이 없었고 갈 때에도 또한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 나의 재물도 아끼는 마음 없어야 하는데 다른 이의 물건에 어찌 마음을 두랴. 만 가지라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만이 몸을 따르느니라.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되느니라. (대문간채의 뒤편에는 낙은정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신원사 주위에는 계룡산 굿당의 효시로 알려지는 밤나무집굿당을 비롯한 많은 굿당들이 포진되어 있다. 굿당이 이렇게 많은 것은 연천봉의 ‘도맥(道脈)’ 때문이라고 믿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악단 안에 있는 방사 <영원전> 대개 사찰에서 지장전으로 불리는 전각이 신원사에서는 영원전으로 불린다. 영원전은 조선 개국 후 왕사였던 무학스님이 태조 이성계가 도를 정할 때 계룡산에 같이 내려와 신원사를 크게 확장하면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을 모셔놓는 영원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법당 안은 지장보살과 무독대왕 도명존자 그리고 시왕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앞 석등 대웅전 앞에 있는 석가여래 진신사리탑, 근대에 조성된 것이다. 신원사 국제선원 벽수선원과 계룡선원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오층 탑족에서 본 중악단 전경 신원사들머리에 있는 숲속에 항아리를 이용한 조형물이 이색적이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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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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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잠시 쉬였다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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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대자대비 관세음보살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