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에서 항구로, 정지에서 귀항으로
― 디카시 「귀항(歸港)」의 이미지와 언어적 긴장
나병훈 / 문학평론가
귀항(歸港)
거친 파도 스러지며
고요의 음(音)으로 포말지는
둥근 항구
세상 품은 푸른 응시 하나
닻을 내린다 가부좌를 틀고
- 悳泉 나병훈
디카시는 사진과 문자가 결합한 장르이지만, 사진과 문자의 단순한 병치만으로 하나의 시적 작품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보여주는 현상과 문자가 발화하는 의미가 서로 침투하고 변형되면서,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제3의 의미공간을 생성할 때 디카시는 비로소 독자적인 미학적 자립성을 획득한다. 그런 점에서 「귀항(歸港)」은 사진과 언어의 관계를 비교적 치밀하게 조직하면서, 하나의 작은 시각적 사건을 존재론적 사유로 확장해 보이는 작품이다.
사진에는 낡고 거친 흰 벽면이 있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균열이 생긴 표면 한가운데 둥근 구멍이 나 있다. 그 어두운 구멍 안쪽에 초록빛의 청개구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사진 자체는 극히 소박한 일상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시의 제목과 문자가 개입하는 순간 이 소박한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의 구조를 갖게 된다.
"거친 파도 스러지며
고요의 음(音)으로 포말지는
둥근 항구"
이 세 행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진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도’와 ‘항구’가 문자에 의해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벽의 구멍을 보여주지만 시는 그것을 ‘항구’라고 부른다. 사진의 물리적 대상과 시적 대상 사이에 변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둥근 항구’는 작품의 핵심적인 시어다. 사진 속 구멍은 물리적으로는 단순한 파손의 흔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 구멍의 원형적 형상을 ‘둥근 항구’로 전환한다. 이때 구멍은 더 이상 결핍이나 파손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머물게 하는 공간으로 의미가 역전된다.
구멍이 항구가 되는 순간, 결핍은 귀환의 장소가 된다. 이러한 의미의 전환은 제목 「귀항」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귀항’이라는 말은 이미 출발과 이동과 귀환이라는 시간적 서사를 내포한다. 그러나 작품 안에는 실제 배도, 바다도, 항구도 없다. 그럼에도 제목은 사진 속 작은 구멍을 하나의 항구로 만들고, 그 안에 웅크린 청개구리를 항해를 마친 존재로 읽게 한다. 제목은 사진의 외부에 덧붙여진 장식적 명명이 아니라, 사진을 새롭게 보게 하는 해석의 장치로 기능한다. 이때 작품의 미학적 긴장은 ‘거친 파도’와 ‘고요’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거친 파도 스러지며
고요의 음(音)으로 포말지는"
‘거친 파도’는 역동적이고 소란스러운 이미지다. 반면 ‘고요’는 정지와 침묵의 상태다. 그런데 시인은 그 고요에 다시 ‘음(音)’을 부여한다. 고요는 본래 소리가 없는 상태인데, 작품에서는 오히려 ‘고요의 음’이 된다. 침묵이 소리를 갖는 역설이다. 더욱이 ‘포말’은 파도가 남기는 물리적 흔적이다. 따라서 ‘파도’와 ‘포말’은 서로 의미적으로 결속되면서도, ‘거침’과 ‘고요’는 서로 대립한다. 이 상반된 요소들이 한 문맥 안에 놓이면서 작품은 단순한 평온의 정조를 넘어선다.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 파도의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친 움직임의 끝에 고요가 오지만, 그 고요 속에는 여전히 움직임의 잔상이 남아 있다. ‘고요의 음’과 ‘포말’은 바로 그 잔존하는 흔적을 감각화한다.
이러한 긴장은 사진의 표면과도 대응한다. 사진 속 벽은 결코 매끈하지 않다. 벗겨지고 갈라지고 녹슨 흔적이 중첩된 거친 표면이다. 그러므로 ‘거친 파도’는 실제 바다의 재현이 아니라, 사진의 물질적 질감을 시적 언어로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의 표면적 질감과 언어의 해양적 이미지가 서로를 비추면서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귀항」은 디카시로서 중요한 성취를 보여준다. 사진이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진을 다시 보게 하고, 사진이 다시 언어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사진과 문자가 서로의 종속물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러한 공간적 전환을 더욱 확장한다.
"세상 품은 푸른 응시 하나"
사진 속 청개구리는 작고 미미하다. 그것은 벽의 거대한 표면에 비하면 거의 하나의 점에 가깝다. 그러나 시인은 이 작은 생명을 ‘세상 품은’ 존재로 확대한다. 물리적 크기와 정신적 크기의 역전이다. 여기서 ‘푸른’은 사진의 초록빛 형상과 연결되는 시각적 색채어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정서적 공간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푸른’ 다음에 놓인 ‘응시’다. 시인은 청개구리의 눈을 단순히 ‘눈’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눈’이 신체적 기관이라면 ‘응시’는 의식적 행위다. 그 결과 사진 속 생명체는 단순히 구멍 속에 숨어 있는 청개구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바깥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주체로 상승한다.
특히 ‘세상 품은’과 ‘작은 구멍’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작은 구멍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생명이 오히려 ‘세상’을 품는다. 공간적으로는 축소되어 있으나 의미적으로는 확대된다. 이것은 작품의 중요한 역설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품고, 폐쇄된 공간이 열린 세계를 품는다. 사진의 구멍은 안쪽으로 파인 폐쇄적 공간이지만, ‘응시’는 바깥을 향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닫힘과 열림의 이중구조가 형성된다. 몸은 안으로 들어가 있지만 시선은 밖으로 나간다. 존재는 움츠러들어 있지만 의식은 세계를 향한다. 그리고 이 역설은 마지막 행에서 절정에 이른다.
"닻을 내린다 가부좌를 틀고"
‘닻’과 ‘가부좌’는 서로 다른 영역의 어휘다. 하나는 항해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의 언어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두 단어가 하나의 행 안에서 결합한다. 닻은 움직이는 배를 한곳에 정박시키는 장치다. 가부좌는 몸을 한곳에 안정시키는 자세다. 따라서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면서도 ‘정지’와 ‘정착’이라는 공통된 의미축을 갖는다. 이것이 제목 ‘귀항’과 결합하면서 작품의 내적 구조가 완성된다. '파도 → 항구 → 닻 → 가부좌' 이 일련의 어휘들은 외적인 항해의 서사를 내적인 정좌의 상태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개구리가 실제로 가부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진 속 청개구리의 웅크린 자세가 시인의 언어를 통해 가부좌의 형상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진은 하나의 시각적 형상을 제공하고, 문자는 그 형상에 새로운 정신적 질서를 부여한다. 특히 ‘가부좌’라는 불교적 용어가 ‘귀항’이라는 해양적 어휘와 결합하는 순간 작품의 공간은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항구는 배가 돌아오는 장소이지만, 가부좌는 존재가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는 자세다. 그렇다면 「귀항」에서 귀항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바다에서 항구로 돌아오는 귀항이면서, 소란에서 고요로 돌아오는 귀항이고, 외부에서 내면으로 돌아오는 귀항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이러한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시인은 ‘인생의 풍파’라거나 ‘마음의 평화’라고 추상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대신 거친 벽면, 둥근 구멍, 초록의 청개구리, 파도, 포말, 항구, 닻, 가부좌라는 구체적인 이미지와 시어를 배열한다. 독자는 그 이미지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귀항」은 설명보다 구조가 앞서는 작품이다.
특히 ‘거친’과 ‘고요’, ‘파도’와 ‘항구’, ‘이동’과 ‘정지’, ‘밖’과 ‘안’, ‘작음’과 ‘세상’, ‘닻’과 ‘가부좌’의 대립과 결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tension)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긴장들이 마지막의 ‘가부좌’에서 하나의 정지된 이미지로 수렴한다. 그렇다고 마지막의 정지는 죽음이나 소멸의 정지가 아니다. 사진 속 청개구리의 초록은 오히려 강렬한 생명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정지는 생명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자기 자리를 얻은 상태에 가깝다. 바로 이 점에서 ‘귀항’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다시 살아난다. 항해의 목적은 끊임없는 이동 자체가 아니라 돌아갈 곳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부좌의 목적 역시 외부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존재를 하나의 중심에 정착시키는 데 있다. 사진 속 청개구리는 가장 작은 공간에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그곳에서 ‘세상 품은 푸른 응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확장된다. 벽의 구멍은 항구가 되고, 항구는 세계가 되며, 세계는 하나의 응시 속에 들어온다. 이것이 「귀항」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미학이다.
결국 「귀항」은 청개구리라는 작은 생명체를 관찰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머무름’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거친 파도가 스러진 자리에서 고요가 발생하고, 구멍이 항구로 변하며, 작은 생명이 세상을 응시하고, 마침내 닻을 내린 채 가부좌를 튼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작품 안에서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언어가 서로를 밀어 올리는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성취는 사진 속 청개구리를 인간의 감정이나 관념에 억지로 종속시키지 않고, 그 작은 생명의 구체적인 형상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는 데 있다. 사진의 사실성과 언어의 상상력이 충돌하지 않고 상호 보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귀항」의 미학적 핵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다. 낡은 벽의 구멍을 ‘둥근 항구’로 발견한 순간, 한 마리 청개구리의 정지는 귀항이 되고, 그 귀항은 마침내 가부좌라는 내면의 정착으로 완성된다.
디카시의 본질이 보이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데 있다면, 「귀항」은 그 가능성을 조용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진은 청개구리를 보여주지만 시는 그 청개구리에게 귀항의 시간을 부여하고, 사진의 구멍은 시에 의해 항구가 되며, 웅크린 생명의 자세는 가부좌의 형상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한 마리 청개구리의 모습만이 아니다. 거친 세계를 건너온 모든 존재가 자기만의 둥근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잠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한 순간의 고요.「귀항」은 바로 그 고요를 포착한다. < 悳泉>
문학평론가/디카시인/ 칼럼니스트
'18년 《수필과비평》문학평론 데뷔
'26년 《문학사계》문학평론 신인문학상 등단
평론집 : [언어의 숲,사유의 길],[詩,거꾸로 읽기]
동인디카시집: [감정계약서].[물낯에 햇빛이 비치면]
수필&칼럼집:[쌀과의 연애론 1,2 ] 外
前 <온글문학>,<씨글문학> 편집장
現 한국디카시학회 전북지부장,시사모운영위원,
글벼리 디카시 문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