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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8 부산강의-딜타이
(강의:이근호 목사)
교부라는 것은 최초로 신앙을 학문화시킨 최초에 한 사람이 교부란 사람입니다. 최초의 교부가 어거스틴이거든요. 그게 말이 되겠어요. 신앙을 학문으로 체계화시켰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정말 진짜 정신 똑바로 차린 사람 같으면 어거스틴이 아니고, 성경으로 모든 계시는 종결되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되어야 되지, 어거스틴으로 돌아가자. 뭐가 이상해!
어거스틴은 어디로 가는지 압니까? 니케아회의로 돌아가요. 니케아회의로 끝나버렸어요. 삼위일체로 모든 걸 종결되어버렸어요. 그럼 니케아회의의 내용이 뭐냐? 아무것도 없어요. 로마주교가 교황입니다. 그게 전부에요. 로마교회에서 요구하는 교리가 우리는 나중에 다 따라갑시다. 그게 니케아회의에요. 또 로마 그거는 제일 인구수가 많고. 왜냐하면 또 로마제국의 수도이기 때문에. 서울의 큰 교회하고 강원도 골짜기 교회하고 게임이 안 되잖아요.
교회사를 하면서 현재 나오는 교회사 전체가 교회사를 논하는 우리는 정통이고, 나머지는 이단이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웃기는 거예요. 복음적으로 그래서 교회사 강의할 때 제일 처음에 그걸 알고 제일 처음 첫 시간에 그렇게 했거든요. 교회사라는 것은,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얼마나 비 복음적이고 반 복음적이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사에서 새로운 게 나올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교회사를 공부함으로써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이 얼마나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온 생각들이냐? 다른 사람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 이렇게 봅니다.
자, 오늘은 역사를 강조했던 딜타이에 대해서 해봅시다. 딜타이하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걱정되는 것이, 딜타이를 하려면 앞에 있는 칸트, 피히테, 셸링, 슐라이어마허, 헤겔, 이런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돼 있어야 이해가 됩니다. 몇 페이지이냐 하면, 179페이지 하는데요.
딜타이라는 이 사람이 앞에서 그렇게 좋은 소리했으면 형님, 최곱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지가 뭐 잘났다고 앞에서 잘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고 손들고 또 나오느냐? 뭐가 문제냐? 거기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179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보면,
[딜타이의 판단에 따르면 2000년 보다 훨씬 전부터 형이상학을 통해서 지각되었으며, 역사의식이 발생함으로써 첨예화된 근대가 형이상학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어있죠.
지금 딜타이의 주장이 뭐냐 하면, 앞에 있는 선배들에 대해서 충실하게 공부를 다 했을 거고, 그들이 뭐가 문제냐? 도대체 문제 찾기에 힘든데, 너무나 대단한 분들이 많아 찾기 힘든데, 그래도 그 틈새를 파고들어서 문제점을 발견한 거예요. 문제점이 뭐냐 하면, 역사가 등장하면, 잘 들어보세요. 기존의 모든 진리는 이거는 상대적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딜타이의 주장입니다.
역사가 등장하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다 상대적입니다. 그러니까 임시적입니다. 진리가 임시적일 것 같으면 이거는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거는 무너져야 한다. 진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주장하면서 제가 이런 진리를 주장하는데 곧 무너집니다. 라는 투로 이야기하란 말이죠. 이거는 곧 깨집니다. 라는 투로 이야기하란 말입니다. 기록이라 하는 것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한다. 라는 그런 말처럼.
기존의 사람들은 어떻게 봤느냐 하면, 인간이 있어서 인간 내부를 쳐다보고, 인간 외부를 쳐다봤어요. 내부를 쳐다보고 그 다음에 외부를 바라보고. 내부를 바라보고 또 외부를 바라보고.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여기서 외부, 내부 왜 쳐다보느냐 하면, 이걸 여러분 꼭 아셔야 될 것은, 사람들은 왜 자꾸 두리번거리면서 외부, 내부를 사색하고 사유하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게 나중에 20세기 중반에 나오는데, 인간은 가만있을 인간이 아닙니다. 날마다 정진하기를 원해요.
인간의 욕구라 하는 것은 이상스럽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곧장 시시해져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800억 예배당 지어보세요. 6개월도 안가서 시시해져요. 천억 지어야 마음에 듭니다. 유명한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인가 모르겠습니다만, 서유석이 불러서 히트 쳤던 한 30년 전의 노래했던 장난감을 갖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좋아하다가 부셔버린다. 있지요.
그래서 '장난감'하는 그것에 제가 아이디어를 얻어서 사람들이 교회 세우기를 장난감 세우듯이 한다 했는데. 애들이 한 개 장난감 가지고 놀 때 오래 가질 않습니다. 계속 다른 장난감을 원하는. 우리가 중학교 때 갖고 놀던 그 장난감이 지금은 초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애들이 갖고 놉니다. 고등학교 때 했던 대화가 요샌 초등학교 애들이 대화에 나오잖아요. 뭐 십구 동그라미, 이거는 벌써 초등학교, 유치원 애들 보게 될 거예요.
옛날 지나간 게 신기했던 것은 그 다음에 곧장 시시해지는 겁니다.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미 암시를 줬어요. 토마스 아퀴나스나 안셀무스 이런 사람들. 안셀무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이런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유명하냐 하면, 성경 말씀으로 설명하던 것을 성경 덮어버리고 철학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래서 히트 친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에 보면 성경 구절, 몇 구절 나오질 안아요. 나머지는 전부다 철학적인 용어를 가지고 세상 전체를 다 설명한 거예요. 이것은 기존에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해서 세상을 설명하던 그러한 유행에 신선한 충격을 준 거죠. 그때부터 용기를 얻어서 성경 버리고, 하나님 버리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형상이라는 이성, 이성을 가지고 성경 아니라도 얼마든지 세상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게 정당하게 신에 대해서 할 소리 다 할 수 있다. 그런 조로 나간 겁니다. 사실은 그것도 어거스틴도 그런 길을 들여 놨습니다만.
사람이 왜 자꾸 그렇게 하느냐? 토마스 아퀴나스는 뭘 이렇게 봤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뿐 아니고, 그전부터 나왔는데 플로티누스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내부나 외부로 보면, 외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늙어가는 존재지요. 내부적으로 볼 때는 소위 신앙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자꾸 신의 형상을 본받으려고 하지요. 외부적으로 볼 때 형식적으로 볼 때 늙어가고 있고 자기 한 몸밖에 없다는 걸 느끼고, 주위에서 의리니, 사랑이라는 것도 나중에 세월 지나면 다 떠나가고, 역시 나는 나밖에 남지 않다는 걸 아는데.
그러면서도 뭔가 고정돼 있는, 잘 들어보세요. 고정되어 있는 나와 외부적으로 나는 고정되어 있어요. 가만 앉아 있어도 늙어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내부적으로 이상스럽게 인간은 가만있지를 못하더라 말이죠. 내부적으로. 연세 많은 사람들이 힘이 안 받쳐줘서 축구 못하지, 지금도 20대 힘주면 날마다 축구합니다. 참, 정력이 안 받쳐줘서 여자 안 밝히지, 만약에 20대, 청소년 그렇게 되면 지금도 여자 밝히려하는 80대 노인들 늘 그렇게 해요.
그런데 내부적으로 가만있질 못하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느냐 말이죠. 자꾸만 터질듯이. 터질 거예요. 맨 날 터질듯 부풀어 오르느냐 말이죠.
젊은 애들은 요새는 그런 것 없는데 옛날에는 대통령도 존경하고, 대통령 환호하지만 나이 80, 90 된 사람, 대통령하면 지 조카 벌로 생각해서 웃기고 있네. 이러잖아요. 그만큼 지는 내부적으로 찌들어가면서도 똥 싸고, 오줌 싸고 찌들어가면서도 자기 내부는 대통령보다 더 높아. 대통령 꼭대기 위에 있어. 노무현, 그거 갈아 쳐야 돼. 노무현 나라까지 다 망해놨데. 이명박이 나와. 노무현이 들어가. 다 갈아 쳐야 돼. 이런 식으로 막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는 거예요.
전두환 대통령 독재시대 때 젊은 애들 잡아가도 백기완이라든지 그리고 또 백기완 말고 백기완은 좀 이상한 사람 말고 씨알의 소리했던 함석헌, 못 잡아갔어요. 왜? 나이가 많아서 그래요. 잡아가봐야 별거 없다 이 말이에요. 노인이 된다는 말은 바깥은 완전히 병자, 환자 다 되고, 안에는 완전히 신이 다 된 겁니다. 이 점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목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는 작은 새끼 신이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 내부, 진리라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다 해서 중세시대 때는 상공이라든지 과학 같은 것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그런 것은 별로입니다. 그러니까 중세 유럽에 스콜라 철학의 그러니까 수도원에서 만든 대학교를 스콜라라 하는데.
그 스콜라 철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 내부에 살아 꿈틀거리는 그러한 무한한 신적인 요소에 관심을 가져야 그게 위대한 사람이지, 바깥에 어디 곡괭이 만들고 뭐 농공상인이라든지 또는 칼질하는 무사들, 사무라이 같은 기사나 옛날 깡패 같은 놈들, 영주들, 깡패들이거든요. 조직폭력배. 그 인간들은 꼼짝 마라 했어요. 조져버렸어요.
클루니 수도원에서 교황의 다시 권위를 높였고, 그 다음에 나오는 시토 수도원에서 나왔고, 그 뒤에 나오는 유명한 프란체스코,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나와서 그 쪽에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그 동안 기독교가 이렇게 체면이 말이 안 된 것은 땅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데. 땅 안 받는다. 프란체스코 이런 데는 뭡니까? 무소유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느 수도원이냐 하면, 도미니크 수도원이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 가르치는 거예요. 무식한 인간들, 칼질하는 사무라이 말고, 유식한 우리는 안에 속에 있는 무한한 인간의 신적인 영역에 대해서 가르쳐요.
그래서 중세에서는 공업, 수학은 어디서 했느냐 하면, 무식한 이슬람 쪽에서 나온 것이지, 나침반, 화학, 그리고 인쇄술 그것은 십자군 운동해서 저쪽에서 수입해 온 거지요. 안에 현재 서유럽에서는 그런 시시한 교양 없는 것들은 연구할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안에 있는 무한한 것을 봐야지 그러한 먹고 사는 그러한 물질적인 것은 초월해야 된다. 도덕적인 것을 우선해야 된다. 이런 쪽으로 나왔었는데, 딜타이는 그렇게 했던 진리라 하는 것은 이제는 전부다 임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고상한? 고상한 것 좋아하네.
헤겔은 고상한 쪽에 제일 접근한 사람이 헤겔 아닙니까?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전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체제를 만드는 것이 헤겔 아닙니까? 땅에서 하늘까지 전체를 다 알아 버린 거예요. 다 안다 하니까 또 지난 시간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한번 해 볼게요. 헤겔은 어떻게 다 알았는가?
헤겔은 이렇게 알았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정신이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정신이 되고 고난 받지만 고난은 반드시 희망이 있으며 극복이 되지요. 이걸 자기고 변증법이라고 해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 내부 속에 있는 정신의 흐름이 우리 바깥에 있는 역사의 흐름과 일치된다고 본 겁니다. 헤겔이.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는 이성이거든요. 그전까지는 헤겔이 오기 전까지는 왜 인간이 반성하고 회개하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헤겔은 하나님이 성육신 되는 걸 통해서 인간 속에는 반성하게 되는 그런 정신을 올바른 이성을 하나님이 신이 줬다 말이죠. 우리 속에 스스로 자기 잘못에 대해서 회개하고 반성하는 걸 봐서 이미 우리 속에는 신적인 이성이 정신이 있었고, 이 신적인 정신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성육신 됐다는 자체가 이것이 '역사의 핵'이거든요. 역사의 핵이라는 건 뭔 뜻이냐 하면, 이걸 되풀이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육신되심.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잠시 고생과 고난 가운데 스스로 자진해서 그것을 고난가운데 들어가는 것. 이 정신이 하나님 성육신 정신이라면, 그리고 이 정신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스스로 반성하고 아무리 악한 놈이라도 뭔가 나쁜 짓, 도둑질하면서도 잘했다 하는 놈 없어요. 뭔가 내가 밥 먹고 살긴 하는데 뭔가 잘못됐다. 잘못됐다는 걸 아는 것, 옛날 같으면 뭐라고 했어요? 그냥 양심이라고 했지, 양심을 기독교적으로 결부시킨 사람이 헤겔이 처음이잖아요. 헤겔이 처음이에요. 칼빈, 루터도 못했어요.
왜 칼빈, 루터는 못했느냐 하면,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를 외쳤지만, 루터도 그렇게 외쳤지만 항상 칼빈, 루터가 약점이 뭐냐 하면, 어거스틴 바탕 위에서 이어왔거든요. 신학이. 어거스틴 건드리면 우린 이단 된다. 그러니까 조심하자. 이렇게 됐다 말이죠.
어거스틴이 무슨 중심이냐 하면, 하나님 형상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는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이 온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펠라기우스한테 이긴 거예요. 펠라기우스는 이단 돼버리고, 이거는 정통돼버렸다 말이죠. 그러니까 어거스틴은 십자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좀더 이야기해 봅시다. 이왕 나온 김에.
동방신학, 서방신학의 특징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람 되어서 사람이 하나님 될 수 있다. 이것이 초반기에 기쁜 소식, 복음으로 간주한 겁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로고스 신학에서 나왔고, 로고스신학은 바로 스토아학파에서 나왔어요. 기독교하고 성경본문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없는데 이미 유럽 자체가 헬라철학에 기초하기 때문에 헬라철학이 뭐냐? 로고스철학입니다. 로고스라 하는 것은 하나 밖에 없는 신이 다양한 자기 모습의 자기 양태로써 각 사람에 파고드는 분점 같은 걸 로고스라 합니다.
‘로고스’라 하는 것이 그냥 번역하면 말씀인데, 왜 말씀이냐 하면, 사람이 짐승과 달리 말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짐승과 다른 요소가 있어서 그게 말하다, 하다 하니까 이거는 신적인 요소다 해서 그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라 하는 것은 말하다 말씀이 아니고, 말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하급 신을 가지고 로고스라 합니다. 그 로고스를 하급 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리우스는 추방된 거예요.
참, 재미있는 게 아리우스가 로고스를 하급 신이라 해서 로마 쪽에서 약이 오른 거예요. 왜 약이 올랐느냐 하면, 만약에 로고스가 사람돼버리면 우리는 하급 신이 사람 된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사람 된 게 아니고. 그런데 왜 아리우스는 로고스가 하급 신이라고 첫 번째 신이 아니고, 두 번째 신이라고 했느냐 하면,
아리우스는 철저하게 유대교의 예언이 약속된 것을 신약으로 봤기 때문에 유대교의 예언, 그러니까 구약의 예언 중에 하나가 뭐냐? 유일신이에요. 유일신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같이 신이 돼버리면 신이 몇 명이냐 하면, 두 명 돼버려요. 아직 성령은 시릴리우스 나와야 성령까지 신되지, 아직까지 성령은 신으로 간주되지 않은 시대에요.
신이 둘 된다고요. 신이 둘 되니까 물론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인 걸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여호와증인처럼 그렇게 천사처럼 보는 게 아니에요. 아리우스가 동의하는 것은 예수도 하나님인데 신과 신 사이에 서열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서열화 되느냐? 아버지하고 이들이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아들이라 했으니까. 아들이라 하는 것은 아들이 없을 때도 있었다고 보는 거예요. 아버지만 있었고. 아버지가 창조한 것이 아들이니까. 아들도 하나님인데 이건 인간적인 세계가 아니고,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창조할 수 있다는 거지요. 우리의 이성으로는 모르지만. 창조했다는 말은 아예 없을 때가 있었단 말이지요. 처음에는 아버지 하나님만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출처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그것이 구약성경의 내용, 구약성경도 진짜 하나님의 예언 아닙니까? 구약성경의 예언과 맞는다고 본 것이 이것이 지금도 그리스도 정교회의 주장입니다. 나중에 정교회가 모스크로 바꿔요. 콘스탄틴이 왕 되고 난 뒤에 모스크바로 이동하며 정교회, 제3의 로마가 모스크바에요. 러시아 되고 난 뒤에. 러시아 이거는 훈족한테 몽고족한테 당해 놓고 설움 받으니까 자기가 종교 받아서 으샤으샤 하는 그런 인간들인데.
러시아 정교회는 삼위일체는 뭐냐 하면, 성부 중심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동방교회, 러시아 정교회가 성령이 예수님에서 나온다는 걸 부인한다는 게 아니에요. 인정해요. 인정하는데 뭐냐 하면, 성부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서방에서 로마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성령은 성부에서도 나오고 아들에게도, '에게'라는 말이 '필로꾸베'란 뜻이에요. 에게라는 말이. 전치사가. 그게 필로꾸베 논쟁이거든요.
아들에게도 나온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동방에서 하는 말이, 미쳤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나오는 성령과 아들에게서 나온 성령이 서로 의견 충돌하면 어떻게 할래? 근데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지만, 서방교회에서 예수님을 하급 신으로 보지 않고 똑같이 보려면, 그러면 두 분이 아니고, 한 분 되잖아요. 한 분 되면, 이거는 유대교처럼 일신교지, 예수님은 하나님 안 되잖아요. 그러면 나눠야 되잖아요.
나누면서 같은 하나님이 되니까 여기서 철학적 용어가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시아’라는 용어에요. 유사본질이 아니고, 호모 이 우시아가 아니고, 호모 우 우시아에요. 동일본질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동조하는 것은 동일본질이라는 용어와 유사본질이라는 용어가 이게 성경에 없는 용어에요.
그런데 왜 이걸 동원시키느냐 하면, 어떤 개념이나 용어를 하나 잡게 되면, 신학자 그룹 말고 문자 해독하는 사람 말고, 하급의 무식한 일반 대중들이 간편하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에요. 간편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올바르게 개념 된 그 신부나 성직자한테 그 사람이 이벤트 벌이는 성찬식에 참석해서 떡과 잔을 마시게 되면, 한 하나님 밑에 한 감독이기 때문에 뭐가 되냐 하면, 구원이 간편하게 됩니다. 일반대중들은 간편하게 구원받으면 되지, 호모 우 우시아고 호모 뭐뭐뭐 그건 아무 관심 없어요.
따라서 누가 정통이냐? 용어 싸움이 등장한 겁니다. 하나 밖에 없는 교회에서 누가 대장질 할 것이냐를 가지고, 용어 싸움으로 결정짓자는 겁니다. 그 용어에 대해서 적당한 용어가 있느냐? 없습니다. 있으면 좋겠는데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성령은 문자에 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백 날 해봐야 가짜만 양산하죠.
예수님도 하나님이고, 아버지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한 것은, 그것이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결합이 될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니가 알아? 하는 그런 차원에서 성경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할 때에 하나를 백 날 분석해 보세요. 하나에서 둘이 나오는가? 하나냐, 한 분이냐? 이것 때문에 싸운 거예요. 차영배 교수가 맨 날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하나라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참 안 됐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것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라는 개념은 영적인 개념하고는 다르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있다, 없다? 없다는 뜻에서 하나란 말을 한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그 문자해석해서 천당 갈 놈을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데.
12장. 여기에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간 말을 하는데, 4절 한번 보세요.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한 말이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본 천국 아니면 나머지 바깥은 다 지옥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말씀을 믿게 되면 천국이고, 말씀 안 믿으면 지옥이에요. 간단해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사도 바울에겐 목숨을 바칠 어떤 이미 목적이 확립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문제가 자기 목숨을 어디 바칠지를 몰라서 우왕좌왕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목숨은 소비하려고 있는 겁니다. 목숨은 붙잡으려고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 어디서 인간이 불행해지느냐 하면, 갖고 있는 목숨을 소비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사람이 불행해요. 살려고 하니까 불행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래 주신 하나님의 목숨은 피조물 목숨이에요. 창조주 목숨이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를 위해서 소비하고 허비하도록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가 선악과 따먹고 지가 신이 돼버리니까 신은 목숨을 부지해야 되거든요. 히스기야가 12년 목숨 연장하려고 기도한 게 그거 무슨 객기입니까? 그거 무슨 망발이에요? 12년 유지해서 나라 말아 먹었잖아요.
돈가스한다고 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어떤 직업을 가져도 좋아요. 그것은 살려고 해서는 안 되고, 복음을 위해서 삼층천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소비하기 위한 목숨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참, 겁대가리 없는 인간이죠. 갈지도 못한 갈지도 못한다는 말은 그게 말만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죽기도 하고 광야에 유리해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요.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아예 감당치 못하잖아요.
철학을 하고 우리가 철학을 하고 교회사를 하고 답답한 게 죽으려는 사람이 없더란 말이죠. 전부다 삼위일체해서 살아 보려고. 어거스틴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초창기 루터는 안 그랬어요. 정말 복음을 위해서 목숨 걸어 논 거예요. 왈도, 후서, 여러 가지 나왔습니다만 그 사람들 전부다 어거스틴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범주를 못 벗어난 것은 그 당시 전체가 니케아회의 범주를 못 벗어요. 니케아회의를 벗어나면 무조건 이단 돼요.
심지어 아리우스파를 따랐던 게르만 민족이 400년부터 유럽을 점령했거든요. 점령하고 세운 나라가 프로비스에 세운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그때는 프랑크입니다. 그 사람들이 프랑크 왕국 세울 때 뭐 했는지 압니까? 아리우스 포기하고 로마 캐톨릭으로 완전히 개종했습니다. 그게 유행이 되어서 영국도 마찬가지고. 나라는 땅은 로마 땅 점령해 놓고 종교는 로마 캐톨릭으로 다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화 낫는 줄 알아요? 누가 화 낫겠어요? 동방교회에서 화낫지요. 그래서 동방교회 이름이 뭐냐 하면, 정교회라. 그럼 결국 교회가 아니다. 그거는 왜 교회가 아니냐 하면, 그거는 무식한 야만족, 바이킹족, 노르만, 무식한, 땅 얻어먹고 땅 영토 얻어먹고 그 사람들에게 머리에다 안수해서 신성 황제로서 훌륭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간주했던 정치적 타협을 했던 놈들이지. 그래서 정통교회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동방교회에선 정통교회 아니라고 봐요. 세상과 야합한 인간들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정교회에요. 오소독스, 정교회에요. 그런데 로마교회는 캐톨릭, 모든 걸 모두모두 우리 편~ 범 교회, 저쪽에는 정교회. 개신교는 바꿔보자 교회.
삼층천에 올라 본 교회는 없고, 천당 아니면 지옥이에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에요. 삼위일체가 없어요. 예수님이 언제 삼위일체 주장했습니까? 삼위일체가 없어요. 예수님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 나머지 예수님 사랑하면 천국이고. 이게 성경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개념으로 다져지지 않아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렇게 했던 것이, 스코투스, 이 사람아 아주 철학에서는 대단한 사람으로 봐요. 스코투스가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제는 성경책, 신앙 다 때려치워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성이 아니지, 그 사람 좋아하는 감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스코투스에요. 둔스 스코투스. 뒤에 나오는 사람이 윌리암 오캄. 성경을 가라! 신부는 가라. 교회는 가라. 우리끼리 감각으로 경험해서 하겠다.
여기서 나온 게 베이컨, 경험주의. 경험주의에 충실한 에라스무스, 베이컨, 여기에 충실한 그 밑에 제자가 누구냐 하면, 존 로크, 흄, 이런 사람들. 이 사람을 가지고 뭐냐? 자연신론자다. 우리 여기는 존 로크는 구분해 가르치지 않았어요. 왜 안 가르치느냐 하면, 지금 학교에서 다 가르치고 있어요. 만져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럼 뭐가 있는가? 딜타이입니다. 뭐다? 역사다. 딜타이의 역사는 뭐냐 하면, 아무리 사람이 과학적으로 옳다, 옳다 해도 세월 지나면 그것은 다 아이고, 그거는 수정,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정의 여지. 여기 몇 페이지에 나오느냐 하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항상 이거는 바꿔야 돼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그러니까 믿을 만한 것은 역사 밖에 없지, 역사 속에서 그 사람들이 진리라 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아니에요. 여기 180페이지 봅시다. 180페이지 중간에 그걸 생체라고 하는데, 생체라고 최초로 이야기한 것이 딜타이입니다.
왜 생체라 하느냐 하면, 여러분 생이라 하면 특징이, 느낌이 뭐냐 하면, 촉촉함, 손에 물렁물렁함, 이게 생이죠. 그야말로 생체란 특징이 뭐냐? 생생한 것만 인정하고 일체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생생한, 탄력성 있는, 생생한 것만. 현실은 생명이라는 것은 아주 촉촉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만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럼 그것만 인정하면 뭘 인정하느냐 하면, 결국 뭘 인정하게 되느냐 하면, 의학, 과학만 인정하는 게 돼요. 손에 만져지잖아요.
아픈데 기도해야 소용없잖아요. 아프면 깊숙이 들어가면 약 먹어야 되고, 아프면 째야 되죠. 째서 안에 있는 것 제거해야 되죠. 디스크 문제 있다면 수술해서 디스크에다 심 박아버려야죠. 그러면 그 환자한테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 따위 소리해야 소용없어요. 의사 와서 박으면 됩니다. 박으면 되는 걸 그러면 됩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어도 철심을 박으면 일어서리라. 하면 일어서는 거예요.
어떤 영화에 초반부에 아주 재미있는 게 있어요. 어떤 게 있느냐 하면, 어떤 거지가 저, 상이용사입니다. 저, 이렇게 앉은뱅이인데 여러분이 동냥해주시면 제가 걸을 수 있습니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주인공이 쓱 가서 동냥이 여기 있잖아요. 돈을 쓱 가져가는 거예요. 동냥을 하는 게 아니고 돈을 가져가니까 벌떡 일어서는 거예요. 거봐. 내가 걷게 해줬잖아. 돈이 걷게 해주는 거 맞잖아요. 돈이 걷게 해주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역사의 위력이죠. 항상 사람은, 여기 나와요. 뭔가 새로운 경험에 의해서 됐다 싶으면 이게 항상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딜타이의 말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오래되면 과거를 회상하는 기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욕 얻어먹으면 그 권위는 인정해 주지만 생생하질 않아요. 시들하지. 아이고, 시시하지. 시시하면서 그 사람이 옛날에 큰 일 했기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고 시시한 거예요.
코미디가 맨 날 바뀌어야 될 이유가 히트 치면 얼마 안가서 그게 생생하질 않아. 새로운 코미디가 나와서 싱싱한 걸 보여주지만 그 싱싱도, 생생도 몇 회 지나가면 완전히 쭈그러들지요. 그러니까 딜타이 하는 말이 그러니까 역사라 하는 것은 마지막 끝에 가서 판단하자 말이죠.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다. 이게 딜타이의 주장입니다. 지금 진리라고 하지 말자. 이 말이죠.
그러니까 형이상학은 역사 앞에서 무너져야 돼요. 뭐를? 뭐가 진리인데? 그 당시에 임시적인 진리이고, 한시적인 진리였지. 뭐가 진리인데. 진리가 어디 있어? 잠시 즐겼다가 버리는 것뿐이죠. 그럼 딜타이 선생, 당신은 왜 그렇게 과거에 신을 찾고, 종교를 찾고, 신앙을 찾고, 헤겔을 찾고, 칸트를 왜 그렇게 찾느냐?
딜타이는 말하기를 그것은 인간은 생생한 것이 오면 자기는 봤지만 사람은 기쁨을 어디서 얻나? 생생해서 기쁨은 순간이고,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추억으로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과거에 자기가 잘 나갔다는 거예요. 추억에 빠지면 추억을 그걸 우려먹는 그것으로서 그때 기분을 현재에 희미하나마 흔적으로나마 재생하려는 노력을 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생생 안 하면 그렇게 되겠느냐 이 말이에요. 이렇게 볼 때 이 딜타이의 철학은 성경해석에 많은 도움을 주지요.
교인들이 목사님 새로운 이야기해달라는 이게 빈 말이 아니고, 정말 옳은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들이 하는 말이 해 아래 새로운 게 어디 있노? 이런 식으로 핑계 대는데. 같은 해를 봐도 생생하게 다가올 때 해가 달라요. 공무원 시험 합격했을 때 보는 해가 생생해요. 떨어질 때 해는 비참한 짜증나는 해입니다. 똑같은 해인데 자기의 그러니까 경험이죠. 딜타이에 의하면.
자기의 경험에 어떤 새로운 기운이 솟으면 호랑이 기운이 솟으면 바깥에 외부적인 그것이 싱싱한 들뢰즈의 이야기죠. 배치, 들뢰즈가 배치라는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은 배치에 의해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거예요. 기존의 이쪽에 달라붙은 부속품을 떼어서 여기에 박아버리면 새로운 게 등장한다는 겁니다. 파격적인 것. 그걸 꼴레쥬라 합니다. 꼴레쥬가 뭐냐 하면, 그림 작품 할 때 기존의 작품에서 떼 내어서 이것 떼 내고 섞어버리면 거기서 새로운 게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 딜타이의 역사론에서 뿅 간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이데거입니다. 그렇다. 형이상학 박살내야 된다. 형이상학은 하나의 추억이었다. 그래서 부흥사들이 맨 날 육이오 사변 때 폭탄 맞은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걸 계속 우려먹는 거예요. 지금 본인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생생한 어떤 복음의 기쁨에 살아가는 자기 한 주일 살아가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맨 날 급진적인 것, 생생한 것을 과거의 것을 써먹는 이유는 지금은 예수 안에서 안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여러 번 하면 그것도 시들해져요. 가끔 해야 사랑한다가 값어치가 있지, 뭐든지 많으면 별로에요. 귀한 줄 몰라요. 이게 인간 속에 있기 때문에 그걸 왜 그동안 이 딜타이가 꼭 이런 이야기해야 되느냐 할 정도로 딜타이는 안타까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딜타이 모를 때까지는 우리가 다 알았지 싶은데 딜타이 이 말도 일리가 있지요. 이상하게. 딜타이는 그럼 또 딜타이 말도 일리가 있는 거예요. 야, 맞다. 이러니까 한 소리했구나.
딜타이로부터 세상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딜타이에서 나온 유명한 신학자가 바로 본 훼퍼입니다. 본 훼퍼의 신학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숙되어 있다. 성숙된 사회. 교회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축복, 축복하는데 기복신앙은 유럽이나 한국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지금 미국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기복신앙이에요. 기복신앙에다가 천당 간다고 하는데 천국이 이미 왔다. 어떻게? 힘없는 모습으로. 이게 본 훼퍼에요. 힘없는 메시야의 모습으로 이미 천국은 왔는데 무슨 힘 있는 메시야를 원하느냐? 우리는 이미 성숙된 자다.
이 본 훼퍼가 아까 이미 헤겔이 이야기한 것도 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웃을 사랑했는데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게 아니라 이웃 때문에 존재하는 존재자가 돼야 한다. 그런데 이 본 훼퍼의 주장이 놀랍게도 스토아학파의 주장하고 동일해요. 공부를 해보면.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습니다만 하나님이 뭐 됐다? 성육신됨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된 우리가 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동방신학, 즉 현재 오소독스, 동방신학의 주장이고, 서방신학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성육신 되었는데, 왜 되었는가? 우리의 죄 때문에 되었다. 따라서 바르게 살자. 이게 서방신학입니다. 둘 다 십자가 복음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 히트 쳤느냐 하면, 이게 히트 쳤어요. 왜냐? 바르게 살자 하는데 바르게 못 살잖아요. 못 사니까 여기에 성만찬의 위력이 등장하지요. 성만찬의 위력이 등장할 때 성만찬의 위력이 중요한 것은 누구 성만찬을 주재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성만찬을 주재하는 사람은 한 하나님 밑에 하나 밖에 없는 교회 지도자가 해야 되는데 하나 밖에 없는 교황의 지도자한테 인정받은 자격증, 받은 그 신부가 개최한 성만찬을 떡 받아먹으면 구원 받습니다. 일반대중들은 복잡한 교회 필요 없어요. 누구 허락받고 성만찬하면 그 성만찬 인정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터툴리안은 더 웃기는 이야기가 성만찬할 때 참회하고 회개하고 해야 된다. 회개한고 난 뒤에 성만찬 참석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죄 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고민이거든요. 한 번은 봐준다. 그렇게 되었어요. 한 번은 봐준다. 두 번은 안 되고.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까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식이 되니까. 돼지가 그러니까. 한 번은 봐준다.
그래서 교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그 다음부터 회개를 안 했어요. 왜냐하면 해봐야 죄 지니까. 임종 직전에 해서 앞에 있는 걸 전부다 용서받으려고. 둘 다 통박 굴리기는 대단하죠. 개판이라 개판. 예수님 복음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교회를 권력단체를 만들어서 유지하려고. 지금 한국이랑 똑같아요.
차라리 딜타이가 낫잖아요. 진리, 진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목사, 니는 방금 그 소리 한 것, 10년 뒤에 책임질래. 10년 후에 가면 또 무슨 소리 할지 모르는 거예요. 왜? 역사는 바뀌니까. 열반했습니다. 고함질렀잖아요. 그래서 바뀌는 놈이 이상한 사람이에요. 우리 주위에 바뀌는 사람 많습니다. 내가 옛날에 잘못 생각했다는 거예요. 책 내놓고 책 내용은 지금 틀렸다는 거예요. 그건 딜타이에요. 그렇다면 또 뭘 바뀔지. 앞으로.
그게 [지옥의 하나님]에 보면 나옵니다. 처음에 신학교 가서 졸업할 쯤 되면 개혁신학대로 하면 먹고 살 줄 알았어요. 개혁신학대로가 아니라 순복음으로 해야 먹고 사는 거예요. 한 5년 쯤 해 봐야 아는 거예요. 이제는 순복음 식으로 하는 것도 안 먹히고, 천주교식으로 해야 돼요. 목사 권위로 성만찬 잃어버리면 교인들은 교리고 신앙이고 교회사고 나발이고 조직신학도 다 필요 없고. 뭐 하면 구원받습니까? 떡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땡큐하고 가버려요. 돈 내고. 땡큐하고 가버려요.
성만찬 하기 위해서는 목사 권위 높이기 위해서는 장로 권위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장로 권위를 높이는 것은 사실은 장로 위주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목사 권위를 높여서 교인들로 하여금 간편하게 패스포드, 간편하게 목사, 장로, 집사 되어 있는 장로교회는 정통 이단 아니니까 거기서 성만찬하고 등록한 교인은 구원받습니다. 간편하게. 거기다 나중에 공동묘지까지 만들어버리면 끝장이에요. 하이라이트는 공동묘지에요. 노인네들은 교회 올 때 공동묘지 있는 교회 가버립니다. 왜? 죽어서 자식들한테 부조금 자식들 주고, 지는 교회에 짐 지우려고. 이걸 배우는 거예요.
신앙논쟁 한다는 자체가 철이 없는 거예요. 철없을 때 하는 거예요. 한국교회 개혁 어떤 그것도 철이 없어요. 양 무리고 이리 무리고 간에 그것도 철이 없어요. 나중에 목회 해 보세요. 그게 문제가 아니고, 노회 만들어서 어느 노회에 가입해서 정통으로 세례 받고 거기서 장로 되고 집사 되고 승진하고 그걸로 노회 많아서 놀러가고 그게 끝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안정된 교회고 좋은 교회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말씀이 ( ) 없는 사람한테 한국교회 잘못됐다. 복음 전하자하면 그 사람들 부담스럽습니다. 귀를 닫아버립니다. 마음 문을 닫아버리죠.
그런데 딜타이의 모르는 것을 하이데거가 알고 있어요.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했어요. 딜타이는 역사가 돼야 변하고 나중에 역사 끝에 안다 하잖아요. 역사 끝을 하이데거가 먼저 알아 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다. 이것 밖에 없다. 이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개념입니다. 하이데거가 딜타이한테 힌트를 얻었어요. 그러면서 멈추지 않고 역사의 끝, 다시 그려 봅시다.
인간은 외부적으로 역사가 흐르죠. 그러면 역사의 흐름이 딜타이에 의하면 생생하잖아요. 역사를 어떻게 느낀다? 생생하게 느끼죠. 생우동, 생라면. 하여튼 생생하잖아요. 그럼 생생한 게 이 안에 들어오죠. 하이데거는 뭐가 역사를 생생하게 보게 하느냐 하면, 역사를 생생하게 만드는 생생한 인간 속의 마음이 뭐냐? 이걸 뭐냐 하면, 이건 바로 가장 생생하지 않는 건 뭡니까? 시체잖아요. 그 시체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려고 하는 그 생생함이 역사를 생생하게 만들었다. 딜타이, 선배님 그건 모르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역사를 생생하게 보느냐? 그냥 역사는 변한다. 우리의 진리는 한시적이고 임시적이다. 왜 그럴까? 그걸 몰랐지요. 하이데거는 알았어요. 그거는 외부가 아니고, 내 마음이 문제인데 내 마음의 역사가 외부로 나오는 역사로 보는 거예요. 그 말이 맞는 게 똑같은 사건이 터져도 일기장에 쓰는 사람이 있고 일기장에 쓸 가치도 없는 게 있어요.
일반사람들 기차 타도 교회에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관심 있는 사람은 꼭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교회 잘 지었네. 우리 교회 저렇게 지을까? 관심이 다 있잖아요. 마음의 역사. 그래서 일기장에 쓰려고 하면 어디 가는데 교회가 아름답더라. 남들은 사건 취급도 안한 사건을 집어 들죠. 어떤 교회가 어떻고, 이렇게 하지요. 만약에 몸이 찌뿌듯한 사람은 일기 쓰려면 뭘 쓰느냐 하면, 청도 가면서 온천탕, 게르마늄 그걸 쓸 거예요. 야, 저 온천탕 언젠가 가봐야 할 텐데 그걸 쓸 거예요.
드라마에서 짝이 없는 사람들은 싱글들은 사랑이야기가 그렇게 좋아요. 이미 결혼하고 한 50대 아줌마들은 그러한 주말 드라마보다는 일일드라마, 가정사이야기, 그게 또 흥미가 있는 거예요. 금쪽같은 내 새끼라든지 금순이 이런 이야기가 좋은 거예요. 그것은 역사는 누가 만든다? 바로 인간, 내가 만들고, 그러니까 존재자는 다 다르죠. 존재자는 다 다르지만 그 많은 존재자가 공통점이 있더라. 그거는 죽음에 대해서는 도망치더라. 그걸 존재라 해요.
죽음에 대해서 도망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가 없어지는 걸 무서워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이 근본이 아니고, 존재가 근본이다. 한 것이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를 가지고 뭐 기존 인간의 철학 가운데 최고의 철학으로 쳐주죠. 이 하이데거의 선을 넘으면 이쪽 세계는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불교 세계입니다. 하이데거는 뭐까지 못 넘느냐 하면, 존재까지는 됐는데 존재가 항상 뭐로 바뀌느냐 하면, 자아로 바뀌잖아요.
그런데 불교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자아가 아니고, 무아 세계죠. 자아라 하는 것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들이 일시적으로 잠시 조립한 것이 자아고, 그게 흩어지면 자아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아가 천 개, 만 개 될 수도 있고, 자아가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요. 현재 내가 누구다고 아는 것은 임시적이고. 불교는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고, 불교는 역사가 없어요. 그냥 모였다 흩어지는 하나의 물결, 그걸 관계망이라 해요. 관계망을 인연이라 하지요. 관계망으로 조성되는 거예요.
그 불교와 유사한 철학을 한 사람이 화이트헤드입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에서 출발했고 베르그송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딜타이의 생철학에서 나온 거예요. 살아있는 철학을 해야지 촉촉하고 쭈물쭈물 거리고 만지면 감각 있는 살아있는 철학을 해야지, 관념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다 버려라. 살아있다면 역사는 살아있고, 나머지는 살아있지 않다. 역사만 살아있다. 그게 바로 딜타이의 철학입니다. 그렇게 기초를 알았으니까 한번 봅시다.
181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현실 그 자체는 결코 논리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직 이해될 뿐이다.]
여기 '이해'라는 말이 나왔지요. 이거는 누구 이야기냐 하면, 슐라이어마허 이야기입니다. 슐라이어마허라 하는 것은 종교란 그걸 조직신학으로 틀을 잡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수긍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지금 뭘 느끼지? 하고 이해, 또는 느낌. 느낌으로 신앙 생활해야 된다는 게 슐라이어마허였습니다. 슐라이어마허로부터 해서 신학이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서 감정으로 갑니다.
나중에 니체가 오게 되면 감정에서 뭐로 가느냐 하면, 의지로 갑니다. 의지라 하는 것은 사실은 개신교 칼빈, 루터부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의지라 했는데, 이 의지는 ‘권력의지’라 합니다. 의지는 그냥 의지가 아니라 항상 권력을 힘을 추구하는 의지인데 그걸 지금까지는 억눌러왔다는 거죠. 그걸 억누르지 말고 그걸 개방해 보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걸 억누르는 이유가 그건 나쁜 의지야. 라고 어떤 선을 바라고 악은 추방하고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속에서 올라오는 권력의지를 그렇게 짓밟았는데 도대체 선이고 악이고 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놈들이 결국 자기 형이상학에 불과하더란 말이죠. 언 놈이 같은 인간끼리 선이고 악이고 할 놈이 있으냐 말이죠. 전부다 그게 힘 있는 자의 논리 밖에 더 되느냐 말이죠. 도덕이라는 게 힘 있는 자의 논리.
이런 것은 인간에선 밟아선 안 된다. 마음껏 개방해야 된다. 풀어놔야 된다. 그래야 인간 속에 있는 잠재적인 것과 가능성 두 가지가 있는데 달라요. 잠재적이라 하는 것은 이미 내부적으로 들어있는 거지요. 가능성이라 하는 것은 지금은 없지만 희망이 보이는 걸 가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잠재력과 가능성을 마음껏 개발하는 니체를 가지고 뭐냐? 적극적 허무주의라고 합니다. 그 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소극적 허무주의인데 쇼펜하우어에요. 죽자. 둘 다 허무주의에요.
재미있는 것은 자꾸 적극적 허무주의가 소극적 허무주의를 뭐라고 훈계하느냐 하면, 그거는 허무주의다. 맨 날 훈계하는 거예요. 맨 날 욕하는 게 뭐냐? 너는 허무주의다. 십자가 하면 뭐라고 합니까? 소극적 허무주의로 자꾸 간주하는 거예요. 허무주의다. 모든 게 죄다. 허무주의다. 해야지. 그러니까 해야지 하면 허무주의가 아닌 줄 아는 거예요.
해야지 하는 말은 허무주의란 말은 여러분 용어를 잘 보세요. 허무주의란 말은 선과 악의 기준을 탈피하고자 나온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너희들이 선과 악을 추구 안 한다고 나한테 욕했다고? 그래, 그래. 허무주의 할게. 이래서 허무주의에요. 되는 대로 사는 것, 유비쿼터스. 어디서 나올지 출발할지 모르고 툭툭 튀어 나오듯이. 요새 애들이 유비쿼터스 아닙니까? 애들 행동이 지 마음대로 아닙니까? 말려도 안 되잖아요.
이게. 분열적 정서에요. 그래서 선악의 논리로 하면, 집착적 정서고 허무주의는 분열적 정서. 이걸 둘 다 정신병으로 보거든요. 라캉이나 프로이드는. 선악을 주장하면 이거는 편집증, 하나에 집착하는 편집증. 하나의 마니아처럼 빠지는 거예요. 허무주의는 뭐냐 하면, 이거는 종잡을 수 없는 분열돼. 분열증. 계속 상상과 공상을 일삼는 분열증. 그리고 이 둘 다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그리고 둘 다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수시에 따라 이게 나올 수도 있고, 이게 나올 수도 있고.
왜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냐 하면, 왜 이 둘 다냐 하면, 인간은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자아가 의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걸 최초로 밝힌 사람이 프로이드입니다. 자아에 의식에 있는 게 아니에요.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자아가 의식에서 나온다고 본 겁니다. 무의식에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프로이드에 대해서 반박하는 반대하는 논리들이 많습니다. 무의식이라 하는 것은 자아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래야 자아를 되찾는 수가 있어요. 만약에 무의식에 맡겨 놓으면 이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사형제도 없애버리자 하는 말은 뭡니까? 사회가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데 좋은 사회 만들면 개도 건전한 사람 될 수 있어. 이게 사형제도 반대하는 사람의 주장이거든요. 사회가 사람을 죽였는데 왜 그 사람한테 모두 책임을 묻느냐? 이거거든요. 왜 유영철에게 묻느냐? 이렇게 보고. 그 인간이 나쁜 게 아니고.
왜? 인간의 자아는 어디에 있다고요? 그 인간한테 있는 게 아니고, 자아는 유영철에게 있는 게 아니고, 무의식에 있고, 그 무의식의 관계는 뭐냐 하면, 무의식을 둘러싼 사회가 여러 가지 요소가 유영철을 형성하기 때문에 개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사회가 죽인 것이지, 지가 죽인 게 아니다.
참, 복음이 없으니까 짓을 해, 아예 짓을 해. 꼭 자기 존재를 정당화시키고 의인되고 싶어서.
181페이지 중간 위에 봅시다. 찾아보세요.
[딜타이에게서 자기의식은 '행위라는 나'] 그것뿐이에요.
행위 하는 나와 이게 자의식이라는 거예요. 자아가 내부에 들여다보면 나오는 게 아니고, 어렵지만 한번 보세요. 여러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행동하면 자아가 나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도 아니고. 자아 들여다보면 자아가 나온 것도 아니고, 행동하게 되면 자아가 드러난다. 이것도 아니고. 행동하면 자아라니까. 그걸 이해하세요.
내가 행동을 이렇게 하는 걸 보니까 자아가 이렇구나. 이게 아니고, 자아는 본인은 몰라요. 세월 따르면 내가 어떻게 살지 몰라요. 지금 행동하는 자체가 자아라니까. 이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까 내 자아가 이런 인간이구나. 이게 아니고. 그건 칸트가 다 이야기했고, 옛날에 피히테가 다 이야기한 거고.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어떻게 행동할지 자아가 안다, 모른다? 나도 모른다. 다만 행동하는 그 순간에 아,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그것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행동이 자아에요.
이것도 비슷한 이야기 성경에 있네. 마태복음 10절. 10장에 보면. 니가 어떤 말을 할 때 니가 이리 가운데 양을 보낼 때 말을 할 때에 니가 말하려고 하지 말고 니 속에 말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라. 그것하고 똑같아. 유사하죠.
실제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설교 이렇게 하게 되면, 나중에 설교 녹음한 것 못 듣습니다. 너무 모든지 어깨에 힘 들어가면 뭘 해도 안 돼요. 골프도 안 되고 당구도 안 되고 뭐 해도 안 되죠.
미리 예상한다는 것은 결국 예상한 것이 그걸 선취라 하는데 자아한테 와버리잖아요. 그러면 자아가 드러나 버려요. 주님을 드러낸다 하면서도 자꾸 자아가 드러나요. 왜냐하면 자아 속에 자기가 준비한 설교가 자꾸 거기에 그 다음엔 이 말 해야지, 그 말 준비해놨잖아요. 그 말 끄집어내야지 한다고.
천방지축 내질러버리면 오히려 그것이 딜타이처럼 생생한 생 설교가 돼요. 준비된 설교는 별로고. 나중에 따져 보면 그런 욕도 안 나와야 될 건데 왜 욕을 했을까 그럴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욕이라고 해서 나중에 비난 받을 만 하지만 들어보면 적당하게 썼다. 잘 튀어나왔다. 설교는 내질러버리세요.
이게 바로 기존의 보수적 교단에 속하지 않은 개척교회 목사의 장점입니다. 기존 교단에 속해버리면 교인들이 그걸 듣고 일러버려요. 다른 교회, 다른 교단에 일러준다니까. 좀 틀리더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요. 눈치를 본다는 것은 눈치 보는 자아가 형성돼야 되잖아요. 행동하는 나는 눈치 볼 게 없잖아요. 행동 자체가 자아기 때문에 무슨 행동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게 딜타이가 주장한 거예요. 완전히 형이상학을 다 깨서 선악이고 뭐고 윤리고 도덕이고 다 부셔버려요. 행동하는 게 나와요.
자, 182페이지 봅시다.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182페이지 제일 위에.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의미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그리고 182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죽음의 순간에 이 전체를 전망할 수 있다.]
이미 하이데거가 그 점에서 천착해서 더 깊이 들어가 적이 있지요.
182페이지에 보면,
[묵시적 예언이 시간을 종말에 고착함으로써 시간을 파괴하는 반면, 예측은 그 직조로서 시간을 도리어 생산한다.]
야, 참.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흔히들 시간 반대가 묵시라 보잖아요. 묵시 반대가 시간이고. 그러니까 시간 반대가 묵시고 묵시 반대는 시간이니까 이 시간과 묵시의 사유 말고 다른 어떤 변화 사유는 없다. 이렇게 보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딜타이는 묵시는 시간을 파괴해 버리죠. 왜? 미리 예측하니까. 미리 예측하니까 파괴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건 뭐냐? 이건 종교가 되고 이거는 신앙이 되죠. 이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이성이 아니고, 교회만, 성경만 좇아야 돼요. 지금 이 사람들은 성경 필요 없이, 지금 근대철학은 성경 없어도 우리의 이성 가지고 따져도 신에게 나갈 수 있다, 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이건 안 되지요. 묵시는 안 되지요.
시간이 흘러가봐야 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러면 당신은 의미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딜타이는 생성하는 시간, 어떻게 생성하느냐? 묵시가 예측 가지고 파괴한다면, 예측 가지고 시간을 생성한다고 생각해 보자 말이죠. 그렇게. 그게 한 사람이 누구냐? 선취라고 하는데 그게 하이데거나 딜타이에서 나온 걸 주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의미 없이 살진 않는다 말이죠. 내가 미래의 주체자로서 지금 내가 예언을 만들어내는 예언자 되면 되지 않느냐 말이죠. 예언자 내가 하고 그 예언의 성취도 내가 해버리고.
그러면 내가 역사의 주인공인데 단 알아야 될 것은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나도 변하고 시간도 변하면 이것도 변한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나중에 갈 때까지 가보자. 그게 허무하게 느껴지지만 허무 하냐, 안 하냐 쪽으로 그것도 사유로 생각한 것이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전부라면 이것이 진리 아니냐? 생생한 생철학이니까. 생생하니까 이게. 이래서는 안 된다, 된다가 아니라 생생하게 느끼면 그게 전부다 이 말이죠. 니, 꼴리는 대로 해라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게 젊은 애들 특징이 이겁니다. 미래가 없잖아요. 마음 끌리는 대로.
그런데 그렇게 마음 끌리는 대로 하는 애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그 마음 끌리는 대로 행동할 때 돈을 쓰게 되어 있고, 그 돈은 부자 부모가 도와준다는 것이고. 가난한 집에 애들은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하질 못하죠. 그럼 지가 공무원시험, 사법고시 공부해서 부잣집 애들처럼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하죠. 그게 나중에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생이라는 그게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산'이라 하는데 나중에 라캉이나 이런 사람을 보면 이것도 비판받지요. 생산할 때 생산의 내용은 자기가 생산하는 게 아니고, 딜타이는 자기가 생산한다. 타인의 욕망, 타인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이 부러워해서 나도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생산하죠. 인간은 행동한다. 뭘 본보기 삼아서? 남이 갖고 있는 좋은 것, 나한테 아직 없는 것.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 모든 걸 가지면 행동 안 하겠네. 천만에 말씀. 모든 걸 가지면 가난한 자가 되고 싶어서 환장하죠. 가난 하냐, 부자가 아니라 무조건 현재 없는 것만 무조건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합니다. 인간은 현재 내가 없는 것만 무조건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가 힘 빠지고 기운 빠지면 가을남자처럼 바바리 깃 세우고 과거를 돌아보면서 찬바람이~ 불러와도 노래 부르면서 가을에 떠나가요 노래 부르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인생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관조하면서 동양화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죠.
동양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을 작게 그려요. 자연은 크게 그리고 자연보다 더 큰 그림은 안개에요. 여백이 커요. 그러니까 동양화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의 포부기 때문에. 나, 저렇게 살고 싶어. 시간이 오고 오는 세월도 정지된 상태에서 고기를 몇 마리 낚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서양화는 막대한 고기가 있어요. 고기는 안 잡힙니다.
그냥 낚싯대 드리워요. 얼굴도 없어요. 삿갓에 가려서. 흐르는 강과 자기 사이에는 안개가 끼고. 여백이 있죠. 모든 것이 무로 다 날아가요. 그게 동양화에요. 동양의 모습입니다. 참, 별 짓하며 지옥 다 가요. 별 것 다 구상하며 지옥 다 가요. 실컷 상상하면서. 그래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도 동양화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여기에 마지막 어려운 것 하나 해 봅시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182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개인의 경험은 늘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개인들에게 해당되는 부분의 의미에 대한 규정이 생명의 흐름 가운데서 변화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해석이 다 달라지니까.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에 있었던 일을 사십 살 때 해석과 오십 세 때의 해석이 달라요. 이것은 변화한다는 뜻이고,
[그러나 이런 과정이 생명의 진행 안에서 완료될 수 없는데, 이런 사실로부터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파생되는 게 아닐까?]
극단적인 상대주의.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죠. 그럼 니는 뭐고? 아무것도 아니네.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이거 누구 이야기했어요? 스토아가 이야기했지요. 스토아의 철학은 하나 밖에 없어요. 자연스럽게. 끝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예정론도 나오고 운명론도 나와요. 운명론, 예정론, 그리고 금욕주의 다 나와요. 자연스럽게. 왜냐하면, 욕심을 부린다 하는 것은 새로움을 창출하니까. 새로움이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없는 거거든요. 없는 걸 찾는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스럽게 만들어요. 자연스럽게.
스토아학파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디오게네스. 황제가 와서 뭐, 소원이 뭐냐? 좀 비켜 줄래요? 햇빛 좀 가리지 말고. 토굴 같은데 들어가서 거지생활하면서. 그리고 또 뭐 합니까? 대낮에 등불 들고 가요. 뭘 찾습니까? 진리가 없어서 찾고 있다. 요새는 밧데리 들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다 부자연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에 의해서 공격 받게 되어 있고, 그 공격이 뭐냐? 인간이 불행이 온다는 거예요. 인간의 비극은 자연스럽지 않기에 온다는 거죠.
그런데 성경에 자연스럽지 않은 걸 가지고 이걸 지옥이라고 해요. 거지 나사로 맞은편에 부자. 부자는 자기는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예를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지요. 이게 부자연스럽잖아요. 바르게 살아야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미래를 예상해서 부자연스럽게 사는 이것을 가지고 위즈덤, 이게 지혜에요. 그러니까 이 성경구절이 얼마나 어려운 해석입니까? 거지 나사로와 결합이 돼야 돼요. 거지 나사로 이야기와 결합되어야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부자연스러워야 돼요.
예수님은 위험스러운 분입니다. 함께 다니면 안 돼요. 다니면 꼭 죽습니다. 너무나 위험스러워요. 그래서 지난 주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제자들 다 도망했다고. 마지막 최후의 징조 주니까 도망해 버리잖아요. 예수님은 무척 위험한 분이에요. 같이 놀면 안돼요. 놀면 죽어요.
바로 바리새인 보고 니가 도를 알아서 나와 지금 심판주가 와도 믿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자연스러움 자체가 자연스럽거든요. 아, 이렇게 넓은 길로 가서 지금 멸망의 길로 가고 있구나. 이게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설교자의 제일 큰 아픔은 뭐냐 하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부자연스럽게 만들도록 설교를 해야 된다는 이게 진짜 총대를 메고 에이, 죽어라. 차라리 나한테 돌을 던져라.
이번에 예상대로 한다면 저는 부천개혁교회 설교제목을 스데반 집사로 지금 생각해요. 장로 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건 스데반 집사처럼 죽어라. 죽는 게 부자연스러워요. 하이데거 보세요.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사도 바울은 뭡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얼마나 부자연스럽습니까? 이게 무슨 스토아철학입니까? 반대지.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은 전부다 사도 바울은 뭐가 들어있다? 스토아철학이 다 들어있고, 영지주의가 들어있다. 이렇게 해석하거든요.
[딜타이는 이러한 문제에 주목했다. 그리고 전체가 부분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일이라면 전체도 역시 우리를 위해서만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런 문제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딜타이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본 거예요.
[부분의 의미는 전체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이 답변이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딜타이는 그렇다면 전체가 되어야 안다면, 그러면 우리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냐? 아니면 우리가 전체를 해석하느냐? 그런 문제가 있을 때 딜타이는 여기서 답변을 주저하고 답변을 못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 그럴 가능성이 있단 말이죠. 좀 어렵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 자체가 어떻게 하면 자기가 편하려고 하는 이야기고 결국 자기를 위한 이야기밖에 안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 말이죠. 분명히 주도권을 역사에 넘겼는데 넘기는 그 자체가 마음대로 행동하고 넘겼는데 그 자체가 역사에 맡겨졌다는 내 몸 하나 편하겠다는 무책임한 행동이 결국은 이기주의의 표상이 될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게 참, 철학의 한계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철학 하다가 불교로 가버리는 거예요. 아, 자아가 문제구나. 내가 따진다는 자체가 내가 있는 이상은 따지는 그 자체가 항상 나한테 돌아와요. 결국 그걸 부인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안 합니까? 맨 날 십자가해도 지 밖에 모른다고. 그들은 십자가를 하나의 철학으로 보니까 그렇게 되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기존의 모든 니케아회의에서부터 시작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본 훼퍼의 이야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어떻게 살았고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잊어버립니다. 이젠 자연스럽게 잊지 말고 부자연스러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십자가가 다시 우리의 생명으로 꽉 차게 들어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