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
← 제4대 민의원 선거는 부정선거로 물들었던 선거였다. 1958년 5월 2일 의원정수 233명을 뽑는 제4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에는 후보자 841명이 나서 평균 3.6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유권자는 1천16만명이었다. 정당별 당선자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통일당 1명으로 여당인 자유당이 의석의 54% 를 차지했으나 개헌선에는 크게 미달했다. 특히 자유당은 서울에서 15석중 겨우 1석을 차지하는 등 대도시에서 참패해 민심의 흐름이 잘 드러났다. 그 후 6월 7일 개원하여 국회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이재학, 한희석을 선출했다. 제4대 민의원선거는 선거공영제와 정당 참관인제 등 공명선거를 위한 장치까지 마련했으나 대법원에 의해 선거무효 9건, 당선무효 2건이 선고될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이로인해 제 4대 국회는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한 채 1960년 해산되고 마는 비극의 운명을 간직한 국회가 됐다. 어쩌면 4대 국회는, 4ㆍ19혁명의 격류에 밀려 만 2년 1개월 남짓하여 죽을 「死」자의 팔자를 면치 못한 사대(死代)국회였는지도 모른다.
[1957년] ‘매카시즘’의 선동자 매카시 사망
← ‘매카시 선풍’으로 미국을 공산주의자 색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렸던 매카시 상원의원.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이 한 마디로 20세기 미국을 광기 `매카시즘‘으로 몰아넣었던 매카시가 1957년 5월 2일 실의 속에 간장병으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 위스콘신주 아일란드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완가로 두각을 나타내 29세에 최연소 주 순회재판소 판사가 됐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 자원, 이같은 경력을 배경으로 4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예상을 뒤엎고 당선됐다. 입심 좋은 의원으로 평판이 났으나 아직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정치인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밤 연설은 그를 하루아침에 여론의 초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날부터 시작된 소위 ‘적색 사냥’ 소동은 온 매스컴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여론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 애초에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없었다. 석 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선풍의 마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부에까지 미치자 1954년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 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결국 매카시는 ‘상원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파문됐고, 4년에 걸친 집단 광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매카시 선풍은 2차 대전 후의 냉전 전개와 한 정치신인의 야욕이 함께 빚어낸 한 시대의 우화였다.
[1592] 일본군, 임진왜란 중 서울 점령
← 임진왜란 때 사용한 신기전 1592년(선조 25) 5월 2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8일 만에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같은 해 4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4개 부대로 나뉘어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선조는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로, 김륵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 수습과 항전을 독려했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삼아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일본군이 북진하는 가운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는 제2번대와 도원수 김명원이 임진강을 사이에 놓고 임진강전투를 벌였으나 조선군이 패했다. 이에 서울을 떠나 평양에 머물던 선조는 다시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했고, 군권을 광해군에게 넘겨주었다. 6월 14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17일 가토군이 함경도까지 진군해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었다.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 Novalis 출생
← 노발리스, Edouard Eichens가 1845년에 제작한 동판화(부분) 1772년 5월 2일 태어남 / 1801년 3월 25일 죽음
"영원한 밤을 찬양하고 영원한 잠을 찬양할진저. 우리는 밝은 낮의 온기로 데워져 오랜 근심으로 쇠하였노라. 타향살이의 즐거움이 우리를 떠났으니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리." - 노발리스, <밤의 찬가> 중에서
노발리스는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작센 지방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예나·라이프치히·비텐베르크 등지에서 공부하면서 실러·슐레겔 등과 친교를 맺었다. 1793년 학업을 마친 뒤 작센 정부의 공복이 되었지만, 창작에 주력해 깊은 종교적 신비주의가 드러나는 서정시와 산문으로 주목받았다. 1797년 약혼녀 조피 폰 퀸이 결핵으로 죽자, 그 상실감을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로 표현했다. 이후 프라이베르크 아카데미에서 광산학을 공부하는 등 다방면에 걸친 사색과 연구에 매진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요절했다. 미완성 유작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 Heinrich von Ofterdingen>은 독일 낭만주의 성장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구하는 이상적 사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푸른 꽃의 이미지는 이후 낭만적 동경의 상징이 되었다.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만델라, 대통령 당선
1994년 5월 2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만델라는 1944년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참여했고, 이내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60년 스하르페빌레에서 비무장 군중들이 상해를 입자 만델라는 비폭력 노선 대신 대(對)정부 사보타주를 역설했다. 1962년 투옥 후 재차 소추된 '리보니아 재판'이 열렸고,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아 1990년 2월까지 약 27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적 압력으로 1990년 2월 F. W. 데 클레르크 정부는 만델라를 석방했다. 같은 해 3월 만델라는 ANC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94년 4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만델라가 약 65%의 지지율을 얻어 당선됨으로써 마침내 46년간에 걸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99년] 파나마 대통령에 미레야 모스코소(女) 당선 1999년 5월 2일 미레야 모스코소(Moscoso, Mireya, 1946~ )는 중앙 아메리카 파나마의 5년 단임 대통령에 선출되어 파나마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모스코소는 파나마의 대통령을 3차례 역임한 의사 아르눌포 아리아스의 미망인이다. 이번 선거에서 그녀와 맞섰던 후보는 여당인 민주혁명당(Democratic Revolutionary Party)의 마르틴 토리호스로, 그는 1968년 아리아스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1977년 협상을 통해 파나마 운하를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넘겨받은 오마르 토리호스 에레라 장군의 아들이다. 1999년 12월 모스코소는 대통령으로서 파나마 운하의 인계를 감독했다. 모스코소는 1946년 7월 1일 농촌 소도시 페다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모스코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서로 일했으며, 1960년대 초에 아리아스를 만났다. 모스코소는 아리아스의 정치운동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커피 수출회사에서 일했다. 아리아스가 1968년 3번째로 권좌에서 쫓겨나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로 망명하자 모스코소도 그를 따라갔다. 모스코소는 미국에서 실내장식을 공부하다가, 1969년 22세 때 67세이던 아리아스와 결혼했다. 아리아스는 1988년에 타계했다. 모스코소는 1990년대 초에 파나마 정부의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는 한편, 1990년 아르눌피스타당(Arnulfista Party)의 창당에 관여해 1991년 당수가 되었다. 1994년 파나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득표율 29%로 2위를 차지했다. 1999년 2번째 출마에서 44.8%를 얻어 37.8%를 얻은 토리호스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3위는 약 17.4%를 얻은 알베르토 바야리노가 차지했다. 투표율은 약 75%로 추정되었고, 투표는 전체적으로 특별한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 주요 후보인 모스코소와 토리호스는 정책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모스코소가 좀더 대중지향적으로 여겨졌고, 토리호스가 재계에 좀더 우호적으로 여겨졌을 뿐이었다. 두 후보 모두 빈곤을 몰아내고,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고, 일자리를 만들고, 파나마 운하를 투명하게 운영해 이익을 내겠다고 공약했다. 모스코소는 또한 정부의 민영화 정책을 늦추겠다고 강조했다. 모스코소는 대학 교육을 못 받은 점 때문에 공격을 받았지만, 다수의 유권자들은 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파나마 운하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감독하는 것이 신임 대통령의 중요한 과제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1998년] 한국의 민속학자 임석재(任晳宰, 1903.5.1~1998.5.2) 사망>
설화, 민요, 무가 수집에 평생을 바친 민속학자 임석재씨가 1998년 5월 2일 별세했다. 임석재씨는 송석하와 더불어 우리 민속학을 개척한 민속학계의 제 1세대 학자였다. 1958년 문화인류학회를 결성, 초대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 굿 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쳤다. 1918년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연루돼 퇴학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설화-민요-무가-민속극 등 민속학 전반에 걸친 자료조사와 연구에 있다. 그의 학자적 혜안은 1960년대 이후 녹음기를 둘러메고 전국을 돌며 각 지역의 민요를 수집한 데서도 드러난다. 가사중심으로 진행되던 당시의 민요사연구풍토로 볼 때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1995년 5장의 음반과 책으로 된 `한국구연민요`가 발간돼 근대화에 밀려 자칫 사라질 뻔한 우리 민요가 보존될 수 있는 길이 트게 됐다. 1960년대 이후 한국문화의 근간을 무속으로 생각하게 된 그는 이후 무가연구에 몰두, 1970년 우리 무속연구의 기틀을 닦은 논문으로 평가받는 '한국무속연구서설'을 발표했다. 1989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1994년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1961년] 한국-벨기에, 국교 수립
벨기에는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한국과는 1961년 5월 2일 단독수교한 뒤 1962년 상품보호협정, 1975년 항공협정, 1978년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2002년 대한수입액 7억 9991만 달러, 대한수출액 6억 4213만 달러이다. 2003년 현재 교민수 171명, 체류자수 345명이다.
[1952년] 세계 첫 제트여객기 영국서 취항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중에는 F-86 세이버(Sabre), 미그(MiG)-15, 미그-17과 같은 초음속 제트전투기가 실전에 배치돼 본격적인 제트기의 시대를 열었다. 제트엔진을 이용한 여객기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됐다. 제트여객기는 높은 고도에서도 비행할 수 있어 연료소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어 경제적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높은 고도에서 운항하는 여객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승객들이 산소마스크 없이 호흡하기 위해 객실 압력을 조절할 수 있는 여압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1949년 제트엔진을 탑재한 여객기 코밋(Comet)을 개발했으며, 여압장치 문제를 해결해 마침내 1952년 영국항공사(British Airways)에 의해 첫 제트여객기가 취항됐다. 그러나 동체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연이은 추락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영화감독 임권택(林權澤) 출생
← 임권택이 감독한 <씨받이>(1986)의 한 장면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계에 뛰어들어, 감독 정창화의 연출부에서 영화수업을 받았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에 데뷔했다. 첫 작품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전쟁과 노인〉(1962)·〈왕과 상노〉(1965)·〈나는 왕이다〉(1966)·〈청사초롱〉(1967)·〈요화 장희빈〉(1968)·〈바람 같은 사나이〉(1968)·〈십오야〉(1969)·〈비내리는 고모령〉(1969)·〈월하의 검〉(1970) 등 많은 통속영화들을 연출했다. 1970년에는 한 해에 8편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다작·범작의 습작 시기를 거친 그는 1970년대 영화법 개정 이후에는 반공영화·새마을영화 등을 만들었다. 다작을 통해 쌓은 경험과 연출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작가로서 눈뜨기 시작한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연출했는데 〈증언〉(1973)·〈족보〉(1978)·〈깃발 없는 기수〉(1979)·〈짝코〉(1980)·〈만다라〉(1981) 등의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1980년대 이후의 〈안개마을〉(1982)·〈불의 딸〉(1983)·〈길소뜸〉(1985)·〈티켓〉(1986)·〈씨받이〉(1987) 등의 작품에서 더 진전된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절제된 연출 스타일과 함께 휴머니즘적 주제의식을 표현했다. 절제된 연기를 바탕으로 구사되는 장시간 촬영(longtake) 기법은 최근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작으로는 일제시대 깡패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1993년에 발표한 〈서편제〉는 좋은 평을 받았다. 2002년 제55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조선 후기의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1921년] 시인 조병화 출생
인간의 존재와 고독을 주제로 한, 말하듯 자연스러운 시를 많이 썼다. 아호는 편운(片雲).
1938년 경성사범학교를, 1945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서울중학교 교사, 1955년 중앙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1959년 경희대학교 조교수로 근무했다. 1960년 경희대학교 초대 출판국장, 문리과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6~63년 대한럭비협회 이사, 1973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82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및 세계시인회의 한국위원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취미가 있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74년 중국 문화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 1982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에 취임한 이후 부총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28세 때인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등단한 이후 30여 권이 넘는 시집을 펴냈다. 발표시기와 성격에 따라, 〈버리고 싶은 유산〉에서 제8시집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9)까지의 인간의 외로움과 사랑 등의 정서를 꾸밈없이 읊었던 시기인 제1기, 〈밤의 이야기〉(1961)부터 제17시집 〈내 고향 먼 곳에〉(1969)까지 청춘적 고뇌와 감정의 충일로부터 인생의 성찰을 표현한 시를 발표한 제2기, 〈오산 인터체인지〉(1971)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전까지의 내적 방황과 여행을 정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의 동일성에 대한 각성을 드러내 보인 제3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통속적 애상의 정서라는 비판도 받으나, 내면세계를 평이한 시어(詩語)로 표현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밖의 시집으로 〈사랑이 가기 전에〉(1955)·〈존재의 이유〉(1963)·〈남남〉(1975)·〈딸의 파이프〉(1978)·〈다시 갈 수 없는 세월〉(1992) 등이 있다. 1960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9년 경희대학교 문화상,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6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 3·1문화상, 1991년 세계시인대회 공로상, 1992년 대한민국 문학대상, 1996년 금관문화훈장, 1997년 5·16 민족상 등을 받았다.
그밖에 2007년 1기 대법원 양형위원회 발족 위원장에 김석수 전 총리 2003년 중국 잠수함 사고, 70명 전원 사망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 1998년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이사장과 리틀엔젤스예술단 일행 64명 평양 방문 1998년 집중호우로 지하철 7호선 침수 1992년 한국-중국,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0년 중국 정계거물 신화통신 허가둔 미국으로 망명 1986년 올림픽대로 개통 1986년 대처 영국총리 방한 1983년 성교육 교재 초-중-고교 교사에 보급 1982년 영국 잠수함 포클랜드전서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1981년 미국 심리학자 데이빗 웩슬러 사망 1980년 한국-키리바시 국교 수립 1980년 서울형사지법,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선고공판(이재문등 4명 사형) 1977년 단국대 학술조사단 진천군서 국내최대 마애여래입상 발견 1972년 이후락, 평양 극비방문 1964년 서울 도동서 4층집 무너져 14명 사망 27명 부상 1964년 민주, 자민, 국민 3당 통합 선언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민등록법 통과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피선 1956년 중국최고국무회의 백가쟁명 시사 1955년 한미민간원조협정 조인 1953년 요르단 후세인 1세 즉위 1953년 이라크 파이잘 2세 즉위 1945년 영국-인도군 랑군점령 1945년 소련, 독일 베를린 점령 1927년 흥남 질소비료공장 설립 1924년 경성제국대학 관제공포. 예과 개설 1902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펠레이 화산 분출로 4만명 사망 1896년 한국 최초의 육상경기대회 개최 1893년 미국 국립광업회사 파산. 전 미국에 대공황 1857년 프랑스 시인 알프레 드 뮈세 사망 151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1360년 중국 명조의 제3대 황제(1402~24 재위) 영락제 출생 1036년 고려 정종, 내외명산 벌목금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