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돌아보기 [한손엔 우산 한손에는 카메라 . 답사,촬영. 2007. 7. 1 장맛비 내리는 일요일. 한국의산천 ]
경복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 봄)의 터를 잡았다.
▲ 근정문 앞에 있는 영제교 ⓒ 2007 한국의산천 궁궐을 드나들 때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이을 살피라는 뜻으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구분지며 건너는 다리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아치형 돌다리 영제교.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경복궁의 주요 전각으로는 근정전(국보 223호), 사정전,강녕전,교태전,자경전,경회루(국보 224호),향원정.자선당,비현각이 있다. 경복(景福)’이란 궁 이름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광화문은 완전 해체를 하여 철거한 상태이다.
경복궁은 중학교 시절 사생대회와 겨울이면 경회루 연못으로 스케이트 타러오고 그 후에는 사진을 배울 때 동료들과 자주 찾던 곳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 금천교 사방에 있는 해학적으로 생긴 해태?석상 ⓒ 2007 한국의산천
▲ 근정전 지키는 수비대 ⓒ 2007 한국의산천
▲ 아침 09: 00 비 내리는 날에도 아랑곳 없이 관광객은 끊임없이 입장하고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근정문 광화문(현재 모두 철거) 을 들어서서 수문장 청을 지나면 남행각 중앙에 자리잡은 홍예문에 이른다. 홍예문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편으로 흐르는 어구가 있고 보도에 이어 돌다리 영제교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근정전일정과 행각 중앙에 중문으로 높이 솟은 우람한 근정문이 있다. 고종 4년에 중건 한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엔 문 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하였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 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 근정문의 아름다운 추녀 ⓒ 2007 한국의산천
근정문을 지나면 근정전까지는 말 그대로 ‘왕도(王道)’가 나타난다. 즉 근정전 앞 계단까지 이어지는 돌출된 중앙길이 바로 왕이 다닐 수 있었다. 왕 이외의 신하들은 왕도 양쪽의 낮은 길로 통행을 하였으리라.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왕도가 있어도 여행, 답사에 왕도(王道)가 있던가? 그저 관련 서적 무식하게 많이 읽고 또 읽고 두 발로 걸어서 현장 답사를 하는것이 최고의 왕도이다.
▲ 근정정 앞의 품계석 ⓒ 2007 한국의산천
예절에서 말하는 동서남북은 자연의 동서남북과 관계없이 예절을 하는 장소에서 제일 윗자리(상석)가 북쪽이고 상석의 앞이 남쪽이며 오른쪽이 동쪽이고 왼쪽 서쪽이 된다.
궁중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문관(文官)우위사상이 있어 임금에게 조하(朝賀)드릴 때는 왕이 있는 쪽이 상석(북쪽)이며 왕의 자리에서 바라보아 동쪽에 문관을 서게 하고 서쪽에 무관(武官)이 섰다.
▲ 근정전 ⓒ 2007 한국의산천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문무 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다. 그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 근정전 칠보대향로 ⓒ 2007 한국의산천
근정전 상월대 위 양쪽으로 세 발 달린 향로모양의 청동제 정(鼎)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정의 밑받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 아래 팔각형모양과 그 위에 둥그런 원모양이 하나의 통돌로 다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의 쓰임새와 용도에 대해서는 향로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구체적인 사료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정의 일차적인 의미는 솥(鼎)을 뜻하지만, 왕권(王權)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하(夏)나라 때 우(禹)임금이 전국 아홉 주의 쇠를 모아 솥을 아홉 개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왕권을 상징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통한다.
근정전의 내부와 천장 ▲ 근정전 월대 네귀에 있는 드므 ⓒ 2007 한국의산천
드므 드므란 순 우리말로 국어사전에서는 '넓적하게 생긴 독' 을 뜻한다. 두무(豆撫), 길상항 (吉祥缸)'이라고도 한다. 덕수궁이나 경복궁의 근정전의 월대 모서리에는 물을 담아놓았던 드므가 있다. 이는 당시 궁궐의 건축물이 대부분 목재로 되어 화재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고자 놓아둔 벽사(壁邪)시설로서 설치되었다고 한다.
드므는 주로 궁궐 앞에 설치하였고 물을 채워놓으면 침입해오던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고 믿었었다고 한다.
▲ 근정전 처마에 있는 잡상 ⓒ 2007 한국의산천
잡상(雜狀)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한 큰 전각의 지붕 위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자 장식한 취두(鷲頭) 치미, 용두(龍頭)와 잡상(雜像) 등이 있다. 여러가지 형상의 잡상이란 건강을 지키고 화마를 잠재우며 잡귀신을 물리치는 흙으로 만든 상징물이다.
근정전의 월대
▲ 근정전 2단 월대와 난간 ⓒ 2007 한국의산천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위치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근정전 월대 남쪽면 중앙 상하에 각각 답도를 설치하였다. 답도 좌우로 좁은 계단석이 놓이고 그 끝에 큼직하게 소맷돌을 설치하여 큰 계단은 세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소맷 돌은 해태가 허리를 펴고 길게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었고, 답도에는 게풍 사이에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 좌우 층계석 전면에는 당초무늬가 부조(浮彫)되었다. 좌우로 해태와 같은 벽사의 신이 강 역을 수호하여 주는 가운데 넝쿨같이 어울려 사는 백성들이 봉황 같은 왕족을 중심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 근정전과 경회루로 나가는 중간에 있는 긴 회랑과 문 ⓒ 2007 한국의산천
▲ 경회루 2007 한국의산천
경회루 (국보 제224호)
동쪽의 큰 섬에는 세 개의 아름다운 돌다리를 설치하고 웅장한 경회루를 건립하였다. 경회루가 있는 이 섬의 둘레와 돌다리의 좌우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를 세우고 돌란대를 설치한 돌난간이 돌려 있고, 다리 앞뒤와 난간이 꺾이는 곳에는 해태석상을 배치하고 있으며 배를 타는 선창 시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이런 용두는 북쪽 지안(池岸)에도 하나 있다.
▲ 사정전 ⓒ 2007 한국의산천
사정전 사정전(思政殿) 근정전의 바로 뒤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왕이 공식집무를 보던 편전(便殿)으로 쓰였다. 뿐만 아니라 사정전에서는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거나 종친,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사정전'이란 이름은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백성의 뜻을 헤아린다'라는 뜻이 있다.
근정전의 뒷 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 되었는데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 서쪽에 천추전, 남행각에 사정문, 서행각에 종현문이 있었다. ▲ 사정전 앞에 있는 해시계 앙부일구 ⓒ 2007 한국의산천
앙부일구 사정전 앞에는 앙부일구라 불리는 해시계가 있다. 일구는 해시계란 뜻이고, 솥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앙부라고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앙부일구는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려주는데 해가 뜨지 않는 밤에는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 왕의 침소인 강령전 ⓒ 2007 한국의산천
강녕전 (왕의 침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 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 왕비의 침소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구중궁궐 ⓒ 2007 한국의산천
▲ 왕비의 침소 교태전 ⓒ 2007 한국의산천
교태전 교태전에 용마루가 없는 점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같으나, 교태전에는 강녕전에 있는 월대(月臺) 대신에 정면 세 곳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교태전은 세종 22년(1440) 무렵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의 경복궁 재건 당시에 중건되었다. 하지만 1917년의 화재로 소진된 창덕궁 내전 전각을 중건한다는 구실로 헐려 창덕궁 대조전의 부재로 쓰이고 지금의 교태전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교태전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데, 이런 지붕을 무량각(無樑閣)이라 하며 왕과 왕비의 침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건물이라 용마루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부속건물이 강녕전에서는 분리되어 있지만, 교태전의 경우에는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뒤로 이어져 있어 공간 활용이 강녕전보다 훨씬 내밀하며 건물 곳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장식들은 이 건물이 왕비의 침소임을 짐작케 한다.
▲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 2007 한국의산천
▲ 교태전의 후원 ⓒ 2007 한국의산천
▲ 교태전의 후원 아미산에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 십장생 굴뚝.ⓒ 2007 한국의산천
▲ 선장문 앞의 굴뚝 ⓒ 2007 한국의산천
▲ 교태전 담장의 꽃문양
교태전 뒷뜰로 가는 도중에 있는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꽃문양, 화려하면서도 그윽한 기품이 넘쳐 난다. 갖가지 꽃이 오밀조밀하게 장식되어 있는 이 꽃담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아름다운 꽃밭을 직접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 자경전 ⓒ 2007 한국의산천
자경전 (보물 제809호)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 室形)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 (보물 제 810호) 자경전 뒤편에 있는 십장생이 그려진 굴뚝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으로 제일 상단에 연가(燃家 굴뚝)가 10개이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小累) 및 창방(昌枋) 서까래 모양의 전돌을 따로 만들어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꽃담처럼 담에 붙여서 만든 굴뚝으로, 너비 381센티미터, 높이 236센티미터, 두께 65센티미터이다. 굴뚝벽의 상단 중앙에 나티(짐승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문전으로 박고 좌우에 학문전(鶴紋塼)을 박았다. 그 아래 중앙벽 구간에 해, 산, 구름, 바위, 솔, 거북, 학, 바다, 사슴, 포도, 연꽃, 대나무, 불로초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밑에 불가사리 두 마리를 전(塼)으로 만들어 박았다. 그리고 굴뚝의 좌우 좁은 벽면에는 박쥐문과 당초문이 배치되었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굴뚝은 조선시대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자경전 꽃담 ▲ 자경전의 아름다운 꽃 담장 ⓒ 2007 한국의산천
▲ 정교하게 조각된 꽃무늬 ⓒ 2007 한국의산천
▲ 자경전 서쪽의 아름다운 꽃 담장
▲ 풍기대 (보물 846호) ⓒ2006 한국의산천
조선시대에 풍향(風向)을 관측하기 위해 설치한 받침돌로서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풍기죽(風旗竹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24방향으로 풍향을 측정하였는데, 1770년(영조 46)에 만든 풍기대가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에 각각 남아 있다.
▲ 향원지를 둘러보고 민속박물관으로 이동하는 관광객 ⓒ 2007 한국의산천
▲ 국립 민속 박물관 ⓒ 2007 한국의산천
▲ 열상진원 ⓒ 2007 한국의산천
열상진원 (烈上眞原) 경복궁 내 향원지 북쪽 함화당 후원에 위치한 샘물.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복궁 창건 때부터 샘솟고 있다는 샘으로 샘솟은 물이 한바퀴 돌아 연못으로 흘러들어간다. 경복궁 창건(1395년)부터 있었던 왕궁의 샘으로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하였다. 샘에서 솟은 물이 내려와서 한바퀴 돌아 두 번 직각으로 꺾여 향원지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는 향원지에 비친 나무나 정자의 그림자가 이 물의 흐름으로 인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와 또한 물고기들이 차가운 물에 의해 놀라지 않도록 하는 배려라고도 전한다.
▲ 경복궁 향원정 ⓒ 2007 한국의산천
향원정(香遠亭)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 비 내리는 향원지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향원지에 모인 관광객 ⓒ 2007 한국의산천
지금까지 소개한 그 외의 주요 건축물
천추전
자선당 수정전 건춘문의 육축과 계단 신무문
일부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 하였습니다.[한국의산천]
입장시간 3월 ~10월 09: 00~17:00 5월 ~ 8월 09 :00~18 :00 11월~2월 09 :00 ~16 : 00 경복궁 입장료 어른 3,000원 단체 (20인 이상) 2,400원 청소년 1,500원 경회루 특별입장료 : 5,000원 주차료 : 1시간당 2,000원 대중 교통 :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5번 출구.
경회루, 교태전, 자경전 상세 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892616 향원정, 풍기대 열상진원 상세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89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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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산천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
첫댓글 근정전 월대 돌계단에 조각된 동물상, 소같은 동물이 우화되어 현대 예술품같이 보입니다. 교태전 후원 아미산의 아름다움은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에 조각된 그림과 함께, 보는이들의 마음을 곱게 가다듬어 주고도 남습니다 꽃삽 어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