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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방송사 뉴스 카메라기자로서 어지간한 사건사고 현장은 거의 다 경험해 봤습니다. 천성이 줄 잡힌 모직 바지에 검은 구두 신고 목에 넥타이 두르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근무경력이 늘어서도 (저흰 그걸 연쪼가 찼다고 합니다만) 국회, 청와대, 경제부처 등등 이른 바 좀 편하고 '대접받는' 취재대상과는 거리가 있는 곳만 다녔습니다. 뭐 삼품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등 대형 사건사고의 현장취재팀장, 히말라야 8천미터 2개봉 무산소 연속등정, 남극, 아프리카 오지...고베 지진....(불행히도 제가 회사에 있을 때는 중동이 비교적 평온할 때여서 종군기자의 영광스러운 기회는 후배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
제가90년대 중반 약 3년 정도 SBS 보도국 영상취재부의 수중촬영팀장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두 건의 대형(?) 해난사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군산 근해 위도 앞바다에서의 여객선 침몰사고이고, 또 하나는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강릉 앞바다 북한군 잠수정 좌초 후 침몰사고가 있었습니다. 물론 양쪽 현장의 수중에 들어갔었고 강릉에선 잠수함이 버린 발레스트 덩어리들과 스큐류 가이드 등을 촬영해 뭐 특종도 좀 했었습니다.(물론 촬영 직전 모터보트에 오르다가 총을 겨눈 채 두 눈동자가 충혈된 해안경비 군부대 소대장에게 체포되어 몇 시간을 초소에 감금되기도 했고...)
스쿠버 다이빙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참 평온해 보이거나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바다는 몇 미터만 내려가 보면 배위에서 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특히 조수 간만이 심한 서해안에서의 다이빙은 매우 어렵습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때 저희 수중촬영팀은 생긴지가 얼머 되지 않은 싯점이었기 때문에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고는 일요일 아침에 발생했는데...그날은 공교롭게도 저희 영상취재부 전체의 워크샵이 가평에서 1박2일로 있던 날이어서 최소 토요 당직 인원만 남기고 모두가 가평에 있는 계성초등학교 수련원에 가 있었을 때였습니다. 당연히 토요일 밤 모두가 통음을 하였고....일요일 오전 아무 생각없이 서울로 향하는데 차 속에서 11시? 10시 라디오 뉴스의 끝자락을 듣게되었는데...."...한편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계익 교통부장관이 사이를 표명했다." 뭐 이런 뉴스가 나오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무장관이 문제 해결부터 해야지 사표보터 먼저 말했다는 것도 좀 웃깁니다만...) 암튼 당시는 YS정권 초기의 이른바 '사고공화국' 시절이었는지라 어지간한 사건사고에 대해서는 그리 놀랄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하여간 그 순간 대부분 허리에 찬 삐삐를 꺼내들었을 겁니다. 쥐똥만큼작은LCD 디스플레이 창에 뜬 아라비아 숫자 4개. '0000' '8282'!!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있던 우리들이었기에 삼삼 오오 무리 지어 서울로 향하던 20여 대의 승용차를 일제히 국도변에 세우고 아무 민가에 들어가 전화 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엔ㄴ 전날 야근한 야근조장과 워크샵에 참석하지 않으신 차장 한 분이 우리즐 전화와 내부전화를 몇 통씩 손에 들고 한쪽으로는 상황전달하고, 한쪽으로는 욕설 퍼붇고...암튼 사무실로 돌아와 우왕좌왕하면서 몇몇 선수들을 군산으로 내려보내고 다소 느긎(?)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남아 오후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수중취재팀은 모두 사무실에 남아 수중촬영 시도 여부를 판단하고 결정이 되면 내려가기로 한 것이죠. 그러나 당시 몇몇 데이터 (현지 바다의 물때, 시야 등등)를 확인하고 잠수 가능 여부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중론은 '현재로는 불가'였습니다. 현장 조건도 조건이었지만, 저희 팀들의 실력도 한 명을 젱회하고 역부족이락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한명의 예외자는 대학 스쿠버 동호회 회원으로 대학 때부터 다이빙을 해왔고, 몇 차례의 익사자 수색 알바도 했던 렁타임이 꽤 축적된 후배였죠. 그러나 최소 세 명 이상의 팀 다이빙이 필수인 수중촬영은 그 혼자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깊어 저희 메인뉴스인 8시 뉴스는 수면 위에서 촬영한 화면으로만 매꾸어지고 좀 버벅이기도 하면서 (왜먀면 당시 지방지국이 많지 않았기에) ,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경쟁사인 M. K의 뉴슬 모니터했는데...입이 딱 벌어지는 화면이 나오더군요.우리보다 훨씬 수중촬영팀 운용 역사가 깊은 M이 해저에 가라앉은 서해 훼리호의 선명과 선체 일부를 촬영한 약 10초 분량의 '현장화면'을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아침 6시 용산의 한미연합사 헬기장에서 육군 시누크에 1톤 가량의 다이빙 장비와 수중촬영 장비를 싣고 이륙하지 전까지 한 잠도 못 자고 16개의 에어탱크 충전하고, 데이터 체크하고...젠장...
위도 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리 수중팀 4명과 엄청난 물량의 수중촬영장비를 쏟아붇다시피 내려놓은 시누크는 한바탕 광풍을 일으키며 군산공항으로 날아가버렸고...선착장까지 길은 왜 그리 먼지. 초등학교 창고에서 무단으로 꺼내온 리어커로 장비들을 해경경비정으로 옮겼고, 최종 목적지(?)인 SSU의 구난함(구미호? 잘 기억이..)로 옮겼습니다. 그 때가 오후 3시 정도. 전날 저녁 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저희팀들은 일단 함장을 만나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민폐가 시작됩니다) 이미 식사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저희에게 전달된 먹을 거리는 군용건빵 1박스와 테트라팩에 포장된 서울우유 1 박스...이걸 먹고 저 난바다에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라면 가야죠.
건빵과 흰우유 몇 팩으로 주린 배를 불린 우리는 다시 함장을 협박(?)해서 통신을 위한 무전기와 하사 1명, 그리고 우리 수중촬영팀 4명이 탈 수 있는 조디악을 하나 얻었습니다. (제2차 민폐 입니다) 오후 4시30분 경에 구미호를 떠나 엄청난 부표와 앵커 로프가 내려진 10여 미터 해저를 앵커 로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BC의 공기배출 밸브를 열었습니다. 수경 위로 천천히 높아지는 수면의 색깔은 황갈색. 바로 1미터 앞의 후배 다이버가 보이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한 손엔 45키로그램의 ENG 카메라 수중하우징을 들고, 팔로 앵커로프를 감은 한 손으로는 BC밸브를 조절하며 몸이 완전히 수중으로 내려서자, 아주 자연스럽게 제 몸이 옆으로 누워지더군요. 엄창난 조류 때문에,...
천신만고 끝에 앵커로프가 묶여진 선미 부분에 도착해서 배를 더듬으며 스크류와 러더 쪽으로 내려가서 스크류에 감긴 로프며 그물이며 잡다한 것들을 십 여초 촬영하고 (촬영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워낙 수중시야가 짧았기 때문에 렌즈를 광각으로 최대한 넓히고, 최대한 조명을 가깝게 붙여서 아주 자연스럽게 물체 표면을 스켄하는 거였습니다. 뭐 어렵게 뷰파인더를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니 보고 싶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기에 불가능했습니다. 이어 선미 부분의 함명을 촬영하고, 마지막으로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상갑판에서 출입문을 열었는데....아뿔사 낚시인의 것으로 보이는 플라스틱 아이스박스가 자체 부력으로 우루르 솓아오르며 제 마스크를 강타하더군요. 뭐 마스크도 훌러덩, 동시에 마우스 피스도 벗겨지고 코에서는 코피도 좀 나는 것 같고. 한 손에는 싯가 2억이 넘는 촬영장비를 들고, 한 손은 로프를 쥐었으니 선택할 게 없더군요.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버디는 2미터 정도 거리에서 뭐하냐고 자꾸 라이트를 흔들어 대고...
겨우 마우스피스는 다시 찾아 물었는데....마스크는 아무리 목 주변을 허우적거려도 걸리는 게 없더군요. 베어 페이스로 겨우 버디를 찾아 철수를 명하고 수면으로 올라왔습니다. 조디악 보트 위에서 당연히 손을 뻗어 장비를 받아주어햐 할 텐더는 욕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자 한참 뒤에 노래진 얼굴로 고개를 내밀더군요. 좀 심하게 놀란 얼굴이었습니다. 제 얼굴이 그렇게 망가졌나? 장비를 넘기고 잠시 배에 매달려서 후배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차례차례 올라오는데...대충 들어갈 때 모습으로 나오는 선수는 대학때부터 다이빙을 했다는 K뿐이고 나머지는 크고작은 부상, 장비손실.....심지어 막판 수심5미터 정도에서 작업을 위해 설치한 여러가닥 로프에 레귤레이터가 걸린 후배는 그걸 벗겨내는데 실패해 결국 bc를 벗고 숨을 참으며 올라왔더군요.
일단 물에 들어갔던 팀이 다 살아서 나온 것을 확인하고 힘차게 솟구쳐 조디악 안으로 몸을 날렸는데 뭔가 뭉컥한게 느껴지더군요. 그건 흰색 타켓크로스를 덮은 시신이었습니다. 저희가 내려간 이후 함내에서 발굴한 시신을 하사 한 명과 텐더 혼자만 탑승해 널럴하던 고 저희 조디악에 시신들을 옮겨 놓은 것이죠. 그래서 아까 텐더의 얼굴이 그렇게 노랗게 변했던 것이고...(낮중에 군산항 횟집에서 텐더에게 들은 내용은 우리 수중팀이 내려간 후 계속 앵커로프를 주시하면서 버블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데 한 5분 쯤 뒤에 버블이 올라오더랍니다. 5분 만에 올라오다니 정말 물속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장비를 받아주려고 상반신을 바다로 내밀고 물 속에서 솓아오른 것을 잡으려고 두 팔을 쑥내밀었는데...그것은 른색 바디의 수중카메라가 아니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의 얼굴을 한 시신이었다더군요. ...)
(원래 이런 신변잡기를 쓰려던 것은 아니고...)
천안함 침몰사고가 발생한지 만 4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사고와 관련된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경로를 거쳐 작성된 다양한 기사들이 모든 매체를 덮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 남편, 애인, 형제의 생사를 모른채 기다려야 하는 가족들의 안타깝고 절망적인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사령부 건물을 지키는 병사의 뺨을 때리고, 설치된 텐트를 부수고, 민간다이버를 불러 사고해역에 투입하고..해군해난구조대 SSU! 제가 알기로는 모두 하사관 이상의 짠빱으로 다이빙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오로지 잠수기술을 연마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는 전문 다이버 입니다. 평소에는 다른 일하다가 한 달에 한 두번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잠수머쉰'같은 사람들 입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 올 정도 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그런 SSU대원들 조차도 현장 접근에 애를 먹을만큼 사고지역의 여건이 나빠서 작업이 더딘 것이지, 병력 숫자가 모자라서, 그들의 수준이 민간이 자원봉사단 보다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현장을 돌아다니면 군의 현장 작업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적어도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앞에 쓴 것처럼 민폐만 끼칩니다. 그들이 정 돕고 싶으면 지금은 다른 배나 인근 섬에서 기다리다가, 해난구조대 요원들이 지쳐서 정말 이제는 다른 다이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아침에 차량정비소에 차를 맡겨 놓고 쓴 글 입니다.)
오후에 사무실로 들어와 이런저런 상황을 살피고, 각 포털의 토론방을 기웃거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큰 그림을 그려 보면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었고,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무엇인가? 계속되는 크고작은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을 못내 놓는 관련 당국은 도대체 뭘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 신경에서 멀어진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살펴보았습니다. 행복복합도시 이전 문제, 4대강 개발에 반대하는 천주교의 움직임, 봉은사 주지 경질과 관련한 안상수 의원, 요미우리 신문의 MB 독도관련 발언 기사의 진위 공방,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인사청탁 뇌물수수 재판....
아주 먼, 그러나 너무 멀지 않아 제 기억에 뚜렸히 남아있는, 정치, 선거, 북한 등과 관련된 몇몇 말도 않되는 사건들이 자꾸 생각나많이 답답합니다.
첫댓글 지금 당사자들(정부, 군인, 경찰, 가족 등등)은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죠... 그리고 지금까지의 진행상황도 정상은 아니죠... 침몰 이외에 팩트가 하나도 없는 이처럼 기묘한 사건도 처음 보는듯... 그리고 이 사건 덕분에 국면전환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국면전환...당장은 그래보이겠지요..또한 이렇게 휘둘려지며 잊어버린다면..국면전환..성공적이겠죠..역사가 제 길을 가도록 하기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해야 합니다.
그 기억만이 역사의 바퀴가 거꾸로 도는 것을 막을 유일한 힘이기에...용서는 하겠지만 잊어서는 안된다...그러나 때로 우리는 용서는 하지 않으면서 쉽게 잊어버리고 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