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충북 기념물 90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청년기까지 한자로 ‘寀浩’로 쓰다가 국외 망명을 전후하여 ‘采浩’로 바꾸었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18대 손이 된다.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산동대가로 지칭되기도 했다. |
|
|
▲ 묘역 입구에 위치한 단재기념관 |
신채호는 어려서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아홉 살에 『통감(通鑑)』전질을 해독하고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다. 열두세 살 때에 능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
|
|
▲ 기념관 좌측으로 동상/사당/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이 무렵에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서 활동하였다. 스물 두 살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 등과 개화와 자강의 교육사상을 펼쳤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신규식, 신백우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스물여섯 살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논설을 쓰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
|
|
▲ 신채호선생 사당 삼문인 정기문(正氣門) |
▲ 단재영각(丹齋影閣) 내부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
그러던 중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어 무단통치가 이루어지자 독립운동 기지를 국외로 옮기자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신채호도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그 해 여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
|
|
▲ 최근에 이장한 파묘터를 아래 위에서 바라 본 모습. 우측 사진 좌(기념관), 우(사당) |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1916년 3월에는 북경에서 애국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소설 「꿈하늘(夢天)」을 썼다. 1918년경부터 그는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
|
▲ 사당 뒷편에서 그 너머로 최근에 이장한 신채호선생 묘역 전경 |
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대립되는 『신대한신문』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
|
|
▲ 신채호선생 묘 |
그는 이해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그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거주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도 심취했다. |
|
|
▲ 묘역 내 장명등과 문인석 모습 |
1927년에 그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면서 국외에서나마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그의 행동투쟁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그해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쉰일곱 살에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
|
|
▲ 좌우 측면에서 바라 본 신채호선생 묘역 |
신채호는 평소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그의 유해를 들여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上黨山, 419m) 기슭 옛 집터에 암장하였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긴 비석을 신백우가 몰래 세웠다. |
|
▲ 신채호선생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 |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1978∼1979년 사이에 묘역을 정화하고 이 곳에 사당을 세웠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으로 맞배지붕집이다. 정면에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당 앞에 ‘정기문(正氣門)’이라 이름 붙인 대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설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역에는 한용운 등이 세운 묘표석과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다. |
국적 없는 ‘신채호 선생’... 한국은 누구의 나라인가
며느리 이덕남 씨 “호적 찾으러 평생을 법정투쟁” 토로 매국노가 대우받고 독립운동가는 천대받는 세상. 남편을 91년에 떠나보낸 이씨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라며 “일생을 재판과 재판을 거듭하며 법정에서 자신의 정체를 확인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토로했다. 신채호 선생에게 호적이 없다는 사실도 놀랄 일이지만 1912년 일제의 ‘조선민사령’에 응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선생과 마찬가지로 무국적 상태라는 것은 충격적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에 출생, 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황성신문 등에 강직한 논설을 써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선생은 영웅전을 써서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북돋기 위해 노력했으며 ‘조선상고사’ 등 역사서 저술에도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게 되고 1936년 1월 중국 여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씨는 “해방 후 시아버지의 유골이 충북 청주 낭성면 귀래리로 귀향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허가가 나지 않았다”면서 “우여곡절 끝에 공개적으로 암장했지만 이를 도왔던 면장은 파면조치를 받았다”고 말했다. 무국적자였던 선생이 남편의 노력으로 1986년에서야 ‘父(부) 신채호’로 입적됐으나 선생 자신의 국적은 여전히 없는 상태라는 이씨는 “남편이 일흔 한 살에 사망했는데 예순 여섯에 아버지를 호적에 올렸으니 그 세월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토로했다. 이씨는 시아버지가 입적되면서 자식에게 할아버지의 흔적은 찾아 줄 수 있었으나 현재 선생의 땅을 상속받는 문제로 또다시 법정 소송 중이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친일파는 재산찾고 독립지사는 국적없어 떠돌아 그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가 시아버지 소유의 밭이고 ‘299’가 집으로 이 일대가 약 2000여평 정도 된다”면서 “1912년 당시 토지대장에 11월 25일자로 ‘신채호의 田(전)’ 등 정확하게 기재돼 있음에도 후손에게 상속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현재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있는 선생의 묘와 사당은 1993년 ‘충북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돼 청원군이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문화재로 지정해 ‘말뚝’만 박으면 다 되는 것이냐”면서 “봉분이 붕괴될 위기에 있었는데도 지방 문화재라는 이유를 들어 손을 쓰지 않아 결국 유가족들이 나섰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해 신채호 선생 사당 뒤편에 안치된 묘가 봉분이 수차례 붕괴하는 등 상태가 불안정해지자 묘를 선생의 옛 집터로 이장해 가묘를 설치했다. 가묘를 설치한 후 그는 묘를 이장하려 했으나 ‘지방 문화재는 유가족도 함부로 손댈 수가 없다’는 규정에 막혀 군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한 달 동안 선생의 묘가 방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씨는 “결국 군도 뾰족한 수가 없어 이장을 허가했는데 나는 오히려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지탄을 받았다”면서 “매국노들은 땅을 속속 찾아주면서 지사들은 묘자리 하나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기가 막힌 것은 시아버지와 연결고리가 없으니까 상속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호적이 있으면 재산상속이 될 텐데 호적은 커녕, 국적도 없으니 주권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것이죠. 제 자식이 신채호 선생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하는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다시 대한민국과 싸우고 있는 셈입니다.” 아들이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면 무조건 법정으로 간다는 것을 수순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라는 이씨는 “‘死者(사자)는 치적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순국선열들의 후손들은 억울하게 당하고 산다”고 말했다. “친일파들은 당시 조선의 귀족이었잖아요? 국적도 있고 호적도 척척 올리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도 수십만평에 이르죠. 친일파 재산을 환수해도 한이 안 풀리는데 있는 땅에서 조상의 넋을 기리며 살고 싶은 이 소망마저 짓밟히니 정말 이민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사실 이씨는 자신의 정착지가 없다. 현재 소송 중에 있는 서울의 아들네와 중국에 있는 딸의 집을 오가면서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씨는 “남편이 죽고 두 달 후 한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이 신채호 선생의 손자라고 주장했다”면서 “독립유공자 연금을 노린 것 같은 데 이 사람이 친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기까지 민사소송 7년, 형사소송 3년으로 10년을 보냈다. 10년 세월 동안 법정싸움을 했는데 남은 것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 동안의 수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남편의 묘까지 파서 DNA를 추출했던 기가 막힌 일까지 해야 했다. 이제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며 “돈도 돈이지만 완전히 패망한 것”이라고 말을 잇지 않았다. 현재 아들이 대법원에서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자 확인의 소’를 진행하고 있다는 이씨는 “살면서 사사건건 시아버지와 관련된 일은 법정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라며 “독립운동가 예우는 둘째치더라도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니 대한민국에서 이를 확인받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우리 땅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더 당하니까 분통이 터져서 이럽니다.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 아닙니까. 사망했더라도 단 하루라도, 아니 단 한시간이라도 호적을 만들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1시간 후 사망신고를 내더라도 나라에서 최소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후손들이 호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이것이 선열들을 예우하는 국가의 의무입니다.” 독립운동가 유가족으로서 당당하고 싶다는 이씨의 말은 긴 여운이 남았다. 2005.04.30 장경순 기자 데일리서프라이즈 |
신채호 묘 이장 소동
‘수맥 나쁘다’ 며느리 파헤쳐 청원군 제지…가묘에 유골 안장 입력 : 2004.09.22 23:33 05'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며느리가 충북도 지정 문화재인 선생의 묘지를 불법으로 이장하려다 당국의 제지를 받았다.
단재 선생의 며느리 이모(60·서울 강남구 포이동)씨는 22일 새벽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위치한 단재의 묘지를 굴착기로 파헤쳐 인근으로 이장하려다 주민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청원군 직원들에 의해 저지됐다.
단재의 묘지는 봉분이 완전히 파헤쳐지고 유골도 수습됐다. 청원군은 묘지 인근에 가묘를 설치해 선생의 유골을 임시 안장했으며, 이씨와 추후 대책을 협의중이다.
이씨는 “묘소에 수맥이 흐르는 데다 1998년부터 최근까지 14차례나 붕괴돼 다른 곳으로 이전해달라고 청원군에 공문 또는 구두로 여러차례 요구해 왔다”며 “군에서 대책을 세워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체적으로 이장을 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 대덕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 언론인인 단재 선생은 1936년 중국 만주 뤼순(旅順)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유족들은 이듬해인 1937년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청원 낭성에 유골을 안장했다. 충북도는 1993년 선생의 사당과 묘소 일대를 지방기념물 제90호 지정했으며, 청원군이 이를 관리해왔다.
청원군 관계자는 “지난 7월에도 단재 선생의 묘소가 장마에 무너져 700여만원을 들여 수맥차단 작업까지 벌였다”고 말했다. |
<클릭 이사람>“단재 신채호 선생 부부는 왜 ‘남남’이어야 합니까”
19년간 시아버지 국적회복 등 몰두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씨
단재 신채호(1880. 12. 8~1936. 2. 12) 선생의 유일한 유족인 며느리 이덕남(67·중국 북경 왕진신청)씨가 최근 청주를 찾았다.
이씨는 오는 17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열릴 시아버지 신채호 선생과 시어머니 박자혜 여사의 부부관계 인정에 관한 판결을 보기 위해 중국에서 지난 3일 귀국했다. 청주에는 동상 건립과 관련해 유족회와 청원군 등과 협의 차 들렀다고 전했다.
그는 남편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40년 전 아버님 묘소를 찾은 날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로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으로 아버님 묘소를 찾았는데 묘소에는 표석 하나와 잡초만이 무성했어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친 분인데 공로가 하나도 인정되지 않는 것 같아 남편이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모릅니다.”
단재 선생 묘의 모습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일은 생전의 단재 선생의 모습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그가 단재 선생의 며느리로 살고 있는 계기가 됐다.
“1970년대 초 첫 아이를 낳고 호적등재를 위해 관공서를 찾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남편(고 신수범)이 호적에 사생아로 등록돼 있었던 거예요. 그 이후로 시아버지의 국적을 찾기 위해 무척이나 힘들게 뛰어다녔습니다.”
1912년 일제가 도입한 새로운 호적제에 등재를 거부해 차라리 ‘무국적자’의 길을 선택한 시아버지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이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단재 선생은 1912년부터 2009년까지 무려 97년 동안이나 무국적자로 남아야 했다. 지난 1991년 남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에도 시아버지의 국적을 회복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후 2009년 3월 18일까지 19년 동안 시아버지의 국적을 회복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 땅찾기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해 부를 누리고 있을 때 신채호 선생의 아들인 고 신수범씨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밝힐 방법이 없어 강요된 사생아로 살아야만 했다. 신채호 선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이씨의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해 지난 2009년 단재 선생은 국적 회복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적회복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법은 시어머니 박자혜 여사와 단재 선생과의 부부관계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후로 이씨는 시부모님의 부부관계 법적 인정을 위해 뛰고 있다. 북경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가 한국에 온 것도 17일 예정인 2차 판결을 보기 위함이다.
“남편도 죽고 없어 인정할만한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게 부부관계를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에요. 17일 판결을 통해 부부라는 당연한 사실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씨는 국가도 인정해 주지 않는 시아버지 신채호 선생과 시어머니 박자혜 여사의 부부관계를 청원군에서 먼저 인정해 함께 동상을 제작해 준다는 데에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실 저도 아버님을 뵌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전국에 5개 정도의 아버님 동상이 있는데 다 제각각입니다. 이번에 만드는 동상은 신채호 선생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을 비롯해 문중이나 기념사업회와 함께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제작됐으면 좋겠습니다.”
단재 선생과 박자혜 여사의 모습과 가장 닮은, 사실적인 동상이 제작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한 번 제작된 동상은 오랜 세월 존재하기 때문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 욕심 같아서는 오는 10월 16일 어머니 기제에 맞춰 동상 제막을 하고 싶습니다만 내년 2월에 동상 제막이 예정돼 있습니다. 그때까지 고증을 거쳐 사실에 입각한 동상이 제작되길 바랍니다.” ▶글·사진/김재옥 |
신채호선생 묘역 위치도 |
|
화살표 ↑ 상단의 봉분이 이장한 신채호선생 묘역이고, 파란 화살표 부분이 파묘터입니다.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 |
|
지도 우측 상단의 화살표 위치에 신채호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충북도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