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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히 기억난다.1999년에 등장하자마자 자타의 기대를 공히 훨씬 넘는 인기몰이를 시작해 그 다음해인 2000년 글레스튼베리 페스티벌에서 인디밴드들을 위한 어더 스테이지 무대에 올랐던 콜드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은, 공연을 본 NME지 기자의 "와 이 정도 호응이면 내년 쯤엔 글래스튼베리 헤드라이너도 될 법하겠는데요?"라는 질문에 정색을 하고 "그건 넌센스"라고 겸손하지만 딱 잘라 답했었다. 그러나 올 2002년 여름, 그들은 글래스튼베리 첫 날의 최고 스타, 즉 헤드라이너로 뛰고 있었다. 불의의 사상자를 냈던 전 해 덴마크 로스킬드 페스티벌을 타산지석 삼아 제기된 안전점검 문제로 인해 당 페스티벌의 2001년 행사가 주최측의 결정으로 치러지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볼 때, 이는 예언의 실현이 아니라면 상당한 현운우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양자 모두에게 기분 나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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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플레이가 영국 내에서 최초의 어떤 '징조'를 보였던 것은 99년 겨울, [The Blue Room EP]라는 타이틀로 발매한 다섯 곡짜리 미니 앨범을 통해서였다. 그 전에 이미 [Safety EP]와 [Sisters And Brothers EP]두 장이 발표된 적이 있었는데, 각각 자족적인 기념품이자 전형적인 인디 팬들을 겨냥한 소규모 시도들이었던 이 두장은 모두 결과론적으로 말해 지금에 와선 [The Blue Room EP]를 위한 좋은 포석이 되어 주었다는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시 DJ 스티브 라막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내처 꾸준한 방송으로 그 이름을 인디 팬들에게 기억시킨 <Bigger Stronger>가 원래 [safety EP]의 수록곡이었기 때문이다.(이 곡은 거의 밴드 최초의 곡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지금보다 더 뛰어나고 싶고 더 강해지고 싶고 내가 가고 싶은 그 어디든 갈 수 있는 빠른 차를 갖고 싶다.그 이하로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자포자기를 담은 그 곡의 비장미가 획득한 호감은, 라디오헤드의 또다른 여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각의 냉소를 단숨에 덮어버릴 만큼은 충분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Shilver>였다. 그때 한창 제작중이던 데뷔 앨범을 한 발 앞서 예고한, 밴드로서는 최초의 본격 싱글 승부수였던 이 곡은 놀랍게도 발매 첫 주에 Top 40 진입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싱글 차트 TOP 40 진입 여부가 곧 히트 여부의 암묵적 기준이 되는 양상은 미국보다 영국이 더 심하다). 얼마나 기대 이상이었냐면, 당시 이곡이 맘에 든다며 자신의 방송에서 열심히 밀었던 중견 여성 DJ 조 와일리가 결과 발표 당일 자기 일인 양 축하 메시지를 건네며 소감을 물었을 때 정작 보컬 크리스 마틴은 실은 너무 떨려서 "결과 발표 들을 엄두가 안나 일부러 오늘 치과 갔다 왔는데" 라고 퍽이나 머쓱하게 대답했을 정도다. 허나 여기까진 그래도 좋았다. 결국은 그 후 <Yellow>가 말그대로 '터졌고', 이것은 곧 데뷔 앨범 [Parachutes]에 뇌관처럼 연결되어 마치 전 해의 영국에서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가 그랬던 것처럼 그 해의 국민송가인 양 불려질 위험에 처했고, 미디어도 그 어디나 이겨 없이 콜드플레이를 "올해의 트래비스"로 도장 콱콱 찍는 분위기였다. 겸하여 멤버들이 트래비스 만큼이나 수수하고 '사람 좋은'이미지로 부각된 것도 이에 덧없는 일조를 했고, 이런 분위기는 앨범이 발매된 후엔 더욱 심해져, 그 여파는 끝내 '인터내셔널 히트'로까지 이어졌다. 이 (상대적으로) 한갓진 대~한민국에서도 [Parachutes]의 라이센스작은 물론 스페셜 2CD 패키지까지 선보였음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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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작 콜드플레이는 그 성공을 스스로 납득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 기숙사에서 만난 동창생 사이였던 이 네명의 사나이들 - 조니 버클랜드(베이스.1988년생). 가이 베리먼(기타,1978년생), 윌 챔피언(드럼,1978), 그리고 크리스 마틴(보컬/기타, 1977년생) - 은 처음에는 라디오헤드 비교 논쟁으로 마음 고생을 했고 나중에는 안티 세력들에게 시달렸다(2000년도 모큐리 뮤직 어워드에 노미네이트 된 [Parachutes]앨범에 대해 前크리에이션 레이블 사장 앨런 맥기가 자신이 미는 프라이멀 스크림의 [Xtrmntr]가 더 자격 있다며 "콜드플레이 같은 건 오줌싸개들이나 듣는 음악"이라 혹평했던 사건은 그 잔적인 예).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들을 당혹케 했던 건 예상보다 빠르고 급작스러운 전개상황이었다. 소속사인 팔로폰 측에서도 4만 장 정도만 팔려줘도 데뷔 앨범으로선 충분히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기대하는 바가 비교적 '건전'했다. 그러나 [parachutes]는 NME, Q, 브릿 어워드, 그래미 어워드에서의 각종 수상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밴드는 가이 베리먼의 말대로 "찬찬히 배워나가는 과정 없이 말 그대로 수직상승"했다. 그러나 베리먼의 다소 자조적인 저 반응보다 보컬리스트이자 곡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크리스 마틴의 당혹스러움은 훨씬 심각해서, 그는 한동안 공연 때마다 마치 사과라도 하듯, "우리 사실 별거 아녜요"나 "마음에 안 드시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류의 멘트를 날림으로써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었던 나머지 밴드 멤버들의 욕구불만을 유발하는가 하면,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던 200년 NME 어워드에서는 스스로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식장을 빠져 나올 만큼 자신(들)의 스타 지위에 걸맞는 행동을 하기가 도대체 버거운 것처럼 보였다.
(이 당시 그의 생각: "보노? 노엘 갤러거? 맙소사, 이런 사람들 옆에 앉아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지만 겸손함을 넘어 지나친 자신감 결여로까지 보이는 이런 크리스 마틴의 자격지심은 역설적으로 새 앨범인 이 [A Rush Of Blood To The Head]를 이해하는 데는 필수적이다.전작인 [Parachutes]는 <Shilver>,<Yellow>,<Trouble> 같은 좋은 싱글들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앨범의 거의 모든 곡들이 '보편적인' 싱글로서의 양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이 모두는 어딘지 어떤 일관된 노선(혹은 의도?)에 때라 선택된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꿔 말해 - <Spies> 정도를 제외하면 - 이전 인디 시절의 EP들이 보여주었던 좀더 은밀하고 섬뜩한 부분들의 상대적인 '거세'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었다. 그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새 앨범에서는 기본적으로 콜드플레이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멜랑콜릭함과 뛰어난 보편적 감성(을 읽는 솜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섬세하지만 오로지 섬세하기만 해서 필연적으로 다치게 될 수밖에 없는 속살로만 일부러 채워놓은 듯한 - 아마도 바로 이 점이 앨런 맥기 같은 사람에게 오줌싸개들 음악이라고 생각하게끔 한 빌미를 제공했겠지만 - [Parachutes]와는 달리 무른 부분만큼 가혹한 부분도 있고 상처가 난 부위만큼 갑옷을 두른 부위도 보이는, 즉 앨범 전체적으로 적절한 리듬에 따라 강약이 조절되고 있는 점이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다. 예컨대 <Politik>을 첫 곡으로 듣게 되는 것부터가 그다지 기대했을 법한 상황은 아닌데, 이 곡이 굳이 9.11 테러 직후의 감정적 여파가 반영된 곡이란 점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Yellow>로 이름을 굳힌 바 있는 콜드플레이로선 적잖은 의외가 될 만 하다. 또는 <Clocks>나 <A Whisper> 같은 트랙들 (둘 다 죽음과 연관이 있다)이 보여주는 좀더 절박하고 '위험한' 내면들이, 이 앨범에서 [Parachutes]의 익숙한 일부를 재현하고 있는 부분들 - 그러니까 <Green Eyes>나 <Warning Sign>,<The Scientist>등 - 사이에서 놀랄 만큼 생기를 띠는 점 또한 기억해둘 만 하다. 말하자면 이번 [A Rush Of Blood To The Head]는 그 성장만큼이나 '복원된' 콜드플레이이다.
그렇게 콜드플레이의 프리(pre-)[Parachutes] 사이의 균형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도 의미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또한 병적일 정도였던 크리스 마틴의 자격지심의 완화를 추측할 수 있게도 하는 부분이다.그러나 이 자격지심은 원래부터가 좀 모순이었던 것이, 실상 이것은 그의 남다른 자존심 혹은 고집 혹은 완벽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으로, 자신의 기준에 백 퍼센트 충족함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듣는 사람에게 무조건 감동하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의 발로에 다름 아니었다. 혹은 그게 아니라면 이는, 크리스 자신의 말대로, 자신들이 정말로 "그저 운때를 잘 만난 대학생 한량 밴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내지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전까지 그런 두려움을 품게 했을 만큼 급속하고 거대하게 들이닥친 성공에 대해, 밴드는 이젠 더 이상 피해자인양 신음 소리를 낼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들은 거기에 적응하고자 한다. 피할 수 없다면 맞닥뜨리는 수밖에. 이 앨범 중 <God Put A Smile Upon Your Face>,<Daylight>(<Clocks>와 함께 에코 앤 더 버니멘 출신의 이언 맥컬록이 팜여한 곡). 그리고 타이틀 곡 <A Rush Of Blood To The Head> 등에서는 전작에 비해 그 일인칭으로부터 확실히 일정한 (안전)거리가 느껴지고, 이는 아마도 자기연민에서 최소한 한 걸음 나아간 객관성을 점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관중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사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 행동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하는 세상만큼 끔찍한 건 없을 것이다.그리고 콜드플레이의 곡들은 사과를 해야 할 만한 노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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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하나 하자면, 이 글을 쓰는 얕은 생각으로선 처음<In My Place>(전작 [Parachutes] 완성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미발표곡)가 첫 싱글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솔직히 김이 빠지는 것이었다.예전 <Yellow>의 반향을 평가절하하자는 건 아니지만 이 사실 자체는 누가 봐도 그 속편을 바라는 꼼수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반복해서 듣는 동안 깨달은 <In My Place>의 힘은 <Yellow>의 대단한 전염성의 긍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절박함에 있다. 그리고 이 절박함에는 사실 꼼수가 없다. 도통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놀랍다. 콜드플레이기ㅏ 그간 안티 세력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던 가장 은밀한.그러나 주된 근원은 바로 이들이 그럴싸한 명문대 풀신이라는 점(멤버들은 영국 UCL 대학 학위를 갖고 있으며 특히 크리스 마틴의 경우는 퍼블릭 스쿨을 거친 전형적인 중상/중산층 출신)이었다 - 즉, 뭐가 아쉬워서 밴드를 했겠으며 그렇게 시작한 밴드가 뭐 대수롭겠냐는 그런 식의 비아냥. 이는 영국 내에서 각별하게 그네들 고유의 끈질긴 계급의식이 로큰롤과 맺어온 관계(국내의 경우만큼 이중적이진 않겠지만)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위험부담이 되는 부분이었고, 필연적으로 이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이 아닌 록밴드로서의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마음의 숙제를 남겼을 것이고, 이것이 내처 아까와 같은 사과 버릇에까지 이르게 했으리라. 그러나 이들은 (비록 라디오헤드 같은 선례는 이들에게 거의 면죄부가 되어줄 수도 있었을지언정) '배운 티'를 내며 영리하게 굴기 보다는 심플한 팝송의 정공법을 택했고, 그것이 말하자면 <Yellow>나
<In My Place>와 같은 곡을 그토록 단순하면서도 특별하게 들리게 하는 바탕일 것이다. 글쎄, 콜드플레이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얄밉기 보다는 착한 편이 낫다.
글고 다행히도 콜드플레이의 그런 진솔함은 이번 새 앨범에서도 여실하다.다만 한 가지 덧붙일 것은 {A Rush Of Blood To The Head]가 그런 바탕 위에서 드디어 그들의 자의식 또한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앨범이라는 점이다. 바론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번엔 <Green Eyes>나 <Warning Sign> 보다는 - 비록 싱글 커트의 가능성에서는 상대적으로 밑질지라도 - <Politik>이나 <A Whisper>같은 곡이 더 들려져야 한다고 믿고 싶다. 왜냐면 이들은 결코 '착하기만 한' 밴드는 아니기 때문에. 역설적이라고? 그럴지도. 하지만 장담하건대 크리스 마틴 저 친구 만큼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노래 쓰기를 두려워하는 저 섬세한 낙천주의자 만큼은.
첫댓글 정말 수고하셨어요^^;;;; 그냥 앨범 사심 보실수 있는건데... 다들 사셨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