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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으로 알프스 3대 미봉 반 트레킹에 참여할 기회를 주신 서울가자산악회 염정의 회장님과 뫼솔산악회 박정규 대장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준 분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산행기(여행기)로 표합니다 특히 그 여행 후 곧바로 떠난 킬리만자로 등정에 쾌거를 올리고 귀환할 박정규 대장을 비롯한 선수들에게 작은 환영의 선물로 이 글을 바칩니다. 님들과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추억여행 한번 다시 한다 생각하고 부족된 글이지만 읽어보신 후 잘못된 곳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프스 3대 미봉(몽블랑, 마테호른, 융프라우) 트레킹(11일) (2019. 6. 27 목 ~ 7. 7 일) - 서울가자산악회, 뫼솔트레킹 -
제1일차 <6월 27일, 목요일> 러시아 항공을 타고 프랑스 샤모니로
6월의 바람을 타고 녹음 짙어가는 창밖을 보며 인천공항으로 간다. 늘 관광차 패키지만 따라다니는 나로서 반 트레킹이라고는 하나 처음 참여하는 해외 트레킹이어서 잘 소화해 낼 수 있을는지 자못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인천 제2국제공항 3층 C카운터 앞 11시 집결인데, 2청사는 처음이고 해서 반시간 앞당겨 도착, 새로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눈다. 짐 부치고 배낭 하나씩은 메고 있다. 도착지에 혹 가방(짐)이 안 오는 경우를 대비해 첫날의 트레킹 준비를 하고 오라는 전갈이 있었다. 마침 작은 배낭이 있기에 따로 마련하지는 않았다. 막상 작은 배낭이라 해도 내 건 너무 작은 듯하다. 등산화는 하루 신고 예행연습 해본 결과 하도 무거워 부치는 짐에 넣고 운동화로 대신한다. 13시20분 모스크바행 러시아항공기가 이륙한다. 기체가 일정궤도에 오르자 음료수가 나오고 두어 시간 후 식사(치킨 또는 피시)가 제공되는데, 이상기류로 인해 서비스 중단한다며 배식이 안 돼 먼저 받은 이들의 식사가 끝난 후 한참 지나서야 배식이 이어진다. 커피 잔이 놓여있기에 커피를 기다렸으나 한참 후 식판을 거두어 갈 뿐 소식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되어(각자 승무원에게 가서 주문한다는 걸) 커피와 과자를 받아 든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19시 좀 넘어 음료수 제공, 젊고 잘 생긴 승무원이 친절하기까지 하다. 한 시간 후 제공되는 식사는 비프 또는 치킨이다. 21시 55분 모스크바공항에 착륙한다. 현지시간 15시 55분(시차 6시간)이다. 공항은 비에 함초롬히 젖어있다. 곧 출발하는 제네바 행을 갈아타기 위해 F구역을 찾아 바쁜 걸음으로 무지 걸었다. 큰 공항인데 그 끝자락에 있어 상당히 멀다. 바뀌어 결국은 E41에서 보딩하게 된다. 18시 17분쯤 모스크바(Moskva, Moscow)공항을 이륙, 이번에도 러시아 항공이라 짐은 마지막 도착지에서 찾게 된다. 19시쯤 식사시간, 날아가는 밥알이라기보다는 덜 익은 듯 찰기가 없는 밥이라 잘 못 먹겠어서 빵으로 대신했다. 마침 열린 창으로 보이는 하늘, 파란 하늘에 햇살 받아 몽글몽글 피어나는 하얀 구름, 공항에선 비가 내렸는데…… 장거리라 힘들까 봐 복도쪽 자리를 예약한 여행사측 배려, 하여 창밖을 내다볼 수가 없다. 두어 시간 후 창밖으로 멀리 설산이 보인다. 구름인가 싶기도 했지만 삐죽삐죽 하얀 연봉들이 이어지는 걸 보면 알프스 산인 것 같다. 좀 더 선명하게 다가든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부친 가방을 찾는다.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남은 가방을 싣고 컨베이어 벨트를 몇 바퀴를 돌도록 산악회 대장의 가방이 나오질 않는다. 병풍 같은 설산의 이어짐, 태양이 산 너머에 가려지고 일행은 한 시간 반가량 어둠 속을 달려 샤모니(Chamonix)로 이동한다. 막상 호텔 앞에 내리니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나무로 장식된 호텔 벽사이로 엷은 불빛만이 흘러나올 뿐, 손님 반기는 로비의 종업원은 고사하고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제2일차 <6월 28일, 금요일> 말로만 듣던 몽블랑 등정, 꿈을 이루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우리가 머문 크리스탈(Le Cristal De Jade) 호텔이 꽤 아름답다. 나무로 이루어진 고전적 샬레 같은 건물로 아파트처럼 여러 동으로 된 5성급 큰 호텔이란다. 커다란 창문으로 보이는 브레방의 머리 부분이 새벽 여명을 막 벗어나 엷은 금빛으로 빛나고, 밖에 나가보니 높다란 앞산 위로 하얗게 빛나는 설산이 얹혀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저 봉우리 바로 뒤가 알프스 최고봉 해발 4,807m의 몽블랑(Mont-Blanc)라고 일행 중 누군가 말한다. 6시 반에 모여 샤모니 시내 제과점으로 가서 음료수와 딱딱한 바게트 빵을 받아놓고 대량 난감, ‘먹어야 산다’ 빵을 잘게 뜯어 쥬스에 담가 아침식사를 때우고 첫날의 트레킹에 나선다. 어젯밤 일이 스쳐간다. 시에서 운영하는 호텔에 밤늦게 도착하다 보니 종업원도 퇴근하여 우릴 맞이할 사람이라곤 없더니, 오늘 아침엔 이른 트레킹을 나서는 우릴 배웅해줄 사람 또한 없다. 직원의 출근시간 전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스스로 비상구를 열고 다녀야 한다. 오늘의 첫 여정은 몽땅베르(Montenvers) 트레킹이다. 점심으로 아침의 그 바게트 빵 하나씩을 배급받고 야생화 피어있는 꽃길을 따라 오른쪽 산으로 오른다. 돌을 삼각뿔처럼 쌓아 만든 ‘케른’도 보고 미나리아재비꽃 등 자잘한 야생화를 만나자 물 만난 고기처럼 반기는 일행은 사진찍기에 바쁘다. 평평한 풀밭에 이르니 맞은편 브레방 산군들의 파노라마가 시야에 펼쳐진다. 아름답다. le Montenvers?쪽을 향한 오솔길을 따라 좀더 올라간다. 온통 붉은 알펜로제 꽃밭이 펼쳐진다. 알펜로제(Alpenrose)는 알프스의 봉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붉게 비친다는 뜻으로 명명된 꽃이다. 이름 모를 자잘한 야생화를 찍으며 가는 일행, 걷기도 힘든데 엎드려 접사로 작은 꽃들을 담아내는 정성이 놀랍다. 그랑조라스의 전체 윤곽과 Dent du Geant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에서 조망하는 것으로 자족하고 하산한다.
산악열차를 타고 샤모니 시내로 귀환, 다음은 정면에 보이는 높다란 브레방(Brevent, 2,525m)에 오를 차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브레방 가는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간다. 가는 동안 브레방쪽 하늘에서 내려오는 색색의 패러글라이더를 본다. 하늘을 나는 저 기개와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샤모니의 평균고도는 1,030m, 케이블카를 타고 1차 브레방 고개인 쁠랑브라에 내려 잠시 조망하고는 이어 2차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브레방 정상(2,525m)에 오른다. 눈도 밟아보며 전망대에 오르니 맞은편에 뾰족탑 같은 에귀디미디 그리고 우측으로 눈부신 순백의 몽블랑 3봉이 넓게 펼쳐진다. 장관이다. 그 아래 보쏭빙하까지도. 아! 한 마디뿐, 그 아름다움에 말을 잃는다. 넋을 놓고 한참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사방을 돌아본다. 그 어느 곳을 보아도 어깨동무하며 겹겹이 에워싼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각자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가까이에 작고 파란 못물이 내려다보인다. 빙하 녹은 물이 이 꼭대기에 호수를 이루다니…… 바람이 시원하고 석조 건물 옆으로 그늘이 있어 일행은 아까 배급받은 기다란 바게트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한다. 사이에 야채가 들어있어 아침과는 다를까 싶었지만 여전히 이빨싸움을 붙여야 겨우 뜯어지는데 힘이 들고 짜기도 해서 간신히 절반 정도만 먹었다. 떠나오기가 싫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중 더할 수 없이 가파른 길에 Z자 형태로 난 산길을 따라 트레킹하는 이들이 보인다. 케이블카를 타고도 그 가파름이 섬뜩한데 이 험한 길을 따라 오르는 저들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대단하고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 제3의 등정코스는 에귀디미디(Auguille Du midi-정오의 바늘), 쁠랑드레기(2,317m)를 경유하여 에귀디미디 전망대(3,842m)에 올라 몽블랑 산군의 만년설을 조망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에귀디미디의 여정은 좀 힘들어한다. 줄을 서서 케이블카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므로 기다리는 지루함과 더위를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어려운 점은 고산증세를 보이는 일행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단계 단계 쉬어가며 오르는데도 전망대에 이르자 숨가빠하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이들이 있어 타이레놀을 한 알씩 나누어 먹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전망대 입장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지쳐가는 일행은 그냥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에귀디미디 이태리쪽 헬브로네는 공사중으로 가지 못한다고 한다. 호텔 귀환이 일러 시내관광을 권한다. 오늘 일정에 지친 일행은 시내관광을 포기하고, 몇 명은 나갔다가 더위에 밀려 금방 들어온다.
휴식 후 7시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여전히 더운 햇살 속으로 한참 걸어가는 동안 오늘 마라톤대회에 출전했던 선수의 늦은 선전을 박수로 격려해 준다. 식사주문도 배식도 늦게 진행된다. 이곳의 문화려니 기다림을 배운다. 맥주를 곁들인 식사가 끝난 후 시내산책은 생략하고 이젠 제법 익숙해진 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온다.
제3일차 <6월 29일, 토요일> 야생화 가득한 레우슈를 거쳐 이태리 꾸르마유르로
날씨 양호하나 락블랑은 케이블카 공사로 크리스마스까지 운행을 안 한다고 한다. 대신에 레우슈(Les Houches)의 쁘라리옹(Prarion), 밸뷰(Belleveu)란 곳으로 가기로 한다. 버스 타러 시내행진을 하는 동안 시선은 하늘로 빼앗긴다.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이들이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져서이다. 정류장에서 바라뵈는 경관은 전면엔 브레방이, 후면엔 진녹색의 산 위로 잿빛 바위세 봉우리가 삐죽 보이고, 한쪽으론 경사를 이루고 있는 두툼한 보쏭빙하(1,895m)가 지금 막 흘러내릴 듯 빛난다. 버스로 한참을 달려 교외로 빠져나간다. 양옆으로 간간이 만나는 호텔이나 인가가 무성한 녹음 속에 아름답다. 꽃들로 장식된 테라스는 기본이고, 옛 건물 그대로를 지니고 있어 더욱 멋스러우며 그들을 에워싼 자연과도 잘 어울린다.
한참을 기다려 탄 케이블카, 오르면서 내다뵈는 알프스 연봉들은 햇살 받아 반짝이고, 시야에 빨려드는 푸른 초원의 샬레가옥들,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연녹색 잔디의 스키장이 거미줄처럼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초원에 내리니 노오란 야생화 밭이 반긴다. 유럽의 광활한 유채 밭에서 그리하듯 꽃밭 속에 뛰어들어 환호하는 여성동지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린 꽃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주저앉아 우리도 꽃이 되어본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패러글라이더를 가로로 길게 늘어놓는다. 노랑, 파랑, 빨강 등 다채로운 빛깔이다. 진기한 광경을 보겠구나, 잠시 발길 멈추고 서있는데 준비를 끝낸 사람이 먼저 그 긴 물체를 이끌고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더니 금새 날아오른다. 차례차례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그들을 보며 욕망과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게 된다. 야생화 사진 찍기를 즐기는 분들에게서 갖가지 꽃 이름을 들으며 학습의 재미를 느낀다. 노오란 미나리아재비는 어디나 널려있고, 금매화, 할미꽃, 알프스 크로바, 용담 등 백두산 야생화와 닮은 꽃들이 많다고 한다. 좀참꽃(알펜로제)은 아예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늘 밑에서 간식으로 사과 한 알씩 먹고는 저 아래 스키장으로 가는 비탈진 초원으로 들어선다. 갖가지 야생화가 만발한 급경사를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사진을 찍는다. 워낙 넓어서 저 아래 앞서간 일행이 소인국 사람들처럼 보인다. 야생화를 찍느라 늦어진 일행이 합류하자 Col Du Voza역에서 T.M.B.라고 씌어있는 녹색의 산악열차를 타고 경사가 심한 한 정거장의 구간을 올라가 밸뷰(Belleveu역에 하차한다. 노란 야생화 가득한 초원이 펼쳐진다.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넘어지며 풀밭을 헤매는 걸 보니 아기천사의 하강인 듯 사랑스럽다. 내가 이럴진대 시종일관 미소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그늘 짙은 숲속으로 들어가 나눠준 샌드위치-이번엔 보드라운-로 점심을 대신한다. 역시 짜서 반만 먹었다. 일행 일부는 휴대한 버너를 이용, 라면을 끓여 햇반을 말아먹으며 맛있다고 감탄을 연발한다. 그도 그럴 것이 더위를 딛고 올라와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밥알을 넣으니 이 순간 이보다 행복한 게 있을까? 멀리 아름다운 설산이 전개되고 아래로는 먼 마을들이 냇물을 따라 이어진다. 케이블카로 하산한다. 샤모니 시내로 진입하니 파아란 브래방 하늘 위에 까만 점들이 가득하다. 점점 그 형체가 들어나기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패러글라이더가 시위라도 하듯 새처럼 날며 하늘을 수놓고 있다. 와! 장관이다. 이런 걸 언제 또 보겠나.
이어 이태리 꾸르마유르(Courmayur, 1,224m)로 이동한다. 유럽 서부에서 가장 높은 몽블랑 산 기슭에 있는 관광도시로, 이태리에서 가장 긴 강인 포강(Po R.)의 지류 도라발테아강(Dora Baltea, 160km)이 몽블랑 산의 1,400m에서 발원하여 도시를 관통한다. 산악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공기가 맑으며, 유럽에서도 널리 알려진 스키 휴양지이기도 하다. 그동안 익숙해진 샤모니를 둘러싼 연봉들 이름을 외우며 알프스 산맥을 관통하는 11,611m의 몽블랑 터널을 지나니 이태리 땅이란다. 프랑스와 달리 돌 지붕을 얹은 마을집들이 뽀얀 빙하 녹은 물로 이루어진 계곡을 따라 펼쳐진다. 역시나 집집마다 테라스의 꽃 화분 장식이 예쁘다. 잠시 후 약간 언덕위에 있는 센트랄레(Centrale) 호텔에 도착한다. 전망이 매우 좋다. 샤모니에서 보이던 삼봉의 뒷모습이, 그리고 에귀디미디, 몽블랑의 뒷모습이 위용을 자랑하며 전경을 이룬다. 내일은 저 봉우리 등정이란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이 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것 같다. 좁지만 꽃들로 장식된 노천카페들과 상점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저녁식사 메뉴로는 피자와 스파게티, 여러 종류, 여러 판의 피자가 너무 짜서 아쉬움과 함께 남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염도와는 다르다고 가이드는 연거푸 말하지만 식습관이란 무서운 것, 점점 싱겁게 먹는 우리 문화가 정착돼가는 중이다. 아무튼 넘치고 버려지는 값 비싼 음식에 대한 일행의 아쉬움은 크다. 식후 주어진 자유시간, 관광객으로 복잡한 도심을 거쳐 수도의 외곽과 같은 한산한 거리를 혼자서 산책한다. 하루 묵고 떠날 곳이지만 노천카페나 음식점 그리고 주택이나 낮은 아파트들이 모두 꽃으로 장식된 이 도시가 예쁘고 한산하기도 하여 마냥 산책한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별로 어둡지 않고, 근처 작은 무대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기에 살며시 문을 밀고 나가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연주하는 걸 감상했다. 보컬을 겸한 바이올린 연주자, 콘트라베이스, 드럼 정도의 간소한 공연이다. 주말이라서 관광객이나 시민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연 것이 아닌가 싶다.
제4일차 <6월 30일, 일요일> 몽블랑의 장관과 야생화의 물결 그리고 극기 훈련
아침 일찍 깨어나 베란다에 나서니 도시의 정경과 이 도시를 이루는 주변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여 따로 산책을 나서지는 않았다. 어제와는 다른 산들의 새벽 얼굴을 본다. 아이비제라늄(Ivyleaved geranium) 화분 너머로 뵈는 몽블랑이 묵직하다. 부지런한 일행이 벌써 산책을 마쳤는지 저 아래 걸어오고 있다. 3층인 이곳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다가 아침인사를 나눈다. 오늘의 일정인 몽블랑 꾸르마유르 트레킹은 포장도로 1시간 노선버스 이용 + 산행 6시간이란다. 꾸르마유르→발 베니(베니 계곡) 버스종점(1667m) 출발→걷기→콤발 호수→발 베니 언덕→목장 돌집(잠시 휴식)→꽃밭에 싸인 물가에서 커피타임→오늘 트레킹코스의 정상에서 점심(라면, 햇반 등)→쉐크르이 호수→메종비엘 산장(스키장)→꾸르마유르로 하산하는 코스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 동안 따가운 햇볕 속에서도 계곡 물소리가 곁에 있어주어 좋았고, 길가에 끊이지 않는 야생화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콤발호수의 파란 물이 반가웠고, 야생화 곁에 앉아 커피를 마심이 호젓했으며, 정상에서의 점심은 맛있었다. 고도 1,659m 지점인 갈림길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 꼼발호수 근처에서 방향을 바꿔 디 베지계곡(2,322m)을 지나며 몽블랑을 왼쪽에 두고 걷는 산길, 무엇보다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몽블랑의 거대함은 끝나질 않았고, 사이사이 빙하의 흔적은 거대했다. 브루자 빙하, 프레니 방하를 비롯하여 좌우로 미아지 빙하, 브렌바 빙하 등이 있고, 몽블랑 앞 거인의 이빨 같은 Dent du Geant 봉우리는 날카로움으로 몽블랑을 받쳐주고 있다. 샤모니 쪽 몽블랑(4807m) 앞에 우뚝 솟은 산은 몽블랑 꾸르마유르(Mt.Blanc De Courmayer, 4,748m) 일명 ‘몬테(산) 비앙코(흰색)’라 하고-헌데 설산이 아니었다- 그 앞의 높은 봉우리는 ‘퓨트레이(Peuterey, 4,108m)’라고 한다. 앞을 흐르는 두 계곡 중 우리가 지금껏 따라온 곳이 발베니(베니 계곡)이고, 우측으로 흐르는 계곡이 발페레(페레 계곡)이다. 끝 모르게 펼쳐진 야생화 천국에 넘실대는 야생화의 물결은 환상적이었다. 뒹굴고 싶었고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커다란 호수를 만나고 하얀 빙하 위를 걸으며 거대하고 소중한 자연 앞에 인간이 겸허해져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빙하물로 젖은 좁고 가파른 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손에 땀을 쥐기도 하고, 녹고 있는 빙하 한 자락을 밟으며 한없이 빠져드는 건 아닌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오랜 시간 몽블랑과 그 연봉들을 거쳐온 후 만나게 되는 메종비엘(Rif Maison Vielle) 산장에서 맥주, 콜라 등 음료수를 마시고 하산하기 시작한다. 무지 덥다. 4시까지는 호텔에 도착해야 하니 좀 서둘러 걸어야 한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오르는 거보다 내려가는 데 자신이 있던 터라 부지런히 내달았다. 산속그늘을 간간이 만나기도 하는데 바람 한 점 없어 쉴 마음도 못 내고,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아낼 새도 없이 먼지가 폴폴 나는 경사 심한 Z형의 좁디좁은 도로를 계속 질주한다. 가다보니 두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후발주자의 선두에 선 나는 선두구릅의 마지막 사람 머리꼭지가 보이지 않으니, 나무 그늘을 만나도 쉬지 못하고 쏜살같이 달려가야 한다. 여기가 비록 야생화 지역은 아니더라도 자연감상하며 산행을 하는 게 도리일 텐데, 극기 훈련이나 승부를 가리는 경주에 참여한 사람들 같다고나 할까. 다리 힘이 서서히 빠지는 걸 감지하며 스틱에 의지하지만 걸음을 내딛기가 힘들어 일행을 모두 앞세운다. 내 뒤엔 오직 가이드 이진기님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난 이 길만 따라가면 될 테니 앞서가서 일정을 진행하라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그는 말한다. “산행에서의 룰입니다.”라고. 그리고는 묵묵히 내 뒤를 지키며 따라온다. 만약 이 스틱이 없으면 탈싹 주저앉고 말 것 같다. 기술이 아니라 체력의 한계다. 모든 힘이 다 소진됐다는 신호탄이다. 스틱에 의존하여 한 발 한 발 밀고 간다. 힘을 모은다. 아니 정신을 모은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개인 등반이 아니다. 단체의 일원으로 나는 여기에 있다. 휘청휘청 더 이상 못 걸을 것 같아도 끝까지 정신줄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는 붙잡고 버티고 있다. 내 이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올 가이드가 의식되어 더욱 힘이 든다. 좀 쉬어가자고 한다. 4시까지 가야하니 쉴 새가 없다고 나는 버틴다. 밀어내는 걸음에도 한계를 느낄 즈음 나는 나무둥치에 앉아 2~3분 쉬었을 게다. 그리고 그가 주는 포도당 알약 두 개를 먹고 걸음을 내딛는다. 평지에 이르러 좀 걸음이 나아진다. 힘들지만 스틱에 의존, 있는 힘을 다 짜내서 걸음을 옮긴다. 무지 힘들게 당도한 호텔, 가이드 이진기님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생애 큰 경험의 날이었다.
4시 이후 호텔을 출발한다. 가이드는 일행 모두에게 포도당 알약을 두 알씩 나눠준다. 엊그제 지나온 그 11,611m의 긴 터널을 통과해 샤모니로 귀환, 그간 익숙해진 거리와 산들을 다시 만나니 친정에 온 듯 반갑다. 여전히 샤모니의 하늘을 수놓고 있는 패러글라이더의 향연을 보면서 샤모니 발므 초입의 샬레앙팡(Chalet Alpin) 산장으로 향한다. 내일의 원활한 일정을 위해 스위스에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해 오늘 그곳에서 묶기로 한 것이다. 2층 침대에 5인실인 방으로 배정되었다. 손님이 많아 식당에서 한참 기다려 받은 저녁 메뉴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옛날 시골에서 이스트 대신 술을 넣어 만든 빵을 연상시키는, 콩이 든 케익은 제법 먹을 만했다.
일행 한 명과 예쁜 동네 산책길에 나선다. 산장 뒤 경사진 너른 초원이 가슴 트이게 하고 그 위로 높은 봉우리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다. 오래된 마을 집들은 저마다 화분장식으로 멋스럽고 자그마한 교회(성당)도 보인다. 산비탈엔 소들의 워낭소리가 조용한 산간마을의 저녁공기를 흔든다. 성당 옆 꽃 장식을 한 집은 사제들의 거처인 것 같고, 같은 골목 유난히 아기자기 꾸민 집 벽면엔 한 신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간헐적인 빗발에 야생화 밭을 뒤로하고 산장으로 돌아온다.
제5일차 <7월 1일, 월요일> 알프스 3대 미봉 마테호른과의 감동적인 만남
산장의 아침, 정 많고 부지런한 선배님들이 방에서 끓여준 간이식의 식사(라면+햇반+누룽지)를 하고 식당에 가보니 산장의 조식이 양호하다. 이런 정도라면 간이식을 안 해도 됐을 것을…… 현지적응형인 나는 웬만하면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뒤에 짐을 싣고 일행을 태운 봉고차는 산장을 출발한다. 기사 옆에 앉은 가이드의 안내가 시작된다. 이 동네 뒷산 에귀베르트(4200m)를 오른 초동 산악인 ‘미셸끄로’의 집을 소개하는데 들어보니 엊저녁에 본 장식이 많던 그 집인가 싶다. 예쁜 꽃장식과 엽서 등으로 그의 손녀가 관리해오고 있다 한다. 어린 날 그는 이 지역에 많은 수정을 채취하다가 산악인이 된 모양이다. 1800년대 언젠가 스키점프도 하고, 패러글라이더를 만들기도 한 ‘부와뱅’ 역시 이곳 출신이라 한다. 샤모니에서 본 삼봉의 머리꼭지도 보인다. 곰이 살던 마을이라는 ‘발로선’도 지나고, 프랑스, 스위스 기차의 분기점도 지나간다. 8시 반쯤 두 나라 국경을 지나며, 스위스 GDP가 8만불, 룩셈부르크가 9만불이라고 알려준다. 스위스(Switzerland)의 정식명칭은 스위스 연방(Swiss Confederation)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의 능선에 걸쳐있고 고원과 깊은 계곡, 호수가 많다. 이로 인해 관광지가 발달, 세계 최고의 관광산업국가로 평가받는다. 꼴데보클라(보클라 고개)를 지나 차는 우리를 마테호른 터미널에 내려놓는다. 짐칸에 배낭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박대장은 그 차를 도로 타고 산장으로 떠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얼마나 고생을 할까 생각하니 안쓰럽다. 일행은 체르마트행 기차를 탄다. 얼마간 달리다가 Brig 이정표가 보여 반가웠다. 두 달 전 환상의 스위스 빙하특급열차를 타고 오다가 내린 지역이다. 10시20분쯤 브라이트호른 4봉의 설산이 눈에 들어온다. 잦은 환승을 하며 드디어 체르마트(Zermatt, 1,626m)에 당도한다. 알프스 관광의 정점이자 가장 대표적인 여행지인 체르마트는 환경오염을 염려해 휘발유 차량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일행은 봉고 같이 생긴 택시 뒤편에 짐을 싣고, 호텔이 있는 비탈진 마을 앞에서 하차한다. 가방은 호텔측 짐수레로 산장까지 운반, 우린 배낭을 메고 비탈길을 오른다. 숙소인 마띠올(Matthiol Serviced Appartements) 측면으로 높다란 마테호른이 보인다. 방을 배정받고 짐을 내린 뒤 시내로 걸어 내려간다. 스위스 붉은 깃발과 멋들어진 가로등, 그리고 꽃들로 장식된 고색창연한 전통가옥 사이로 마테호른의 위용이 드러난다. 마테호른 머리꼭지에서 생성된 것인 듯 구름 한 자락이 파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봉화를 올리고 있다는 멋진 표현이 흘러나온다. 오늘은 체르마트에서 마테호른(Matterhorn, 4,478m)을 조망하기 위해 슈바르츠체(Schwarzsee, 2,583m)호수까지 등정하는 날이다. 전망 좋은 마테호른 무릎 아래까지 가는 거다. 케이블카 승차장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두 번 환승하며 마테호른 북쪽 벽으로 접근, 마테호른 글라시어 파라다이스 전망대(3,883m)로 이동한다. 드디어 마테호른이 눈앞으로 다가든다. 아! 그냥 3대 미봉이 아니다. 날카로운 두상, 날렵한 몸매, 둥그스름한 몽블랑과는 아주 다른 이미지다. 높다란 그의 기상이 마음에 와 닿는다. 빗방울이 약간 비친다. 봉우리 아래 마테호른 그림자를 안고 있는 작은 호수가 있어 호숫가를 따라 걸어본다. 저만치 작은 경당이 하나 있다. 야생화 찍기에 탐닉한 이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그 사이사이 야생화 밭이나 호수를 배경으로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좁은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작은 연못 하나가 더 있다.
놀라운 것은 호수 앞 둔덕에 아기예수를 품에 안고 다소곳이 서있는 목각의 마리아상이 있다는 거다. 나무 조각인데도 마리아의 더할 수 없는 인자함이 묻어나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조각품의 방향과 고개를 갸웃한 모습이 마테호른을 꼭 닮았다는 점이다. 염회장님의 위대한(?) 발견이다.
노란 벽에 배열된 빨간 색 덧창문, 그 앞에 빨간 별들이 그려진 깃발과 빨간 파라솔의 물결, 멋진 호텔 테라스에 앉아 마테호른의 뾰족한 이마를 바라본다. 그 날카로움 속에 의연함이, 비스듬한 얼굴에 세상을 내려다보는 연민이 서려있는 것 같아 마음이 저리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연봉들 사이에 만년설 덮인 ‘작은 마테호른’과 브라이트호른(4,164m) 4형제의 파노라마가 시선을 끈다. 우리의 여정이 아닌 곳으로 연신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올라왔으니 내려가야 하는 것은 정한 이치,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비탈진 길을 걷는다. 내려오던 중 가이드는 일행을 머물게 하더니 가지고 온 사탕과 작은 초콜릿을 서로 나누며 당 섭취를 하라고 한다. 그리고는 등하산시의 스틱사용법을 강의한다. 좀 내려오다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교회라는 ‘Mary of the Snow’를 본다. 야생화를 보며 얼마쯤 걸어 내려오다가 트로크너슈테그(2,927m)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 체르마트 시내에 당도한다. 고색스런 세인트 모리셔스 교구 성당 앞마당에서는 빨간 제복의 시니어 5명이 기다란 관악기 알펜호른을 연주하고 있다. 바로 옆엔 유리집으로 된 Matterhorn Museum이 있다.
산을 향해 갈 때도 올 때도 자꾸만 발길을 묶고 셔터를 누르게 하던 체르마트 전통가옥 휘테(Hutte)가 너무도 인상적이다. 가다가 돌아서고 돌아가서 셔터 한 번 누르기를 수없이 한다. 고전을 지키는 이들의 정서가 아름답게 밀려오고 본받고 싶다. 저녁식사를 하러 시내로 또 내려가는가 했는데 숙소에서 조금 걸어나오니 Holiday zermatt 호텔에 정갈하고 멋진 식당이 있다. 외양은 번듯한데 일손이 없어 오래오래 기다린 끝에 세련된 만찬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눈 덮인 마테호른 사진을 보면서……
제6일차 <7월 2일, 화요일> 거대한 빙하, 빙하, 빙하와 만나는 감격
오늘의 여정은 체르마트에서 빨간색 산악열차를 타고 3089m에 위치한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전망대에 올라가 어제 슈바르츠체 호수에서 올려다본 마테호른의 동쪽 벽을 조망하고 몬테로사(4,634m)로 이어지는 설산 파노라마를 감상하게 된다. 요즘 늘 보는 경치지만 시시로 다가드는 경관을 보고 싶어 좌우 창문을 향한 눈 운동이 바쁘다. 더러는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창틀과 승객의 머리에 가리고 만다. 기차를 타고 산으로 오른다는 경이감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서도 기차의 진행방향이 바뀔 때마다 무성한 전나무와 잣나무 숲 사이로 다각도의 마테호른 모습을 스캔하면서, 그림 같은 그 이웃 봉우리들과 빙하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네 번째 역 즉 종점 한 정거장 전인 로텐보덴(Rotenboden, 2,815m)역에 하차한다. 엄청난 빙하군이 눈앞에 펼쳐진다. 만년설 덮인 산들과 빙하와 눈높이를 같이하니 동서남북 어디를 먼저 바라봐야 할지 마구 설렌다. 우리가 방금 올라온 기찻길이 굽이굽이 휘어지고 멀리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빨간 기차가 그 굽이길을 돌고 있다. 이곳 산악열차는 오직 전력을 이용해 작동하는 최초의 톱니궤도열차로 친환경적이다. 기찻길 옆에 동그마니 나붙어 있는 시계가 10시 35분을 가리키고 있다. 표를 내고 연봉들이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다. 작은 마테호른과 브라이트호른 4봉이 장엄한 위용을 드러내고 그 사이사이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빙하가 엄청나다.
붉은 색조를 띈 바위들 사이로 좀 떨어진 곳에 마테호른이 고개를 내미는가 싶은데 이마가 구름에 젖어있다. 오늘은 얼굴을 안 보여주려나? 허리께에 흰 띠를 두른 먼 마테호른의 상체를 품에 안고 있는 리펠제 호수(Riffelsee)가 저 아래 나타난다. 언덕을 뛰듯이 내려간다. 와! 아름답다. 대칭의 그림! 맑은 호수 물속에 좌우 산과 마테호른, 하늘과 구름 그리고 일행의 그림자가 있다. 이보다 아름다운 그림이 또 있을까? 이 풍광은 렌즈 속에 또 어떻게 담겨졌을까 궁금하여 염회장님의 사진을 본다. 신의 솜씨다. 물속엔 허랑한 내 마음도 서려 있다. 물속 마테호른을 만나며 호숫가를 한 바퀴 돌고 언덕을 올라와 그 감격을 안은 채 다시 기차를 타고 종점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역(2,815m)으로 간다. 자유시간이 주어져 전망대로 걸어서 오른다. 전망대는 저 높이 두 원기둥 위에 돔이 올라앉은 형상이다. 우측으로 전개되는 웅장한 규모의 빙하들 앞에서 정신이 없다. 아득해진다. 여러 개의 빙하가 흘러내리다 굳은 흔적이 마치 짐승의 등뼈 같다고 해야 할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롭게 골을 이루며 묵중함이 느껴진다. 저 빙하는 언제부터 있어온 걸까? 얼마나 오랜 세월 흐르고 흐르다 이렇게 광장처럼 넓어지고 석회석처럼 굳어진 걸까? 엄청난 빙하 앞에서 나는 그만 주눅이 든다. 맨 처음 물 위에 떠 있는 무한대의 운동장 같은 남미 칠레의 모레노 빙하를 보았을 때의 감격은 어느 것으로도 상치될 수 없으나, 오늘 만나는 이 빙하도 형태나 규모면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자연 앞에서 더없이 왜소해지는 나를 느낀다. 계속 이어지는 거대한 빙하에 홀린 듯 눈길을 떼지 못하며 좀더 올라가 찍사의 명령대로 흐트러진 큰 바위들에 걸터앉아 포즈를 취한다. 박대장은 다르다. 그 포스가 나타난다. 나도 그의 흉내를 내보며 함께 웃는다. 그 높은 곳에 십자가와 자그마한 종을 지붕 위에 이고 있는 작은 성당이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배려일까? 개방된 문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보니 누군지는 모르나 단아한 목각에 성상 세 분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몇 개의 붉은 초가 불을 밝히고 있다. 나는 성현이 자리한 곳이면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고개 숙여 예를 올린다.
내려오면서도 잠시도 빙하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굽이쳐 내려오던 하얀 물길이 한 순간 그대로 멈춘 것처럼 골골이 주름지고 군데군데 패이고…… 저 패인 곳에 한 발 내디디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생각에 움찔한다. 언젠가는 꿈틀꿈틀 다시 살아서 일어날 어떤 생명체의 동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르고 내리면서 수없이 바라본 마테호른, 오늘은 하얀 구름모자 푹 눌러쓰고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제 그 위용을 만났으니 다행으로 여기자. 리펠베르그역을 지나 알프베르그역까지 걸어서 내려간다. 얼굴만 검은 산양들이 무리지어 노닐고 있다. 우뚝 솟은 마테호른과 고만고만하게 이어지는 희끗희끗 눈 덮인 봉우리들, 그 아래 기찻길 따라 연두 빛 섞인 흙길을 스틱을 짚으며 열 지어 걸어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본다. 자연을 음미하고 경외하며 더불어 호흡하는 구도의 행렬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더위에 지쳐갈 즈음 시원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데 비교적 양과 맛이 괜찮다.
식사를 마치고 자잘한 나무와 야생화들이 누워있는 초원을 걷는다. 아까보다는 녹색이 짙어 상쾌함을 준다. 샘물도 졸졸 흐른다. 노란색, 흰색, 붉은색, 보라색까지 갖가지 야생화가 얼굴을 내민다. 더러는 발치에 누운 몽글몽글 이끼 같은 이파리 위로 납작 엎드려 피어있는 ‘북극이끼장구채’라든가? 뒤늦게 핀 연노랑 할미꽃?이 우아하여 일행의 발길을 붙잡는다.
위로는 빨간 산악열차 지나는 기다란 터널이 인상적이고, 구불구불 가늘게 이어지는 산길이 닿는 저 아래쯤엔 다닥다닥 이마를 맞댄 몇 채의 산간마을이 정겹다. 어느덧 평평한 길이 나타나고 길을 따라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고사목들이 연출해내는 해괴한 모양을 감상하며 걷노라니 어디쯤에선 늙은 소나무 옹이를 파내고 그 안에 우아한 관을 쓴 여인상을 모시고 주변을 온통 꽃으로 장식한 특이한 곳도 만난다. 어느 역에선가 시원한 바람 쐬며 환담을 나누다가 열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귀환한다. 어제의 그 거리를 또 걷는다. 스위스 전통가옥 휘테(Hutte)를 자꾸 보고 싶다. 통나무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를 엮어놓은 모습이 못 하나 사용하지 않는 우리 한옥과 닮아있다. 여긴 짙은 갈색 나무를 사용하는 게 다르다. 눈이 많이 쌓이는 겨울을 대비해 바닥을 높이고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작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돌판을 얹고 그 위에 나무집을 얹었다. 지붕도 돌판으로 되어 있다. 석축에도 작은 나무문이 있으며, 석축과 작은 돌기둥 사이엔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작은 창틀엔 영락없이 빨간 아이비제라늄 등의 나무화분이 놓여 있다. 1715년에 지어졌다는 안내판이 벽에 붙어있다. 300년이 넘었다는 얘기, 어떻게 오늘까지 보존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시내 복판에 여러 채의 구옥들이 손상 없이 보존돼 있는 걸 보며 그들의 자연과 전통 사랑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시내구경하라고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별로 돌아볼 곳도 없어 잠시 소일하다가 숙소로 향한다. 어제 오늘 오르내려서 익숙한 풍경이다. 멋진 집들의 정원에서 만나는 보랏빛 솔잎도라지, 흰색의 샤스타데이지, 자주 보라색의 루피너스, 쫑긋쫑긋 입벌린 쌍둥이 제비들처럼 하늘 향해 층층이 피워올린 참좁쌀풀꽃 -꽃이름은 염회장님 사진에서 컨닝- 특히 눈에 많이 띄는 아이비제라늄과 하얀 하설초(snow-in-summer)가 인상적이다. 숙소 가까이 노란 꽃들을 달고 있는 나무를 보고는 웬 아카시아 했는데 알고 보니 ‘금사슬나무’라고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힘차게 흘러내려가는 시가지의 뽀얀 물길-빙하 녹은 물-을 따라 모임장소인 성당으로 간다. 저녁은 중국식이라 하니 좀 먹을 만하겠지 기대가 된다. 그러나 기대는 저만치 물 건너가고 그저 한때 해결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기로 한다. 오늘 못 먹으면 내일이 있고, 내일이 시원찮으면 모레가 있다. 한 때 배고픔을 면하는게 식사다.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말기로 하자. 여행 중엔 별 생각 없이 포식을 하게 되니 자제의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7일차 <7월 3일, 수요일> 그린델발트 피르스트(First)에서 본 알프스의 젖은 얼굴
엊저녁에 비가 와서 마테호른의 일출의 반영을 못 본 게 아쉽다. 라면+햇반+누룽지로 아침을 해결하고, 7시 짐을 끌고 내려와 두 대의 택시로 체르마트역역까지 이동한다. 한 대당 6만 원 가량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7시37분 빨간색 기차를 타고 출발, 인터라켄(Interlaken)을 거쳐 그린델발트(Grindelwald)로 간다. 출발하면서 Chur역과 Brig역 사이를 오가는 ‘스위스빙하특급열차’를 보니 반갑다. 바로 두 달 전 저 차를 타고 알프스 설원을 달릴 때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되살아나며 그리워진다. 다시 타보고 싶은 열차여, 다시 보고픈 설원이여! Visp역까지는 빙하 녹은 뽀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는 기찻길과 주변 풍광이 매우 조화로웠다. 우거진 나무와 바위와 그 곁을 따라 흐르는 물, 피어오르는 물안개, 휘돌아 달려가는 기차의 빨간 머리, 연두 빛 초원과 다문다문 보이는 고가들의 운치…… 산등성이마다 스위스 샬레가옥들이 펼쳐지는 풍경화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8:48 Visp역 도착, 4번 플랫폼으로 달려가 8:57 환승, 좀 지나 터널 속으로 이어진다. 얼마나 긴 터널인가? 9:15쯤에야 빠져나온다. 9:24 Spiez역 하차, 10:30 인터라켄 West역에 도착한다. 환승까지는 여유시간이 많아 주변산책에 나선다.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비탈진 포도밭 아래로 붉은색의 집들과 교회, 그리고 작은 포구엔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앞에 너른 강인지 호수인지 펼쳐져 있으며 맞은편엔 비에 젖어 흐릿한 산들이 둘러져 있다. 포구까지 내려가고 싶었으나 나뭇가지 늘어진 사이로 운치 있게 펼쳐진 전망이 좋아 작은 공원에 한참 머물러 감상했다. 카메라 분실한 일행이 있어 신고하느라 이곳에 혼자 남고, 나머지 일행은 11:25 인터라켄 Ost역에 도착하여 기다리기로 한다. 이래저래 시간지체로 점심은 가이드가 현지에서 급히 구입한 샌드위치로 해결한다. 역시나 짜서 점심은 물 건너간다. 돌아온 일행과 합류하여 산악열차를 바꿔 타고 그린델발트역에서 하차한다. 그린델발트는 스위스 중부 베른주 인터라켄에 있는 산악마을로 해발 1,034m의 고원에 있으며, 아이거봉, 슈레크호른, 베터호른과 같은 고봉을 등반하기 위한 거점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짐을 끌고 한참을 걸어 숙소 다운타운롯지(Downtown Lodge)에 당도, 여장을 푼다. 이 롯지는 규모나 짜임새면에서나 세련되지는 못하다. 크기와 실용 면에서 각기 다른 방의 사정으로 일행의 맘에 들게 배치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나는 좁고 창문이 높은 좀 불편한 방에 혼자 머물기로 자청한다.
오늘 오후 일정은 융프라우(Jungfrau), 아이거(Eiger)를 조망할 수 있는 그린델발트의 피르스트(First, 2,168m) 트레킹이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Top of the adbenture’라 쓰인 걸 보니 뭔가 기대가 크다. 케이블카를 타고 피르스트로 이동한다. 정수리에 백설을 이고 있는 Eiger가 눈에 들어온다(롯지에서 보인 건 아이거의 뒷모습?). 구름 걸친 산에 감탄이 쏟아진다. 아이거(3,970m)는 알프스 산맥의 고봉으로 1858년 영국인 바링턴이 처음으로 등정했으며 근처에 아이거요흐, 아이거빙하가 있다. 융프라우와 아이거 사이에 묀히(4,099m) 봉우리가 “나 여기 있소.”하고 뾰족한 고개를 내민다. 잠시 구름이 걷히자 아이거, 묀히, 슈렉호른 등 높은 봉우리들이 뚜렷이 드러난다.
아이거의 허리에 잿빛 구름이 또 맴돈다. 야생화 가득한 산길을 따라 걷는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양쪽 둔덕엔 연두 빛 이끼와 바위, 녹색의 키 작은 나무들이 조화롭다. 그 사이사이로 빙하 녹은 물이 굵게 혹은 가늘게 뱀처럼 휘어지며 하얀 계곡을 이룬다. 저 멀리 엎드린 산마을들이 그림처럼 다소곳하다.
시야를 가리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우산을 받쳐 들고 비속을 걷는데 높은 산 풀밭에 고개를 박고 하늘로 융프라우를 박차고 있는 어떤 젊음을 만나게 된다. 신기함으로 바라보다가 한 컷 찍는다. 세상엔 별 취미도 다 있구나 싶었다. 아니 그 도전은 용기요, 젊음의 특권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구름이 들락거리더니 갑자기 동글동글 하얀 입자의 우박이 쏟아진다. 예기치 않은 일이다. 연이어 쏟아지는 굵은 우박, 손에 받아보면 작은 돌멩이 같다. 맨 머리로 맞는다면 깨질 것 같은 우박의 위세, 처음 겪어보는 신기함이다. 땅바닥이 하얘진다 싶을 즈음 비로 변하여 억수같이 퍼붓는다. 질펀해진 물길을 걷는 운동화는 흠뻑 젖고 바람을 몰고오는 빗줄기는 우산으론 감당이 안 된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어느 건물로 우선 비를 피한다. 친절한 찍사님은 또 은혜를 베푼다. 극구 사양했지만 자신은 더 좋은 우비가 있다며 꺼내 입고는 다이소에서 마련한 거라며 파란 점무늬의 우비를 내게 건네준다. 고마운 분, 받아서 입는다.
큰 바위 중턱을 따라 시작하여 공중으로 이어 설치한 클리프 워크(일종의 잔도)에서 아이거 봉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두른다. 야생화 은은한 연두 빛 초원 위, 비 그친 하늘에 까만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내 카메라에 잡힌다. 개울을 따라 가파른 언덕에 점점이 박혀있는 한가로운 소들이 케이블카 밑에서 여유롭다. 해가 반짝 난다. 그린델발트 시내의 어느 식당에서 현지식의 저녁식사를 한 후 일행 한 명과 산책을 한다. 마침 이 지역 축제의 날이어서 크지 않은 도시의 거리 한 가득 음악이 흐른다. 네 명의 연주와 노래에 맞춰 흥겨워하는 관중들 대부분이 여행객이 아닌가 싶다. 차량 통제로 거리까지 나온 노천카페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조촐한 축제를 보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소득이다.
제8일차 <7월 4일, 목요일> 융프라우(Jungfrau)를 오르내리며 만나는 감격의 순간들
롯지의 조식이 간편하고 좋다. 간단한 빵과 치즈 그리고 커피 정도다. 오늘은 인터라켄 융프라우(Jungfrau, 4,158m) 등정일이다. 융프라우요흐(joch, 3,454m)의 동굴도시도 탐방하게 된다. 기차를 타러 그린델발트역으로 간다. 이 도시의 특이한 점은 거리에 신호등이 없다는 점이다. 신호등 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인터라켄은 툰호(湖)와 브리엔츠호 사이에 위치하며, ‘호수의 사이’라는 뜻이다 흑류트시네강 상류의 높이 1,000m의 그린델발트에 등산전차가 통과하고, 다시 그 곳에서 3,474m의 융프라우요흐에 등산전철이 이어진다. 1896∼1912년 건설된 융프라우 철도는 최대경사가 25°이며, 기점역(基點驛)인 클라이네샤이덱(높이 2,061m)에서 약 2km는 완만한 초원이지만, 나머지 7km는 모두 아이거와 묀히의 산허리를 뚫은 터널이다. 50분 정도 소요된다. 1811년 마이어 형제가 발레 쪽에서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1865년 영국의 G.영과 H.B.조지가 인터라켄 쪽에서, 1927년에는 2명의 가이드가 남쪽에서 각각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융프라우(4,158m)는 베른알프스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북벽(北壁)에는 중생대 쥐라기의 석회암이 노출되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인 융프라우요흐(3,454m)역이 있으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산이 있다. 융프라우란 ‘처녀’라는 뜻이며, 인터라켄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명명된 것이라 한다. 9:18 기차 승차→9:32 Brandeg→9:35 Alpiglen→9:36 Kleine→9:49 Soheidegg→ 10:00 환승하여→10:8 Eigergletscher→10:21 Eismeer에서 5분간 정차, 거대한 빙하조각들을 감상→10:35 ‘Top of Urop’ Jungfraujoch에 도착하여 설원으로 나간다. 만년설 덮인 설원의 꼭지점을 만나는 이 감격, 무어라 표현할 말이 막힌다.
눈썰매타기를 한다. 경사가 완만하여 스릴은 없지만 알프스의 눈썰매 체험이라는 데 의미를 둔다. 머리 위로는 짚라인을 타는 사람들의 포효가 울린다. 한 나이라도 젊었으면 나도 저 허공을 날으련만…… 오래 전 언젠가 중국 운남성 둔덕에서 호수 위를 가르며 내려오는 짚라인을 탔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유시간이 주어져 사진을 찍고 이어 굴속으로 들어가 사진전시와 얼음동굴을 감상한다. 15년 전인가?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땐 원형의 고층 고속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 그 높은 곳에 설원이 펼쳐져 있어 신천지를 만난 감격에 환호작약했었지. 또한 동굴 속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면서도 차가움 속에 진기한 얼음조각을 신기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통유리창으로 된 스핑크스 전망대에서의 조망을 위한 대열의 기다림이 너무 길어 포기하고, 12시20분 제공되는 컵라면으로 중식을 하고는 13시 하산열차를 탄다. 우측으로 내다뵈는 산과 산 사이 저 아래 길게 깔려있는 빙하-대부분의 빙하는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구조였는데-가 혹시 알레치빙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14시25분 산악열차로 아이거글래쳐(2,320m)로 이동하여 Eiger Trail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이거글레쳐→알피글렌(1615m)→아이거북벽을 보며 아래 펼쳐진 목가적인 그린델발트 마을 풍광과 건너편 피르스트 언덕을 조망하게 된다. 가이드가 처음 안내한 작은 호수, 작지만 그 호수는 아이거나 융프라우의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어 볼만하다고 힘주어 말했는데 막상 와보니 공사중으로 전과 같지 않아 실망하는 눈치다.
그래도 작은 호수에 그 큰 산을 품고 있음이 놀랍다. 산 갈피갈피 덮인 눈과 빙하 그리고 파란 하늘과 구름을 그대로 안고 있는 호수, 지나는 사람들 그림자마저 한결같이 받아들이는 호수, 지상과 물속, 하나이되 하나가 아닌 두 자연을 접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가이드는 커피를 끓여 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마시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오늘은 유난히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흰 구름이 많다. 3,000m 야생화 군락,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생화를 감상하며 마냥 걷는다. 우측으로 따라오는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의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어디쯤인가, 좌우 대칭의 경사를 이루는 녹색 산이 넓게 펼쳐지고, 발아래 야생화 들판과 눈 덮인 높은 산들의 얼굴이 마주하는 곳, 그 절경 앞에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오래 머물고 있노라니 큰 사진기 들고 있던 일행이 한 컷 찍어준다. 무심히 걷고 또 걷다가 만난 길가 작은 호수엔 몽실몽실 피어난 하얀 코튼플라워(목화꽃)-우리나라 목화보다는 꽃이 작아 앙증맞다-가 푸르고 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계속되는 야생화 밭 사이에 납죽 엎드린 외딴 시골집, 가느다란 길을 사이에 두고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유난히 고운 꽃밭이 좌우로 전개된다. 산기슭의 목초지에 가도 가도 끊이지 않는, 종류와 색깔을 달리하는 변화무쌍한 야생화의 물결, 와! 와!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삐죽삐죽 보랏빛 범꼬리 군락이 온산을 덮은 곳도 지난다. 주목인지 측백나무인지 녹색 짙은 나무들이 간간이 줄지어 서서 야생화 품고 있는 연두 빛 야산들과 어울려 조화롭다. 어디쯤에선가 박대장은 아예 벌렁 누워 꽃 속에 묻혀버린다. 일행 한 분이 셔터를 누른다. 절기가 바뀌어도 지지 않는 꽃으로 그의 곁에 남을 것이다. 온통 어우러진 꽃밭 어딘가에 숨어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들려온다. 고즈넉한 하산길에 유일한 음악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구름 허리에 두른 아이거의 웅혼한 석벽을 아쉬움으로 작별한다. 경사를 이룬 너른 들에 자유로이 노니는 소들의 워낭소리를 천상의 음악으로 들으며 야생화에 시선을 빼앗긴 채 걷고 또 걷는다. 걷는 줄 모르고 걸어가는 이 동작, 이 순간순간 무의식의 흐름을 무어라고 이를까, 선인들은? 나는 그저 잠시 몰아의 순간이었다고 자각할 뿐인데…… 자연에 취해 마냥 걷고 있는데 빗방울이 듣는다. 마침 휴게소를 만나 비도 피할 겸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저 아래로 기차가 지나가고 풀 뜯는 소들과 전원주택이 그림 같다. 열차는 연신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사과와 차를 마시며 망중한을 누려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야생화 사진을 찍으며 하산한다. 충분한 휴식 후 열차에 오른다. 16:47 출발→16:52 Brandegg→17:05 Grund→17:12 Grindelwald에 도착하여 18시 반부터 중국식의 석식을 한다. 식후 일행 몇 명과 아랫마을로 산책을 나선다. 도로 양편으로 조성된 직선의 작은 도시, 아랫마을 샬레가옥이 궁금했다. 아기자기 많은 소품들을 모아 장식한 집이 예쁘고 신기하여 몰래 사진을 찍고, 앞쪽으로 돌아 가보니 가족인 듯 세 사람이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격조 있게 사는 이 사람들이 살짝 부러워진다. 높은 산 아래 계곡물은 그치지 않고 흐르며, 푸른 숲과 초원이 어우러진 이런 곳의 삶은 어떤 것일까?
제9일차 <7월 5일, 금요일> 하더 쿨름 등정과 브리엔츠 호수 유람 오늘은 인터라켄 하더 쿨름(Harder_kulm)에 오르는 날이다. 인터라켄 시내와 툰호수(Thunersee), 브리엔츠호수(Brienzersee), 건너편 융프라우, 아이거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8시 좁고 불편했지만 이틀이나 정들었던 다운타운롯지를 떠나 그린델발트역에서 기차를 탄다. 8:19 출발→8:24 Schwend→8:27 Burg lauenen→8:31 Lutschental→8:42 Zweilutschimen→8:48 Wilderswil→8:53 Interlaken Ost에 도착, 환승하여 9:05 Interlaken West에서 하차한다. 우선 짐을 숙소에 맡겨놓고 Harder Kulm으로 가기 위해 Ost역으로 다시 걸어서 간다. 거리엔 세일을 하는 많은 상점들과 카페와 꽃들이 널려 있어 볼거리가 많은데, 대단히 넓은 잔디공원이 한동안 이어져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공원 뒤편으로 솟아있는 높은 산들 사이로 하얀 머리를 내미는 융프라우가 반갑다. 파란 공원과 짝하여 조화를 이루는 칸나와 장미 등 길가의 많은 꽃들이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다. 지루한 줄 모른 채 기차역 한 정거장을 걸어 Interlaken Ost역에 당도한다. 시간여유가 있어 공원에 앉아 휴식을 한다. 호수 건너 맞은편 하더 쿨름 오르는 가파른 기찻길이 숲 사이로 보인다. 그 앞으로 호수와 나란한 기찻길에 산악열차가 수시로 지나간다. 전개되는 풍광이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하다. 10시40분 푸니쿨라를 타고 Harder(지명)-Kulm(정상)으로 오른다. 45도는 되는 듯 철로를 따라 급경사를 오를 때 가슴이 덜컹, 몸이 기우는 듯하다. 하차하여 조붓한 산길을 따라 걷는다. 빨간 지붕의 예쁜 별장 저 아래 툰(Thunersee)과 브리엔츠 (Brienzersee) 두 호수의 파란 물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곱고, 맞은편 높고 푸른 산 사이 융프라우 하얀 설산과 아이거가 고개를 내민다. 내려다뵈는 밀도 높은 시가지는 마치 레고를 쌓아올린 듯 앙증맞게 펼쳐져 있다. 별장식당 우측 옆으로 돌아 쭉쭉 뻗은 전나무 울창한 숲길을 오른다. 좁고 답답한 길은 더욱 덥게 느껴진다. 식사 시간에 맞춰 내려와 별장식당으로 간다. 스카이 전망대엔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13시10분 유리창으로 급경사를 내려다보며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 더욱 스릴을 느끼게 한다. 호수공원의 시원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한다. Thun호수가 Brienz호수보다 크다고 하는데 우린 Brienz호수를 유람할 계획이다.
14시7분 브리엔츠 유람선에 승선한다. 바다 같은 호수를 미끄러져 나간다. 별장 같은 집들이 호숫가를 빙 둘러치고 있다. 또한 모터보트 선착장을 갖춘 고급주택들이 호숫가에 즐비하다. 집집마다 자가용 보트가 물결에 찰랑대고 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넓은 호수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선착장마다 들러 손님을 태우고 내려준다. 녹음 짙은 숲속에 고성 같은 건물들이 숨어있고, 교회나 카페 등이 있으며, 붉은 지붕의 주택들이 물가에 무더기지어 마을을 이루고 그 뒤로는 기찻길이 지나가고 있다.
홀로 서서 여유롭게 노 젓고 있는 비키니스타일의 처녀뱃사공을 간혹 만나는데 아마도 홍보용 같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날듯이 달아나는 빨간 모터보트를 즐기는 이들, 덩달아 흥겨워진다. 유람선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긴 시간 동안 바라본 산의 얼굴이 이젠 익숙하다. 어느 나루에선가 산책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하선하여 물가 마을을 가까이서 감상하며 한참을 걸어갔다 돌아온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마침 만나게 된 박대장과 그 선착장 주변에서 나무조각상을 만들고 칠하고 하는 아티스트의 거리를 거닐며 감상했다. 긴 유람의 시간이 끝나고 16시50분 하선하여 5분간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 웨스트역으로 간다. 시내거리를 한참 걸어 새로 열었다는 ‘아레 한식당’으로 가서 삼겹살을 주문했는데 유난히 반찬이 약하다. 나는 덥고 갑갑하여 밥을 물에 말아 먹는다. 얼마 만에 해보는 짓인지…… 갈증해소도 되고 괜찮았다. 식후 박대장과 나는 도도히 흘러오는 냇물을 거슬러 Ost역까지 걸어갔다가 오전에 갔던 길을 따라 돌아온다. 카페마다 남녀노소로 가득하다. 20명이 넘는 남자노인들의 장중한 연주를 감상하기도 하고 아까 본 융프라우의 저녁얼굴도 만나보면서 걸었다. 숙소로 돌아와보니 한국의 젊은이들이 입소하여 고기를 굽는 둥 저녁을 마련하고 있다. 집에서도 저렇게 잘할까 궁금증이 일어나다가도 닥치면 나름대로 해결해내는 게 요즘 젊은이들이겠지. 내가 괜한 염려를 하는구나. 생각하니 비식 웃음이 난다.
역에서 멀지 않은 MM식료품 가게 맞은편에 Haus Gotthard가 우리의 숙소다. 2층 침대이며 6인실 내지 4인실이다. 불편한 대로 이런 경험도 해보는 게 여행이다. 짐은 최소한만 풀고, 우린 갑갑하여 2층 베란다에 나가 하산하는 패러글라이더를 헤아리며 담소를 나눈다. 여행의 마지막 저녁이다. 2층 숙소에 작은 베란다가 있어 내다보니 연갈색의 이슬람 복장-스위스에서 만난 이슬람 여인 대부분이 이 색을 착용함-을 한 여인들이 의자에 앉아있고, 관광마차인지 마차택시인지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 여기도 잠들지 못하는 관광도시인가 보다.
제10,11일차 <7월 6~7일, 토~일요일> 돌아옴
새벽5시, 2층의 어느 방에 모여 라면을 끓여먹기로 엊저녁에 얘기가 됐고, 새벽부터 한바탕 냄새를 피운다. 오늘부터는 바쁜 귀국 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6:37 인터라켄 웨스트 출발→6:55 Spoez→7:03 Basel SBB→환승하여 7:34 Bern 출발→제네바 공항으로 이동한다. 13시 제네바공항을 이륙하여 16시 반(현지 17시 반)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한다. 21시쯤 인천행으로 바꿔 타고 이튿날 11시 좀 지나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한다.
이렇게 알프스 3대 미봉 반 트레킹을 마치며 감회가 깊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트레킹이란 이름의 여정, 의미 깊고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도 감출 수 없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는 하지만 분수를 알아야 하고, 자연 앞에선 어떠한 겸허도 지나칠 것이 없다. 생애 최초의 고갈된 체력 앞에서 내 의지와 체력은 비례하지 않음을 절감하며, 몸 앞에 겸손해질 것을 배우고 나아가 체력의 보완에 힘써야겠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컵라면으로 허기를 면하며 오르던 산등성이, 가죽 같은 바게트 빵을 질겅거리며 웃음꽃을 날리던 산상에서의 한 끼, 그리하여 만나게 되는 하늘 가까운 산, 산, 산 그 앞에 누구도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높은 설산의 위용과 한없이 낮은 자세로 피어나 지상의 평온을 이루는 야생화 꽃밭, 그 야생화와 오래오래 눈 맞추던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리라. 정성껏 준비해 갔다가 두고 온 일행들의 솜씨, 맛있는 오이지, 마늘장아찌, 명이장아찌도 눈에 삼삼하다.
여행 기간 동안 고락을 함께하며 첫 행보인 나를 아껴주고 보살펴준 일행 모두에게 진정 고마운 마음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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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고야~~~~~~~ 자세히도 적어 올리셨네요
염정희는 염정의...오타입니다
또 한가지는
서울가자산악회에서 기획
뫼솔트래킹에 의뢰하여
뫼솔트래킹이 안내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모 연재를 해야지..사진과 더불어 설명을 붙이면서..
한번에 읽으려니 힘들오,,다시 알프스 가 있는 느낌 이네..
야생화 올린 다고 햇는데 산 다니느라 까마득히 잊어버렷네..염회장 걸로 대체합세.그분 전문 이니..
노작 쓰시느라 손끝 좀 아프셨슈 ㅎㅎ
죄송무지로소이다. 함자를 바꾸다니... 엄벌을 내리소서. 달게 받겠나이다. 냉큼 정정하였사옵니다.
서울가자산악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여행안내 유인물에 뫼솔트레킹으로 나와서리 그만......
남제형님! 잘못했어유. 이래저래 지루한 글일 텐데 연재씩이나 하면 너무 여러 날 걸릴 거라서...
사진은 작가님들 거 많이 올렸으니 저까지 보탤 필요 없다 생각했고,
지루한 여행기는 하루치씩 나눠 읽으면서 장면장면 떠올리는 게 어떨까 해서 그리했답니다.
잘햇다ㆍㆍ
자옥언니!!
뭔가를 계속 물어보고 적더니만.....이런 생동감 넘치는 후기가 나왔네요
트레킹 도전정신에 감탄, 존경을 표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씀에 감동하였읍니다
3대미봉은 하프 트레킹 코스랍니다.
언니덕분에 일정이 다 끝난후엔(자유시간) 원피스(스커트)를 입는거로...
색다른 낮 설움에 흥분되었답니다
하여 0731 킬리만자로 갔을때 사파리 호텔 자유시간-석식때 롱~랩 원피스 입었답니다
대 환영이었답니다. 만찬자리에서 제 여친구랑 춤도 추었답니다 ㅋㅋ
시간이 허락한다면 가벼운 트레킹 코스(4박-5일) 추천합니다
크게 부담없이 힐링하는 트레킹 코스랍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