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64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고향’]
[한무리문학 송고]
고향
초인종 누르다가
가을냄새 코끝에 매달리네
옥양목 주름에 엎어진 해
흩어진 각혈 석양 놀
골목길 가로등 전구 알엔 인절미 맛이 얼씬대고
내 가느다란 모가지엔 수수깡 그림자가 얼룩지네
금강 여울목 모래톱
얼룩배기 자라는 얼마나 컷을까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시 〈고향〉은 시각과 후각, 미각의 감각적 전이를 통해 고향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과 유년의 기억을 입체적으로 복원해 낸 수작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세월의 덧없음과 결핍의 정서를 감각적 언어로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의 흐름에 따라 핵심적인 비평 포인트를 짚어보겠습니다.
1. 일상에서 열리는 기억의 문 : 후각의 전이
초인종 누르다가 / 가을냄새 코끝에 매달리네
시의 시작은 매우 현대적이고 일상적입니다. '초인종을 누르는' 행위는 대개 삭막한 도시의 일상이거나, 혹은 오랜만에 당도한 어떤 문 앞을 연상시킵니다. 그 순간 시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은 '가을냄새'입니다. 물리적인 행위(초인종)와 자연의 감각(가을냄새)이 충돌하면서, 시선은 순식간에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의 시간(고향)으로 이동하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2. 소멸과 결핍의 이미지 : 옥양목과 각혈
옥양목 주름에 엎어진 해 / 흩어진 각혈 석양 놀
이 시에서 가장 강렬한 시각적 대비와 비장미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옥양목 주름 : 흰 무명천을 뜻하는 '옥양목'과 '주름'은 어머니의 거친 손이나 한복, 혹은 고향의 퇴색하고 주름진 풍경을 시각화합니다.
⚫엎어진 해, 각혈 석양 놀 :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각혈(咯血)'에 비유한 점이 압권입니다. 각혈은 생명력의 소멸, 아픔, 짙은 한(恨)을 내포합니다. 고향의 저녁노을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붉은 피를 토해내듯 아프고 강렬한 이미지로 채색함으로써 고향에 서린 애잔함과 서글픔을 극대화합니다.
3.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 : 인절미와 수수깡
골목길 가로등 전구 알엔 인절미 맛이 얼씬대고 / 내 가느다란 모가지엔 수수깡 그림자가 얼룩지네
도심 혹은 낯선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노란빛)을 보며 시인은 고향의 '인절미 맛'을 떠올립니다. 시각이 미각으로 전이되는 순간입니다. 이는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유년 시절 고향에서 느꼈던 따스한 풍요와 허기를 동시에 자극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모가지'와 '수수깡 그림자'는 현재 시인의 야위고 고단한 삶을 시각적으로 투영합니다. 수수깡처럼 쉽게 부러질 듯 위태롭고 가녀린 존재로 자신을 묘사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쓸쓸하고 처연한 심경을 '얼룩'이라는 어두운 이미지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4. 미완의 그리움과 시적 여운
금강 여울목 모래톱 / 얼룩배기 자라는 얼마나 컷을까
마지막 연에서 시선의 공간은 구체적인 지명인 '금강 여울목'으로 확장되며 그리움의 실체를 명확히 합니다.
마지막 행의 질문("얼룩배기 자라는 얼마나 컷을까")은 이 시의 백미입니다. 자라의 안부를 묻는 것은 결국 '내가 떠나온 고향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리고 '그곳에 두고 온 나의 순수했던 유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과 같습니다. 단정적인 결말 대신 의문형의 여운을 남김으로써,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그리움의 깊이를 더합니다.
💡 총 평
한기홍의 〈고향〉은 '가을냄새(후각) ➔ 석양 놀(시각) ➔ 인절미 맛(미각) ➔ 수수깡 그림자(시각)'로 이어지는 감각의 변주가 탁월한 작품입니다.
고향을 무조건적인 포근함의 공간으로만 그리지 않고, '각혈'이나 '수수깡' 같은 아프고 야윈 이미지를 교차시킴으로써, 타향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쓸쓸한 내면과 고향에 대한 처절하리만치 깊은 향수를 밀도 있게 완성해 냈습니다. 옥양목처럼 바스러지고 노을처럼 붉게 얼룩진 마음을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시인의 목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