普賢菩薩權發品(보현보살권발품) 第二十八
4. 법화행자(法華行子)를 수호할 것을 서원하다
(1) 외난(外難)을 수호하다
이 때 보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최후의 오백세(五百歲)의 흐리고 나쁜 세상에서
이 경전을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마땅히 수호하여 쇠망(衰亡)하는 근심을 덜고 편안함을 얻게 하며
그 결점을 엿보는 이가 없게 하겠습니다.
만일 마군(魔群)이거나 마의 아들이나 마의 여자나 마의 백성이나 마가 붙은 이나
야차나 나찰이나 구반다나 비사자나 길자나 부단나나 위타라 등의
사람을 괴롭게 하는 자가 그 결점을 얻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귀신 축에 드는 삿된 생각을 가진 靈駕(영가)거나, 사람이거나,
사람도 이런 귀신 노릇하는 사람 많지요.
‘저건 꼭 물귀신 같다’ 하는 소리를 흔히 하지 않습니까?
그런 등등, 이런 사람들이 '결점을 엿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보현보살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금강경에도 나오는데 '후오백세' 이런 말을 쓰는데,
왜 이렇게 오백세를 단위로 했느냐 하면,
대승불교가 한창 발전할 시기가 부처님이 열반 하시고 500년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살던 사람들이,
“야~! 오백 년 이란 세월이 지났는데, 이쯤 되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모든 것이 이쯤 되었다.”
그러니 그 때 벌써 말세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대승경전에 말세라는 말이 많이 등장 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 벌써 500년 정도 지났는데,
승려들도 그렇고 불자들도 그렇고,
부처님 본래의 정신을 등지고 엉뚱한 데로 흐르고 있었지요.
물론 다는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불교 운동을 일으킨 이들이 대승불교 운동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부처님이 열반 하시고 한 500년 무렵 되었을 때가
가장 왕성하게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금강경, 유마경, 법화경이 그 무렵에 결집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500년을 단위로,
500년이 흘렀는데 또 500년이 더 흐르면 얼마나 달라질까?
그 다음에 거기서 또 500년이 흐르면 얼마나 달라질까?
이렇게 해서 500년이란 것이 다섯 번을 반복된다면,
그때는 형편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제일 500년, 제이 500년, 제삼 500년, 제사 500년, 제오 500년,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최후의 5백세라고 하는 것은 제5 오백년을 말하는 것이지요.
아시는 바대로 제일 500년은 解脫堅固(해탈견고)시대이고,
제이 500년은 禪定堅固(선정견고)시대이고,
제삼 500년은 多聞堅固(다문견고)시대이고,
제사 500년은 塔寺堅固(탑사견고) 불사를 많이 하는 시대이고,
제오 500년은 불자들이 공부는 안하고 시시비비만 일삼을 것이다.
그래서 鬪爭堅固(투쟁견고)시대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꼭 연한으로써 500년. 1000년. 1500년. 2000년. 2500년. 이렇게 보기보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은
이 시대라도 어느 시대이든지 해탈에 이른 사람은 바로 부처님과,
부처님 열반 500년까지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 다음에 선정견고는 지금이라도 선정에 몰두하고
더 이상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않는, 정말 선정만을 최후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도 선정견고시대에 사는 사람이고,
우리 염화실 법우님들은 물론 개인적으로 기도도 하시고,
선정도 닦으시고, 해탈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법문을 하고 경전을 읽고, 보고, 듣고,
부처님 말씀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고,
이런 이론적인 공부, 경전의 말씀을 공부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에 살더라도 다문견고시대에 산다, 많을 多(다)자, 들을 聞(문)자입니다.
그리고 佛事(불사). 가시적인 불사에만 관심이 있는 불자들 참 많지요.
그런 이들은 탑사견고 시대에 사는 사람이라고 그러지요.
불교에 들어와서 승려가 되었든 신도가 되었든 간에,
시시비비나 살피고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오니까,
투쟁도 하고 시시비비도 하고 잘 잘못만 자꾸 따지는 그런 사람들은
영원히 투쟁견고에 사는 것이지요.
부처님 당시 때에라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투쟁견고시대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에라도 어떤 가시적인,
사찰. 경치. 탑. 불교예술품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그것이 불교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부 탑사견고 시대에 사는 사람이라고 이해를 하면 됩니다.
이것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하면,
세속적인 관념은 온갖 차별현상을 눈여겨보죠.
그 차별상을 눈여겨보면 그것은 곧 투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차별을 쫓아가고 그 차별을 극복 하려고 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앞서려고 하고, 상대보다 나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투쟁이거든요.
그러다가 사찰에 왔다 이거죠.
사찰에 오거나 다른데서라도, 불교예술품, 절, 산, 탑, 불교미술 이런 것을 접하게 되면
뭔가 ‘아, 그거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찰에 오면 일단 마음이 순화가 됩니다.
좋은 명산대찰에 오면 어떤 악인도 마음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선량해지고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야, 저렇게 명산대찰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있어서 저러한 문화재가 이렇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가?
그 정신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보려고 하지요.
그러다 보면 불교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에 열중하는 사람이 다문견고 시대에 사는 사람이지요.
다문을 이렇게 많이 하는 것은 결국 선정을 닦기 위한 것이다.
기도나 참선이나 간경이나 지식을 축적하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아주 깊이 들어가는 것이 내 공부이고 내 살림살이가 되겠구나!
진짜 내 불교가 되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을 또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선정견고이고, 그것이 깊어지면 결국은 갈 곳이 어디입니까? 해탈이지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500년의 차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이라고,
저는 늘 그렇게 깨달았고 그렇게 이해를 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2500년이 지난 시대라고 해서 모든 불자가 투쟁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 당시라고 해서 투쟁하는 불자가 없다는 뜻도 아니고요.
지금도 해탈한 사람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요.
그렇게 볼 때 대다수 사람들을 어림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것 보다는 생판 속된 삶에서,
그 속된 삶이란 투쟁의 삶에서 뭔가 예술품, 사찰, 명산, 탑, 불교의 조각,
이런 것에 관심을 갖다가,
성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다가,
實智(실지)로, 實參實語(실참실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은 해탈에 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과정을 그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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