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이면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곤 한다. 공원이라야 복지시설에 면한 작은 쉼터 같은 곳이다. 할아버지 세 분이 벤치에 앉아 서산에 걸린 해를 바라본다. 초점 없이 퀭한 눈의 노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고 각자 생각에 잠긴 듯 정물화처럼 앉아만 있다.
'푸릇' 소리가 나며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새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나뭇가지만이 떠나간 새의 흔적을 말해준다. 공원은 다시 정적에 잠긴다. 눈을 들어 새의 비행을 따라간다. 해질녘이면 유난히 새가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신기하다. 귀소본능이 있어서일 것이다. 새라고 사람과 다를 바 무엇이랴. 밤이 오려 하니 새들도 지친 날개를 쉴 터전을 찾는 것이리라.
해거름의 신비는 '섞임(混)'에서도 비롯한다. 낮과 밤, 해와 달, 별과 구름이 함께 하되 존재감을 시위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세상사나 우리네 삶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 이치인 듯싶다. 토속적인 것과 엑조틱한 것의 융합은 동경과 애수를 자아낸다. 혼혈 중에 미인이 많음은 잘 알려진 속설이며 접경지대 마을에 문물의 교역이 왕성하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바다는 색깔이 아름답고 프랭크톤과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문명이 교차하는 지역엔 어김없이 더욱 찬란한 문명이 꽃핀다. 지정학적으로 두 대륙에 걸쳐 있어 문화유산이 많은 터키와, 알함브라 궁전 같은 기독교와 아랍 풍이 어우러진 '무데하르' 건축 양식으로 유명한 스페인은 본보기다. 잠잘 때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하는 가수면 상태에서 영감이 스치고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러시아의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꿈속에서 원소가 분분히 날아 앉는 것을 보고 '원소주기율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해 질 무렵 어느 순간,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다가드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밝음과 맞닿아 있는 동 틀 녘 어둠이 짙듯이 해 질 녘의 밝음은 어둠과 잇대어 있음으로 한층 더 밝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운 해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찬란한 빛을 남겨둔 때문이 아닐는지. '사라짐(滅)과 자취(痕)'의 미학이며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 아닐까 한다. 그 빛은 머지않아 스러질 것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아라비아 신화에 나오는 사막의 불새는 불에 타 죽기 전 가장 높이 날아오른다고 한다. 병이 깊은 사람도 생명의 끈을 놓기 전에 일순 신지를 회복하여 얼굴이 빛나는 순간이 있다. 헤어짐이 예비된 만남은 그 만남과 헤어짐이 더욱 애틋하다.
해는 기울고 달과 별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산등성이 너머 하늘에 검붉은 기운이 한지(韓紙)에 물밴 듯 펼쳐져 있다. 해 질 무렵의 놀라움은 또한 '남김(餘)'의 미학에도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직접 마주할 때보다 '남겨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더욱 가슴이 뭉클하다. 자연현상 또한 그러하다. 해가 남긴 잔광(殘光)이 구름과 뒤섞여 하늘 캔버스에 화려한 그림을 수놓았다. 나선형 구름은 음전한 여인의 여러 겹 치맛자락처럼 휘감아 돌며 비밀스런 문양을 만들었다. 겹겹이 층을 이룬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긴 노을빛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으로 인도한다. 헤르메스의 구두를 신은 소슬한 바람이 소식을 전한다. 머지않아 어둠이 찾아올 테니 걸음을 채근해야 한다고. 우리 모두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서산으로 넘어간 해가 쉬는 틈을 타 채비를 마친 달이 시중드는 별을 데리고 떠오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도시에서는 어릴 적 평상에 누워 헤던 별들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해서 어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까. 눈에 띄지 않은 사물은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별도 거대한 우주의 질서에 작은 친구들로 참여하는 것이다. 별만이 아니다. 적막한 숲을 스치는 바람, 뱃길을 비추는 등대, 똑딱이는 거실의 시계, 졸고 있는 가로등, 기화(氣化)하는 푸른 연기, 슬픔처럼 흐르는 안개, 어디엔가 깨어 있는 작은 동물, 차디찬 곳에 누워 있는 자. 이 모든 개별 존재가 교호하여 우주적 합일을 이룬다. 천지간의 온갖 사물, 낮과 밤, 삶과 죽음은 비밀스런 통로로 연결돼 순환하며 생성과 소멸,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벤치의 노인들이 엉거주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손짓으로 헤어짐의 인사를 나눈다. 피할 길 없는 생의 해질녘에 선 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삶의 무상함과 회오의 감정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석양을 바라보며 숙연함을 느끼는 것은 보편적 감정이리라. '인생의 짧은 하루'를 뒤돌아보며 소홀히 보낸 한낮의 시간과 무분별하게 소진한 젊음을 아쉬워한다. 옛 시인 도연명은 <잡시(雜詩)>에서 '젊음은 거듭 오지 않고 하루에 두 번 새벽을 보기 어렵다(성년부중래 일일난재신‧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고 했거니와 시간과 젊음의 헛된 낭비를 경계한 잠언시요, 권면가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기다림과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 새벽은 또 오는 법이니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모든 것을 잃고 고향 땅 타라에 돌아온 스칼렛 오하라가 어슴푸레한 해질녘 하늘을 우러러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고 절규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의 시작'이다. 해 질 녁과 동 틀 무렵의 풍광은 비슷하다. 동 틀 녘 온통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해를 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마음에 격동이 일고 각오를 다지며 소원을 빌게 된다.
붉은 해가 떠오른다. 해는 이윽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 나무 잎사귀와 풀잎에 맺힌 이슬과, 너와 나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앉는다. 서서히 해가 움직인다. 우리 또한 해의 궤적을 따라 일상의 분주함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또 다시 희망과 생명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창식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