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은 여성, 가난한 사람, 성령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성이나 가난한 사람은 제도라는 틀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성령은 제도나 틀에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교리화된 문자, 제도화된 종교, 가시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틀에 갇혀 활동하지 않는 개방적인 하나님입니다. 옛날 여성은 제도 안에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가난한 사람 역시 예루살렘 체제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성과 가난한 사람에 관심 두는 누가복음은 그래서 틀로 규정할 수 없는 성령을 강조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 후손이라 틀 안에 사람들입니다. 해마다 순서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해야 하는 틀 안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틀 안에 있는 부부는 당연히 자식을 낳아야 했습니다. 자식을 낳아야 하는 틀 속에 있는 가족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부끄러웠습니다. 또 성서 속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가 올 때까지 자손을 낳아 공동체를 유지하는 건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제사장 가문에게 자식이 없는 건 그래서 부끄러운 노릇이었습니다. 제사장 아내 엘리사벳은 부끄러웠고, 자기 잘못 때문에 제사장인 남편 사가랴 얼굴에 먹칠하고 있다고 여겼겠습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저출생 국가입니다. 현재 마이너스 출생률이 유지된다면 산술적으로 대한민국은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고 합니다. 요새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임 부부는 어쩌면 대한민국 체제에 저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 내 아이를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쩌면 지혜일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나라도 생존하려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맞선 저항이든, 대한민국을 사는 지혜이든, 저출생 현상은 아쉽고 염려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사람이 국가 앞섭니다. 사람이 국가를 만든 것이지, 국가를 사람으로 채워야 하는 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고 영원하진 않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역사 속 모든 국가는 성쇠하기도 하고 흥망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체제였든, 어느 나라였든 현재 대한민국 영토엔 사람들이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삽니다. 사람이 살 것입니다. 인구가 줄어들면 줄어든대로, 너무 많이 줄어들면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여기 우리 사는 땅을 채울 것입니다. 그들이 경영할 나라입니다.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국체를 결정하고 국정을 꾸려갈 것입니다. 장차 대한민국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한민국 인구가 감소하는 건 누구의 잘못이라 짚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걱정됩니다. 누구의 것이라고 잘못을 꼭집어 말할 순 없는데, 진단을 내리자면 잘못된 게 무엇인지 짚어내고 싶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도 뭔가 잘못한 게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법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옛 유대인들이 상상 속에 만들어낸 관습에 부합하지 않았을 뿐,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관습이나 분위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잘못한 줄 착각합니다. 잘못한 게 없지만, 엘리사벳이 잘못한 걸 굳이 찾으라면 해선 안 될 착각에 빠져있는 걸까요.
착한 사람들에게 굳이 있지 않은 잘못을 찾아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사는 내내 괴로웠겠습니다. 감사하게도 괴로움의 시간이 지나고, 기적이 일어났고, 임신이 불가능한 나이에 사가랴는 잉태하고 아들 요한을 낳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자식이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났기에, 아버지 사가랴를 이어 성전에서 복무하는 게 마땅할텐데,
엘리사벳이 낳은 아이 요한은 전통을 배반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제사장 자식이라, 성전에서 복무하는 게 가문의 기대였는데, 성전을 떠나 들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됩니다. 성전에 들어가지 않고 들에서 일합니다. 들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마치 제사장인 것처럼 정결을 선포하면서 성전 제사를 무력화시킵니다. 아들 요한이 성전을 거부하는 건 아버지나 어머니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이런 아들의 비행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제사장 가문이고, 세례 요한을 잉태했을 때도 성전에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가랴에게 성전은 참 좋은 곳입니다. 뭔가 잘못됐다고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사가랴와 엘리사벳 속 마음을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압니다. 세례 요한이 성전을 거부하고 들에서 제사장 노릇하는 건, 아비 어미 잘못이 아닙니다. “It’s not your fault.” 세례 요한은 유대교 교리를 어지럽히고 유대교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건 엘리사벳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엘리사벳을 잉태케 하시고, 요한을 키우며, 요한을 통해 하나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요한의 기행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죄나 잘못은 어떤 사건의 원인이 아닙니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뜻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세례 요한을 향한, 성전 밖 사람들을 위한 뜻이 있었던 것이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잘못이 아닙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자식의 인생은 아빠의 잘못이 아닙니다. 엄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었기에 내 뜻을 넘어선 자식의 인생이 펼쳐집니다. 죄나 잘못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아닙니다. 죄나 잘못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죄나 잘못에게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나 잘못에겐 능력이 없습니다. 죄나 잘못이 인생을 끌고가지 않습니다. 인생을 끌고가는 건 하나님이시지, 죄나 잘못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죄나 잘못은 그닥 유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십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 어떤 잘못을 했든 어떤 실수를 했든,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It’s not your fault.” 우리가 잘못해서 기대치 않았던 상황을 맞이한 게 아닙니다. 기대치 않았던 상황은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의 길을 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이 상황이 닥친 건 우리가 예수의 길을 마중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를 맞이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