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증탕 풍경
이태호
지난번 증기목욕탕은(sauna) 벌겋게 익은 맥반석이 레일을 타고 나왔었다. 오늘 찾은 불가마는 마치 에스키모 이글루 같은 모형이었다. 자수정(紫水晶)과 운기 석을 이용한 두 평 남짓한 공간에 뜨거운 열을 가두고 있었다. 온도계가 섭씨 100도 이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른 생각하기엔 들어가면 당장 익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도 들어가니, 나도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슴없이 들어간 것은 과학적인 근거를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랑스럽게 붙어 있는 운기 석과 자수정의 효능에 대하여 읽어보았다.
운기석의 설명이 추상적이라면 자수정은 그렇지 않았다.
숫자까지 나열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자면 운기 석은 원적외선 방출로 혈액의 순환이 잘되고 신비로운 氣 작용으로 피로, 스트레스, 과음, 불면증, 당뇨, 신경통 및 비만 극복에 좋다. 라고 설명하였다. 자수정의 경우에는 황토 암벽 천궁에서 천만년 열 수에 결정된 신비의 보석이며 우주, 푸리 에너지(氣)의 방출이 보석 중 최고입니다. 따라서 육각 분자 구조가 완전하여 1초간 32,786KHz에 해당하는 규칙적인 진동 발진으로 인체 신진대사에 크게 기여하고 연구 결과 인체에 가장 유익한 원적외선(8~11㎛)을 90% 다량 방출은 물론 마이너스 이온과 자수정에서만 파동 하는 D6라는 신비의 에너지로 만병을 다스립니다. 라고 숫자를 이용하여 믿음직하게 나열되었다.
그럴듯한 설명이 뒷받침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자수정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억지로 땀을 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같이 삐쩍 마른 북어 같은 몸뚱이야 빼어낼 수분도 넉넉하지 않다. 매번 호기심 반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휴! 아니면 끙! 하는, 가끔 견디기 힘들 때 내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보통 때는 속으로 180까지(약 3분) 셈을 셌지만, 오늘은 달랐다. 공간의 장식 때문인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번쩍번쩍 빛나는 자수정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프레스코화를 바라보는 듯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빛의 파장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색깔이 서광처럼 느껴졌다. 선전 문구처럼 약발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정좌하고 앉았다가 오금에 통증을 느껴 평좌로 고쳐 앉았다. 빛깔도 아름다운 자수정에서 방출하는 신비의 에너지 D6의 파동 따라 이리저리 몸뚱이를 돌리면서 온 몸속으로 그 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라, 이게 뭔 소리 다냐?
오도독, 오도도독! 갑자기 심하게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싹, 소름 끼치는 소리에 얼른 뒤를 돌았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몸피가 넉넉하신 여성분께서 백열등 불빛 받아 수정처럼 빛나는 사각 얼음 조각을 으드득, 오도독 깨물어 드시고 있었다. 그분의 이빨이 참으로 부러웠다. 평생 저런 소리를 낼 수 없을 부실한 내 이빨이 원망스러웠다. 처음에는 한두 개 정도만 깨물고 그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독, 오도독! 계속 깨물어대고 있었다. 아마도 통쾌하게 바스러지는 소리에 스스로 도취하였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밤새워 술과 결투를 벌였을 것 같은 사나이가 등짝에 무시무시한 龍을 업고 등장했다. 문신의 용맹스러움과 달리 비실비실 내 옆댕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궁둥이 걸음으로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龍 氏께서는 주독을 빼내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발한 수단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위험한 발상이다. 시래기 선지 국으로 해장을 하셨는지 크악, 크악~ 게트림할 때마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둥그렇게 모여 앉은 남녀 모두 툭, 튀어나온 용의 눈깔에 겁에 질렸는지 함구하고 있었다.
여인이 깨무는 얼음 바스러지는 소리와 사내가 품어대는 시래기 썩는 냄새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공법은 나에게 불리할 것이 분명하였다. 생각 끝에 용기를 내었다. 나도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인데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목소리와 표정을 가다듬고 마치 수십 년 수도한 도사처럼 머릿속에 저장시킨 자수정 선전 문구 중 어려운 단어들만 골라 큰 소리로 쑤왈라 거렸다.
"에또~오푸리에너지삼만칠천키로헬즈는파동에너지D6마이너스요산성이알카리를오버하니원적외선(8~11UM)커브곡선이10%미만으로따운되도다."
나의 주문(呪文)이 통했는지 징그럽게 들리던 얼음 깨무는 소리가 멈춰지고 사내도 혈압이 상승했는지 비실비실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얼음 한 컵을 다 깨물어 먹은 여인은 필경 맺힌 한을 풀어내는 것 같았고, 아침부터 비틀거리는 사내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간밤에 다리 사이에 달고 다니는 중요한 추(錘)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유추해 보았다.
*다음에는 서산시에 청솔 숲에 있다는 ‘솔 한증막’풍경을 그려볼 예정입니다.
첫댓글
공공장소에서 눈쌀 찌뿌리게 하는 이들을 잘도 내보냈네요.
해병대의 기상을 한증막에서도 보여주신 이태호 선생님, 멋집니다^^*
ㅎ ㅎ 몸피 넉넉한 여인과 문신한 사나이 만리포도사님 주문에 딱 걸렸습니다.
저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무슨 주문인지 알듯도하고 모를듯도 해서 무서워 도망가겠습니다.
참, 다재다능하신 대장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