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려고 그랬을까?
시내버스를 타고 내가 즐겨다니던 산복도로로 향했다. 그 산복도로는 6.25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렸고, 가난한 우리들의 어린시절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또한 나의 젊은시절 많은 지인들의 생활터전 이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가면 '이곳에 아직도 사람이 사는구나!' 하는 감탄사를 쏟아내게 했고, 주변의 분위기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곳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언젠가 도로가 작은 쉼터에 앉아 동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이제 늙은이들만 남았는데, 셋집중 한집은 비었어요."
나는 대중교통 이용을 즐겨한다. 혼자 버스나 기차를 타고가며 지나는 풍경을 즐기고, 이런저런 추억에 잠기는 때가 행복했다. 그래서 불편을 감수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다.
오늘따라 차를 옮겨 타기가 쉽지 않다. 얼마전 시내버스 노선변경이 있었는데, 종전에는 한번에 갈수있는 코스를 바꾸어 버렸다. 결국 버스나 지하철을 한번만 타던 것을 두번 세번 갈아타게 만들었다.
나만 불편한게 아니라, 다른 승객들도 수십년 지속되었던 노선을 바꾸어 버린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 차내 머무르는 시간이 2시간이다. 이런게 약자의 설움일까?
당국은 치솟는 비용으로 인한 버스요금 인상요구를 노선변경이란 기술적보완(?)을 통하여 해결한 모양인데, 결국엔 서민들의 불편이 그것들을 수용해야 하는 형국이 된 듯하다.
버스를 타고가다 예전 어머니께서 계시던 아파트와 교회를 보았다. 그리움이 왈칵 치솟았다. 지금은 산비탈 양지바른 공동구역으로 옮겨가셨다.
남포동에서 버스를 내려 용두산공원으로 올라섰다. 낯시간이라 공원지킴이 노인들과 외국 관광객들의 모습만이 뜸하다.
나는 이곳에 오면 먼저 떠오르는게 박보장기다. 시내를 배회하고, 두개의 영화를 연속 관람하던 극장의 추억보다, 젊은시절 제법 수를 읽었다고 자만하다 이곳 박보장기판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했던 알량란 자존심 손상때문이다.
계속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민주공원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노인들의 쉼터이다. 걷거나 버스를 타고 오면 구덕산과 부산항을 바라보며, 문명에서 소외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있는 명당이다.
산복도로는 언제 걸어도 기분이 좋다. 다니는 차들이 적어 공기가 맑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트인 부산항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길가 풍경은 아직도 옛날을 회상하게 만든다. 군데군데 아파트가 새로 들어섰고, 아름다은 건축물들이 생겨났지만 주민생활 본연의 터전은 1970년대를 공생한다.
언덕에 자리잡은 시영아파트는 5.16 군사혁명이 있은 후 다음해인 1962년에 완공되었다. 낡은 외관에 아직도 사람이 사는가? 궁금하여 유심히 올려다보니 창가에 화분이 놓였고, 몇군데 빨래가 걸렸다.
이곳의 불편, 우선은 주차공간이 없다. 군데군데 도로변 옥상주차장이 있을뿐, 생활필수품인 차들은 먼곳 어디엔가 주차해야함직하다.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니 부산은 평지보다 비탈면적이 넓은 도시같다.
배우 이영애씨가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건립성금을 낸 것을 두고 비난이 일자 "북처럼 되었으면 얼마나 끔찍했을까요?"하고 말했단다. 이념을 떠나 생명의 존엄함을 따지자면 맞는 말이다.
6.25 남측 최후의 보루는 칠곡 다부동과 마산 진동전투였다. 다부동은 학도병까지 투입되어 사력을 다했으나, 마산은 정말 위험한 순간에 처했었단다. 그때 밀렸으면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와 수많은 피난민들은 어떠한 선택을 요구받았을까?
그러한 아픔의 역사가 깃든 도시가 부산이고, 피난민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숨어 있는 곳이 산복도로 주변이다.
삶은 오로지 자신만의 영역이다. 지난 과거를 누구에게 탓하며, 자신의 현실이 구차하다고 비난받을 이유도 전혀없다. 행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주인공들이 자식 손주들이 더좋은 세상을 꿈꾸면서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묘한 정감을 느끼며, '이렇게 살려고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따뜻한 마음가진 그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