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물러날 줄 알았던 ‘식물총리’가 살아서 돌아왔다. ‘정홍원 사퇴’가 ‘유임’으로 둔갑되자 여당 내에서도 ‘이러면 안 된다’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 정권을 줄곧 비호해왔던 여권 인사들도 ‘지나친 것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왕실장’ 김기춘의 통제권에 있는 ‘식물총리’ 정홍원
인사 참사에 대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외풍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끄떡없다. 심지어는 새누리당 중진들까지 나서 ‘김기춘 책임론’을 제기해 보지만 ‘왕실장’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다.
‘식물총리’ 정홍원은 ‘왕실장’을 상전으로 모실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모든 면에서 ‘왕실장’의 새까만 후배이기 때문이다. ‘왕실장’이 나이도 훨씬 많을뿐더러 검찰 대선배이기도 하다. ‘왕실장’의 검사임용이 ‘식물총리’에 비해 10년 빠르다. 검찰에 근무하며 손발을 맞춘 적도 있다. 김기춘이 법무부연수원장으로 재직할 때 정홍원은 연수원 기획과장이었다.
인연도 남다르다. 둘 다 경남 출신으로 경남중학교 선후배 사이다. 정 총리를 천거한 게 김 실장이라는 설도 있다. 정 총리에게 김 실장은 깍듯이 모셔야 될 ‘큰 형님’ 같은 존재다. 고향 선배이자 학교 선배이고, 검찰 대선배이자 한때 상관과 부하관계였다.
총리가 ‘왕실장’의 통제권에 있으니 ‘왕실장’을 조종할 수 있다면 정부의 공식라인을 접수하는 셈이 된다. 김기춘을 움직일 있는 그룹이 있을까.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새정치연합 박지원 의원이 거론한 ‘만만회’가 그것이다. 문고리권력의 핵심인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그리고 박 대통령 보좌관 출신이자 박 대통령과의 ‘미스터리 관계’로 널리 알려진 고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를 지칭하는 작명이다.
‘왕실장’을 움직일 수 있는 힘 ‘만만회’
이들이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다는 설이 있다. 여권 사정에 정통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내부적으로 박 대통령과 가깝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주변에 막강한 ‘이너서클’이 있다는 얘기다. 박지원 의원은 한술 더 떠 “문창극 전 총리내정자 추천을 비선라인인 ‘만만회’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청와대 안살림을 총괄하는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대통령 의전 수행을 담당하는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과, 대통령 가족 의전을 담당하는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과 더불어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린다. 이들은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때(1998년)부터 줄곧 함께 해왔다. 이들 ‘3인방’의 위세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는 ‘왕실장’도 비서실장 임명 초기에는 대통령에게 할 보고를 이들에게 먼저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들 ‘3인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최태민의 사위’가 바로 그다. ‘3인방’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해 보좌관으로 발탁되도록 도왔으며 사실상 오랫동안 이들의 상관 역할을 한 게 바로 정윤회다. ‘박근혜 비선조직’으로 알려졌던 ‘신사동팀(강남팀)’을 이끌어 왔다는 설도 있다.
‘최태민의 사위’와 ‘문고리권력’
‘최태민 사위’의 권세가 대단한 가보다. 재미교포 언론인 ‘선데이저널’은 “정윤회씨가 지난해 10월 박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순방 기간 중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청와대 내 몇몇 인사들을 접촉했다”고 보도하면서 이 회동이 있는 직후 박 대통령이 성낙인 서울대 교수와 김희욱 동국대 총장을 감사원장 후보로 낙점했던 것을 뒤집고 “황찬현 대법관으로 방향을 틀었다”며 “정씨가 감사원장 인선에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만회’가 인사 개입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국정운영을 부추겨 온 것으로 보인다.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공작도 이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채 전 총장 개인정보를 유출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조오영 행정관의 상관이 바로 이재만 총무비서관이다.
‘왕실장’과 ‘만만회’와는 어떤 관계일까. 갈등도 있겠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만만회’는 ‘청와대 공식적 2인자이자 인사위원장까지 겸하고 있는 김 실장의 협조가 필요할 테고, 김 실장은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만만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일이 잦을 수 있다.
정홍원 유임은 ‘왕실장’-‘만만회’의 의기투합?
이번 정홍원 총리 유임도 이들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왕실장’과 ‘만만회’ 사이에 상부상조적 의기투합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식물총리’의 귀환은 양쪽 모두에게 결코 나쁜 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 총리후보자 물색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고 활용하기 편하니 ‘식물총리’를 유임시키는 게 낫다는 쪽으로 결론 내지 않았을까.
정권 중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비선조직 내에서 파열음이 들린다. 정윤회와 박지만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는 소문도 있다. 작년 말 정윤회 측 사람이 박지만을 미행했고 이를 눈치 챈 박지만이 청와대 비서실에 항의했으나 이 사건을 조사하려던 민정수석실 경찰 간부가 갑자기 인사 조치됐다는 내용이다.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다.
정윤회-이재만의 보좌진 그룹과 박지만의 가족그룹 간 발생한 알력으로 비선조직 중 가장 막강한 이너서클인 ‘만만회’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다.
새누리당에도 균열이 발생했다. ‘공신’들이 목소리를 낼 자리에 비선조직이 끼어들어 인사 개입 등 노획물을 챙기니 참다못해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문창극 불가론’에 불이 지핀 건 서청원, 김무성, 이재오 등 새누리당 중진들이었다. 친박 진영에서 “저런 사람 누가 데려왔느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다. ‘만만회’ 등 비선조직이 인사에 개입하는 걸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왕실장’ ‘만만회’ ‘식물총리’ 뒤에 웅크린 박근혜
당권주자인 서청원, 김무성 의원은 “외부인사를 인사위원회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당 의원 일부는 “비선 인사들이 총리나 장관 후보자 추천하는 일 없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박 대통령이 ‘만만회’ 등 비선조직 의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경우 청와대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문고리 권력과 가족들이 주축이 된 비선조직이 인사나 국정에 개입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을 빚게 된다. 비선조직 내 알력싸움뿐만 아니라 비선조직을 밀쳐내려는 당내 저항이 심각한 수준으로 비화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권 조기 레임덕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왕실장’ ‘만만회’ ‘식물총리’ 뒤로 웅크린 박 대통령. 이미 박근혜 정권의 앞마당엔 레임덕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