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25則]千峰萬峰去
〈垂示〉
垂示云。機不離位。墮在毒海。語不驚群。陷於流俗。忽若擊石火裏別緇素。閃電光中辨殺活。可以坐斷十方。壁立千仞。還知有恁麽時節麽。試擧看。
〈本則〉擧。蓮花峰庵主。拈拄杖示衆云。古人到這裏。爲什麽不肯住。衆無語。自代云。爲他途路不得力。復云。畢竟如何。又自代云。楖[木+栗]橫擔不顧人。直入千峰萬峰去。
제25칙
연화봉 암주의 주장자〔蓮花柱杖〕
기봉〔機〕이 단계적인 지위를 떨쳐버리지 못하면 독바다〔毒海〕에 떨어지게 되고, 말이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하면 저속한 데 빠지게 된다. 만약 돌 부딪치는 불빛〔石火〕속에서 흑백을 구별하고, 번뜩이는 번갯불에서 살(殺)․활(活)을 분별한다면, 시방(十方)의 (논란을) 꽉 틀어막아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하리라. 이러한 상황을 아느냐? 본칙의 거량을 살려보자.
☞기봉이라 함은 첫째로 안목이 있는 이가 자신의 안목을 들어내고자 할 때하는 모든 말과 행위를 말함이며, 두 번째로는 선지식이 후학을 제접하고자 함에 근기에 따라서 행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단계적 지위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함은 심식의 생각과 지식을 버리지 못하여 교학적인 가르침으로 선을 이해시키려는 것과 같아서, 이는 장님이 햇불을 들고 사람을 인도하려는 것으로 자신과 인도하는 사람을 구덩이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이에 독바다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돌 부딪치는 불빛 속에서 흑백을 구별하고 번뜩이는 번개불에서 살활을 분별한다는 것은 안목이 있는 사람의 막힘없는 기봉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식은 후학을 제접함에 단박에 그의 근기를 알아서 상황에 맞게 방편을 써서 천길 낭떨어지에 밀어서 그 안목을 열어주게 하는 것이다.
(본칙)
연화봉(蓮花峰)의 암주(庵主)가 (입적하던 날에) 주장자를 들고서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옛사람들은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머물려 하지 않았는가?”
대중들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스스로 대중을 대신하여 말하였다.
“그들이 수행의 도상에서 별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이어 말하였다.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또 스스로 대신해 말하였다.
“주장자를 비껴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첩첩이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여기에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은 성품 그 자리는 언어문자로는 들어갈 수 있지 못하여 일체 머므를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는 것이어 그러한 것이다. 수행의 도상에서 도움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안목을 얻기 전까지는 목숨을 버리고 갖고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얻을 수 있지만 참으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얻은 것에 있어서는 실소를 하게 되므로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며, 얻고자 하는 마음은 오히려 얻음을 더디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장자를 비껴든 채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 함은 주장자는 자신의 면목을 말함이며, 자신의 성품은 현실과 자신의 안이비설신의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므로 그대로 마음씀이 없이 현실에 들어가나 들어간 바가 없으므로 더 이상의 업은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심으로 일없는 곳에 머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평창)
여러분은 연화봉 암주를 알 수 있겠느냐? (전혀 자취를 남기지 않아) 발꿈치조차도 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송(宋)이 건국됐을 무렵 천태산 연화봉에 암자를 세웠다. 옛사람들은 도를 얻은 뒤에는, 초옥이나 석실(石室)에서 발 부러진 가마솥에 나물 뿌리를 삶아 먹으면서 날을 보냈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인연 따라 일전어(一轉語)를 하면서,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고저 하였다.
그는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바로 주장자를 들고서,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물었다. 이렇게 전후20여 년간을 지내왔으나, 끝내 한 사람도 대답한 자가 없었다. 이 물음에는 방편도 있고 진실도 있고, 지혜도 있고 행동도 갖추어져 있다. 그의 속셈을 알았다면 말해줄 것이 없다. 그대들은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20여 년간 이처럼 물었는가를? 이는 종사(宗師)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인데, 무엇 때문에 언어의 말뚝에 얽매여 있는가? 만일 이 경지를 알아차리면 자연히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설명하기도 했고 의견을 붙이기도 하면서 자기가 이해한 바를 드러내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해도 궁극의 자리에는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이 경지는 언구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구가 아니고서는 분별하지 못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도란 본디 말이 아니지만 말로 인하여 도는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을. 그러므로 사람을 시험하는 급소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아차려야 한다. 옛사람이 남긴 일언반구(一言半句)는 다름이 아니라, (그 급소를) 아는가 모르는가를 보려는 데 있다.
암주는 학인들이 알지 못한 것을 보고서 스스로 대신하여 “그들이 수행의 도상에서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보아라. 그는 제대로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이치와 기틀에 계합했다. 어찌 종지를 잃었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말을 들으면 모름지기 종지를 알아야지, 제멋대로 기준을 세우지 말라”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로지 한 번 부딪쳐 보고는 그걸로 그만이니, 심정이야 알겠다만 뻔뻔스럽고 미련한 일임을 어찌하랴.
만일 작가 선지식한테 가서, 삼요어(三要語)로 허공에 도장을 찍고〔印空〕, 진흙에 도장을 찍고〔印泥〕, 물에 도장을 찍어서〔印水〕 그(작가 선지식)를 시험하면, 곧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는 듯하여 들어맞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자기와 똑같이 도를 깨친 자를 찾아보아도, 그 경우에 어느 곳에서 이를 찾아야 좋을까? 만일 (본분소식을)아는 사람이라면 가슴을 열어놓고 소식을 주고받음에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 소식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두어야 한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주장자란 평소 납승이 사용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의 도상에서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을까? 옛사람은 이런 경지에도 머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금가루가 비록 귀하기는 해도 눈에 떨어지면 장애물이 되는 것과 같다.
석실 선도(石室善道)스님은 당시에 당 무종(武宗)의 법난(法難)을 만났다. 항상 주장자를 들고서 설법하기를,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했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할 것이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다”라고 했다.
설봉스님이 으뜸에 하루는 승당(僧堂) 앞에서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중등 내지는 하등의 근기를 지닌 사람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때에 어떤 스님이 대중 속에서 나오면서 말하였다.
“갑자기 으뜸의 근기를 지닌 사람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에 설봉스님은 주장자를 집고서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나라면 설봉처럼 엉망진창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스님이 “그럼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운문스님은 대뜸 후려쳤다.
무릇 묻는 것은 복잡할 것이 없다. 그대들이 밖으로는 산하대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안으로도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다고 여기거나, 위로는 우리가 도달해야만 하는 부처님의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래로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일랑 모두 토해버려라! 그래야지만 하루종일 행주좌와하는 가운데 한결같아지리라. 그러하면 비록 한 터럭 끝이라도 대천사계(大千沙界)만큼이나 넓으며, 확탕․노탄 지옥에 있어도 안락국토에 있는 듯하며, 온갖 보배 속에 있어도 초라한 띠 풀집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툭 트인 작가 선지식이라면 옛사람의 참된 경지에 이르는 데 자연히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연화봉 암주)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고서 다시 다그쳐 물었다.
“궁극적으로 무엇인가?”하고는,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가 말하였다. “주장자를 비껴 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천봉우리 만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일까? 말해보라. 어디가 그의 영역이라 하겠는가? 참으로 구절 속에 눈이 있고, 말밖에 뜻이 있어,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놓았다가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듣지 못하였는가? 엄양존자(嚴陽尊者)가 길가에서 한 스님을 만나자 주장자를 세우면서 말한 것을.
“이것이 무엇이냐?”
“모르겠습니다.”
“한 자루의 주장자도 모르는군.”
엄양존자가 다시 주장자를 땅에 내려꽂으면서
“알겠느냐?”고 하자, 여전히 스님은
“모르겠다”고 하니,
“움푹 패인 구멍도 모르는군”하고, 엄양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걸머지면서 말하였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주장자를 비껴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천봉우리 만봉우리 속으로 곧바로 들어간다.”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머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산승(원오스님 자신)은 “뒤통수에서 뺨이 보이는 사람과는 함께 사귀지 말라”고 주석하였을까? 사량분별을 하자마자 바로 흑산(黑山)의 귀신 굴속에서 살림살이하는 것이다. 만일 사무치게 보고 믿음이 따르면, 모든 사람이 그를 얽매이려 해도 어찌하지 못하리라. 움직이거나 한 대 내질러도 자연히 살리거나 죽이거나 자유자재하리라.
첫댓글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