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죽음의 일부다. 커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모두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1회용 건전지처럼 남은 전력을 서서히 소비하다 다 쓰면 다른 폐기물들처럼 소각되거나 땅에 묻힌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이고, 인식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실제로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 엄마가 그랬던가.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사냐고. 그럼 낙관적으로 살려고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고 노래부르란 말인가. 끊임없는 레이스를 한 번도 쉬지않고 열심히 달려 골인하면 바로 죽음이란 도살장이 기다리는 마라톤. 와이리 좋노.. 와이리 좋노.. 이런 노래라도 부를까.
생로병사가 다 고통인걸 어쩌란 말인가. 액운은 혼자 오지 않으며 복은 같이 오지 않는걸. 언제나 좋고 충만한 성취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건 잠깐, 성취와 완성은 곧 혐오의 시작이다. 곧 싫어져 허전함에 다른 또 뭔가를 무언가도 모르면서 이뤄낼 무언가를 찾아 헤메고 또 애쓰며 그걸 계속 반복하다 죽는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한다면서 집안에서 런닝머신굴리듯 하고 있다.
우린 언젠가 죽는다. 그것만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50년뒤에든 100년뒤에든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오늘 지금 내가 손을 얹은 키보드자판에서 손가락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누를때마다 하나의 번뇌씩을 담아 누르는 키보드의 108개의 키에서 108번뇌중 어느 번뇌와 함께 어느 키를 누르다 죽을지도 알 수 없다. 하나하나 누르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버튼을 눌리다 죽을까 저 버튼을 눌리다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산다는 것도 있을수는 없는 일이다.
늘 죽음만 생각하면 즐거울 일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남의 일이라고 어짜피 오래뒤의 일이라고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일따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어쨌든 웃을 수 있는 것이니까.
당신은 내가 대강 낸 통계에 따르면 25%의 확률로 암에 걸려 죽고 15%정도의 확률로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1%미만의 확률로 자살하고 15%의 확률로 기타질병에 걸려 죽고 40%이상의 확률로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정확히 계산해본적 없으니까 아님말구.
죽은 인간들의 사망신고서를 처리하는 업무를 본 적이 있다. 하루에서 최소 두 세껀, 많게는 대여섯껀까지 늘 처리했지. 또 죽었군. 젊은데 죽었네. 내 후배인데 서울에서 의경하다가 강도의 칼에 찔려죽었군. 친구랑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줌만데 자살했군. 우리 엄마랑 같은 계원이네. 아는 할아버지인데 왜 하필 자기 동에서 뛰어내리지 9동 사시는 분이 우리 1동와서 뛰어내리냐구, 자식내외가 미국으로 이민간뒤 외로워서 자살했다는데그래도 사인은 추락사. 아침에 밥 먹다가 창문밖에 왠 할아버지가 날라가시더라. 드래곤볼을 많이 봐서 그런가. 원래 무천도사는 늙어서 못 나는데, 요새는 영감님도 날라다니는군하고 생각하고나서도 어째 좀 이상하더라.
우리 집앞 약국에 약사아저씨는 여름에 하도 더워서 술 먹고 저수지에 차랑 같이 뛰어들었군. 얼마나 더웠으면 지난 여름은 무지 더웠지 왠만해서 더위 안 타는 나도 헥헥댈 정도였으니 이해한다. 나라도 너무 더워 물에 뛰어들고 싶었을꺼야. 술까지 먹었으니 얼마나 더웠을까.
그래도 정수장에 물에 빠져서 자살한 놈, 그 물 더러워서 누가 먹으라고 죽을 곳도 잘 골라죽어야지 음냐. 심보도 더럽게 자기가 먹을 물 아니라고 우물에다 똥누는 격이군. 정수장에 왜 시체버리냐. 이런 살려내서 물먹여 도로죽일 놈.
오줌누다가 바지벗은채로 쓰러져 죽은 놈. 연고가 없어서 경찰이 첨부한 시체사진엔 포즈도 기가 막히다. 시체포즈가 얼마나 섹시한지 처녀들이 사진보고 얼굴이 빨개지더군.
불쌍하다고? 매일같이 사람죽는걸 보는 의사가 어디 사람죽을걸 슬퍼하던가. 오히려 농담꺼리지. 불쌍하고 슬프면 그 일 못한다. 나만 이상한게 아니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다 이상하단 말인가. 같이 농담하고 웃고 이랬는데 음냐. 이런 일 해보면 안다. 불쌍한 것도 하루이틀이지. 젊은데 안 됐다. 아깝다. 그걸로 끝. 뭘 더 어쩌란 말인가. 음냐.. 웃어넘겨야지 달리 웃을 일도 없는데
죽는 사람들 사인은 대부분은 암, 대장암, 위암, 자궁암, 유방암, 무슨 종류든 질병중에 가장 많은 것은 어쨌든 암. 친구 어머니도 자궁암에 걸려 죽었다.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어머니가 만나러 가보니 먹기만 잘 먹고 말만 잘 하더라고 다 나으면 내년에 설악산으로 단풍여행가자고 그랬다면서 사람들이 그 집에 아줌마 다 죽어간다고 그러던거 다 헛소문이라더라고 그랬는데 그 뒤 한 달도 안 되서 그 아줌마는 죽었다.
어릴때 내 비비탄총을 만지려해서 안 주니까 "안돼, 안돼"하고 주문외듯이 특이하게 울던 녀석이었다. 그 이후인지 그 이전인지 우리 집에 왔을때 내가 우리 고양이를 못 만지게했는데 그 착하시던 외삼촌마저 고양이가 뭐가 그렇게 소중하냐고 화를 내신적이 있다. 그땐 고양이가 더 소중했지만, 그렇게 죽을껄 누가 알았겠냐고.. 미안하고 후회될 뿐이다. 외사촌동생도 그 아버지(그러니까 나한테는 외삼촌)이 보는 바로 앞에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배창자가 다 터져 죽었다. 그 뒤로 멀쩡해보이던 외삼촌도 시름시름 앓더니 자다가 돌아가셨고 지병이 있긴 있었지만 몸엔 별 이상이 없었고 그래도 제일 젊었던 막내외삼촌도 앉은 자세로 돌아가셨다.
막내외삼촌은 촉망받던 천재요, 큰 키에 훤칠한 외모였다. 아까운 인재였고, 돌아가신 그 위의 외삼촌 역시 머리는 둔하나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순하기만 한 남에게 평생 해한번 끼친 적이 없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만 먼저 데려간다더니 역시나 그런가보다. 나는 별로 착한 일 한 것도 없는데 요새 자꾸 하늘나라에서 천사들 노래소리가 들리고 2000년간 예수만 오른쪽에 앉혀두었더니 왼쪽이 허전하다고 자꾸 하느님이 나보고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하는 통에 미칠지경이다. 내가 그래도 음덕이 많은지...ㅎㅎㅎ 뭘 벌써 데려가려구 사실 별로 착한 일 한 것도 없는데. 음냐.. 내가 그렇게 착한가 허허...
변변한 직장도 없던 두 분 게다가 병으로 사람구실 못하던 막내를 어쨌든 병을 고쳐 사람구실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40대체력을 유지하면서 왠만하면 노인네한테는 안 해주는 위암수술까지 받고도 끄떡않으시던 외할아버지는, 장성한 아들 둘을 잃자, 밥도 안 드시고 술만 드시다가 결국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시고 내가 오래살아 이런 꼴을 보는게다 싶어 자살이라면 자살인 상여꾼들 들기 편하라고 끝까지 산 사람들 위해서 뼈만 남은 앙상한 그런 죽음을 선택하셨다. 이외수가 말한 내장을 깨끗하게 비운채 아사하는 것, 영양실조로 죽는 것.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나는 직접 보진 못 했지만. 그렇게 자신있으면 낭만 어쩌구는 유가족들한테 말해보라.
댁의 할아버님은 낭만이 뭔지 아시는 분이요. 꽤나 낭만적인 죽음을 택하셨구려... 이랬다간 바로 같이 묻어드린다.
나같은게 뭐가 그렇게 보고 싶냐고... 날 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다고 하시는데도 안 갔다. 돌아가신다음에 가니까 큰외삼촌이 그래도 살아계셨을때 그렇게 보고 싶어하셨는데 이렇게 지금이라도 와줘서 고맙다고 그게 나를 욕하는건지 외삼촌 둘 장례식때도 별 이유없이 안 갔는데 안 올줄 알았던 내가 와서 정말 고마워서 그러는건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살아있으실때 안 가 뵌게 죄스럽지만 그때는 미처 이렇게 후회할껄 생각하지 못 했다.
외할머니 장례식때 알게된 얘긴데, 비몽사몽하실때 하나님한테 가시려고 단식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정신이 희미하시던 와중에도 돌아가시기 전날밤에 그때만은 정신이 멀쩡하셔서 갑자기 외할머니에게 물으셨단다.
"자네 날 사랑하는가"
외할머니는 대답은 안 하고 그저 빙그레 웃으실 뿐이셨다. 무슨 말뜻인지 알구 웃으신게 아니라 진짜 검은머리 파뿌리될때까지 일본에서 만나고 결혼해 8남매두고 평생을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 뭘 그런걸 물어볼 필요나 있나싶은 황당함에 웃으신 것이겠지. 일본에서 커서 자랐다해도 서로 좋아 어쩔 줄 몰라도 어짜피 사랑한다 어쩐다 표현 잘 안 하는 한국사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자기 딸들에게 무슨 비밀이야기하듯이 그러시더란다. 우리 엄마는 자기한테만 그런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모들한테도 죄다 다 그랬다고, 외할머니는 그때 "당연하지요. 그럼요. 백번천번 만번 사랑하지요. 그러니까 아들딸낳고 지금까지 살지요"라고 대답해줄껄 못해준게 아쉽다고 그러셨다고 한다. 남들이 들으면 지어낸 얘기 아니냐고 어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얘기 아니냐고, 그리고 어쩌면 그게 뭐 대단하다구 할지 모르지만, 진짜 나에게는 어떤 감동적인 영화나 지어낸 이야기보다도 와닿는 일이었다. 살화인데다 그게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얘기니까. 네 그럼요. 사랑하니까 결혼했고 그렇게 평생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8남매나 낳으면서 평생 해로했지요. 우리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같은 부부도 또 없을꺼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에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셨다는데 다 봤는데 나만 못 봤다고 나도 아주 냉혈한은 아닌지라 죄책감에 시달리는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외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엔 30만원을 용돈으로 드렸다. 30만원이 뭐 돈이라고 친손자도 안 해주는걸 외손자가 해준다고 엄청 좋아하시더라만은 그래도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몇 달전엔 우리 집에까지 왔다가셨는데 갑자기 떡먹다가 목이 막혀서 돌아가셨다. 남이 그렇게 죽었다는걸 들을땐 웃었는데 그게 우리 외할머니니까 도저히 웃을수가 없다. 콜라를 하도 좋아해서 콜라병에 농약든걸 모르고 단숨에 원샷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던 어떤 연예인의 울먹이는 말에 사회자도 반사적으로 잠깐 웃다가 표졍을 금새 수습하며 바로 애도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안 보는 뒤에 가선 얘기하면서 웃었을지 몰라도 대놓고 웃진 못하지. 떡 먹다 목 막혀 돌아가셨다고 황당하게 생각해도 아무 말 안 하겠다. 나도 황당하니까. 모니터앞에서 웃어도 내가 모르니 나한테 그 사실만 말 안 하면 괜찮다.
내가 미쳤지 그 돈 30만원 그냥 뒀으면 플2를 사도 샀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엄마한테 내가 미쳤었나보다고 그런 말도 한 번 한 적 있긴 있지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줄 몰랐을때 했던 소리고, 지금보면 정말 돌아가시기전에 그나마 내가 해드릴 수 있었던건 그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짜피 내게 돈은 중요한 것도 아니니. 그까짓 돈으로 사람이 흐뭇해할 수 있다면 비싼 것도 아니지.
죽은 뒤 3년안에만 같이 죽으면 천생연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딱 3년만에 돌아가셨다. 우리 친할머니처럼 혼자서 오래 살아계시면 외롭기밖에 더 하겠냐고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뭐 어쨌든 몇년 전부터 외가집은 연연이 초상이다. 이른바 줄초상, 죽을 사람 다 죽었으니 이번엔 내 차례 아닌가 모르겠다.
멀쩡하던 외삼촌이 둘이나 갑자기 죽고 인간들의 사망진단서를 처리한 뒤로
내 자산이 약해질수록 점점 더 두려워진다. 나를 그렇게 멍청하고 둔하고 눈치없는 놈이라고 우습게 알아도 그래봤자 날 무시하는 어른들보다 내가 훨씬 더 오래살껄. 죽은 뒤에 무덤에 그런 사람들 무덤에 침뱉으며 내가 그래도 훨씬 더 오래까지 살아남았지. 인생이란 써든데쓰모드에선 마지막까지 드롭되서 안 떨어져나가구 남는 놈이 이기는거야. 포인트가 높던지 낮던지는 상관없어. 이렇게 내가 침을 뱉아도 당신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누워있잖아..라고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젠 상관없다. 오래 못 살아도, 나는 이미 개, 고양이들의 최고수명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해도 난 그 사람드이 불쌍한걸. 인생이란 눈물의 골짜기에서 어떻게보면 먼저 탈출하는 사람이 땡잡는거다. 그래서 인간은 유산을 남기지, 돈을 남겨줄테니 잘 해보라고. 난 이제 가니까 끝까지 잘 버텨보라고. 내 게임기는 내 친구 종영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그 인간은 절대 게임이 안 파니까 내 게임기도 아마 창고에 처박더라도 나처럼 팔아버리지는 않지싶다. 겜기에 내 이름 새겨놓으면 누구누구증이라고 박아놓으면 볼때마다 내 생각하겠지 그 놈이 이상한 놈이었지만 같이 오락할땐 그래도 심심하진 않았어.
나는 철권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철권인으로 죽고 싶다. 아니 죽는다. 살아서도 철권인이요. 죽을때까지도 어짜피 나는 가장 뛰어난 내 능력을 발휘하고 대우받은게 철권뿐일꺼다.
어짜피 화장할꺼지만 묘비에 이렇게 새겨주세요. 철권인 모모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철권인으로 죽다. ㅎㅎ
내가 가장 오래했던 게임 철권씨디와 함께 묻어주세요. 내 인생의 4분의 1이상을 철권과 함께 먹고 자고 같이 꿈도 꿨어요. 아참 게임기도 같이요. 그리고 손에 레버를 쥔채로 관뚜껑을 닫아주세요. 혹시 관속에서 깨어나면 심심할때 그거라도 하게. 결국 나의 현란한 광대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여한일 뿐입니다.
어쨌든 난 내 동생들처럼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죽진 않았다.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만 5세가 되기전에 혹은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죽은 아이가 한 둘이 아니다. 평균수명을 깍아먹는건 대부분 아이들이다. 그만큼 한국의 영아사망율은 아직 높다.
인간의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이름도 붙여지기전에 무덤도 없이 누구하나 기억해주는 이도 없이 그 부모에 의해 모체에서 뜯겨져나와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 손으로 걸레처럼 찢겨 살해된뒤 쓰레기통에 유기된 동생들이 내 나이또래라면 누구나 최소 몇 명은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약한 새끼를 어미가 인정사정없이 물어죽인다. 특히 독수리는 죽은 새끼의 살점까지 남김없이 살아남은 새끼에게 뜯어먹인다. 어쨌든 우리도 짐승들의 그런 잔인한 처사를 비인간적이라며 비난할 수 있을까. 자기들이 한 짓은 절대 모른다. 물론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 거리낌없이 동생들을 죽인 부모님을 비난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지만 인큐베이터에 넣으면 살릴 수 있는 미숙아를 낳는다고 다 키우는줄 아느냐고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노인들의 매정함이 그냥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지금 내가 누릴 이런 금전적인 여유를 서너명의 형제들과 함께 나눠야했다면 어떤 동물이나 가지고 있는 내게도 어떤 인간에게도 약간 씩은 있는 형제살해유전자가 여러 동생들을 학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나있는 동생도 내가 받을 사랑의 절반밖에 못 받는다고 구박하면 할수록 나는 부모님 눈밖에 났으니까 부모님이 짐승들보다 더 매정하게 동생들을 죽여준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며, 오히려 내겐 고마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다른 동물이었다면 장남이라도 약한 나를 버렸을 것이다. 나는 버림받지 않기위해 먼저 태어난 유리함을 이용해 동생들을 구박하고 먹이를 뺏고 심지어 물어죽여야했을지도 모른다.
열악한 환경에서 다 낳아 키운다는 것 역시 학대다. 그렇게 애초에 버릴 생명을 아예 만들지 않았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들이 먹었어야할 음식을 살 돈으로 나는 오락을 하고 형제들과 같이 써야했을 따뜻하고 넓은 방에서 고양이를 둘 씩이나 기르면서 여유있게 생활한다. 옷은 어떻고... 별 볼일 없는 장남이라도 아늘 하나밖에 없다고 늘 그저 우리 아들 우리 아들하면서 목매다는 부모님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지나친 관심이 동생들이 있었더라면 돌아오지 않았을 나에겐 과분한 복이다.
살만큼 살아봤다. 이젠 지겹다. 내가 기르다 잃어버린 개도 고양이들도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 그들에 대한 내 기억이 죽지않은한 나는 죽을때까지 평생 죽을정도로 괴로울 것이다. 10년도 넘었지만 갈수록 더 슬프기만 하다. 오히려 그냥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면 그리고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두고두고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드디어 욥은 침묵을 깨트리며 입을 열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저주를 받아라
내가 임신이 되던 그 밤도 저주를 받아라.
그 날이여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려라.
빛이여, 다시는
그 위에 비치지 말아다오.
흑암아, 사망의 그늘아
그 날을 너의 것이라고 주장하여라.
구름아, 그 위를 덮어
빛이 비치지 않게 하여라
그 밤이여
짙은 어두움에 휩싸여 버리고
달력에서도 삭제되어
그 해의 달과 일수에 계산되지 말아라
차라리 그 밤이 적적하고
기쁨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뻔하였다
날을 저주하는데 익숙한 자들아,
그 밤을 저주하여라
그 날 밤은
새벽 별도 빛을 내지 말고
기다리던 빛도 나타나지 말며
아침 동녘도
보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나를 태어나게 하여
이처럼 큰 슬픔을 당하게 한
그 날을 저주하고 싶구나!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어째서 어머니가 나를 무릎에 받아
젖을 빨게 하였는가?
내가 그때 죽었더라면
지금쯤은 평안히 잠들어 쉬고 있을텐데
그것도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고 살던
고대 왕들과 고관들,
그리고 금은 보화로 집을 채운 황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때 죽었더라면
죽어서 나와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땅 속에 묻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 곳은 악한 자들이 말썽을 부리지 못하고
피곤한 자들이 쉴 수 있는 곳,
죄수들까지도 평안을 누리고
포악한 간수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
그곳은 높고 낮은 자의 차별이 없고
종이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곳이다.
어째서 고난당한 자에게 빛을 주고,
마음이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었는가?
이런 자들은 죽기를 기다리고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 죽음을 찾아도 그것이 오지 않는구나!
이들은 죽어서 땅 속에 묻혀야만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앞날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째서 생명이 주어졌는가?
먹기도 전에 탄식이 먼저 나오고
물같이 쏟아지는 신음소리는 막을 길이 없구나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것이
결국 나에게 닥치고 말았으니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이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고난뿐이구나!"
(욥기 3:1~ 3:26)
영혼은 물질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며, 기억과 사고란 분자상태의 물질이 만들어내는 전기적인 화학작용이다.
인생은 바람과 같이 현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삶이란 바로 잠잠하던 그 물질들이 응집되어 활발한 분자운동을하는 찰나의 혼돈기이며 또 다시 우리는 분해되어 어떤 생물의 자양분이 될때까지 오랜 고요함과 침묵을 유지한다. 윤회한다고 믿는 불가의 이론은 나같은 유물론자와도 어쩌면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윤회란 영혼의 윤회가 아닌 물질의 순환일지도 모른다. 육체도 물질, 영혼도 물질이 일으키는 신기루니까.
나는 땅에 묻혀있는 내 발을 보며 늘 어디론가 내가 가고싶은 곳이 생길때는 발을 파내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내 발이 땅속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내 자신이 팔도 없이 내 힘으로는 어떻게도 뽑을 수 없는 깊히 뿌리박힌 나무였다는걸 알아버렸을때 나는 금새 흙을 덮어버렸어야했다. 모른채 그냥 묻어두었더라면, 아니면 아예 애초에 그걸 알만한 능력이나 기회가 없었더라면... 많은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모른척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걸 알고 있다는데서 자부심을 느끼는지 모른다.
우연히 바람에 패여 드라나 있는걸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보게된 우연한 행운인지 불행인지에 자부심을 느낄만큼 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내세울게 없다는 것인지. 어쨌든 그 사실을 잃는다는 것 자체가 그 조차도 잃는다는 두려움에 그럴 수 없게 한다. 어쩌면 운명이 나에게 내 붙박힌 뿌리만을 볼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을 다시 흙으로 덮을만한 기회는 주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신이 언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줬던가. 신은 성경에서 뱀에 꼬시킴에 넣어가서 남자를 꼬셔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따먹도록 했으니 그 벌로 여자는 다달이 생리하고 배아프게 애낳고 힘들게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이나 보고 남자도 여자한테 속아서 사과 먹었으니 너도 나가서 힘들게 일해서 돈이나 벌어오란 말은 한 적이 있다. 인간은 신도 발명하고 자유의지도 발명했다. 어쩌면 전지전능한 신의 계명까지 어길 수 있도록 발명한 자유의지는 더 위대한 전지전능한 인류최고의 발명품이다. 인간은 과학법칙에 조금도 영향받지않고 인과의 법칙에 위배되는 전지전능한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현상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피노자 이런 철학자 이름 들먹이니까 되게 유식해보이겠다 아님말구 나름대로 유식해보이려고 하면 그런가보다하고 성의를 봐서라도 좀 유식해보인다 해줘야.. -_-) 아니면 일부러 무지하려고 노력하는건가. 조금만 생각을 뻗치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모르는게 똑똑한건지 평생을 모른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요샌 꽤나 많다.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한건 사실이다. 네가 오른쪽 길을 가든 왼쪽 길을 가든 안 가든 어짜피 정해져있고 심사숙고하든 안 하든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정해져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맞는 사살이더라도 과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기계란걸 알아버린 안드로이드처럼 인간이 기계란걸 알아버린 인간기계론자는 절망에 빠진다.
젊은때 누구나 그럴수 있는 흔해빠진 운명론자군. 바보같은... 그렇게 따지면 물도 기계.... 아니라고 우기면서 웃어 넘겨도 할 말은 없다. 내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알게해줘서 나나 그 쪽이나 득되는 것도 없다. 그래도 몇몇 이유를 들어 아니라고 끝까지 우길테니 내 입만 아프다. 그럼 편하게 모른채 살라구, 없는걸 있다고 믿는 종교나 있는걸 없다고 믿는 천재나 있는걸 있다고 믿는 바보나 없는걸 없다고 믿는 바보나 다 똑같다. 누가 바보이고 천재인지조차 알 수도 없다.
이젠 5년넘게 진실속에 헤멨으니 다 잊어버리고 자유의지라는 생긴지 오래된 신식종교에 환상에 빠져들 때다. 믿을 수 있으면 나만 빼고 우리 가족 다 믿는 예수공갈교를 같이 믿어도 좋지. 그러면 죽을때 천국간다고 생각하니 편하게 죽을테니. 가장 두려운 것을 없애기위해 없는걸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의 능력이다. 여러분은 내가 활용하지 못한 망상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
어떤 인간이 기계답지 못하고 인간다운 행동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자유의지를 실행하는 것을 볼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풍부한 감수성과 인간미를 발견하겠지만 나는 무질서해보이는 복잡한 패턴속에 내재된 알고보면 몇 가지 단순한 원칙뿐인 그의 행동양식속에서 기계를 발견한다. 인간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다. 도저히 기계같지않고 인간이 만든 기계와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로봇의 인공지능은 파리와 모기수준이다. 몸의 절반에 돌에 짓눌려 납작해져도 끝까지 먹이를 물고 비틀대며 본능적으로 개미굴로 걸어들어가는 개미와 에프킬라을 마시고 땅바닥에서 날개짓으로 뱅글뱅글 제자리를 돌기만하는 파리같이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로봇보다 정교한 마이크로 로봇에게서 위대한 신의 손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내 자신에게서도 가장 확실히 발견한다. 이 세상 모든 사물, 온갖 곳곳에서 신을 발견하면 꼭 한 마디해주지. fuck you, 왜 만들었니. 재수없게... 니가 만들었음 내가 니꺼야? 아 재수없어.. ㅎㅎ
낙엽이 제멋대로 춤추듯 바람에 휘날린다하여 낙엽 스스로 바람의 도움없이 빙글거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연히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물에 떠내려가는 조각배를 타서 다시 다른 흐름을 탈 수는 있다. 그게 우연해보일지더라도 그것은 필연일 뿐이다.
개도 이성이 있다. 한 대 맞으면 개는 다시는 자신의 이성으로 밥상의 음식을 먹고픈 마음을 자제한다. 인간이 감빵갈까봐 범죄를 저지르는 충동을 억제하는 이성과 마찬가지다.
그 이성이 그 이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이성을 잃는건 오히려 인간쪽이 흔하다. 그렇게도 개만 못한 짐승이 되고픈가. 나쁘진 않지.
인간은 생각으로는 못하는 것이 없다. 그만큼 대단하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래, 나도 신의 아들이다. 또 누가 혹시 아나. 2000년뒤에는 내가 예수처럼 숭배받을지.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나라에 많은 사이비교주들 다들 죽고나면 전설이 되는거지. 지금은 이단사파더라도. 예수도 처음엔 이단사파라서 자기가 구세주고 신이라던 미친 놈이라서 그래서 사형당한게 아닌가. 지금도 자기가 예수고 심지어는 예수랑 석가모니랑 마호멧마저 자기가 보냈고 자기를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가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 바로 죽는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살아있는 인간도 있다. 그 분도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열심히 하면 몇 천년뒤엔 예수나 마호멧이나 석가모니처럼 승천했다는 전설로 남으실 분이지.
믿지말래도 믿고 싶다. 하지만 신앙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채로 뽑혀버린걸 어쩌랴. 하나님, 없는 천사라도 보내시어 신앙이 뽑힌 자리에 제발 뭐든 다시 심게 해주시옵소서.
나는 뿌리가 드러난 나무처럼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언제까지 흔들릴지 흔들리다 결국엔 죽을지, 죽고나서 쓰러져야만 흔들림이 멈출지, 방황은 아직 얼마나 더 오래있어야 끝나는지.
어떻게보면 제자들 아무도 계승하지 않았던 프로이트의 이론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동물도 스스로 자해한다. 꼬리를 물어뜯기도하고 자기 얼굴을 할퀴기도 또 911테러당시 WTC의 인간새처럼 천길벼랑으로 뛰어내리기도 한다.
인간은 원래 물질이었으니 원래의 편안한 상태인 물질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죽음의 본능은
끝까지 다다른 막다른 골목에서만 발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 다른 동물에게서도 급박한 상황으로 몰렸을때 소극적인 자해의 본능은 발견된다.
어쩌면 사람들은 생의 본능을 쫓아사는게 아니라 아니라 죽음의 본능에 쫓겨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디애나존스역할을 맡은 해리슨 포드를 파라오의 무덤에서 양쪽으로 압박하는 두 개의 판처럼 인간은 누구나 한쪽엔 죽음의 공포, 또 한 쪽엔 삶의 공포에 짓눌려 짜부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인간에게는 그냥 한쪽은 움직이지 않는 벽이겠지만
나에겐 두 가지 다 나를 압박하는 트랩이다. 양쪽 다 막힌 딜레마의 계곡,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늘 우왕자왕하던 내 인생.
그래도 나를 눌러대는 것 중에 삶에 대한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어쩌면 더욱 강한 것이기에 반드시 한 방향으로 죽음쪽으로만 흘러가는 나의 시간이 어쩌면 고맙기도 하다.
나는 짜부라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살았을때 그대로 사진처럼 납작해지기만 좋으련만
삶이여 나를 밀어라. 더욱 세게 밀어라. 죽음쪽으로 바싹 다가가게. 에이 이건 너무 약하게 밀고 있잖아. 그거 밖에 안 되냐. 좀 세게 밀으라니까 음냐..
죽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누가 말하길래 죽고 싶으면 죽어라. 그렇게 말했다.
가장 편하게 죽는 방법은 늙어죽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으로 자살한다.
죽을 날만 바라꼬있는 노인들이 대표적이다.
나는 ...? 보면 몰라 지금 자살하는 중이지. ㅎㅎ
자살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떨어져 죽은건 추락사요. 자살할 생각이 약간 있었는데 발을 헛디뎌 죽은 것은 사고사요. 자살할 마음을 먹고 뛰어내려 죽을려고 올라갔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시 내려오다 미끌어져 죽은건 자살이다. 아님 말구 ㅎㅎ
내가 언젠가 어짜피 죽는데 내 맘대로 죽고 싶어서, 지금 당장 그냥 죽고 싶은데 마침맞게 차에 치여 사고로 죽던 죽을려고 전쟁터에 자원해서 총맞아 죽든, 병걸려 죽든, ... 다 자살이 아니다. 사망진단서엔 사고사나 병사 혹은 기타등등으로 기록된다.
나는 늙어죽거나 병으로 죽을테니 더욱 자살이 아니다. 그게 자살이면 다 자살이지.
그래 좋아서 사는 사람이 어딨나. 죽을 날만 바라꼬있는 노인들은 특히 그렇고. 살고싶다는 생각은 다 해도 죽고싶다는 생각 한 두 번쯤 안 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딨나 음냐.. 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힘들어도 사는거지. 자살이 죄책감 드냐고.. 그럼 늙어서 죽으라고 당장 죽고 싶다고? 그럼 죽어 뭘 망설여 음냐..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고 살고 싶음 살아 괜히 죽는다고 난리피우면서 남의 시선 끌지 말구. 누군 살고 싶어서 사나 그럼. 그래도 힘을 내 이런 말 해주면 꼭 더 죽을려구 하더라. 난 그래서 말해주지. 디져! 당장 뒈져버려! 너같은건 살 가치가 없어! 뭐하러 사냐! 나같으면 진작 자살했겠다. ㅎㅎㅎ 그럼 기분 나빠서 악착같이 살더군. 나가 죽어.. 이런다고 진짜 나가죽으면 이왕 자살할려고 폼잡은거 결심하게 도와주는거고.. 원하던대로 죽었으니 이제 편안해졌군 ㅎㅎ 자살병에 빠진 사람은 누가 건져주면 자꾸 가서 빠지니까 아무도 안 구해줄껄 알면 필사적으로 헤엄쳐서 나오게 되어있으니까. 아님 말구. ㅎㅎ
차라리 납짝하게 차에 깔려 급사하는게 보는 사람이 안 됐어서 그렇지 본인한테는 복이다.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담은. 급사하는 것도 참으로 복중에 복. 보험많이 들어놓거나 보상많이 받고 죽으면 그건 더 좋고.
나는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다. 몸이 안 좋아서 좀 빨리 죽어간다는거 뿐이지. 내 살만큼 살다 가니까 개나 고양이처럼 몇십년밖에 못 살고 일찍 죽는다고 동정할 것도 없다. 개나 고양이들은 지들보다 오래 산 날 부러워할테니까. 200년씩 사는 거북이가 아니면 천년씩 사는 외계인이 겨우 150살먹고 제발 죽여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오래 살다죽은 노인이 150년밖에 못 살아놓고 죽었냐고 불쌍해하면 황당하겠지. 내가 먼저 가서 명당자리 차지하고 있을테니 다들 천천히 와서 말석에 앉으라구 ㅎㅎ
정말 멋진 좌우명을 본 적 있는데 "죽을 때까지 살자"였다.
다들 죽을때까지 산다. 나도 죽을때까지 산다. 그러니까 우린 다 똑같다.
버둥대다 죽는 것과 홀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인간다운가.
가고 싶을때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죽는 것과 사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으니 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문은 노크만 살짝해보고 반만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도 의미는 있다. 어쨌든 죽을려고 빽써서 운 좋아 성공이면 탈옥이요, 실패하면 도리어 죽기싫어져 형기만료될때까지 그 안에서 콩밥먹고 사는 법이니까. 아니면 또 시도해서 결국 성공하던지.
내 아는 사람하나는 약을 먹어도 안 죽고 목을 매도 안 죽으니까 약도 먹고 목도 매니까 결국 죽더라. 하긴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 되도록이면 확실하게 하도록. 두 번 세 번 저승사자 헛걸음하게 만들지 말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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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한 잡담(거창하네 -_-)
맥스폐인
)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
죽는 것도 죽는다는 것
모든 것이 죽음의 일부다. 커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모두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1회용 건전지처럼 남은 전력을 서서히 소비하다 다 쓰면 다른 폐기물들처럼 소각되거나 땅에 묻힌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이고, 인식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실제로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 엄마가 그랬던가.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사냐고. 그럼 낙관적으로 살려고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들고 노래부르란 말인가. 끊임없는 레이스를 한 번도 쉬지않고 열심히 달려 골인하면 바로 죽음이란 도살장이 기다리는 마라톤. 와이리 좋노.. 와이리 좋노.. 이런 노래라도 부를까.
생로병사가 다 고통인걸 어쩌란 말인가. 액운은 혼자 오지 않으며 복은 같이 오지 않는걸. 언제나 좋고 충만한 성취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건 잠깐, 성취와 완성은 곧 혐오의 시작이다. 곧 싫어져 허전함에 다른 또 뭔가를 무언가도 모르면서 이뤄낼 무언가를 찾아 헤메고 또 애쓰며 그걸 계속 반복하다 죽는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한다면서 집안에서 런닝머신굴리듯 하고 있다.
우린 언젠가 죽는다. 그것만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50년뒤에든 100년뒤에든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오늘 지금 내가 손을 얹은 키보드자판에서 손가락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누를때마다 하나의 번뇌씩을 담아 누르는 키보드의 108개의 키에서 108번뇌중 어느 번뇌와 함께 어느 키를 누르다 죽을지도 알 수 없다. 하나하나 누르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버튼을 눌리다 죽을까 저 버튼을 눌리다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산다는 것도 있을수는 없는 일이다.
늘 죽음만 생각하면 즐거울 일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남의 일이라고 어짜피 오래뒤의 일이라고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일따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어쨌든 웃을 수 있는 것이니까.
당신은 내가 대강 낸 통계에 따르면 25%의 확률로 암에 걸려 죽고 15%정도의 확률로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1%미만의 확률로 자살하고 15%의 확률로 기타질병에 걸려 죽고 40%이상의 확률로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정확히 계산해본적 없으니까 아님말구.
죽은 인간들의 사망신고서를 처리하는 업무를 본 적이 있다. 하루에서 최소 두 세껀, 많게는 대여섯껀까지 늘 처리했지. 또 죽었군. 젊은데 죽었네. 내 후배인데 서울에서 의경하다가 강도의 칼에 찔려죽었군. 친구랑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줌만데 자살했군. 우리 엄마랑 같은 계원이네. 아는 할아버지인데 왜 하필 자기 동에서 뛰어내리지 9동 사시는 분이 우리 1동와서 뛰어내리냐구, 자식내외가 미국으로 이민간뒤 외로워서 자살했다는데그래도 사인은 추락사. 아침에 밥 먹다가 창문밖에 왠 할아버지가 날라가시더라. 드래곤볼을 많이 봐서 그런가. 원래 무천도사는 늙어서 못 나는데, 요새는 영감님도 날라다니는군하고 생각하고나서도 어째 좀 이상하더라.
우리 집앞 약국에 약사아저씨는 여름에 하도 더워서 술 먹고 저수지에 차랑 같이 뛰어들었군. 얼마나 더웠으면 지난 여름은 무지 더웠지 왠만해서 더위 안 타는 나도 헥헥댈 정도였으니 이해한다. 나라도 너무 더워 물에 뛰어들고 싶었을꺼야. 술까지 먹었으니 얼마나 더웠을까.
그래도 정수장에 물에 빠져서 자살한 놈, 그 물 더러워서 누가 먹으라고 죽을 곳도 잘 골라죽어야지 음냐. 심보도 더럽게 자기가 먹을 물 아니라고 우물에다 똥누는 격이군. 정수장에 왜 시체버리냐. 이런 살려내서 물먹여 도로죽일 놈.
오줌누다가 바지벗은채로 쓰러져 죽은 놈. 연고가 없어서 경찰이 첨부한 시체사진엔 포즈도 기가 막히다. 시체포즈가 얼마나 섹시한지 처녀들이 사진보고 얼굴이 빨개지더군.
불쌍하다고? 매일같이 사람죽는걸 보는 의사가 어디 사람죽을걸 슬퍼하던가. 오히려 농담꺼리지. 불쌍하고 슬프면 그 일 못한다. 나만 이상한게 아니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다 이상하단 말인가. 같이 농담하고 웃고 이랬는데 음냐. 이런 일 해보면 안다. 불쌍한 것도 하루이틀이지. 젊은데 안 됐다. 아깝다. 그걸로 끝. 뭘 더 어쩌란 말인가. 음냐.. 웃어넘겨야지 달리 웃을 일도 없는데
죽는 사람들 사인은 대부분은 암, 대장암, 위암, 자궁암, 유방암, 무슨 종류든 질병중에 가장 많은 것은 어쨌든 암. 친구 어머니도 자궁암에 걸려 죽었다.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어머니가 만나러 가보니 먹기만 잘 먹고 말만 잘 하더라고 다 나으면 내년에 설악산으로 단풍여행가자고 그랬다면서 사람들이 그 집에 아줌마 다 죽어간다고 그러던거 다 헛소문이라더라고 그랬는데 그 뒤 한 달도 안 되서 그 아줌마는 죽었다.
어릴때 내 비비탄총을 만지려해서 안 주니까 "안돼, 안돼"하고 주문외듯이 특이하게 울던 녀석이었다. 그 이후인지 그 이전인지 우리 집에 왔을때 내가 우리 고양이를 못 만지게했는데 그 착하시던 외삼촌마저 고양이가 뭐가 그렇게 소중하냐고 화를 내신적이 있다. 그땐 고양이가 더 소중했지만, 그렇게 죽을껄 누가 알았겠냐고.. 미안하고 후회될 뿐이다. 외사촌동생도 그 아버지(그러니까 나한테는 외삼촌)이 보는 바로 앞에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배창자가 다 터져 죽었다. 그 뒤로 멀쩡해보이던 외삼촌도 시름시름 앓더니 자다가 돌아가셨고 지병이 있긴 있었지만 몸엔 별 이상이 없었고 그래도 제일 젊었던 막내외삼촌도 앉은 자세로 돌아가셨다.
막내외삼촌은 촉망받던 천재요, 큰 키에 훤칠한 외모였다. 아까운 인재였고, 돌아가신 그 위의 외삼촌 역시 머리는 둔하나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순하기만 한 남에게 평생 해한번 끼친 적이 없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만 먼저 데려간다더니 역시나 그런가보다. 나는 별로 착한 일 한 것도 없는데 요새 자꾸 하늘나라에서 천사들 노래소리가 들리고 2000년간 예수만 오른쪽에 앉혀두었더니 왼쪽이 허전하다고 자꾸 하느님이 나보고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하는 통에 미칠지경이다. 내가 그래도 음덕이 많은지...ㅎㅎㅎ 뭘 벌써 데려가려구 사실 별로 착한 일 한 것도 없는데. 음냐.. 내가 그렇게 착한가 허허...
변변한 직장도 없던 두 분 게다가 병으로 사람구실 못하던 막내를 어쨌든 병을 고쳐 사람구실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40대체력을 유지하면서 왠만하면 노인네한테는 안 해주는 위암수술까지 받고도 끄떡않으시던 외할아버지는, 장성한 아들 둘을 잃자, 밥도 안 드시고 술만 드시다가 결국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시고 내가 오래살아 이런 꼴을 보는게다 싶어 자살이라면 자살인 상여꾼들 들기 편하라고 끝까지 산 사람들 위해서 뼈만 남은 앙상한 그런 죽음을 선택하셨다. 이외수가 말한 내장을 깨끗하게 비운채 아사하는 것, 영양실조로 죽는 것.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나는 직접 보진 못 했지만. 그렇게 자신있으면 낭만 어쩌구는 유가족들한테 말해보라.
댁의 할아버님은 낭만이 뭔지 아시는 분이요. 꽤나 낭만적인 죽음을 택하셨구려... 이랬다간 바로 같이 묻어드린다.
나같은게 뭐가 그렇게 보고 싶냐고... 날 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다고 하시는데도 안 갔다. 돌아가신다음에 가니까 큰외삼촌이 그래도 살아계셨을때 그렇게 보고 싶어하셨는데 이렇게 지금이라도 와줘서 고맙다고 그게 나를 욕하는건지 외삼촌 둘 장례식때도 별 이유없이 안 갔는데 안 올줄 알았던 내가 와서 정말 고마워서 그러는건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살아있으실때 안 가 뵌게 죄스럽지만 그때는 미처 이렇게 후회할껄 생각하지 못 했다.
외할머니 장례식때 알게된 얘긴데, 비몽사몽하실때 하나님한테 가시려고 단식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정신이 희미하시던 와중에도 돌아가시기 전날밤에 그때만은 정신이 멀쩡하셔서 갑자기 외할머니에게 물으셨단다.
"자네 날 사랑하는가"
외할머니는 대답은 안 하고 그저 빙그레 웃으실 뿐이셨다. 무슨 말뜻인지 알구 웃으신게 아니라 진짜 검은머리 파뿌리될때까지 일본에서 만나고 결혼해 8남매두고 평생을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 뭘 그런걸 물어볼 필요나 있나싶은 황당함에 웃으신 것이겠지. 일본에서 커서 자랐다해도 서로 좋아 어쩔 줄 몰라도 어짜피 사랑한다 어쩐다 표현 잘 안 하는 한국사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자기 딸들에게 무슨 비밀이야기하듯이 그러시더란다. 우리 엄마는 자기한테만 그런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모들한테도 죄다 다 그랬다고, 외할머니는 그때 "당연하지요. 그럼요. 백번천번 만번 사랑하지요. 그러니까 아들딸낳고 지금까지 살지요"라고 대답해줄껄 못해준게 아쉽다고 그러셨다고 한다. 남들이 들으면 지어낸 얘기 아니냐고 어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얘기 아니냐고, 그리고 어쩌면 그게 뭐 대단하다구 할지 모르지만, 진짜 나에게는 어떤 감동적인 영화나 지어낸 이야기보다도 와닿는 일이었다. 살화인데다 그게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얘기니까. 네 그럼요. 사랑하니까 결혼했고 그렇게 평생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8남매나 낳으면서 평생 해로했지요. 우리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같은 부부도 또 없을꺼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에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셨다는데 다 봤는데 나만 못 봤다고 나도 아주 냉혈한은 아닌지라 죄책감에 시달리는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외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엔 30만원을 용돈으로 드렸다. 30만원이 뭐 돈이라고 친손자도 안 해주는걸 외손자가 해준다고 엄청 좋아하시더라만은 그래도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몇 달전엔 우리 집에까지 왔다가셨는데 갑자기 떡먹다가 목이 막혀서 돌아가셨다. 남이 그렇게 죽었다는걸 들을땐 웃었는데 그게 우리 외할머니니까 도저히 웃을수가 없다. 콜라를 하도 좋아해서 콜라병에 농약든걸 모르고 단숨에 원샷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던 어떤 연예인의 울먹이는 말에 사회자도 반사적으로 잠깐 웃다가 표졍을 금새 수습하며 바로 애도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안 보는 뒤에 가선 얘기하면서 웃었을지 몰라도 대놓고 웃진 못하지. 떡 먹다 목 막혀 돌아가셨다고 황당하게 생각해도 아무 말 안 하겠다. 나도 황당하니까. 모니터앞에서 웃어도 내가 모르니 나한테 그 사실만 말 안 하면 괜찮다.
내가 미쳤지 그 돈 30만원 그냥 뒀으면 플2를 사도 샀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엄마한테 내가 미쳤었나보다고 그런 말도 한 번 한 적 있긴 있지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줄 몰랐을때 했던 소리고, 지금보면 정말 돌아가시기전에 그나마 내가 해드릴 수 있었던건 그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짜피 내게 돈은 중요한 것도 아니니. 그까짓 돈으로 사람이 흐뭇해할 수 있다면 비싼 것도 아니지.
죽은 뒤 3년안에만 같이 죽으면 천생연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딱 3년만에 돌아가셨다. 우리 친할머니처럼 혼자서 오래 살아계시면 외롭기밖에 더 하겠냐고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뭐 어쨌든 몇년 전부터 외가집은 연연이 초상이다. 이른바 줄초상, 죽을 사람 다 죽었으니 이번엔 내 차례 아닌가 모르겠다.
멀쩡하던 외삼촌이 둘이나 갑자기 죽고 인간들의 사망진단서를 처리한 뒤로
내 자산이 약해질수록 점점 더 두려워진다. 나를 그렇게 멍청하고 둔하고 눈치없는 놈이라고 우습게 알아도 그래봤자 날 무시하는 어른들보다 내가 훨씬 더 오래살껄. 죽은 뒤에 무덤에 그런 사람들 무덤에 침뱉으며 내가 그래도 훨씬 더 오래까지 살아남았지. 인생이란 써든데쓰모드에선 마지막까지 드롭되서 안 떨어져나가구 남는 놈이 이기는거야. 포인트가 높던지 낮던지는 상관없어. 이렇게 내가 침을 뱉아도 당신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누워있잖아..라고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젠 상관없다. 오래 못 살아도, 나는 이미 개, 고양이들의 최고수명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불쌍하다고 생각해도 난 그 사람드이 불쌍한걸. 인생이란 눈물의 골짜기에서 어떻게보면 먼저 탈출하는 사람이 땡잡는거다. 그래서 인간은 유산을 남기지, 돈을 남겨줄테니 잘 해보라고. 난 이제 가니까 끝까지 잘 버텨보라고. 내 게임기는 내 친구 종영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그 인간은 절대 게임이 안 파니까 내 게임기도 아마 창고에 처박더라도 나처럼 팔아버리지는 않지싶다. 겜기에 내 이름 새겨놓으면 누구누구증이라고 박아놓으면 볼때마다 내 생각하겠지 그 놈이 이상한 놈이었지만 같이 오락할땐 그래도 심심하진 않았어.
나는 철권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철권인으로 죽고 싶다. 아니 죽는다. 살아서도 철권인이요. 죽을때까지도 어짜피 나는 가장 뛰어난 내 능력을 발휘하고 대우받은게 철권뿐일꺼다.
어짜피 화장할꺼지만 묘비에 이렇게 새겨주세요. 철권인 모모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철권인으로 죽다. ㅎㅎ
내가 가장 오래했던 게임 철권씨디와 함께 묻어주세요. 내 인생의 4분의 1이상을 철권과 함께 먹고 자고 같이 꿈도 꿨어요. 아참 게임기도 같이요. 그리고 손에 레버를 쥔채로 관뚜껑을 닫아주세요. 혹시 관속에서 깨어나면 심심할때 그거라도 하게. 결국 나의 현란한 광대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여한일 뿐입니다.
어쨌든 난 내 동생들처럼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죽진 않았다.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만 5세가 되기전에 혹은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죽은 아이가 한 둘이 아니다. 평균수명을 깍아먹는건 대부분 아이들이다. 그만큼 한국의 영아사망율은 아직 높다.
인간의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이름도 붙여지기전에 무덤도 없이 누구하나 기억해주는 이도 없이 그 부모에 의해 모체에서 뜯겨져나와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 손으로 걸레처럼 찢겨 살해된뒤 쓰레기통에 유기된 동생들이 내 나이또래라면 누구나 최소 몇 명은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약한 새끼를 어미가 인정사정없이 물어죽인다. 특히 독수리는 죽은 새끼의 살점까지 남김없이 살아남은 새끼에게 뜯어먹인다. 어쨌든 우리도 짐승들의 그런 잔인한 처사를 비인간적이라며 비난할 수 있을까. 자기들이 한 짓은 절대 모른다. 물론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 거리낌없이 동생들을 죽인 부모님을 비난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지만 인큐베이터에 넣으면 살릴 수 있는 미숙아를 낳는다고 다 키우는줄 아느냐고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노인들의 매정함이 그냥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지금 내가 누릴 이런 금전적인 여유를 서너명의 형제들과 함께 나눠야했다면 어떤 동물이나 가지고 있는 내게도 어떤 인간에게도 약간 씩은 있는 형제살해유전자가 여러 동생들을 학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나있는 동생도 내가 받을 사랑의 절반밖에 못 받는다고 구박하면 할수록 나는 부모님 눈밖에 났으니까 부모님이 짐승들보다 더 매정하게 동생들을 죽여준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며, 오히려 내겐 고마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다른 동물이었다면 장남이라도 약한 나를 버렸을 것이다. 나는 버림받지 않기위해 먼저 태어난 유리함을 이용해 동생들을 구박하고 먹이를 뺏고 심지어 물어죽여야했을지도 모른다.
열악한 환경에서 다 낳아 키운다는 것 역시 학대다. 그렇게 애초에 버릴 생명을 아예 만들지 않았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들이 먹었어야할 음식을 살 돈으로 나는 오락을 하고 형제들과 같이 써야했을 따뜻하고 넓은 방에서 고양이를 둘 씩이나 기르면서 여유있게 생활한다. 옷은 어떻고... 별 볼일 없는 장남이라도 아늘 하나밖에 없다고 늘 그저 우리 아들 우리 아들하면서 목매다는 부모님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지나친 관심이 동생들이 있었더라면 돌아오지 않았을 나에겐 과분한 복이다.
살만큼 살아봤다. 이젠 지겹다. 내가 기르다 잃어버린 개도 고양이들도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 그들에 대한 내 기억이 죽지않은한 나는 죽을때까지 평생 죽을정도로 괴로울 것이다. 10년도 넘었지만 갈수록 더 슬프기만 하다. 오히려 그냥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면 그리고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두고두고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드디어 욥은 침묵을 깨트리며 입을 열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저주를 받아라
내가 임신이 되던 그 밤도 저주를 받아라.
그 날이여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려라.
빛이여, 다시는
그 위에 비치지 말아다오.
흑암아, 사망의 그늘아
그 날을 너의 것이라고 주장하여라.
구름아, 그 위를 덮어
빛이 비치지 않게 하여라
그 밤이여
짙은 어두움에 휩싸여 버리고
달력에서도 삭제되어
그 해의 달과 일수에 계산되지 말아라
차라리 그 밤이 적적하고
기쁨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뻔하였다
날을 저주하는데 익숙한 자들아,
그 밤을 저주하여라
그 날 밤은
새벽 별도 빛을 내지 말고
기다리던 빛도 나타나지 말며
아침 동녘도
보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나를 태어나게 하여
이처럼 큰 슬픔을 당하게 한
그 날을 저주하고 싶구나!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어째서 어머니가 나를 무릎에 받아
젖을 빨게 하였는가?
내가 그때 죽었더라면
지금쯤은 평안히 잠들어 쉬고 있을텐데
그것도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고 살던
고대 왕들과 고관들,
그리고 금은 보화로 집을 채운 황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때 죽었더라면
죽어서 나와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땅 속에 묻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 곳은 악한 자들이 말썽을 부리지 못하고
피곤한 자들이 쉴 수 있는 곳,
죄수들까지도 평안을 누리고
포악한 간수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
그곳은 높고 낮은 자의 차별이 없고
종이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곳이다.
어째서 고난당한 자에게 빛을 주고,
마음이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었는가?
이런 자들은 죽기를 기다리고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 죽음을 찾아도 그것이 오지 않는구나!
이들은 죽어서 땅 속에 묻혀야만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앞날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째서 생명이 주어졌는가?
먹기도 전에 탄식이 먼저 나오고
물같이 쏟아지는 신음소리는 막을 길이 없구나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것이
결국 나에게 닥치고 말았으니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이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고난뿐이구나!"
(욥기 3:1~ 3:26)
영혼은 물질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며, 기억과 사고란 분자상태의 물질이 만들어내는 전기적인 화학작용이다.
인생은 바람과 같이 현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들은 삶이란 바로 잠잠하던 그 물질들이 응집되어 활발한 분자운동을하는 찰나의 혼돈기이며 또 다시 우리는 분해되어 어떤 생물의 자양분이 될때까지 오랜 고요함과 침묵을 유지한다. 윤회한다고 믿는 불가의 이론은 나같은 유물론자와도 어쩌면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윤회란 영혼의 윤회가 아닌 물질의 순환일지도 모른다. 육체도 물질, 영혼도 물질이 일으키는 신기루니까.
나는 땅에 묻혀있는 내 발을 보며 늘 어디론가 내가 가고싶은 곳이 생길때는 발을 파내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내 발이 땅속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내 자신이 팔도 없이 내 힘으로는 어떻게도 뽑을 수 없는 깊히 뿌리박힌 나무였다는걸 알아버렸을때 나는 금새 흙을 덮어버렸어야했다. 모른채 그냥 묻어두었더라면, 아니면 아예 애초에 그걸 알만한 능력이나 기회가 없었더라면... 많은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모른척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걸 알고 있다는데서 자부심을 느끼는지 모른다.
우연히 바람에 패여 드라나 있는걸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보게된 우연한 행운인지 불행인지에 자부심을 느낄만큼 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내세울게 없다는 것인지. 어쨌든 그 사실을 잃는다는 것 자체가 그 조차도 잃는다는 두려움에 그럴 수 없게 한다. 어쩌면 운명이 나에게 내 붙박힌 뿌리만을 볼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을 다시 흙으로 덮을만한 기회는 주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신이 언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줬던가. 신은 성경에서 뱀에 꼬시킴에 넣어가서 남자를 꼬셔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따먹도록 했으니 그 벌로 여자는 다달이 생리하고 배아프게 애낳고 힘들게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이나 보고 남자도 여자한테 속아서 사과 먹었으니 너도 나가서 힘들게 일해서 돈이나 벌어오란 말은 한 적이 있다. 인간은 신도 발명하고 자유의지도 발명했다. 어쩌면 전지전능한 신의 계명까지 어길 수 있도록 발명한 자유의지는 더 위대한 전지전능한 인류최고의 발명품이다. 인간은 과학법칙에 조금도 영향받지않고 인과의 법칙에 위배되는 전지전능한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현상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피노자 이런 철학자 이름 들먹이니까 되게 유식해보이겠다 아님말구 나름대로 유식해보이려고 하면 그런가보다하고 성의를 봐서라도 좀 유식해보인다 해줘야.. -_-) 아니면 일부러 무지하려고 노력하는건가. 조금만 생각을 뻗치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모르는게 똑똑한건지 평생을 모른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요샌 꽤나 많다.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한건 사실이다. 네가 오른쪽 길을 가든 왼쪽 길을 가든 안 가든 어짜피 정해져있고 심사숙고하든 안 하든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정해져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맞는 사살이더라도 과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기계란걸 알아버린 안드로이드처럼 인간이 기계란걸 알아버린 인간기계론자는 절망에 빠진다.
젊은때 누구나 그럴수 있는 흔해빠진 운명론자군. 바보같은... 그렇게 따지면 물도 기계.... 아니라고 우기면서 웃어 넘겨도 할 말은 없다. 내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알게해줘서 나나 그 쪽이나 득되는 것도 없다. 그래도 몇몇 이유를 들어 아니라고 끝까지 우길테니 내 입만 아프다. 그럼 편하게 모른채 살라구, 없는걸 있다고 믿는 종교나 있는걸 없다고 믿는 천재나 있는걸 있다고 믿는 바보나 없는걸 없다고 믿는 바보나 다 똑같다. 누가 바보이고 천재인지조차 알 수도 없다.
이젠 5년넘게 진실속에 헤멨으니 다 잊어버리고 자유의지라는 생긴지 오래된 신식종교에 환상에 빠져들 때다. 믿을 수 있으면 나만 빼고 우리 가족 다 믿는 예수공갈교를 같이 믿어도 좋지. 그러면 죽을때 천국간다고 생각하니 편하게 죽을테니. 가장 두려운 것을 없애기위해 없는걸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의 능력이다. 여러분은 내가 활용하지 못한 망상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
어떤 인간이 기계답지 못하고 인간다운 행동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자유의지를 실행하는 것을 볼때,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풍부한 감수성과 인간미를 발견하겠지만 나는 무질서해보이는 복잡한 패턴속에 내재된 알고보면 몇 가지 단순한 원칙뿐인 그의 행동양식속에서 기계를 발견한다. 인간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다. 도저히 기계같지않고 인간이 만든 기계와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로봇의 인공지능은 파리와 모기수준이다. 몸의 절반에 돌에 짓눌려 납작해져도 끝까지 먹이를 물고 비틀대며 본능적으로 개미굴로 걸어들어가는 개미와 에프킬라을 마시고 땅바닥에서 날개짓으로 뱅글뱅글 제자리를 돌기만하는 파리같이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로봇보다 정교한 마이크로 로봇에게서 위대한 신의 손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내 자신에게서도 가장 확실히 발견한다. 이 세상 모든 사물, 온갖 곳곳에서 신을 발견하면 꼭 한 마디해주지. fuck you, 왜 만들었니. 재수없게... 니가 만들었음 내가 니꺼야? 아 재수없어.. ㅎㅎ
낙엽이 제멋대로 춤추듯 바람에 휘날린다하여 낙엽 스스로 바람의 도움없이 빙글거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연히 운 좋게 혹은 운 나쁘게 물에 떠내려가는 조각배를 타서 다시 다른 흐름을 탈 수는 있다. 그게 우연해보일지더라도 그것은 필연일 뿐이다.
개도 이성이 있다. 한 대 맞으면 개는 다시는 자신의 이성으로 밥상의 음식을 먹고픈 마음을 자제한다. 인간이 감빵갈까봐 범죄를 저지르는 충동을 억제하는 이성과 마찬가지다.
그 이성이 그 이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이성을 잃는건 오히려 인간쪽이 흔하다. 그렇게도 개만 못한 짐승이 되고픈가. 나쁘진 않지.
인간은 생각으로는 못하는 것이 없다. 그만큼 대단하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래, 나도 신의 아들이다. 또 누가 혹시 아나. 2000년뒤에는 내가 예수처럼 숭배받을지.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나라에 많은 사이비교주들 다들 죽고나면 전설이 되는거지. 지금은 이단사파더라도. 예수도 처음엔 이단사파라서 자기가 구세주고 신이라던 미친 놈이라서 그래서 사형당한게 아닌가. 지금도 자기가 예수고 심지어는 예수랑 석가모니랑 마호멧마저 자기가 보냈고 자기를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가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 바로 죽는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살아있는 인간도 있다. 그 분도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열심히 하면 몇 천년뒤엔 예수나 마호멧이나 석가모니처럼 승천했다는 전설로 남으실 분이지.
믿지말래도 믿고 싶다. 하지만 신앙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채로 뽑혀버린걸 어쩌랴. 하나님, 없는 천사라도 보내시어 신앙이 뽑힌 자리에 제발 뭐든 다시 심게 해주시옵소서.
나는 뿌리가 드러난 나무처럼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언제까지 흔들릴지 흔들리다 결국엔 죽을지, 죽고나서 쓰러져야만 흔들림이 멈출지, 방황은 아직 얼마나 더 오래있어야 끝나는지.
어떻게보면 제자들 아무도 계승하지 않았던 프로이트의 이론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동물도 스스로 자해한다. 꼬리를 물어뜯기도하고 자기 얼굴을 할퀴기도 또 911테러당시 WTC의 인간새처럼 천길벼랑으로 뛰어내리기도 한다.
인간은 원래 물질이었으니 원래의 편안한 상태인 물질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죽음의 본능은
끝까지 다다른 막다른 골목에서만 발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 다른 동물에게서도 급박한 상황으로 몰렸을때 소극적인 자해의 본능은 발견된다.
어쩌면 사람들은 생의 본능을 쫓아사는게 아니라 아니라 죽음의 본능에 쫓겨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디애나존스역할을 맡은 해리슨 포드를 파라오의 무덤에서 양쪽으로 압박하는 두 개의 판처럼 인간은 누구나 한쪽엔 죽음의 공포, 또 한 쪽엔 삶의 공포에 짓눌려 짜부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인간에게는 그냥 한쪽은 움직이지 않는 벽이겠지만
나에겐 두 가지 다 나를 압박하는 트랩이다. 양쪽 다 막힌 딜레마의 계곡,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늘 우왕자왕하던 내 인생.
그래도 나를 눌러대는 것 중에 삶에 대한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어쩌면 더욱 강한 것이기에 반드시 한 방향으로 죽음쪽으로만 흘러가는 나의 시간이 어쩌면 고맙기도 하다.
나는 짜부라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살았을때 그대로 사진처럼 납작해지기만 좋으련만
삶이여 나를 밀어라. 더욱 세게 밀어라. 죽음쪽으로 바싹 다가가게. 에이 이건 너무 약하게 밀고 있잖아. 그거 밖에 안 되냐. 좀 세게 밀으라니까 음냐..
죽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누가 말하길래 죽고 싶으면 죽어라. 그렇게 말했다.
가장 편하게 죽는 방법은 늙어죽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으로 자살한다.
죽을 날만 바라꼬있는 노인들이 대표적이다.
나는 ...? 보면 몰라 지금 자살하는 중이지. ㅎㅎ
자살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떨어져 죽은건 추락사요. 자살할 생각이 약간 있었는데 발을 헛디뎌 죽은 것은 사고사요. 자살할 마음을 먹고 뛰어내려 죽을려고 올라갔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시 내려오다 미끌어져 죽은건 자살이다. 아님 말구 ㅎㅎ
내가 언젠가 어짜피 죽는데 내 맘대로 죽고 싶어서, 지금 당장 그냥 죽고 싶은데 마침맞게 차에 치여 사고로 죽던 죽을려고 전쟁터에 자원해서 총맞아 죽든, 병걸려 죽든, ... 다 자살이 아니다. 사망진단서엔 사고사나 병사 혹은 기타등등으로 기록된다.
나는 늙어죽거나 병으로 죽을테니 더욱 자살이 아니다. 그게 자살이면 다 자살이지.
그래 좋아서 사는 사람이 어딨나. 죽을 날만 바라꼬있는 노인들은 특히 그렇고. 살고싶다는 생각은 다 해도 죽고싶다는 생각 한 두 번쯤 안 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딨나 음냐.. 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힘들어도 사는거지. 자살이 죄책감 드냐고.. 그럼 늙어서 죽으라고 당장 죽고 싶다고? 그럼 죽어 뭘 망설여 음냐..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고 살고 싶음 살아 괜히 죽는다고 난리피우면서 남의 시선 끌지 말구. 누군 살고 싶어서 사나 그럼. 그래도 힘을 내 이런 말 해주면 꼭 더 죽을려구 하더라. 난 그래서 말해주지. 디져! 당장 뒈져버려! 너같은건 살 가치가 없어! 뭐하러 사냐! 나같으면 진작 자살했겠다. ㅎㅎㅎ 그럼 기분 나빠서 악착같이 살더군. 나가 죽어.. 이런다고 진짜 나가죽으면 이왕 자살할려고 폼잡은거 결심하게 도와주는거고.. 원하던대로 죽었으니 이제 편안해졌군 ㅎㅎ 자살병에 빠진 사람은 누가 건져주면 자꾸 가서 빠지니까 아무도 안 구해줄껄 알면 필사적으로 헤엄쳐서 나오게 되어있으니까. 아님 말구. ㅎㅎ
차라리 납짝하게 차에 깔려 급사하는게 보는 사람이 안 됐어서 그렇지 본인한테는 복이다.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담은. 급사하는 것도 참으로 복중에 복. 보험많이 들어놓거나 보상많이 받고 죽으면 그건 더 좋고.
나는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다. 몸이 안 좋아서 좀 빨리 죽어간다는거 뿐이지. 내 살만큼 살다 가니까 개나 고양이처럼 몇십년밖에 못 살고 일찍 죽는다고 동정할 것도 없다. 개나 고양이들은 지들보다 오래 산 날 부러워할테니까. 200년씩 사는 거북이가 아니면 천년씩 사는 외계인이 겨우 150살먹고 제발 죽여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오래 살다죽은 노인이 150년밖에 못 살아놓고 죽었냐고 불쌍해하면 황당하겠지. 내가 먼저 가서 명당자리 차지하고 있을테니 다들 천천히 와서 말석에 앉으라구 ㅎㅎ
정말 멋진 좌우명을 본 적 있는데 "죽을 때까지 살자"였다.
다들 죽을때까지 산다. 나도 죽을때까지 산다. 그러니까 우린 다 똑같다.
버둥대다 죽는 것과 홀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인간다운가.
가고 싶을때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죽는 것과 사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으니 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문은 노크만 살짝해보고 반만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도 의미는 있다. 어쨌든 죽을려고 빽써서 운 좋아 성공이면 탈옥이요, 실패하면 도리어 죽기싫어져 형기만료될때까지 그 안에서 콩밥먹고 사는 법이니까. 아니면 또 시도해서 결국 성공하던지.
내 아는 사람하나는 약을 먹어도 안 죽고 목을 매도 안 죽으니까 약도 먹고 목도 매니까 결국 죽더라. 하긴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 되도록이면 확실하게 하도록. 두 번 세 번 저승사자 헛걸음하게 만들지 말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