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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세계적인 전염병학 및 백신 전문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언제든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스(SARS)로 전 세계가 공포에 떨었고 거의 해마다 수퍼독감이 유행하는가 하면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 탄저균 테러와 같은 새로운 위협들도 우리의 우려를 가중시킨다.
작년 초 미국 전역에 웨스트 나일 뇌염이 유행했듯이 선진국들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몰살시켰던 흑사병(黑死病)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에볼라 바이러스를 주제로 한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아웃브레이크(The Outbreak)’는 비단 영화 속만의 일이 아닐지 모른다.
만약 이런 일이 현실화된다면 항생제와 예방백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질환들은 종종 전염성이 강하며 생명까지 위협한다.
WHO가 발표한 2003년 세계 인구 사망원인을 보면 감염질환이 전체의 25%로 심혈관질환(31%)에 이어 두 번째이다. 0~4세 소아의 사망 원인에서는 단연 1위(63%)로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어린이에게 감염질환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만약에 DTP백신(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예방), MMR백신(홍역·풍진·볼거리 예방), Hib백신(뇌수막염 예방)과 같은 예방주사를 제때 맞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을 것이다.
국내 백신산업은 지난 수년간 과당경쟁, 연구개발 투자의 미흡, 부작용 발생의 사회문제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크게 위축돼 왔다. 2000년대 들어 자체 생산되는 백신은 B형 간염과 일본뇌염 백신 등 불과 수 종에 불과하며, 현재 백신 생산의 자급률은 10% 안팎으로 현저히 떨어졌다. 이웃 일본이 거의 대부분의 백신을 자급자족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바이러스 전염병에 대비하여 한국도 시급히 백신 생산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유는 자명하다. 백신은 전염병의 위기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필수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WHO와 인플루엔자(독감) 전문가들은 각국이 독감백신 생산능력을 조속히 확보하도록 강력히 권장하고 있지만, 비상시 백신 공급 등에 관해선 국제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만약 수퍼독감이 대유행하게 되면 독일·영국·미국 등 몇몇 생산국을 제외하고는 백신이 각국에 고루 공급될 수 있을지 우려된다. 작년에 우리나라는 1800만명 분의 독감백신 원료를 전량 수입했다.
최근 세균무기를 이용한 생물 테러의 위험이 점증하고 있는 것도 백신의 국내 생산이 필요한 이유다. 국가 차원에서 천연두나 탄저병 백신을 확보하고 있어야 이러한 바이러스를 이용한 생물 테러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백신은 국가를 지키는 생물 방어무기의 하나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백신 생산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생물산업의 하나다. 이미 국내에는 국제백신연구소(IVI)라는 훌륭한 백신 연구기관이 있고, 생명공학 기술이 첨단 수준에 도달해 있어, 백신 개발 및 생산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전염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생물 테러의 위협에서 국가를 방어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생명공학 산업을 발전시켜 국가의 이익까지 창출할 수 있는 백신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시급하고 필요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