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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김순현 여사를 보내드리며’라는 제목으로
어느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며 금호중앙여고 김회경이 쓴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도사가 사랑방신문에 전면 광고로 특별 게재되었습니다.
외롭고 쓸쓸함을 달래보려 군중속에 들어갔지만, 다시
그 군중 속에서 외롭고 쓸쓸한, 그래서
존재의 허무만이 가득한 이 시대의 가정 속에서
실존의 외로움을 달래며 삶의 의미를 되새김해볼 수 있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어서 소개해드리니 한번 읽어보시고,
다행히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께서는 부모님을 찾아
꼭 껴안고 그리고 이렇게라도 살아계시는 어머님을 향해
가슴속에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래서 잠깐 동안이라도 흐뭇하고 행복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여기 주인공인 고 김순현 여사님에 관한 추도문은 결코
제가 쓴 글이어서 소개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가정의 어머니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소개드립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마음의 의지처이자 고향인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그리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삶은 단지 자식이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며,
각자 여러분들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글귀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전략----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 줄줄이 학교를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검정고시 시킬 때 고모와 고숙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셨으며,
추운 데 연탄 값이 없어 바윗덩어리를 옆집 연탄불에 달궈서
그걸 이불로 싸 덮어놓고 모두 발들만 그 따뜻한 바위에 대고
온기를 느끼며 추운 겨울밤을 견뎌내야 했던 이야기들이며,
어린 자식들 그 추운 겨울에도 새벽 네 시면 깨워 신문 돌리러 내보냈을 때,
지금도 생각만하면 저에게도 이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고모님과 고숙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게 아프셨습니까?
아니, 어쩌면 아파할 조금의 시간도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바쁜 벌들에게는 슬퍼할 시간이 없듯이,
정말 먹고살기도 힘들어 그 많은 자식들 교육비며 생활비 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테니까요!
가난한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었겠어요?
당연히 온통 속이 썩어 암이 되어 이렇게 떠날 수밖에요....
그나마 모든 자식들의 지성스러운 효성 덕분에 지금까지 생명이 연장되었을 뿐,
가슴 속은 젊은 날 그 때 이미 새카맣게 썩어 문드러져 속병을 앓고 계셨을 거예요!
---후략----
http://cafe.daum.net/symposion11 고전교사공부방에 원문 게재
http://cafe.daum.net/ipmyen 자유게시판에 원문 게재
지상에서 영원으로,
김순현 여사님을 보내드리며
-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 김회경(21gobong@hanmail.net)
오늘 우리는 한 평생을 오로지 가정과 자식을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한 여인,
지상에서의 모진 여행을 마치고 영원한 저세상으로 떠나시는
이 여인을 배웅하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당신은 곡성 입면 매월리 월평 지아집 9대 종가에서
아버지 경주김공 학성과 어머니 남원윤씨 소남 사이
4남5녀 중 셋째인 차녀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조백 있고 기품 있는 분위기 속에서
항상 밝고 총명한 천성을 유지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디서든 아무하고나 함부로 교류하지 않는
선비와도 같은 기품 또한 갖고 사셨으며,
그 고귀한 가치들을 자식들은 물론 손자들에게까지 물려주셨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을 미리 알고 하나님이 정하신 듯, 순할 순(順)자에 어질 현(賢)자를 써서,
어진마음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그 어질고 선량한 마음을 금과옥조처럼 따라 사셨기에,
金자 順자 賢자라는 이름을 받으시지는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제가 고모님을 마지막 뵌 것은 이미 지상의 과업을 훌륭히 마치시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뒤였는지,
마지막 이승의 가픈 숨을 내쉬며 떠나시려고 준비하실 때였나 봅니다.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천사의 사도인 온유한 교회 하동준 목사님이 안수기도를 해주시어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생이란 한 덩어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덩어리 그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니
생과 사의 경계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걸 예 모르는 바 아니나,
생사의 경계가 이리도 간단없이 하나라는 것,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허망하고 허망한 마음은 그래도 달래지질 않습니다.
이런 허망한 죽음 앞에 감히 제가 나서서 조사를 하는 것은
고모님의 삶을 제가 어려서부터 속속들이 직접 보고 듣고 잘 알고 있기에,
너무나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사연들이 제 가슴을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모님의 삶은 천 권의 책으로도
당신 가슴에 쌓인 한과 그 서러움은 다 담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승과 저승은 세계가 다른지라
그 서러운 마음들 몇 장 글에 요약하여 위로하고 달래드리려 하오니
부디 여기 이승에 남긴 자식들, 손자들 걱정일랑 조금도 마시고
이승을 떠나 천국에서 안정을 얻으시옵소서!
존경하는 고모님! 고모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무척이나 총명하셨다지요!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의 명민한 두뇌와 남원윤씨 할머니의 조백 있는 기품을
그대로, 좋은 점만 물려받으신 것 같아요!
할머니의 외롭고도 어려운 집안 사정을 잘 헤아려
집안에서도 입안의 혀처럼 희생하시며 지혜롭게 잘 처신하셨고,
어렵게 학교엘 보내주었을 때엔, 왜정 시절의 소학교의 일본인 선생님에게
“김준겐(金順賢)이 빼놓고는 모두가 다 こめくいむし(고메쿠이무시=食蟲이)”
라고 들을 만큼 빼어난 지성을 칭찬하셨다지요!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너희 고모 삼촌들을 어려서부터 제대로 공부시켰으면…….
정말 이 세상을 짊어지고 큰일을 해냈을 텐데……. 하시면서
할아버지께선 당신의 호를 스스로 ‘뉘우칠 회(悔)’자 ‘집 당(堂)’자,
그래서 ‘회당(悔堂)’이라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물네 살이던 꽃다운 젊은 날,
고모님은 연일정씨 송강 정철의 12대손인 고숙을 만나셨다면서요?
동갑인 고숙을 만났을 때 얼마나 가슴 설레고 기대감으로 두근거리셨나요?
결혼하여 6남1녀를 낳아 모진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언제나 진실하고 선량하면서도 훌륭하게 사신 것,
들어서 알고 제가 직접 보고서도 너무나 가슴 저미게 잘 알고 있답니다.
종가집의 엄한 어른들 밑에서 벗어난 시가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자유로움이야 상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겠지만
어려운 살림을 해결하느라 여기저기 시골 오일장들을 떠돌며
무던히도 힘든 생활을 하셨었지요.
그렇게 노력하여 한 밑천 잡았다싶으면
뜻하지 않는 변고를 만나 망하기를 몇 번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무일푼으로 광주에서 새 삶이 시작 되었다면서요!
그런 광주에서의 어려운 살림살이는 저에게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답니다.
그 극한의 어려운 살림살이는 정말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그런 절박한 생활의 연속이었지요! 저축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고,
날이면 날마다 그 날 벌어서 그 날 자식들 입에 풀칠하는 것도 항상 모자랐으니,
어린 자식들 줄줄이 커가는 모습들 보시면서 대견함에 앞서 정말 암담하셨을 터인데,
얼마나 가슴 아팠으며.....
어쩌다 한번 오신 친정아버님의 밥상을 준비하실 때
아무것도 없는 부억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얼마나 애닯았으며,
가시는 길에 차비도 못드리는데,
조용히 생활비에 보태 쓰라 쥐어주는 아버지의 돈을 받고 얼마나 울면서 애달았을꼬!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때 저는 고모님의 상황을 아무것도 모른 채 방학만 되면
엄마가 그렇게도 말리며 못가게 하는 고모집으로 쪼르르 달려 가버렸으니......
사랑하는 고모님!
어느 날인가, 추적추적 비가 왔던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숙은 곤로나 우산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고쳐야 하는데,
그날은 아예 일하러 나가실 수 없으셨었지요.
그날따라 고모님의 콩나물 난전에도 팔린 게 거의 없어
전대 바닥을 박박 긁어 150원 밖에 나오지 않았지요.
150원. 그 당시 150원으로는 보리쌀을 팔아도 5~6인 분 정도 밖에 안 되는 돈이었는데…….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고달프고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
힘 빠진 슬픈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아나- 태숙아! 이 돈 갖다 보리나 사서 쌂아라!”
보리쌀도 아니고 그냥 ‘보리’였어요.
어찌할 수 없는 가난에 체념된, 그렇게 선택한 단어가 보리쌀이 아닌 ‘보리’라는 것을,
저는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겨우 짐작밖에 할 수 있었답니다.
결국 그걸로 보리쌀을 사다 겨우 밥을 지었고,
그 부족한 밥을 보충하려고 밭에서 버려놓은 무를 주워와
깨끗이 씻어 잘게 채 썰어 밥에 넣고 삶아 양판 하나에 담아 비볐고,
그 비빔밥을 떠먹을 때, 그 많은 자식새끼들의 수저들끼리 부딪혀 불꽃을 티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같았고,
그 밥이 사라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지요!
지금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면 고모는 그때 분명 밥만 비벼놓고
한두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시곤 배부르다며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으셨지요!
그 당시 상황을 태종이 형하고 태숙이 누나는 잘 알고 있었지요!
누나가 막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이어서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나 어른스럽고 영특했기에…….
그리고 태종이 형은 동성중 졸업반이거나
광주상고 입학했거나 그 무렵이었을테니까요!
그래서 형과 누나는 그런 고모님의 가슴 아픈 속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기에
유독 평생을 가슴에 간직한 채 슬퍼하고 애달프게 생각하며 살았기에
그렇게 건강들이 좋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어렵고 절박한 가난 속에서도 고모님은 물론이고 고숙께서도
조카인 저를 대하는 눈빛에는 조금도 불편해하거나 싫은 내색이란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정말 사랑해주고 존재감이 느껴지게 대해주시어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가슴 뿌듯함을 넘어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답니다.
정말 상냥하고 자애롭게 사랑으로 대해주셨지요!
그래서 그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방학만 시작되면 저는 응당 고모집에서
태형이 형이랑 태술이랑 같이 지내는 것이 마냥 좋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곤 했지요.
그런 고모 고숙을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솟아오르고,
그래서 제겐 ‘고모’ ‘고숙’이란 단어는 제게 ‘눈물’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 버렸어요.
그랬어요! 그 때는 허름한 셋방 하나 얻을 돈도 없었지요!
광주역 뒤에다 함바집에서 버린 판때기들 주어다 철조망 울타리에 걸쳐
지붕과 벽을 가려 이슬과 바람만 겨우 피하고 살아가는 게 전부였지요!
그런 가난한 천막집에서 방 하나 겨우 만들어 아홉 식구에,
방학 때면 조카인 저까지 더해져 열 명이 생활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열 명이 들어가 서있을 공간도 안 나올 그곳에서,
어떻게 열 식구가 잠을 자고 살았는지 궁금하기만 해요!
그래서 지금도 광주역 뒤를 지날 때면 저도 모르게 그 때의 추억이 아름답게 떠올라요!
고모님께선 가장 힘들고, 생각하기도 싫으셨을 그곳이
저에게는 가장 최고의 추억이고 아름다움으로 남아있으니 얼마나 애달픈 사연인가요!
사랑하는 고모님!
언젠가 이런 날도 있었지요?
어느 여름 소나기가 무던히 내렸고, 물이 빠지지 않는 그곳 하수구 도랑 옆 천막집은
그 더러운 고랑 물이 방바닥에 차오르고, 급기야 우리 무릎까지 덮었으니,
자다가 말고 식구들은 책가방과 이불 등 짐만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막내 태환이만 책상 위 짐들 사이에 겨우 끼워 놓고
바지 걷어 부치고 서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지요!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기에 집에 들어온 며느리들이
아무도 믿지 못한 이 이야기가 어디 소설이지 현실이었던가요?
저는 생애에 한두 번 있는 일이라 떠올리면 정말 재밌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지만
당시 고모와 고숙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 어린 자식들이 한 방에서 편하게 잠을 자고 쉬어도 아쉬움 많았을 텐데,
잠을 자지도 쉬지도 못하고 서서 떨면서 졸다가 다리가 풀려 그 물에 쳐박혀
옷을 다 적셔 떨고 있는 자식들을 보시면서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는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집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고통뿐인데,
그런 고모집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방학만 되면 쪼르르 고모네로 달려가게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면 가슴 저미게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해요
사랑하는 우리 고모님을 보내드리려니까 아련한 기억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떠올라요.....
그 가운데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를 하나 덧붙일까 해요.
역시 광주 신역 뒤 천막집에 살던 때의 이야기랍니다.
언젠가 하루는 곤로를 고치고, 우산을 고치는
고숙의 조그마한 연장 창고에 도둑이 들었었지요.
그 연장들을 가져다 몰래 팔아서 용돈을 마련할 요량으로 쌓아놓고는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다 바보같이 잠든 그 젊고 어린 도둑 이야기를 할려고 해요.
그런 도둑을 보고 고숙과 고모는 없는 밥 한 숟가락씩을 식구들 밥에서 떠다가
밥 한 그릇을 만들어 그 젊은 도둑에게 먹이고는,
집에서 입을 딱 하나밖에 없는 태종이 형의 웃옷까지 입혀주면서 말씀하셨지요.
“느그 집에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 아니냐!
얼른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이 시킨 대로 열심히 공부해야하지 않겠냐!“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인가요!
욕설과 꾸중은 고사하고 그렇게 따뜻하게 밥 먹여 옷까지 입혀 돌려보낸 자애롭고 감동적인 사건은 두고두고 교육 현장에 선 제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었답니다.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생경감있게 전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헌신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살다간 그런 성현들의 성스러움을
멀리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이나,
그에게 은접시를 내어준 밀리에르 신부에게서만 찾을 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 살아있는 삶 속에서 보여준 고모 고숙 그대로의 삶 모두가 성스러움이었고,
지극한 선 그 자체였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겠어요!
저는 비록 스스로는 부족한 점이 많으나
이런 감동적인 경험들 덕분에 정말 생경감 있는 윤리수업을 할 수 있었답니다.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 줄줄이 학교를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검정고시 시킬 때 고모와 고숙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셨으며,
추운 데 연탄 값이 없어 바윗덩어리를 옆집 연탄불에 달궈서
그걸 이불로 싸 덮어놓고 모두 발들만 그 따뜻한 바위에 대고
온기를 느끼며 추운 겨울밤을 견뎌내야 했던 이야기들이며,
어린 자식들 그 추운 겨울에도 새벽 네 시면 깨워 신문 돌리러 내보냈을 때,
지금도 생각만하면 저에게도 이렇게 눈시울 젖어드는데......
고모님과 고숙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게 아프셨습니까?
아니, 어쩌면 아파할 조금의 시간도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바쁜 벌들에게는 슬퍼할 시간이 없듯이, 정말 먹고살기도 힘들어
그 많은 자식들 교육비며 생활비 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테니까요!
가난한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었겠어요?
당연히 온통 속이 썩어 암이 되어 이렇게 떠날 수밖에요....
그나마 모든 자식들의 지성스러운 효성 덕분에 지금까지 연장해왔을 뿐,
가슴 속은 젊은 날 그 때 이미 새카맣게 썩어 문드러져 속병을 앓고 계셨을 거예요!
성스럽고도 지극히 선하게만 사신 데다가 근면하고 성실하기까지 하셨으니
고모와 고숙의 삶이 가져다 준 과보만으로도 자식들이 어찌 잘 못될 수 있겠어요!
두 분의 공덕만으로도 최소한 3대 이상은 천복을 누릴 거예요!
거기다 형들이나 누나, 동생들이 저렇게 고숙 고모님 두 분을 꼭 닮아서 성실하고 근면하며,
모든 손자들까지 또한 그러하니, 아마도 손자들의 손자들까지도 한없는 복락을 누릴 거예요.
고모님! 한 번 보실래요!
그 많은 자식들 가운데 성정이 조금이라도 어긋나
자신을 위해 남을 적당히 이용하거나 밟고 살아가는 자식이 하나라도 있나요!
세상살이가 갈수록 이렇게 험악해져가는 지금 이 세상에 말입니다......
또한 고모와 고숙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당신들의 은덕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예요.
고모 집 안방에는 항상 고모가 없을 때 찾아온 수많은 모르는 손님들이 찾아와
먹고 치우지않은 밥상이 펼쳐져 있었지요,,,...
문전에 손님이 끊이질 않았던 것은 자애로운 고모 고숙을 닮아
자식들도 하나같이 사람들이 좋아해서 다들 잘 따랐고,
친구들이 모두 다 집에 와 한 식구처럼 살며 지냈기 때문이지요!
그게 다 두 분이 쳐놓은 아름답고도 고귀한 사랑의 울타리였어요!
고모 고숙과 그리고 형 동생들과의 수많은 사연들은
주옥같이 가슴에 박혀 별이 되어 빛나고 있어요.
살아서 책으로 쓰면 천 권이 넘을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은
죽으면 선행부 한권 하늘에 올려 하늘이 그것을 보고 회담하여
별 하나 새겨 밝기 등급을 매긴다면서요?
오늘부터 밤이면 우리는 제일 밝고 빛나는 고모 이름을 딴 순현성(順賢星)을 찾아
당신의 공덕을 칭송해 후손들에게 영원히 이어지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 할 거예요!
사랑하는 고모님!
“친정집 부모와 가문의 명예가 너의 양 어깨에 달려있으니,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시집살이라도 시집의 화목을 위해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잘 참아 견뎌내야 한다!“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조금도 어긋남 없이 훌륭하고도 아름답게 잘 참아 넘기셨습니다.
이제 지상에서 간직하고 계신 가슴 아픈 사연들일랑 다 벗어놓으시고,
마중 나오신 그 곳 고숙을 만나, 두 분이서 함께 영원한 안녕을 얻으셔요!
고모님, 그럼 안녕히 가셔요!
이제 순현성의 별을 칭송하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당신을 배웅하렵니다.
2014년 6월 16일 망월동으로 영락을 떠나시는 고모님을 보내드리며.....친정조카 김회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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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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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고인의 슬하 자식들을 간단히 소개 한다면,
7남매 중에서
큰 아들, 가난 속에서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광주 일고를 포기하고 광주상고를 졸업해 광주은행 최장기 지점장직을 역임하다 최근에 퇴임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리에 운영되고 있다. 형수님이 그 많은 짐들을 지고 오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다는 점에 깊이 감사드린다. 자식 둘 중 큰 아들은 현대자동차 근무하고 있고, 딸은 치과의전 졸업반이라 병원개업 구상중이다.
둘째, 누나는 모진 가난과 어려운 조건 속에서 옷 하나도 갈아입을 수 없는 아픈 성장과정을 거치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번도 본인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단다. 다만 고모님을 그대로 닮아 선비같은 기품 때문에 더욱 어려웠고, 화장실 하나 없어 변을 참다 어려서 생긴 병으로 건강이 많이 안좋아 무척 안쓰럽다. 공부를 시켰으면 정말 잘 되었을텐데, 모든게 야학이고 검정고시다. 매움에 대한 아쉬운 DNA 구조가 자식들에게 전달 되었는지, 아들은 대학을 가기 전까지 모든 분야에서 수석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이며, 서울대 영문과 2학년 재학시절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 근무중이고 영국, 프랑스 독일서 석사학위들을 받았고 현재 5개국어를 마스터한 보기 드문 수재다, 현재 외무부 일은 혼자서 거의 좌우할 정도로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다, 누나를 닮아 너무나 예쁜 딸은 로스쿨 졸업후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자형은 애들이 자형 닮아서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주장하는데, 누나만으로도 충분한데, 머가 더해졌는지 찾는 중이다.
둘째, 아들은 '스몰 빅맨'이란 별병을 갖고 있을 정도로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나 전설속 요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믿어질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인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성자'라인정한다. 모든 시험에 수석이나 차석으로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왜소한 체구와 면접시 입을 양복 하나가 없어 번번히 낙방하였으나 한번도 세상을 향해 원망 한번 하지 않고 그 때마다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어느 신문사에 기자로 합격해 정직과 성실을 실천하다 해직기자가 되었다. 이듬 해 사랑방 신문을 창업해 대표를 지내다가 최근엔 친구 조사장에게 맡기고 자식 교육과 견문을 넓히려 캐나다에서 생활중이다. 그가 떠날 때는 나 역시 죽음보다도 더한 고독을 느끼고 있을 때였고, 그가 떠날 때 나는 내 반쪽이 사라진듯한 쓰라림을 느꼈다. 아무 말없이 자식 5남매를 키우며 태형이 형을 따라 가족 친지들에게 베푸는 데레사 같은 둘째 형수에게 눈물겨운 감사를 드린다. 자연인 그대로여서 하늘이 준 자식들을 그대로 받아서 살아가는 천연기념물들이다 자식 5남매 중에서 첫째 둘째는 UBC대학에 보내고, 밑으로 세 자식들 또한 다들 유망한 기대주들이다.
셋째, 정이 가장 많은 그는 지금 광양에서 치과병원 원장을 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아버지처럼 베풀며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도움을 받은 사람들과의 애정담은 밤 하늘의 별들 보다도 많은 에피소우드를 가지고 있어 행복한 사람이다. 정이 많은 동생을 아무 말없이 돌보느라 그렇게 하고싶었던 초등 교직을 버렸다. 닥터지바고 라라역의 쥬디크리스티를 닮은 제수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자식 셋중에서 큰애는 약사로 근문중이고, 둘째는 치과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막내 늦둥이는 어려서 아빠 모습 그대로 똘똘이이다.
넷째, 한때 대학에 강의도 나갔으나, 지금은 법무부 중간 간부 역을 맡아 충실하게 근무하고 있으며, 고모님 간암 진단부터 임종까지 입안의 혀처럼, 그림자처럼 간병을 하고 낮에는 직장에 나가 충실히 근무하였다. 그의 지성스러운 병간호는 필자를 감탄스럽게 만들어 눈물겹게 한다. 그의 처는 지산 한길학원의 신화를 만든 장본인이지만 자식교육을 위해 모든 경제적인 좋은 조건들 헌신짝처럼 다 버리고 캐나다에서 두 자식 키우며 부부 이산 가족의 조건 속에서도 유학온 주변 자식들을 정말 훌륭하게 잘 키눠낸 장한 여성이다. 큰아들은 캐나다 토론토 아니면 오타와 대학을 졸업하여 항공회사에 다니고 있고, 딸은 이번에 캐나다 의과대학 예비학교에 합격한 상태다.
다섯째, 모든 사연들이 그의 귓가에 닿아 입으로 나갈 때면 희극으로 각색된다. 때문에 가족 전체가 하나 같이 결속되어 있기에 가정의 우울한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그 조건들을 희극 배우처럼 유머감각으로 분위기를 전환하여 카타르시스 시키는 장본인이다. 지금은 정신 상담 치료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고, 서울 주변에서 병원 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제수씨 또한 어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미소를 머금는 여성스러운 여유를 소유하였으며, 동생이 살아가는 방식을 잘 존중하여 가정에 헌신하고 자식들을 캐나다 UBC대학과 외국인 학교에 보내 훌륭히 키우고 있다.
막내, 서울대 컴퓨터학과 학부부터 석박사를 거쳐 LG에서 근무하다 현재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스카웃해가 시니어 매니지먼트로 근무하고 있다. 막내 같지 않게 너무나 어른스러운데다 제일 큰 형님을 너무 닮아 수미쌍관 완전한 무늬를 완성하려고 나왔나보다. 제수씨 또한 훌륭한 교육학자이며 현대 시에틀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어린 자식들은 둘 다 영재교육원에 다니고 있어 국가가 반은 관리해주고 있다.
상기 본문 내용은
아래 사랑방 신문 14년 6월 21일자 22면에 실려있습니다.
http://ebook.sarangbang.com:88/Ez
BookViewer/bookmain.asp?foldername=20140620195410&id=srb&date_n=3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머니....~! 이세상에 태어나서 너무 고생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자식,손자가 모두다 성공하여 이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부디 이곳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이제 먼저가신 아버님 만나 이곳의 행복했었던 이야기 하시면서 평온하게 극락왕생하시옵소서...꾸~벅
내가 죽은 뒤에도 나의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 나는 죽은 것이 아니다. -캠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