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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안녕하세요.”
살갑게 인사했건만 들은 건지 만 건지 아파트 경비는 그저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여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발랄한 표정에 경쾌한 걸음걸이가 더없이 밝았다. 눈이 따가울 만치 새하얀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 색 치마, 이렇다 할 장신구도 없었고 눈에 띄는 문신이라든가 짙은 화장 없이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매력을 뿜었다. 굽이 높은 구두가 땅을 찍으며 내는 딱딱 하는 소리마저 세련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긴 다리를 뻗어 말끔한 새 건물의 바닥을 훑는 움직임이 꽤 날렵하다. 웃는 낯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그다지 썩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 나오지 않는지 여러 번에 걸쳐 가르마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었다. 결국 어느 쪽으로도 확고히 정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두고 입가를 더듬었다. 볼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을 털어내다 말고 느닷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곁눈질에 우편함이 보였던 건지 손가락 쭉 뻗어 편지 봉투의 끝을 살짝 집었다. 딱히 편지 올만한 데는 없는데. 들릴락 말락 중얼거리는 입술에 기대감이 맺히었다. 찬찬히 봉투를 뜯어보는가 싶더니 이내 갸우뚱하며 편지를 쥔 손목을 틀었다 고개를 돌렸다 해가며 이리저리 살펴댄다. 풀칠한 자국 말고는 글씨 하나 적혀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발신인 이름조차 없이 ‘최진주’하는 자신의 이름 석 자만 달랑 적혀 있는 괴상한 편지였다.
“저기, 아저씨?”
진주가 종종 걸음으로 경비에게 걸어가선 물었다. 그 어조에 그다지 따지고 드는 듯한 공격성은 가셔 있었는데도 한창 야구 중계를 보고 있던 경비는 화들짝 놀라선 “예, 예.” 하며 굽실거렸다. 바싹 얼어 있는 그를 향해 진주는 여유 있게 웃었다.
“이거 우편물이 좀 이상한데요?”
“에…, 그게 그러니까요.”
별 일 아닌데도 변명하는 말이 습관처럼 붙었는지 덜컥 그렇게 뱉고 보았다. 진주는 괜히 자기가 무안해져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수신인 주소랑 이름은 제가 맞는데요…. 발신인이… 없어서요.”
“에… 잠시만이요.”
경비는 편지를 낚아채듯 집어가선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턱을 매만졌다. 잠시 머리를 긁적여도 봤다가 다리를 떨기도 하더니 다시 편지를 진주에게 건네었다.
“잘 모르겠군요.”
그 정도는 표정만 봐도 알겠다. 진주는 그런 생각이 들어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괜찮아요.’하는 위로의 말 정도로 알아들었는지 경비가 인상을 조금 풀었다. 고심하는 연기에서 해방된 그 눈은 다시 야구 중계로 돌아갔다. 몇 대 몇이냐고 쏘아주고 싶은 충동을 구겨 넣고 다시 생긋 웃었다.
“이 편지 보낸 사람 못 보셨어요?”
“한 6시쯤에 웬 아가씨가 와서 편지만 꽂아두고 나가긴 했는데요.”
이 불성실한 경비가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왠지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지만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없었다.
“어떤 아가씨가…?”
“잘은 기억 안 나는데 별 특징 없는 아가씨였는데…. 안경 쓰고 머리 묶고 있었던 것 같은데….”
데, 데 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게 영 시원치가 못했다. 게다가 늘어놓는 특징이란 것이 안경, 묶은 머리, 셔츠 따위 시시한 것들에 불과해서 그다지 좋은 추리를 제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진주는 대충 머리를 숙여 인사말을 대신하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누가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일까 싶었지만 자신의 집까지 아는 사람이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할까 싶었다. 고백이라도 들어온 걸까. 스토킹이라도 당했던가. 그도 아니면 누가 장난치는 걸까. 여자가 보낸 편지라면 역시나 장난일 가능성이 크지 않으려나.
경비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 종합한다고 해도 딱히 구체적인 사람 형상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 편지를 전한 여자는 정말 그의 말 그대로 ‘별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긴 뚜렷한 특징이 있었더라면 인상착의라고 할 만한 게 안경, 머리 모양 정도는 아니었을 테지. 특징 없는 여자라고 하니 생각나는 사람이 꼭 하나 있기는 했다.
얼마 전에 상담을 했던 여자였다. 첫 인상은 그야말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라는 것이었는데 다시금 떠올려 보려 해도 가물가물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려니 기억나는 거라고는 ‘안경’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뚜렷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주긴 했다. 그럼에도 별다른 외형적 특징 하나 잡아내지 못했다는 일은 참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미약했다.
그래도 용케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수수한 외모 -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 와는 어울리지 않는 징그러운 똥고집 때문이었다. 거의 얼굴을 다 뜯어고치고 싶다고 했는데 이유는 꿈이 아나운서라서 그렇다고 했다. 카메라를 대본 것은 아닌지라 확신은 할 수 없었으나 확실히 TV에서 볼 정도의 얼굴은 아닌 듯 했다. 속으로나마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게 괜히 뒤에서 흉이라도 본 듯한 죄책감 비슷한 기분에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나운서 감은 아니었다. 목소리도 여자로선 낮은 편이라 음울하게 들렸고 얼굴이 예쁘다, 못났다를 가리기 이전에 그리 신뢰가 가는 인상도 아니었다.
성형외과 의사로 지낸지 그럭저럭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별에 별 이유로 성형을 하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그때마다 막연한 안타까움이 들면서 만류하던 것이 이제는 거의 버릇이 되어버린 진주였다. 이번에도 슬슬 눈치를 보다가 여자가 조금 주저하는 틈을 타 냉큼 조금 더 생각해보시라는 말을 은연중에 슬쩍 꺼내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버릇이었다. 자신이 성형외과 의사로 있으면서 거의 매번 수술을 만류하는 것은 아마 독립한 병원의 의사였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도 선배들이나 원장의 굳은 얼굴을 볼 때면 혹여나 수술을 만류하고 다니는 게 어디 소문이라도 퍼지지 않았나 싶어 흠칫 놀라곤 했다. 그녀의 만류를 반기지 않는 것은 윗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상담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다지 그녀의 제안에 따뜻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개심에 떨며 노려보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진주는 딱 보기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이었다. 갸름한 턱선에 웃을 때마다 적당하게 휘어지는 반달눈에 코도 날이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얇은 여린 느낌이었고 선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라고 소개 받은 사람이면 얼굴 손 좀 봤구나, 하는 지레짐작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진주가 수술을 말리니 얄밉게 보일 만도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성형 수술 조금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의사가 돼서 만류를 하느냐는 생각이 스스로도 들긴 했다. 하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별 대단한 것도 아닌 외모 때문에 간절한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측은했다. 성형 수술이 일상화 되었다고 하지만 그 위험에 대한 인식까지도 일상화 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진주는 늘 자신감이 충만했고 자신이 사고를 낼 거라든가 하는 생각은 그다지 해본 일이 없긴 했다. 하지만 수술에 대한 강한 공포감에 쌓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들은 고작 해야 쌍꺼풀 수술 조금 하는 것에도 수없이 떨어대곤 했다. 대체 뭐가 그리 그들을 성형외과로 내모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불투명한 공포에 떠밀린 이들이 기웃거리는 모습을 봐오다 보니 의외로 익숙해지기는커녕 회의감만 늘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의 충고는 그리 잘 먹히는 편이 아니었다. 상담하던 젊은 여자는 버럭 화를 낸다던가, 짜증을 부린다거나 하는 것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긴 했지만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언짢은가? 진주는 조심스레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의 화를 돋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진주로서는 조그맣게 몸을 떠는 그녀의 모습이 그저 측은하기만 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조금만 더 생각해보죠.”
어쩐지 상담하는 내도록 동경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서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띄엄띄엄 들린 그 말이 어쩜 그렇게 힘 있게 들렸는지. 진주는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아나운서가 꼭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랬는데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역시 미안한 일이었다.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서 얼굴을 한 번 찾아볼까도 싶었지만 모처럼의 주말을 반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습관이 된 인사말을 무심코 던졌지만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사방에 밤이 깔려 있었다. 발을 들이자 그녀의 움직임에 반응한 전등이 앞을 밝혔다. 난방비가 팍 줄었더니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바닥의 온도도 뚝 떨어졌다. 사람 냄새란 건 참 금방 잦아드는 향인가 보다. 부모님이 여행 가신 건 진주가 출근하고도 두어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을 텐데 사람 사는 곳다운 온기가 싹 가셔 있었다.
피곤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교회엘 가봐야지. 오랜만에 찾아든 완연한 자유를 즐기고픈 마음도 적잖이 들긴 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이 건강한 생활이 더 중요했다. 이제 그녀도 30대, 철없는 방종은 접을 때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뭐가 그리 급한지 씻자마자 침대로 쓰러져 버렸다. 읽지도 않은 편지가 식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가운데 휑한 집의 불빛을 어둠이 앗아갔다.
의외로 일찍 잠이 깨었다. 꿈꿀 새도 없이 푹 잠이 든 덕인지 머리가 아주 맑았다. 하품조차 나오지 않는 유쾌한 숙면이었다. 진주는 천천히 방에서 나와 적당히 씻고 여유롭게 냉장고에 있던 찬 물을 들이켰다. 컵에 따르지도 않고 페트병 채로 물이건 음료수건 개의치 않고 마시던 통에 늘 선머슴 같다는 소리가 따라다니곤 했다. 진주는 아련한 기억 속의 별명을 하나 둘 꼽아보며 웃었다.
허나 언제까지고 웃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니 밥 먹을 길이 막막했다. 오랜만에 요리라도 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긴 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다 큰 처자가 혼자 있으면 밥 하나 변변히 못 차려 먹는다는 구박을 귀에 달고 살았지만 귀찮은 건 별 수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잔소리할 엄마도 안계시니 모처럼 적당히 아침을 떼울 요량으로 우유와 씨리얼을 꺼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릴 내며 씨리얼을 쏟아붓는데 그제야 어젯밤의 괴이한 편지가 눈에 띄었다. 별로 신경쓰지 않고 대충 보아서인지 수명을 다한 전등의 어둑한 조명 때문인지 잘 보지 못했는데 어설프게 풀칠을 해놓은 손떼가 흰 편지 봉투 이곳저곳에 묻어 있었다.
그냥 장난일까? 이 편지는 런던으로부터 시작되어 총 120개국에 걸쳐 퍼져 있으며- 따위로 시작하는 행운의 편지는 아닐까. 요즘 같은 세상에 행운의 편지를 이메일을 쓰지 않고 손수 써서 우편함에 넣어준 사람이 있다면 장난기는 배제하고서라도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유쾌하게 웃어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도 편지를 뜯어보진 못했다. 벌써 8시 50분. 교회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5분 내외지만 시간에는 깐깐한 편인 진주로서는 상당히 급한 순간이었다. 우유에 뒤섞여 눅눅해진 씨리얼을 후루룩 마시 듯이 해치워버리고 황급히 손가방을 챙겨선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나선 다음에야 얼결에 어제 그 편지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내 가방에 쑤셔넣어버렸다. 주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행운의 편지 따윌 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적당히 속으로 얼버무렸지만 괜한 불길함에 굴복한 것이란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도 아직 어린애네."
처음 이메일로 행운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찝찝한 두려움을 안고 안절부절했던 순진한 시절이 아직 약간은 남아 있는 것이겠지. 진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단정한 차림으로 교회로 향했다. 요즘 한창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와서 시끌벅적하다. 그 정겨운 풍경이 떠올라 진주는 다시금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현석이는 2주 전부터 진주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아이였다. 또래에 비해서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반곱슬인 머리를 부스스하게 하고 다녔는데 진주에게 성경 내용을 배우는 첫 아이였는데 제법 말귀를 잘 알아듣는 총명한 아이였다. 간혹 좀 멍하니 있긴 했지만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는지 교회에 나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먼젓번부터 다니고 있던 아이들에 섞여 노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놀이의 중심에 서 있어서 진주를 비롯한 성경 공부 시간의 선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진주에게는 썩 마음에 드는 제자였다. 이 교회의 성경공부라는 것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길어야 한 달 정도 진행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현석이는 정말 이해가 빨랐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기분일 뿐인지, 성경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에서부터인지는 몰라도 집중력을 가지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학생이란 건 언제나 가르치는 이에게 환영 받는 존재였다. 열 살 꼬마치고는 제법 오래 앉아 있는 버릇이 들어 있어서 끈기도 있었다. 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 해봐야 하느님과 예수님 밖에 없는 꼬마가 아브라함이니 다윗이니 솔로몬이니 하는 길고긴 구약성서의 내용을 끝까지 듣고 있는다는 건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일이어서 진주도 나름대로 열의를 다해 현석이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헌데 오늘은 유달리 진주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역시 애는 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그 모습이 얄미운 것이 아이를 마냥 예뻐만 할 수 없는 교사의 마음이란 걸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성 싶었다.
"있잖아요. 구원 받는단 게 뭐예요?"
한참을 쭈뼛거리던 현석이가 결국에는 진주의 말을 끊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 별 게 아니었다. 지겹다거나, 집에 가고 싶다는 투정이 나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내심 걱정했던 진주로서는 도리어 고마운 질문이었다.
"구원? 그건 다음 주쯤에 알려줄텐데. 왜?"
"그냥요. 넌 구원 받았냐고 엄마가 물어보길래요."
진도를 알아보기 위해 물으셨나보다. 진주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뭐라 답할 말이 어중간하긴 했지만 열의를 보이는 현석의 모습에 흐뭇해졌다.
"그건 천천히 말해줄께. 다음 주엔 현석이도 구원 받을 수 있을 거야. 일단 오늘은 솔로몬 왕 이야기를 끝내자."
현석이는 이내 수그러들어선 "예"하고 답했다. 진주는 다시 여유를 되찾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차피 자신의 역할이란 것은 시시했다. 신학적인 의미를 풀어준다거나 하느님의 뜻을 심어주는 건 목사의 몫일 뿐, 자신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도 기왕 하는 일인 바에 이 첫 제자만큼은 '구원'받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인 것 같았다. 그녀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수첩을 꺼내어 다음 주 일요일에다 '구원'이라고 작은 글씨로 적어놓았다.
"이거 뭐예요?"
"응?"
언제 떨어졌는지 가방에 넣어놓았던 편지가 현석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 내 편지야. 고마워."
자꾸만 잊게 되는 편지가 또 자꾸만 다시 눈에 띈다. 잊고 있던 편지가 우연찮게 눈에 띈 것은 다행스러워 해야할 일이건만 왠지 굳이 편지를 주워준 아이가 야속하다.
진주가 편지를 읽을 결심이 선 것은 현석일 보내고 나서였다. 정확하게는 오후의 성인 대상의 설교을 듣고난 후였다. 뇌리 깊숙이에서 숨어있다 틈틈이 공포를 들춰내는 악몽처럼 편지는 진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멤돌았다.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별 것 아닌 장난질일 수도 있는 편지를 열어보지도 못하고 있는 꼴이 우스워서 오기로라도 편지를 뜯어볼 것을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그러나 남들 있는 데서는 차마 뜯어보지 못했다. 굳이 사소한 편지에 벌벌 떠는 자신의 유약한 면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고 진짜 행운의 편지 따위 시덥지 않은 장난질이었다가는 정말 낯뜨거운 일이 될 것만 같아 진주는 집에 거의 다다른 후에야 봉투를 찢었다.
편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인쇄된 글씨라 필체를 확인해보기는 어렵지만 무뚝뚝함이 살짝 느껴졌기에 그녀는 편지를 보낸 이가 남자라고 속단했다.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하지 않은 티가 역력히 나는 신명조 체의 글씨에서부터 무신경함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최진주 씨.
저를 무어라 소개해야 좋을지 난감하군요. 일단 의사라고 해두겠습니다. 나름대로 처방을 내리는 일을 하고 있긴 하니까요.
이선경 변호사께 전해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구원’받으신 분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구원’받으신 분들은 다 훌륭한 삶을 유지하시기는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것이 있으니 유일한 중간 점검이자 마지막 진단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일요일 오후 4시에 찾아뵙겠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무슨 소리일까. 진주로서는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당최 이 편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대체 이 편지의 어디가 의사다운지도 알 수 없었다. 방문 진료 서비스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그런 걸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딸일 뿐이었다.
물론 언뜻 대단한 집안으로 비칠 수 있기는 했다. 엄마는 변호사인데다 국내 굴지의 로펌에서 일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대학병원 교수 겸 의사였다. 친척들도 대체로 의사, 변호사, 판검사, 못해도 교사 등등등 '사자 돌림 집안'이었고 진주 자신도 명문대 의대 출신의 성형외과 의사였다. 이 정도 정보만 놓고 보면 고만고만하게 살아온 부잣집 따님일 뿐이었지만 진주는 나름대로 억척스러운 데가 있었다. 아버지가 개인 병원을 낸 시기가 어떻게 금융위기 겸 진주의 고 3 시절과 겹쳐서 꽤나 고생했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미국 어디 쯤에 유학 중이셨고 진주로서는 더없이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는 지금도 가족끼리의 식사에서 그 때를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곤 하신다. 결론은 언제나 '장하다, 내 딸.'하는 식이어서 진주로서도 꽤 괜찮은 안주였다. 수험생 때를 생각하면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였다. 학원이고 과외고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더구나 지방에 내려가서 준비한 수능은 시쳇말로 '대박'이었다.
이제 정말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까 하는 환상에 젖어선 대학 문턱을 넘었다. 헌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외고생이니, 과고생이니 또 새로운 상류 사회를 만나게 되었다.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도 많았다. 더군다나 지방에서 사는 동안 짧은 시간동안 짧은 사투리는 지방 출신 동기들에게도 서울 토박이 동기들과도 어울리지 못할 이질적인 억양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게 대학생활을 잘 보냈다. 4개나 되는 동아리 활동을 해내고 인기로는 최고를 달리고 있는 성형외과 공부를 마쳤다. 장학금은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쯤 되니 슬슬 집안도 안정이 되었다. 엄마는 로펌에 들어가셨고 아버지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다시 교수로 임용되었다. 구원이라면 구원이긴 했다. 무엇보다 그저 상류 사회의 딸래미일 뿐이던 진주로서는 그 ‘자수성가’의 체험은 보석보다 진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진주가 믿는 구원은 오직 그 하나였다. 성경을 만난 시기도 이때였고 도전에 앞선 다짐에서 떠올리는 기억도 이때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다. 귀 기울여 보니 발소리가 들리는 데 한 명은 아니었다. 높은 구두에도 능숙한 여자의 발소리와 구두가 질질 끌리는 호리호리한 남자의 발소리가 섞여서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언뜻 말소리도 들리는데 목소리 톤으로 보아 한 쌍의 남녀다. 진주는 저도 모르게 가만 몸을 움츠린 채 눈을 오른쪽으로 굴렸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다. 일요일 6시. 편지에 씌어 있는 ‘마지막 진단’의 시간. 진주는 재차 초인종이 울려대는 현관을 향해 슬며시 다가갔다. 문을 열어야 할까. 편지를 보긴 했지만 뜯기 전의 왠지 모를 불안감은 여전히, 아니 더 커져 있었다.
간신히 나갈 맘이 들어서 현관문 밖을 슬쩍 내다본 것은 한 시간이나 지난 7시 쯤 되어서였다. 당연하게도 인기척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럭저럭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좀 이른 감이 있었다. 진주는 신이 얼마나 성급히 안심했는가는 다음날 출근길에 바로 알 수 있었다.
편지였다. 진주는 조심스럽게 그 편지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최진주 귀하’말고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고 편지는 서툴게 풀칠한 흔적이 손때로 남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편지 드렸던 담당 의사입니다.
모처럼 댁을 찾아뵈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맞지 않았나 봅니다. 거부감이 드실 수도 있겠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니, 다음 진료에는 반드시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인쇄된 글씨가 아니었다. 급히 봉했는지 잉크가 조금 번져 있긴 했지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선이 동글동글하고 자음이 가분수 꼴로 커다란 글씨체였다. 여자의 글씨다. 어제 찾아왔던 일행 중 한 명이 남기고 간 편지가 분명했다.
안타깝지만 다음 진료는 제가 직접 해드리지 못할 듯 합니다. 죄송스럽다는 말을 어머님께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6시에 저의 조수 혼자 찾아갈 것입니다. 별로 대단한 검사도 아니고 30분 이내에 끝날 것입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편지는 거기서 끝나있었다. 진주는 일단 그 기묘한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아직도 불안감이 가신 것이 아니어서 일련의 편지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상담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잔뜩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이한 바람이 고개를 쳐들었다.
오전부터 상담이 있었다. 일전에 왔던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다. 여전히 특징 없는 외모에 무난한 목소리 어디 하나 뚜렷하지 못한 인상과 옷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진주의 목소리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진주 또한 더 이상 말을 이어갈 기운이 없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노랫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런 소리를 내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멀뚱멀뚱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의외로 말을 건 쪽은 환자 쪽이었다.
“저기… 정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역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진주도 더 이상 만류할 생각은 없었다. 한 번 더 그랬다가는 정말 머리채라도 뜯길지도 모를 독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하도 매서워서 진주에게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의사질이나 하는 주제에 니가 뭘 아냐!’하고 당장이라도 다그칠 듯한 기세였다. 며칠 전에 와서는 겁이 많다고 설레발치던 그녀의 모습이 슬쩍 겹쳐져 안쓰럽기는 하였으나 여기까지 결심하고 온 그녀를 내칠 능력도 권리도 진주에겐 없었다. 여전히 몸을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을 뿐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모습이 퍽이나 가여웠다. 하지만 역시 진주가 뭐라고 한 들 들을 눈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원망마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특별히 미움 받는 일은 없었지만 눈에 띌 일도 없었던 그녀는 언제나 격정과는 먼 삶 속에서 휘청 이고 있었다. 아나운서를 지망한다고 했지만 만류하는 사람도 격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시시한 것이었다. 주목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익숙했다.
진주는 뭘 하든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 시선은 언제나 살가웠고 적의가 없었다. 사랑 받는 데 더없이 익숙했고 사랑 받는 방법에 능숙했다. 시선을 끄는 미인이었고 탁월한 천재였고 해맑은 여자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두 여자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무룩하니 고개를 숙인 둘이 묘하게 어울리긴 했지만 여전히 둘의 이질감을 매울 만큼은 아니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때때로 이런 질문을 던질 적에 자신이 의사인지 스타일리스트인지 헷깔리는 때도 있었지만 진주는 늘 그랬듯이 충실하게 업무에 몰입했다. 수술 날짜도 잡았다. 그 때 봐요, 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화 패턴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진주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다른 상담을 개시했고 한 차례 만류했고 여전히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쾌활하게 ‘지금도 너무 예쁘세요.’, ‘지금도 충분히 잘생기셨어요.’ 따위 말을 던져주는 모습은 그녀다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의도가 어쨌든 멍청한 짓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느덧 진주도 조금 전 떠나갔던 그녀의 존재를 잊었다. 그녀 또한 얼마 뒤에, 밀려 있는 수술을 처리하고 나면 수술대에 눕게 될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스쳐가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그 편지만은 의식의 한쪽 끄트머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지 당최 떠나갈 줄을 몰랐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이 괴이한 편지의 발신자가 엄마를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지속적으로 풍긴다는 점이었다. 엄마의 이름까지 떡하니 적혀 있을 뿐 아니라 안부를 전해달라는 것은 단순한 뻔뻔함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을 즐기고 계실 부모님께 괜한 말을 해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말한다 해도 믿어줄 것이란 확신도 들지 않았다. 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벌써부터 자존심 긁힐 일이 걱정되는 것이, 괜히 말해놓고 보니 그저 장난일 뿐인 것으로 밝혀지면 어쩌나 싶어서 했다.
이런저런 이유에 묶여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내 보고,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괜스레 쑥스러웠다. 꼭 한 명, 고등학교 적부터 알던 친구를 만나서 넌지시 이상한 편지 같은 거 받아본 적 있냐고 물었더니만 무슨 일 있냐는 대꾸도 않고 제 이야기만 재잘재잘 떠들어 대는 바람에 이 괴상한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밥 먹었냐.
네, 엄마는요.
아직. 아침은 좀 챙겨먹어.
거긴 몇 시야?
지금? 아침 8시.
여긴 벌써 저녁이야.
아, 그렇겠네.
그 대화들이 어쩐 일인지 뚝뚝 덩어리진 채로 끊긴 느낌이어서 고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입에서 우물쭈물 편지의 ‘ㅍ’발음을 머금고 있다말다 하다보니 침이 잔뜩 고여 있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엄마와의 통화가 이리 긴장되는 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편지 온 거 없었니?”
“응?”잔뜩 긴장한 진주와 달리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물었다. 생각해보면 별로 대단한 질문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집을 비웠으니 우편물 정도는 물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계속 편지에 대한 생각이 진주의 머리를 헤집고 다녔기 때문인지 그 평범한 물음이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차라리 자신의 기분 탓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었더라면 좀더 마음이 가벼워졌을까. 엄마의 질문은 결코 그냥 별 생각 없이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검사 받으란 소식 없디?”
급할 때 내지는 바짝 긴장했을 때나 나오는 엄마의 사투리였다. 어릴 적에 엄마, 아빠와 놀이동산에 갔을 적에, “화창한 날씨의 주말을 맞아 놀이동산은 어린이들과 나들이를 온 가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따위 멘트 직후에 나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리포터가 덜컥 마이크를 들이댔는데 엄마는 우물쭈물하더니만 더듬더듬 딸도 처음 듣는 사투리로 무어라 해댔었다. 아빠도 몰랐다는 듯 ‘당신 고향 서울 아니었어?’ 하며 물었는데 어릴 때 지방에 잠깐 살았다느니 뭐라고 해대는 엄마의 횡성수설이 여지껏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추억 탓에 엄마의 사투리는 늘 긴장한 목소리와 달리 진지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느닷없이 웃음이 피식 나왔지만 어쩐지 맘 편히 웃을 수만은 없었다.
“어… 있긴 한데, 왜?”
“그거 꼭 받아.”
“…응.”
힘없이 긍정하긴 했지만 의외였다. 할 말을 한 듯이 다시 서울말로 뭐라 읊어대는 엄마의 목소리 따위는 진주에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놈에 검사란 거, 받고 말지 하는 떠밀림인지 자발인지 모를 굳은 결심을 다진 것은 말이다.
*
딩동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문을 열어주었다. 얼굴은 보지도 않고 대뜸 인사랍시고 고개부터 숙였다. 높다란 검은색 하이힐에 발이 자그마하다. 다리로 봐선 조금 통통한 편인데 알이 배기거나 하진 않은 걸 봐선 고생 모르고 자란 인상이었다. 조금 고개를 들자 벌써부터 허리가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평범한 몸매, 유별스러울 것도 없는 인상의 처녀였다.
“어라?” 왠지 목소리가 낯익었다. 하지만 특색 없는 음색이어서 딱히 누구라고 감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 자체보다는 ‘라아-’ 하며 끝을 높다랗게 올린 물음표 붙은 억양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대체 이 여자가 자신을 보고 놀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진주는 냉큼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누구….”까지 말하고 뒷말은 냉큼 집어 삼켰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 여자다. 얼마 전에 병원을 찾았던 아나운서 지망생.
“아, 안녕하세요? 무슨 일….”
잔뜩 긴장해서 가슴 졸이며 ‘검사’를 기다리던 진주가 괜히 당황해선 여차저차 설명하려 입을 벌렸는데 입술만 벙긋벙긋할 뿐 제대로 된 설명은 나오지 않고 서툰 손짓만 해댔다. 그러니까 느닷없이 인사를 한 건 몰라봐서가 아니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니까 원래 어떤 약속이 있었는데…. 내뱉을 변명이 뒤엉켜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는 쑥스러운 변명 대신 내심 하고 싶었던 말을 툭 던져버렸다.
“웬일이세요?”
그녀가 집으로 덜컥 찾아올 이유는 아무리 머릴 쥐어 짜봐도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진주네 집은 어찌 알고 왔단 말인가.
“오늘 검사 받으실 분이 선생님이세요? 최…진주 씨 맞으시죠?”
그녀도 얼떨떨한지 그렇게 물어왔다. 아, 그럼 이 여자가 그 조수라는 사람인가보구나. 느닷없이 아는 얼굴을 봐서인지 여전히 꺼림칙한 데가 풀리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진주는 이내 의심을 풀었다. 내내 자신을 불안케 했던 검사란 게 예상 외로 별 것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느닷없이 마음이 탁 풀어지는 것이 마음 한 구석에서 그녀를 얕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진주는 내색은 하지 않고 얼른 손짓으로 손님을 맞아들였다. 병원을 찾을 때조차 주춤주춤하며 사방에 곁눈질을 하던 그녀의 소심한 모습이 떠올라 최대한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제스쳐를 날렸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꽤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왠지 기분 나쁜 웃음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비웃음일까. 혹시 지금까지 괜히 벌벌 떨었던 게 들키기라도 한 걸까. 덜컥 빈정 상하긴 했지만 일단 기다리는 동안 준비해두었던 말을 건네었다. 커피를 타고 어떤 검사인지, 어머니께서 전화가 오셨더라, 조수가 아닌 담당 의사는 어떤 분인지. 하지만 그녀는 어느 것도 답하지 않았다. 자세한 건 잘 모른단다. 얼렁뚱땅, 허겁지겁 적당적당한 답변만을 남긴 체 되려 물어왔다. 소위 검사란 게 시작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 성적 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흠, 중학교 때는요? 직업은… 의사셨죠? 실례지만 어느 대학교 출신이신지 좀…? 수능은요? 학점은요?
“저기….”
질문이 어째 이상했다. 무슨 중고등학생 꼬실 학원 전단지에나 나올 법한 사안이나 물어대는 것도 그랬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일일이 기록하면서 진중하게 물어대는 것도 별스러웠다.
“질문은 잠시만 있다가 받을게요.”
진주의 말은 그렇게 턱 막혀버렸다. 그 이후로도 질문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는 속옷 사이즈, 키, 몸무게까지 물어오는데 덜컥 답해주기는 하되 하면 할수록 역시 질 나쁜 장난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나쁜 예감이 불끈불끈 치솟았다.
“저기….”
진주가 다시금 제지하고 나섰건만 여자는 답할 생각도 않는 듯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질문만 톡톡 쏘아붙였다. 진주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였다면 성추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소하고 개인적인 질문들에 일일이 답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엄마가 ‘꼭 받아봐’라고 한 검사를 차마 뿌리치진 못했다. 진주 자신의 성질머리가 맘에 안 든다고 냉큼 물어오는 질문을 무시하고 버럭 성을 낼 수 있게 생겨먹은 것도 아니었다. 진주는 언제나 차분하게 듣는 편이었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낙천적인 성격에 조용한 편이었다.
“자, 이제 끝났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저기, 잠깐만요.”
저기만 몇 번째 반복하는 건지. 이번에는 말을 가로 막는다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차분히 진주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진주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용히 종이를 내밀었다.
“어떤 검사인지, 무엇을 위한 검사인지 알고 싶으시면 서명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형식적인 어조로 주절주절 긴 계약서 비스무리한 을 읽어주었다. 어디 인터넷 사이트 하나 가입하는 시시한 일에도 수없이 보이는 그런 어조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조금 특이했다. 부모님 및 자녀 등 일촌 이상의 가족과 친족에게 본 시술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 검사의 결과는 한 달 이내에 통보해드립니다. 그 사이 검사의 내용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시술은, 발설하지 않는다. 발설하지, 발설, 절대로, 않는다. 말하자면 닥치고 있으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들이었다. 오래 읽을 것도 없었다. 진주는 냉큼 이름 제 이름 석자를 휘갈겨 썼다.
"됐죠? 이제 가르쳐 줘요."
흥분해선지 새된 진주의 목소리가 여자의 고막을 후벼 팠다. 거의 마시지도 못한 체 식은 진주의 커피가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건지 한 차례 출렁거렸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초조할까. 자문해봐야 알 수 없었다. 진주는 바싹 말라버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유전자 성형이에요."
"네?"
꽤나 의외의 말이었다. 특히 '성형'이란 단어가 오늘따라 유달리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성형이란 단어가 낯설다는 것은 성형외과 의사인 진주로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한 단어를 가만히 보며 해체하고 있다 보면 문득 드는 의구심과 같은 묘한 혼란이 성형이란 어휘에서 풍겨왔다. 성형? 그런 걸 받은 기억은 아무래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전자 성형이란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 시술은 주로 태어나기 이전에 시행되는 거니까요. 선생님이 전공하시는 '성형'과도 다르니까 걱정하실 필요도 없어요."
나름대로 친절한 말이었지만 말투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그녀가 진주를 바라보는 눈빛은 거의 적의에 가까운 경멸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진주는 어렵지 않게 그 '유전자 성형'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믿는가의 여부와는 별개였다.
"서명하셨으니까, 수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검사 결과와 동봉해서 보내드릴 거고요, 이제 저한테 성형 만류 같은 거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그렇게 찬바람 날리는 말투로 쏘아붙이곤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굳이 그녀가 당부하지 않았어도 진주 또한 더 이상 남의 성형을 만류할 기력이 없었다.
현관문 즘에서 몇 차례 철컥거리는 소리와 손잡일 돌리며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진주는 나가보지는 않았다. 공들여 쌓은 모래성을 걷어찬 파도는 너무나 거대했다. 파도가 쓸고 간 자리에 스러진 모래성처럼 진주는 망연자실하여 제 몸도 간신히 추스르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별스러울 만큼 강렬하다. 숨을 내뱉었다. 긴긴 한숨과 함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분명 뱉을 수 있는 만큼의 숨을 다 토해내었는데도 진주는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
"구원 받은 것 같니?"
진주가 처음 이 질문을 받은 지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또 한 번의 주말을 맞이했다. 정확한 과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야말로 그럭저럭 보낸 시간이었다. 그럭저럭 잠이 들었고 그럭저럭 깨어났다. 신앙에서라기보다 몸에 밴 기계적인 감각에 의해 교회에 왔다. 그럭저럭 찾아온 현석이에게 그럭저럭 성경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던지 지난주에 했던 얘기라는 투정을 몇 차례 들은 끝에 무사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얘기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20년 전, 자신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해준 그 아주머니의 억양 그대로, 부드럽고 나긋하고 친절한 음성으로.
"구원 받은 것 같니?"
"네."
목소리가 꽤나 당차다. 진주도 그 자신감에 동화되었는지 일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이의 그것과는 달리 힘이 쭉 빠져서는 어딘지 어설픈 웃음이었다.
"그래, 그럼 기도하자."
눈을 감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시작하는 기도를 읊었지만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목사님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신에게 '구원'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 누군가의 읊조림을 흉내 내어 무어라 지껄였다.
어쩐지 옛 생각이 자꾸 났다. 그 때는 아이가 구원 받았다고 하고, 거기에 맞추어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다. 교회 음악을 전공했다는 목사님의 부인 덕에 어릴 적 다닌 그 교회는 여느 동네에서도 두, 세 개는 족히 있을 작은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피아노 연주가 끊이질 않았다. 유장한 저음이 일정한 박자로 발아래에 차오르고 현란하고 높다란 빛깔의 음표들이 쏟아져 내리는 청각의 풍경은 그야말로 예수가 세례를 받는 그 장면 그대로였다. 괜히 '나는 구원 받았다!'하는 생각에 설레어서 그 연주가 더욱 환상적으로 들렸었다.
귀에 그 아련한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 듯 했다.
'난 구원 받은 건가?'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진주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없었다. 거대한 무게감이 어깨 언저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기도 끄트머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색하게도 무기력함과 허망감이 심장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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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소설의 결말은 자살이었다.
결말이 바뀐 이유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