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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梁世奉) 장군(1896~1934)】 " ② 만주 땅을 유랑하다 ⑴"
★ 여동생 같은 재순과 결혼하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 땅을 지배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를,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수탈을 강제로 실시했는데, 이는 조선의 주요 경제 명맥을 장악하여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는 토지 강탈과 봉건적 착취를 확고히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10년 3월에 총독부는 이완용에게 ‘임시 토지조사국 관제’를 제정하도록 한 뒤, 일본인들로 구성된 조사국을 만들어 토지 측량을 하기 시작했다. 1912년 8월에는 ‘토지조사령’과 ‘시행규칙’을 공포했다. 토지를 수탈하여 봉건적 지주들의 토지 소유를 보호하고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하여 지속적인 토지 강탈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토지세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토지조사 과정에서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그리고 일본인 지주가 주로 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철산군의 수많은 토지도 동척(東拓)이 교묘한 수단과 힘으로 빼앗아 갔다. 양세봉이 세를 내어 경작하던 토지 주인도 파산하였고, 토지는 동척 명의로 넘어갔다. 양세봉은 동척과 계약을 하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는 있었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 땅에서 농사 짓는 걸 포기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양세봉은 다른 조선인 지주의 소작농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지주는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땅을 빌린 대가로 수확의 70%를 가져갔다. 그 밖에도 곡물세, 탈곡세, 국세, 지방세, 부가세, 인두세, 애국세 등을 내야 했다. 이런 여러 명목의 세금은 세봉의 가정에 많은 부담을 안겨 주어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는 세봉 말고도, 동생인 원봉과 시봉은 외지에 나가 품을 팔아야 했다. 탈곡이 시작될 무렵에 지주는 소작농들이 수확을 속이거나 곡식을 숨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탈곡을 감시하려고 아예 세봉의 집에 와서 묵었다.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세봉의 어머니는 1916년에 봉녀를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봉녀의 시댁은 의주군 월화면 마용동에 있었는데, 세리면에서 몇십리 떨어진 산골로 벼농사를 지을 논도 없는 곳이었다.
세봉은 어머니를 모시고 봉녀의 시댁이 될 최숭치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아주 외진 산골로 방이 셋인 외딴 초가집이었다. 제일 가까운 이웃집도 2리는 가야 했다. 봉녀의 시아버지 최숭치는 젊었을 때 대장장이 생활을 했는데, 농민 중에서는 세상물정을 좀 아는 사람이었다. 또 글도 어느 정도 알았다. 자작농으로 집에 소도 기르고 생활도 넉넉한 편이었다. 시어머니인 백씨는 소박한 아낙네였다. 이미 두 딸은 시집을 갔고 맏아들 최인종도 결혼하였다. 봉녀의 남편 최인세는 그 집안의 둘째 아들인데 청각장애인이었다. 셋째 아들인 최인협은 최인세가 결혼할 때 18세로 봉녀보다 네 살 많았다.
봉녀는 결혼하여 모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큰딸 최원숙, 큰아들 최원석, 작은아들 최원갑, 작은딸 최원향이다. 최인세는 1939년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1941년 집안이 몰락하여 생활이 힘겨워지자 최숭치는 며느리 봉녀를 비롯해 가족을 모두 데리고 중국 동북지방의 청원현으로 이사해 원봉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여동생이 출가하자 어머니는 세봉과 재순의 혼사를 치렀다. 재순은 민며느리여서 약혼·예물·함들이와 같은 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몇 가지 요리를 마련해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상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와 입에 붉은 고추를 물고 대가리를 곧추세운 결혼식용 삶은 수탉 한 마리도 놓여 있었다. 숙부 가족들과 이웃에 사는 몇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한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상견례·맞절·폐백 등 식을 간소하게 올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세봉이 결혼한 후 식구들은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1917년 봄, 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양운도의 집에 불행이 닥쳤다. 양운도와 그의 동생 양운항은 세봉과 6촌 형제간으로 같은 증조부의 자손들이다. 운도의 아버지는 운도가 다섯 살, 운항이 세 살 때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운도의 어머니 문씨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영향을 받은 아낙으로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문씨의 오라버니가 문씨에게 개가를 하라고 강요해도 이에 응하지 않자, 그는 운도의 두 누이를 인신매매(人身賣買)로 팔아 버리고 문씨와 그의 아들 둘마저 팔려고 했다. 이에 문씨는 대성통곡을 하며 두 아들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다.
마음이 넓고 대장부 기질을 지닌 세봉이 이런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와 상의했다.
“같은 양씨 집안으로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러니 우리 집으로 모셔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니 알아서 하여라.”
그리하여 문씨와 운도·운항은 세봉의 집으로 왔다. 세봉과 재순, 남동생들은 운도와 운항을 친동생처럼 대해 주었고 숙모 문씨도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식솔이 많아지자 이들 양씨 일가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 고향을 떠나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잔인하고 폭압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조선 민중의 삶의 토대인 토지를 점차 빼앗아 갔다. 조선 토지 면적의 70%는 일본 사람들이 소유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설립한 척식회사는 77군데에 달했고, 30정보(町步) 이상의 토지를 점유한 일본 사람이 464명이나 되었다. 반면에 조선인 농민들은 경작할 땅이 없어 고향을 등지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 곳곳에 이재민과 거지들이 가득했다. 빈농의 수도 해마다 늘었다. 그들의 어려운 생활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으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는 도저히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곧 조선 땅이 일본의 상품을 파는 새로운 시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무명과 쌀의 가격이 낮아져서 농사와 수공업 상품으로 생활을 유지하던 전통적인 조선의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1917년 흉년이 든 데다 농산물 가격이 너무 낮자, 지주들은 실물로 받던 농지세를 화폐로 바꿔 받았다. 각종 세금도 전부 현금으로 내라고 했다. 세봉의 집에서도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지난해 내지 못한 세를 올해 농사지어 갚겠노라고 마음먹었는데, 가뭄이 들어 수확량이 형편없는 데다 곡물 값이 너무 싸져서 빚을 갚을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또 다시 빚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의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중국 땅으로 도망갔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을 토지도 넓고 아무런 핍박도 없는 지상낙원으로 생각했다. 나무는 옮기면 죽지만 사람은 옮겨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세봉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고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외지로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은 곳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간혹 조선 민족은 떠돌아다니는 습관이 있다고 말하는 중국인들이 있는데 이는 오해다. 조선 사람들은 고향을 잘 떠나지 않는다. 세리면 사람들도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백성들로, 한 번도 이주해 본 적이 없었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근현대사의 이주는 모두 나라와 땅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것일 뿐,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습관 때문이 아니다.
처음에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봉이 어머니와 숙모에게 중국에 간 많은 사람들의 실례를 이야기해 주자, 어머니는 마지못해 세봉의 뜻을 따랐다.
세봉은 숙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얼마 안 되는 가산을 팔았다. 팔만한 값나가는 물건도 별로 없었다. 동생들은 각자 자기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1917년 겨울에 세봉은 온 식솔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중국 땅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다.
세봉은 가족의 중요한 재산을 지게에 얹어 걸머졌다. 조선왕조 시대의 동전 1천~2천전, 조선에서 운영되는 일본 은행이 발행한 약간의 지폐, 자신이 읽던 책, 놋그릇, 놋숟가락, 놋대야, 그리고 반 자루 가량의 양식이었다. 시봉은 운도를 업었고, 원봉은 운항을 업었다. 어머니와 숙모는 이불과 옷 등을 머리에 이었고, 재순은 생활용품과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야금(伽倻琴)을 메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수풍을 지나 중국의 관전현(寬甸縣)에 당도했다. 또 환인현(桓仁縣)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한 달쯤 걸어 마침내 흥경현(興京縣) 영릉가(永陵街)에 도착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그들은 값이 제일 싼 여관에서 묵거나 중국의 평범한 농가에서 묵었으며 어떤 날은 남의 집 뜰 안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나마 세봉이 중국어를 조금 알아서 한결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영릉에 도착했을 때 양세봉의 어머니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숙모와 재순이, 두 동생의 발에도 물집이 생겼다. 날씨도 점점 더 추워져 모두 벌벌 떨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영릉 노성(老城)의 한 절에 들어갔다. 그곳은 비구니 절이었는데, 한 늙은 비구니가 이 조선인 가족들 중에 부녀자 둘과 젊은 여자가 하나 있는 것을 보더니 여자와 아이들은 절에서 잘 수 있도록 허락했다. 또 가마솥도 빌려 주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세봉과 남동생 둘은 근처의 서씨(徐氏) 성을 가진 여진인(女眞人) 농가에서 묵었다. 집주인은 화로를 가져와 양세봉의 형제들이 몸을 녹이도록 하였고, 그들의 피난 과정을 들었다. 여진인 서씨는 세봉 일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그는 세봉에게 우선 이곳에서 집 한채를 빌리고 해가 바뀌면 땅 몇마지기를 빌려 농사를 지으며 터전을 잡으라고 권했다. 세봉은 그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튿날 서씨는 스스로 나서서 노성의 하남(河南)에 초가집 한 채를 얻어 세봉 가족이 이국 땅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집주인은 자작농으로 여진인 서씨와 친척 관계였다. 그는 세봉에게 겨울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다가 영릉의 장작 시장에 가져다 팔면 식구들이 먹고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세봉은 집주인의 말대로 시봉·원봉·재순과 함께 매일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왔다. 세봉 형제들은 장작을 영릉 시장에 가져다 팔았는데, 시장까지의 거리가 왕복 20여리여서 힘겨웠지만 장작을 팔아 중국 돈을 받아 쥐니 마음이 자못 흐뭇하였다. 이 고장의 아낙네들은 집에서 밥만 짓고 밖의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봉의 숙모와 재순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여기며 “고려인 여자들은 정말 일을 잘 한다”고 말하곤 했다.
봄이 되자 여진인 서씨는 양세봉을 도와 열 마지기의 땅을 빌렸는데, 모두 밭이었다. 세봉과 동생들은 밭에 수수와 옥수수를 심었다. 이들 가족은 이 밭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땅도 깊이 갈고 정성껏 가꾼 탓인지 곡식은 잘 자랐다.
영릉의 후보(後堡)·서보(西堡)·이도하자(二道河子) 일대에는 근래 몇 년 사이에 이주를 해온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양씨(梁氏) 성을 가진 가족들이 마을에 새롭게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십 리 길을 걸어 찾아왔다. 약간의 양식이나 야채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통하여 세봉은 영릉 지역에 조선인 가족이 흩어져 몇십 가구 살고 있으며, 또 이곳 현의 왕청문(旺淸門)·홍묘자(紅廟子)는 조선인 집단거주지로 그곳에는 조선인 사회단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조선인 집단거주지로 이주
양세봉의 가족이 영릉 고성에 살면서 지은 첫 농사는 꽤 큰 수확을 얻었다. 토지세를 내고도 적지 않은 곡식이 남았다. 지주는 피난 온 조선인 가족의 수확이 많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내년에는 소작세를 늘려 달라”고 했다.
양세봉은 이곳이 이국인 데다 조선인 가족이라고는 달랑 하나뿐이어서 남들이 업신여긴다고 느꼈다. 외롭기도 했다. 또 어머니와 동생들, 숙모 모두 중국어를 모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이내 식솔을 데리고 흥경현 경동부(境東部)에 있는 조선인 집단거주 지역인 홍묘자 사도구(四道溝)로 아사갔다.
흥경현성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동만주의 국자가(局子街) 동부까지 이 집단거주지는 이어졌다. 그들은 모두 19세기 중엽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청나라 시기에 흥경과 부근의 통화·환인·관전 등 21개현을 ‘동변도(東邊道)’라 불렀다. 이곳과 국자가는 당시 청나라 조정이 금지 구역으로 봉쇄해 아무도 개간과 경작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 고장은 조선 국경과 아주 가까워서 가난한 조선 사람들은 아무도 경작하는 사람이 없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했다.
자고로 청과 조선 양국의 조정에서는 국경 금지령을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래도 일부 농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 청나라의 성조(聖祖)·고종(高宗) 황제 때에는 압록강에 군대를 배치하여 국경을 넘는 조선 사람들을 단속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강 연안 지역 농민들에게 매년 백로(白露) 전(양력 9월 상순 전)에 약 한 달 동안 청나라 지역으로 가 풀 베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강을 건넌 사람들이 비옥한 토지를 보고 아예 그곳으로 이주하여 살고 싶어했지만 법을 어긴 죄로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47년에 사사로이 그 땅을 개간하는 조선 사람이 나타나자, 이들을 쫓기 위해 청나라 조정에서는 초소를 18개 정도 설치하고 병사들을 파견하여 감시하였다. 청나라 말기에는 외국과의 접촉이 갈수록 빈번해짐에 따라 농촌 붕괴가 가속되었다. 조선 말기 역시 가혹한 착취로 인해 더욱 가난해진 농민들과 수재·한재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주인 없는 기름진 땅을 찾아 동변도로 몰려들었다. 여러 차례 말려도 막을 수 없게 되자, 이듬해에 청나라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동변도 지역에 임시 소작인을 모집,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처럼 봉쇄가 점차 완화되자 개간자들이 많아졌다.
1867년 청나라 조정은 봉쇄 구역을 해제하고 경작지를 중국인에게 개방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산동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은 물론,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조선 사람도 많아져 동변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1890년 조선 북부 지역에 큰 재해가 발생하자, 굶주림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도 금지령을 어기고 강을 건너 동변도와 간도로 넘어왔다.
1884년 길림성 정부와 조선 조정 사이에 ‘길한규약(吉韓規約)’을 체결하고 월간국(越懇局)을 설립하여 이주해 오는 조선 사람들이 배로 늘었다. 기록에 따르면 1897년, 조선 조정은 서상무(徐想懋)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고 청나라 지역에 사는 조선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민 온 조선 사람들은 오늘의 통화현·환인현·흥경현·관전현 각 지역에 퍼져 살았으며, 그 수는 약 8천 7백호에 3만 7천여명에 달했다.
근대에 조선인의 동북 지역 이주는 매우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19세기 중엽부터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시기이고, 두번째는 3·1운동이 일어난 때부터 1931년 동북 지역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시기이며, 세번째는 만주사변 이후이다. 따라서 양세봉 일가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첫번째 시기 말에서 두번째 시기 초쯤에 해당한다.
양세봉 가족이 홍묘자 사도구에 이주할 당시, 그곳에 사는 조선 사람은 몇십호 가량 되었다. 중국에 온 지 가장 오래된 집안이 50년이 넘었는데, 그들은 이미 중국 국적을 가졌을뿐 아니라 부농으로 꽤 잘살았다. 대부분은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흡수된 후에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민 온 지 비교적 오래된 집안들은 비록 부유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황해도에서 온 사람도 있고 함경북도·함경남도 사람도 있었으며 강원도·평안북도·평안남도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양세봉은 이곳으로 이사한 후 같은 조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임시로 자그마한 집을 한 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산악 지대인 이곳은 아직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많았다. 그러나 황무지를 개방하자 말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장악했다. 그들이 말뚝을 박으면 그것은 곧 땅의 경계가 되었고, 그들은 주인이 되었다. 개간자들은 밭 한 뙈기를 경작하면 곡식 한 섬을 바쳐야 했다. 세봉은 지주에게서 땅 두 뙈기를 빌리고, 추수 후에 함께 갚는다는 조건으로 종자와 농기구 살 돈을 빌렸다.
산지는 매우 비옥했지만 각종 나무뿌리와 잡초들이 서로 휘감기고 뒤얽혀 곡꽹이로 있는 힘을 다해 휘둘러야 뿌리들이 겨우 찍힐 만큼 아주 힘들었다. 캐낸 뿌리와 나무 줄기를 태우면 그것이 비료였다. 세봉과 남동생들은 열심히 일했다. 어머니와 숙모, 재순도 함께 힘을 보태서 마침내 그 거친 황무지를 경작지로 만들어 냈다. 온 집안 식구의 노력으로 첫해부터 풍성한 수확을 얻었는데, 그렇게 이곳에서 3년을 살았다.
첫댓글 백전백승의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장군은
밀정 박창해
의 계략에 아까운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