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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오준선의 민족운동
문대식 추천 0 조회 34 20.12.07 09: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오준선의 민족운동 〉


          Ⅰ. 머리말 

          Ⅱ. 가계와 학문   

          Ⅲ. 오준선의 의병관   

          Ⅳ. 의병들의 오준선 인식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의병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이다.1) 의병항쟁은 1904년 일제침략이 본격화된 이후 일제를 상대로 한국 민족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의 사건으로 의병전쟁이 고조되고, 한국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일제는 의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일제의 군경 및 일제의 앞잡이들이 의병에게 죽거나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을 전후하여 군대를 동원한??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악랄하게 실시하였다.??남한대토벌작전??으로 항일의병들은 많은 수가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다.2)

??남한대토벌작전??중 지금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광산구(光山區) 용진산(聳珍山), 석문산(石門山), 대명산(大明山), 어등산(魚登山)은 호남의병의 치열한 전투지역이다.3) 이곳에서 저항한 의병들은 사재(私財)를 털어 무기를 만들고 장기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4)

 1917년에 세워진 용진산(聳珍山) 용진정사(湧珍精舍)5)는 오준선(吳駿善,1851~1931)이 1931년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오준선이 용진정사에서 배출한 문생은 나주 함평 무안 장성 등에서 사는 뜻있는 634명 선비들로, 이중에 이기손(錦齋李起巽,1877~1937), 오상렬(義齋吳相烈,1879~1907), 오성술(竹坡吳成述,1884~1910), 전수용(海山全垂鏞,1878~1910)은 의병장으로 크게 활동하였다.6) 오준선의 《후석유고(後石遺稿)》〈의병전〉에 4명의 의병장이 언급되어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금서 처분을 받을 만큼, 의병사를 자세히 기록하였다.7) 

  1909년 기우만(奇宇萬)이 집필한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에서는 오준선의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김준(金準)?전수용(全垂庸) 의병전을 실을 만큼 당시 의병전의 찬술자로 크게 거론되었다.8) 금장태(琴章泰)와 고광식(高光植)은??오준선은 절의와 예도를 지키며 의리정신으로 살았다??고 언급하였다.9) 홍순권은 심남일(沈南一)의 의병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준선의 글을 인용하였으며, 오준선의 <기삼연(奇參?)전>에??기삼연이 적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전주로 잡혀 갔다??또한??광주 양암정(羊岩亭)에서 포군 정원집(鄭元執, 1887∼1909)10)을 데리고 왔다??라고 하면서 오준선이 쓴 <전해산전>을 언급하였다.11) 김상기는??노사학파(蘆沙學派)에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과 의병투쟁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라고 오준선을 평가하였다.12) 오영섭은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선비정신을 조명하면서??위정척사운동이 의병운동과 근대 민족주의 원동력이다??고 하였다.13) 홍영기는 호남 의병을 연구하면서 오준선을??노사학파 중 노사의 학설에 깊이 신뢰하고 따른 인물이다??고 하였다.14)

 이에 본고에서는 오준선의 구체적 실천 정신과 일제에 대응한 의병관은 어떠했고 의병들은 오준선에 대해서 어떠한 인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오준선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추적하고자 한다. 오준선의 문집《후석유고(後石遺稿)》15)을 기초 자료로 사용하고, 오준선의 스승인 기정진(蘆沙奇正鎭, 1798~1879)의《노사집(蘆沙集)》16), 동문수학생 기우만(松沙奇宇萬, 1846~1916)의《송사집(松沙集)》17)을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Ⅱ. 가계와 학문

  오준선의 호는 후석(後石)이고 자는 덕행(德行)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그의 선대를 살펴보면, 고려 혜종(惠宗, 914~945)의 모친 장화왕후(莊和王后, 생몰년 미상)는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역사 속에 크게 이름을 나타난 인물이다. 가장 오래된 오씨 족보(吳氏族譜)는 오희도(吳希道, 1583~1624)가 적은 필사본이 전하고 있다.18) 나주오씨는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 생몰년 미상)을 1세로 하고, 5세손 오자치(吳自治 생몰년 미상)는 세조13년(1467)에게 영정을 하사 받은 인물이다.19) 오준선의 8대조 병조좌랑 오이익(吳以翼, 1618∼1666)은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다.20)

  오준선은 1851년 조선 철종 2년 음력 12월 6일 오하규(吳夏圭, 1829∼1872)와 금성나씨(錦城羅氏, 생몰년 미상)의 3남 중 장남으로 당시 나주군(羅州郡) 삼도면(三道面) 도덕리(道德里)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면(三道面) 도덕리(道德里) 도림마을(道林)에서 태어났다.21) 유년기에 백부 금사 오항규(錦沙 吳恒圭, 1824∼1874)와 백모 순천박씨(順天朴氏, 생몰년 미상)에게 입후하였다.22)  오준선은 평소 형제간의 깊은 우애가 깊었는데, 동생 오영선(吳泳善, 1854∼1872)과 오유선(吳裕善, 1857∼1886)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영선의 양아들 오동수(吳東洙, 1878∼1945)와 유선의 아들 오남수(吳南洙, 1884∼1933)를 친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23)

  오준선이 태어나고 살았던 삼도면 도덕리 도림에는 오준선의 생가와 초기 수학했던 지어제(志於齊), 사당인 도림사(道林祠)와, 오준선이 중년에 강학했던  본량면(本良面) 동호리(東湖里) 석문산(石門山)에 빙설당(氷雪堂)과, 본량면(本良面) 명도리(明道里) 대명산(大明山)에 영사제(永思齊)가 남아 있다.24) 만년의 강학장소인 용진정사(聳珍精舍)는 삼도면(三道面) 왕동리(旺洞里) 용진산(聳珍山)에 자리하고 있다.25)

  용진정사는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 1853∼1937)의 편액 글씨가 있고, 영당에는 오준선의 영정이 있다. 오준선의 영정은 1924년 당시 77세인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48~1941)이 오준선의 74세의 상복을 입은 모습과 용진정사도를 그렸던 것이다.26)

  오준선은 유년기에 족숙 오태규(臨履公 吳泰圭, 1843~?)에게 수학하였다.27) 당시 오준선보다 8세 연장이며 오태규의 손자인 오계수(難窩 吳繼洙, 1843~1915)와 동문수학하였다.28) 1868년 오준선이 18세 되던 해에 당시 71세의 기정진(奇正鎭)을 찾아가 예법과 경전 등을 탐구하게 되었으며 기정진의 기대를 받았다.29) 이때 기우만, 고광순과 동문수학하였다.

 1874년 오준선은 학문의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은 임헌희(全齋 任憲晦, 1811~1876)와 송근수(立齋 宋近洙, 1818~1903)를 찾아 배알(拜謁)하였다. 임헌희는??노력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하늘의 기를 얻는 것(明德)을 숭상하라, 이것이 나의 바램이다??는 글을 적어 주었다.30) 오준선이 충청도로 찾아가 만난 송근수는 을미의병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을 후원한 인물이다.31) 임헌희 또한 이이(李珥, 1536~1584)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통을 계승한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석학이었다.32)

 오준선이 임헌희·송근수 등의 사림 영수들을 차례로 만나는 것은 거유(巨儒)들과 폭 넓게 종유(從遊)하고자 한 것이다. 1890년 40세에 오준선은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매월 초하루 윤강(輪講)을 하였다.33) 오준선은 50세 때인 1900년과 그 이듬해에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 송병순(心石 宋秉珣, 1839∼l912)을 찾아 선대의 행장이나 문집(文集) 서문(序文)을 청하기도 하고, 강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34) 이러한 오준선의 활동은 그의 사고가 호남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911년 오준선은 일제(日帝)가 보낸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다가 장성 헌병대에 구금을 당하여 고초를 겪었다.35)

 1917년 이후 용진정사에서 제자를 가르친 오준선은??의(義)를 통한 마음(心田)을 쟁기와 보습으로 갈듯하면 인간 본성을 실현한다??고 농은설(農隱設)36)에서 의로운 선비 자세를 강조하였다. 또, 보만설(保晩設)37)에서는 식민지 현실을 혼돈으로 보고??공직자는 혼돈속에서 잣나무 모습이나 소나무의 푸르름과 같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위정척사를 위하여 광산설(狂山說)38)에서??서양의 물질문명이나 유행음악 등을 멀리하자??고하며 전통 도덕과 이념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오준선은 공직자의 도덕적 가치를 바른 선비자세와 의로운 전통이념이라고 보고 학문적인설로 주장한 것이다. 이상적인 학문의 법도는??학자가 자기 몸을 반성하고(修身) 생각하는데 행(行)하는 것이 급선무이다??는 이이의 말을 사법(師法)으로 삼고자 하였다.39) 오준선은??마음의 본성과 근본은 조화와 본원이 이(理)에 있기 때문에, 태극은 이(理)에 중점을 두어 음양을 생성한다??40) 하였다. 오준선은 본성이 마음의 이치(理致)이고, 마음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본성이며, 마음은 기(氣)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理)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기정진은〈납량사의(納凉私議)〉를 완성한 후??중인(衆人)의 눈에는 모두 기(氣)이고 성인의 눈에는 이(理)라고 말하였다??41) 기정진은 기(氣)를 비판하고 이(理)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기정진의 학설은 기호 학맥의 원류인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였다??하여 송병선과 전우(田愚, 1841~1922)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42) 이때, 오준선은??기정진이 이이에게 심복하면서도 다만 이기설에서는 이견을 보인 것이며, 그것은 이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후현이 선현의 이론을 변론(辯論)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43)

 오준선은 기정진이〈외필 (猥筆)〉에서??이(理)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氣)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理)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오준선은??무조건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44)??고 하였다. 기호학파 중 이일원론을 전개한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적 입장을 따른 오준선은, 기정진의 설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주인이고, 주인은 바로 이(理)요, 명령을 받은 자는 종이니 종은 바로 기(氣)다는 것이다. 오준선은 이이의 이기론적 입장에는 비판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Ⅲ. 오준선의 의병관

  오준선은 고종이 승하하자, 문도들과 서울까지 올라가 인산에 곡하고??고종 승하의 변란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45)하며 오준선은 임종 때까지 백립을 쓰고 원수를 갚는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았었다.46) 오준선의 부인은 의병의 가문으로 이름을 빛낸 상산김씨(商山金氏)였는데, 기정진 문하에서 오준선과 동문수학하였던47) 의병장 김용구(金容球, ?∼1918)의 가문이다48)

  오준선은 1896년 봄 기우만이 장성(長城)에서 창의(倡義)하였으나, 생모 나주나씨의 상중(喪中)이어서 의병에 참여하지 못하였다.49)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신 토죄와 늑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구순 양모를 봉양해야 하는 오준선은 의병에 참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 할 모의(募義)를 기삼연(奇參衍)·고광순(高光洵)과 함께 논의하였다.50) 오준선은 ??원수 갚는 의리가 가슴 속에 절실하여 한시도 복수 할 것을 잊은 적이 없다??51)고 하며 복수하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1906년 오준선이 담양군(潭陽郡) 삼인산(三人山) 아래서 오준선이 고광순과 기우만에게??구순의 양모가 계시는데 봉양 할 다른 형제가 없어 떠나기가 어렵네??52) 라고 하며 노모와 친척을 봉양해야 하는 어려운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기우만·고광순에게 사정을 말한 것이다.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여름철이 되면서 오준선은 구순이 넘은 양모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서 거상을 치러야 했다.53)

 오준선은 망국의 현실을 통곡하며??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금수의 오랑캐 나라가 되었구나??54)하면서 통곡하다가,??망국에서 살아남은 자가 몸을 던져 죽을 수 없다면, 뜻에 따르는 충의가 있어야 한다??55)면서 입산하였다.56) 처음 석문산에 은거했으나 용진산으로 문도들이 거처를 축성하여 용진산으로 옮겼다. 용진산으로 들어간 오준선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의병전〉을 저술하였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오준선의 의병관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는〈의병장 기삼연 (省齋 奇參衍)전〉,〈의병장 고녹천광순(高鹿川光洵)전〉,〈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海山 全垂鏞)합전〉찬술(撰述)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심남일(德弘 沈南一)행장〉57) 〈의병장 고광순(鹿川 高光洵)행장〉58)등 5명의 의병장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의병장 기삼연전〉에서 오준선이 평가한 기삼연은??나라가 장차 망하는 것을 분히 여겨 초망(草莽)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는 계책(肉食之謀)을 내어 순국(殉國)할 뜻이 있었다. 을미년 국가에 변이 망극하고 적신(賊臣)이 임금을 협박하여 머리 깎으라는 명령이 급박하였다. 드디어 기송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토벌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스스로 군무(軍務)를 맡아 군사의 지휘하는 것이 병법(兵法)에 합하니 여러 사람이 매우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장성으로부터 나주로 들어가니 사방에서 의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군사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송사가 바야흐로 광산에서 군사를 모으는데, 성재가 장성 군사 3백 명을 데리고 광산에 모이니 사기(士氣)가 배나 더하여져 장차 일을 할 수가 있을 듯 하였는데 위에서 선유(宣諭)를 내려 타이름으로 부득이 군사를 파하였다??59)라고 하며 기삼연이 병법(兵法)을 잘 이해하고 장성군에서 군사 3백 명을 모집하여 인접한 광산군에 기우만 의병부대에 신속하게 지원하여 의병부대 사기(士氣) 진작에 기여한 군사 지휘 능력을 크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 탁월함이 장차 일제 응징에 기여 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기성재 같은 이는 포의(布衣)로 한갓 충의를 가지고 군사들을 격려하여 까마귀 무리처럼 이리저리 모인 군사를 몰아서 한창 치성한 적을 토벌하다가 군사가 패하자 순국하였으니, 강한 창자와 매운 간담이 늠름히 살아 있는 것 같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성재로 하여금 수양과 문산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2분의 일을 역시 하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항상 지금 사람이 옛 사람보다 못하다 하니 충의로서 순국한 데야 어찌 다름이 있으랴. 나는 성재와 나이는 동갑이요, 젊어서 동문(同門)이었다. 비록 도량은 얕고 깊은 것이 있고, 취하는 것이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있었으나, 간담이 서로 비치어 흰 머리가 되도록 변하지 아니하였다. 기억나는 것은 옛적 정미년 가을에 나를 집으로 찾아와서 일을 함께 하기로 약속할 적에 나는 90세의 늙은 어머님이 계시므로 차마 옆을 떠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하였더니, 비록 억지로 일으키지는 아니하나 서로 떨어지지 못하고 닷새를 머무는데 의논하는 것이 의병 일으키는 일뿐이요, 한마디도 다른 데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이 의병을 일으키기 1달 전이었다??60)라고 하며 오준선은 기삼연의 순국을 옛 사람 못지않은 충의로 보았다.

 오준선은 동문(同門)수학한 기삼연이 같은 나이로 간담이 서로 비치어 흰 머리가 되도록 변하지 아니한 깊은 의리를 가지고 있는 사이라고 하였다. 1907년 가을 의병을 일으키면서 기삼연과 떨어지지 못하고 5일 동안 의논한 것이 의병을 일으키는 일뿐이었다. 

??매양 김준·김영업(痴齋 金英業, 1869~1909)·전수용이 찾아와서 만날 적마다, 기삼연의 순국에 눈물을 흘리며 원수를 갚자??61)고 하였다. 김준·김영엽·전수용이 오준선을 찾아와 의병장 기삼연의 순국에 관한 일제 응징전략을 논의한 것도, 오준선이 의병에 관하여 매우 깊은 병법과 의병창의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준선이 기삼연의 행적을 기록한 이유를??기삼연의 의적(義蹟)에 담겨진 뜻에 오준선 자신이 장차 힘입어서 썩지 않고자 붓을 들었다??62)라고 하였다.

〈의병장 고녹천광순 (高鹿川光洵)전〉에서 오준선은 고광순이??병신(丙申)년에 원수들이 덤비어 국모(國母)가 화를 당하자 홀로 기송사(奇松沙)가 대의(大義)를 밝혀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녹천이 듣고는 용감히 달려가서 의사들을 격려하여 군사를 뽑고 무기를 수합하여 장차 날을 정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63)라고 하였다.

 오준선은 구례(求禮)의 연곡(燕谷)사 전투에서?? 연곡은 동으로 화개동(花開洞)으로 통한 민간 포수 수백 명이 있어 정예하여 쓸 만하고 서에는 문수동(文殊洞)이 있는데 천연적으로 험한 것이 믿을만하였다. 고제량(高濟亮)·고광수(高光秀)·고광채(高光彩)·박찬덕(朴贊德)과 아우 광훈(光薰)으로 더불어 웅거하여 기계(器械)를 수습하고 대오(隊伍)를 나누어 정하니 영남·호남의 의사들이 소문을 듣고 호응하였다. 척후병이 화개동에 있는 왜병이 온다고 보고하였다. 광수로 하여금 한가닥 군사를 끌고 가서 습격하게 하고 또 한가닥 군사를 내어 숭티(崇峙)를 넘어서 광수와 서로 응하게 하고 절에 남은 것은 다만 10여명뿐 이었다. 왜병이 하동(河東)으로부터 양대(兩隊)로 나누어 밤을 타서 작은 길로 들어오므로 절 문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았다. 수하에 다만 포수 1사람만이 있었다. 공(公)이 시켜서 총을 쏘게 하며 “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마음은 일을 일으키던 날에 이미 정하여졌으니 제군(諸君)은 나가서 다시 뒷일을 도모하라.”64)는 고광순의 죽음으로 임하는 의병관 자세하게 적고 있다.

??고광순이 적을 토벌하여 원수 갚기로 맹세하고, 충의가 분발하는 모습을 보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날짜를 약속하였다??65)고 하며 오준선은 고광순 충의를 높게 사 의병참여에 따르기로 약속하기도 하였다. 고광순이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천성(天性)과 인륜(人倫)의 두가지의 도리를 다 행하는 천하에 드문 인물로 오준선은 인시하고 있다.

??녹천과 같은 이는 충?효?열의 옛집에 태어났으니, 인륜에 대하여 본래부터 잘 알고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극사가 위급할 때에 능히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서 비록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하였으나 위급한 것을 보고서 목숨을 바친 것은 모두 신자(臣子)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고, 선조의 충성에 빛이 있었으니 주자(朱子)의 이른바  ‘시국이 크게 변할 적에 여러 사람은 무너지기를 강물이 흐르는 듯하는데, 지주(砥柱)처럼 우뚝하여 한 마음이 물과 같아 그의 본심을 온전히 한 이는 천추에 죽지 않는다’ 는 말에 녹천은 거의 거기에 해당될 수 있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다만 그 충의의 실적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파묻혀 들어나지 못하니 역시 한스러운 일이다. 기억하건대 병오(丙午)년에 3사람이 산 밑에서 작별할 때에 녹천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자네의 의기를 아는데 어찌 홀로 말이 없는가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는데 신자(臣子)가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마는 위로 90노모가 계시는데 봉양할 다른 형제가 없으니 아침 저녁으로 참으로 곁을 떠나기 어렵운 나의 사정이 이러하니 일을 기다려 주라고 하였다. 녹천은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자네가 편안히 집에 있을 수는 없으니 내 말을 잊지 말라고 하며 섭섭하게 작별하였다??66)라며 오준선은 고광순의 마음에 잊을 수 없어 이 의병전을 써서 역사에 남겨 교훈으로 삼고자 하였다.

고광순이 연곡사 전투에서 원수 갚기로 목숨을 바친 것을??아름다운 대의??라하며 충?효, 군신?부자 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보았다.67)

  오준선은〈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합전〉에서 김준 형제가??갑오(甲午)년에 동학당(東學黨)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일본과 서양을 배척한다고 선전하므로 준이 시험 삼아 가서 본즉 실로 적을 토벌하는 데는 뜻이 없고 전혀 겁탈·노략질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드디어 돌아와서 아우 율(聿)로 더불어 수원(水原)에 피해 살았다??68)라고 하며 의병들의 관심이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데에 뜻을 두고 있음을 말하였다

 고창 문수사 야간전투에서 김준은 놀라 흩어지려 의병들에게 강하게 말하기를  “군사가 의병이라고 불렀는데, 적을 만나 도피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또 기구한 험한 길에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니 기왕 죽기는 같을 바에야 싸우다가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며, 곧 포수들을 시켜 석벽에 몸을 기대고 연달아 총을 쏘아 크게 한바탕 싸우자 적병이 도망하였다. 성재는 극히 칭찬하기를 준이 장수의 재주가 있으니 의병이 승리하겠다고 하였다”69) 기삼연 역시 김준의 전투 능력을 크게 보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김준은 1908년(무신년) 정월 초하룻날 담양군 남면(南面) 무동(茂洞)에서, 적장 요시다(吉田勝三郞) 쏘아 승리를 거두었다??70)라고 하면서 김준이 요시다를 사살한 성과를 큰 승전으로 평가하였다.

전술 상황을 매복과 화력으로 제압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창평의 지곡(芝谷)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고 그날 밤에 한 고개를 넘어서 무동촌으로 진군하니 이날은 무신(戊申)년 정월 초하룻날이었다. 적장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郎)이 기마병을 거느리고 쫓아왔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마병이 매우 정예하였고, 또 길전은 제 나라의 육군대장으로 키가 10척이나 되고 용력이 뛰어났다. 날랜 말 위에 앉아서 칼을 휘두르며 바로 들어와 눈 아래 의병이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쳐다만 보며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준이 칼을 짚고 진(陣)에 나와서 강하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하여서는 안된다. 또 적이 사면에서 총을 쏘는데 어찌 도망할 길이 있겠는가? 하고 이에 군인들로 하여금 담 밑에 몸을 숨겨서 장령(將令)을 기다리게 하고 또 정예한 포수 2사람에게 이르기를 돌담 사이에 잠복하여 내 말을 기다려 쏘아라고 하였다.

  약속을 이미 정하자 길전이 날랜 기운으로 바로 담 밖에 이르렀다. 준이 잠복하였던 군사에 눈짓하여 천보총(千步銃)을 쏘아 그놈을 바로 맞추어 연달아 쏘아 모두 맞추니 몸이 넘어져 말에서 떨어졌으나 오히려 죽지 않았다. 준이 그놈의 보검을 빼앗아 쳐 죽이고 그의 망원경과 육혈포를 거두고 좌우에서 복병이 모두 총을 쏘니 소리가 뇌성처럼 진동하였다.

  적들이 제 대장의 즉음을 분히 여겨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의사 강길환(姜吉煥)·조덕관(趙德寬)이 죽어서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는데 율의 군사가 마침 가까운 곳에 있다가 총을 쏘아 옆으로 공격하니 적이 비록 도망해 갔으나 혹은 죽고 혹은 상하였다. 의병의 기세는 더욱 장하였다??71)면서 김준 부대의 의병들의 사기가 높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모습과 요시다를 사살하는 전투장면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여 의병들의 활약상을 크게 나타내고 있다.

〈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全垂鏞)합전〉에서 의사 전수용은??천안 사람인데 을사년에 의병장 오성술(吳聖述, 1884~1910)과 서로 힘을 합하여 광주 도림마을에 와서 머물렀다??72)면서 의병투쟁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6월에 군사를 광주 양암정(羊岩亭)에서 모으는데 포군(砲軍)이 문득 1사람을 얻어 왔다. 그 사람은 키가 7척이요, 기상이 늠늠하니 곧 지도(智島)에 귀양살던 정원집(鄭元執)이었다. 이 사람은 을사년 협박조약 때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려다가 도리어 적의 도당에게 모함을 당하여 바다 섬에 귀양살이로 와 있었다가, 본도에 의병의 기세가 매우 떨치는 것을 보고 몸을 탈출하여 이리로 달려 온 것이었다. 모두 인물 얻었음을 기뻐하였다. 7월 29일에 함께 수용을 추대하여 대장을 삼으매 드디어 허락하고, 정원집으로 선봉장을 삼고, 김원범(金元凡)으로 중군장을 삼고, 윤동수(尹東秀)로 후군장을 삼고, 박영근(朴永根)으로 후군장(護軍將)을 삼고, 이범진(李凡辰)으로 도포장(都砲將)을 삼고, 군령을 엄히 하고 부대를 정비하였다??73)라 하면서 해산 군인 정원집을 영입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의병의 조직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진안에서 전수용이 체포되어 일제 감옥에서 말하기를 “내가 본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왜놈의 두목을 무찔러서 국가의 수치를 씻으려 한 것인데, 도리어 너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이 있으랴. 오직 한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함이 있을 뿐이다. 하니 대장도 의롭게 여겼다. 광주의 옥으로 압송되자 광주의 판사(判事)·검사(檢事)?란 자들이 극히 공경히 대우하여 독방에 있게 하고, 음식을 잘 공급하면서 백방으로 꼬였다. 수용이 기색이 더욱 늠름하고 소리를 높여, 내가 네놈들을 만 동강으로 찢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왜 나를 속히 죽이지 않는가? 하였더니 적이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광주의 옥에 갇힌 지 여섯 달 동안에 슬피 읊은 긴 노래가 많이 있었다 한다. 경술년 정월에 의장(義將) 박영근(朴永根)·심남일(沈南一)·오성술(吳聖述)·강무경(姜武景)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7월 23일에 마침내 해침을 입었다??74)면서 의병을 일으킨 목적은 왜놈의 두목을 무찔러서 국가의 수치를 씻으려 한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오준선은 이석용(李錫庸, 1878∼1914)·김영엽(痴齋 金永燁,1869~1909)·심남일 등 10여 인이 또한, 의가 있으니 빠뜨릴 수 없다고 하였다.75) 심남일이 기유(己酉)년 8월 26일에 일제에게 사로잡혀 9월 2일, 광주(光州)감옥에서  말하기를 “네놈들이 동맹국으로서 우리나라를 보호한다 일컫고 강제로 국권을 박탈하며 마침내는 종묘사직을 전복하니 우리나라 신민(臣民)은 만세라도 이런 심각한 원수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백면서생으로 의분심을 못 이겨 의병을 수합하여 더러운 오랑캐를 깨끗이 쓸어내고 우리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하늘이 바른 자를 돕지 아니하여 네놈들에게 잡히고 말았으니 오직 한 죽음으로 나라 은혜에 보답할 따름이다. 비록 그러하나 네놈들을 반 토막으로 짤라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네놈들 손에 죽게 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하니 소위 왜적의 부대장이라는 자도 역시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여 마지않았다”76)라고 말한 심남일의 장한 모습을 오준선은 실기로 나타내며 친척을 여읜 것처럼 슬퍼하였다.

 “남일 같은 사람은 시골구석의 한 농민이니 비록 문을 닫고 집안에 들어 앉아 그 몸을 보전하는 것도 안 될 것은 없는데, 다만 충의로서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선뜻 일어나 3년 동안 행군하면서 4,5백 명의 피곤한 군사로 강성한 침략자를 대항하여 대장 한 놈과 수백 명의 졸병을 잡았으니 국가의 원기가 역시 장하다 하겠다. 필경 운수가 다 가서 사로잡히게 되자 수개 월 동안 감옥 속에서 칼날에 닿아도 기운이 꺾이지 않고 하느님이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이 깨끗이 순절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세에 찬사가 있을 것이다??77)라고 하며 심남일의 죽음을 순절한 의병의 표본으로 인식하였다.

 오준선은  고광선이 쓴 행장의 말처럼??도를 안고 산으로 들어가(抱道自靖) 법도를 지키는 뜻에 따른 것이다. 오준선은 옛 법도를 지키는 길(去之守舊)을 선택한 것이다. 오준선은??뒷날에 충성을 사모하고 의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거든 의병들을 표창하여 드러내길 바란다??고 하였다.78)

  기정진은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지극한 선의 발현과 그 실현이 더욱 요청된다고 하였는데 기정진의 노사학파의 사상은 세 가지 방향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첫째로 위정척사 운동을 통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통성 회복, 둘째로 이른바 도학의 진흥, 즉 성리학 이론의 탐구와 발전, 셋째로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의 전개 등 이들의 가치는 서로 별개가 아니며, 의병항쟁은 위정척사 운동의 구체적 실현으로 조선왕조의 근왕운동(勤王運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79)

  오준선의 의병관은 국치를 씻기 위한 의병들의 의(義)가 해와 별과 같이 밝아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동방에 의병이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장한 것이며, 군자라면 좋아하는 의로움이 의병항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80) 오준선의〈의병전〉에서 기삼연, 고광순의 의병 활동을 군왕을 위한 근왕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81) 무장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오준선은〈의병전〉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

〈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합전〉에서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대항한 의병들이 살육 당하거나 체포됨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무장투쟁으로 요시다를 사살한 전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제의 화력과 군대 대적하기 위해 의병들의 총기 노획한 점을 강조하면서 화력보강을 강조하고 있다. 의병전쟁 중 고광선·기삼연·김준·전수용·심남일·이석용·김영엽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민중의 전통적인 반침략 항쟁의 민족정신과 을 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Ⅳ. 의병들의 오준선 인식

  오준선은 일제에 대한 강한 배일의식과 충?효?의리관을 강조하며 문하생을 가르쳤다. 문하생들은 오준선의 가르침을 받아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오상렬·이기손·오성술·전수용은 오준선의 문생들중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82) 오상렬(吳相烈,1879~1907)은 본량면 명도리 164에서 살면서 오준선에 수학하고??죽을 곳에서 마땅히 죽으니 한스러움이 없다??83)하면서 무장투쟁에 나섰다. 1906년 전해산, 김태원, 김율 등과 의병을 규합 도통장(都統將)으로서 삼도면(三道面) 명도리(明道里) 영사제(永思齊)에서 무기를 만들고 光州 無等山에서 3일간의 전투에서 일제 병졸 200여명을 사살하였으며, 동년에 석문산에서 5일간에 일제 병졸 100여명을 사살하였다.84) 1907년 용진산 사호치(沙湖峙)전투에서 45일간 일제와 투쟁하였다.85)

 이기손( 李起巽1877~1957) 본량면 북산 110살면서 오준선에게 수학하고,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光山, 羅州, 咸平) 의병장으로서 800여명의 의병을 지휘, 무기 천포대, 대완구, 신식총 500 정(일제 노획무기)으로 무장하여 일제 기병장교 요시다와 일제병졸 200여명을 사살하고 소총 100여정을 노획하는 공을 세우고 선병명령에 따라 함경도, 러시아, 만주 등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였다.86) 오성술( 吳成述1884~1910) 삼도면 송산 477에 살면서 오준선에게 수학하였다. 1908년 4월 전해산이 장성(長城)에 왔을때 오성술은 전해산을 찾아가 재기를 상의하였다.87) 오성술 의병장은 나주, 광주, 담양 등지에서 일군과 격전하고, 체포되어 광주의 감옥에 갇힌 지 여섯 달 동안에 충정으로 읊은 노래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경술년 정월에 의장(義將) 박영근(朴永根)·심남일(沈南一)·오성술(吳聖述)·강무경(姜武景)과 함께 대구에서 순국하였다.88)

 당시 의병들은??의롭게 죽는다면 죽음도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89)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은 오준선을 정신적 지도자로 인식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오준선과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한 김열은 (金烈, 1857~1936)은 장성군(長城郡) 삼서면(森西面) 석마리(石馬里) 운곡초당(雲谷草堂)후학을 가르치고, 1894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90) 김열은 문생록에서 오준선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각금(却金)을 물리치고 평생토록 옥빛 같은 정직한 마음, 이제 어느 곳을 우러러볼까??91)라고 하며 오준선의 평소 모습을 정직한 모습에 일본의 은사금을 거부하는 각금의 모습을 높이 흠모하고 산과 하늘같은 평생 충과 의를 가르친 스승을 극진한 옥빛으로 인식하였다.

 고광순은 거의(擧義)하면서??오준선이 충의가 분발 하였다??92)하며, ??오준선의 의기를 잘 안다??라고 하였다.93) 고광순은 오준선과 동문수학하였기에 누구 보다 고광순은 오준선이 학문이 높고 깊으며 의리가 밝다고 인정한 것이다.

  기우만은 오준선이??치밀하여 향중에서 이름이 있다??94)고 하며,??매월 초하루의 윤강을 행하여 선비들의 학풍을 진작 시켰다??95)하며 ??김천일(健齋 金千鎰 , 1537∼1593)의 문집이 당시까지 간행되지 않은 것을 간행하는 사업을 일으켰다??96) 이러한 모습을 보아온 기우만은  향촌 일에 앞장선 오준선이 향리에 이름난 학풍의 소유자라고 하고 있다.

 기삼연은 오준선과??간담이 서로 비치어 흰 머리가 되도록 변치 않는 사이다??97)라며 정미년 가을 5일간 떨어지지 못하고 의병에 관한 의논만을 하였다.98) 이는 오준선의 의병에 깊은 관심과 민족운동을 향해 살아가고자하는 오준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준선의 학풍과 충의정신은 의병들은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Ⅴ. 맺음말

  한국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일제는 의병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제의 군경 및 일제의 앞잡이들이 의병에게 죽거나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을 전후하여 군대를 동원한??남한대토벌작전??을 악랄하게 실시하였다. 용진산, 석문산, 대명산, 어등산은 호남의병의 치열한 전투지역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원이다.

 오준선은 광산지역을 근거로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벌인 의병의 스승으로 의병들과 문도들의 정신적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 기우만의 언급과 같이   향촌 일에 앞장선 오준선은 향리에서도 이름난 학풍의 지도자였다. 한말 호남의병 중 오준선의〈의병전〉에 4명의 의병장이 언급되어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금서 처분을 받을 만큼 의병사의 전투 기록을 담고 있다. 오준선은 당시 정직한 마음과 의기가 높아 향리에서 이름이 있는 정신적 지도자로 인식되고, 634명이나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중에서 이기손, 오상렬, 오성술, 전수용은 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다.

  오준선을 찾아 예법과 경전 등을 탐구한 용진정사의 선비들은 의병들의 산실이 되었다. 오준선은 기우만과 고광순과 동문수학하며, 임헌희, 송근수, 최익현, 송병선, 송병순 등 사림의 영수들을 찾아 배알하고, 학문의 활동 벙위도 호남에 극한하지 않고 기호까지 넓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오준선은 기의 발동과 운행은??오직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라며 무조건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다.

 국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 할 모의를 논의하면서, 원수 갚는 의리를 가슴 속에 한시도 잊지 않고, 용진산으로 들어간 오준선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의병전〉을 찬술하면서, 오준선은 의병들의 의가 해와 별과 같이 밝아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동방에 의병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면서, 충성을 사모하고 의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거든 의병들을 표창하여 드러내길 바란다고 하였다.

〈의사 김준?전수용합전〉에서 일제의??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대항한 의병들이 살육과 체포됨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무장투쟁으로 요시다를 사살한 전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제의 화력과 군대 대적하기 위해 의병들의 총기를 노획한 점을 강조하면서 화력보강을 강조하고 있다. 오준선은 무장투쟁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의병전〉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고자 하였다. 의병전쟁 중 고광선·기삼연·김준·전수용·심남일·이석용·김영엽 등을 거론하면서 오준선은 집필 활동을 통하여 조선민중의 전통적인 반침략 항쟁의 민족정신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출처 :전남대평생교육원문화유산지도자 원문보기 글쓴이 : 덕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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