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 연분이네유
1922년 6월 10일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매산리 어느 조그마한 궉터마을의 혼사집 초례청에는 22세된 신랑과 18세된 신부가 동네 사람들과 친인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축하를 받으며 마주 바라보고 서있다 당시만 해도 먼거리 왕래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이웃동네 또는 한동네에서 같이자란 남녀들이 주로 혼인을 했다 오늘 혼례를 치루는 부부 역시 신랑 신부집의 거리가 십여리도 채 않되는 곳이니 이웃 동네나 별로 다를바 없다 아무개집 몇째아들 아무개집 몇째딸 하면 근동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눈만 뜨면 매일 만나고 보는 사람들이라 속이고 또 속을것 없으니 중매쟁이의 하는 역할은 다리만 놓아줄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다 혼기가 찬 자식들이 있으면 동네 어른들은 시장판에서 막걸리 한잔 나누다가도 서로 서로 사돈 삼자고 한말이 우연히가 아닌 사실로 되여 친구간에도 사돈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간에 사돈네집 숫가락이 몇개인지 제사날이 언제인지 까지 훤히 알고 있었고 오고가는 이야기 끝에 얽히고 설키면서 서로 연결되어 온동네가 이리사돈 저리사돈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욕을 하거나 험담하지 못하는 경우가 되였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요지음 사람들에겐 이해가 어렵겠지만 옛날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안방 건너방에서 애기를 낳던시절이 있었다 그러하니 삼촌 조카사이에 나이 구별이 없었으며 시동생이 형수의 젖을 먹고 손자가 할머니 젖을 먹고 자라기도 하였으며 삼촌 조카가 같은학교 같은반에서 공부하다보니 친구이자 삼촌 조카 사이였다 그래서 나온말이 작아도 콩싸라기란 말이 있었는데 조카보다 나이가 적은 삼촌이라해서 나온말이다
갓 시집온 색시가 시집 삼촌과 친정 언니딸의 혼인을 주선하는 희한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호칭에는 엄연한 위게질서가 따르는것이 또한 예이다 시집쪽으로 보면 이질녀가 숙모가 되고 친정쪽으로 보면 삼촌이 조카사위가 된다 어떻게 호칭하며 지내는지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답을 모르겠다
옛말에 사돈과 변소는 멀어야 한다는 말이있다 요지음이야 변소가 실내 거실에 있고 사돈간에 거래가 자주 있질 않아서 예외가 되어버렸다 가까이 할수록 냄새나 풍기고 기분 않좋은일이 일어날수 있다는 말인되 꼭 맞는말은 아닌듯 싶다 요지음에도 친구끼리 사돈하면서 잘지내는이도 이따금 볼수가 있다
서로가 잘아는 이웃간의 사돈이자다보니 싫고 좋고를 떠나 그것이 운명처럼 살아왔다 부부간의 이혼이나 싸움이라는것은 아예 몰랐고 어쩌다 그런말이 들리면 그것이 무슨 뉴스 거리인양 온동네가 요란들썩 알게되니 속으로만 삭일뿐이였고 그러녀니 여기며 살다보니 천생연분으로 알고 백년해로 하며 잘 살아왔다 이른바 미풍양속이고 서로간의 신뢰였다 요지음 처럼 젊은이들이 결혼식에서 맺은 결혼서약서를 휴지처럼 마음대로 버리고 이혼을 멋대로 생각하며 황혼이혼조차 서슴없이 하는 현시대를 살면서 천생연분이라 여기며 운명처럼 사시던 옛어른들을 생각해본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날 신랑은 면사무소 호적계를 찾아가 혼인 신고를했다 1901년 12월 7일생 의 신랑과 1905년 12월7일생인 신부였다 - 천생 연분이네유 - 호적계를 보고있던 직원이 신기한듯 입을 떡 벌렸다 - 호적계를 여러해 보았지만 신랑신부가 한날 생일인것은 처음이네유 - 신랑은 평강채씨24세손 (奎자仁자)이시고 신부는 순흥안씨 안저安渚씨와 전주이씨 사이에 2녀2남중 맡딸(光자得자)이시다
그분들이 바로 내 부모님 이시다 사람들은 가리켜 대단한 천생연분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위로 딸 ,아들, 딸, 그리고 딸, 아들, 아들, 끝으로 딸을 나으셨다 이렇게 칠남매를 낳고 사시면서 부부싸움이 뭔지 모르고 알뜰살뜰 사시는 잉꼬이시였다 아버지 성격은 평소 말없이 과묵하신데다 법 없이도 사실 호인이시였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비해 활달하시였지만 여필종부의 시대속에서 사시다 보니 약간의 뜻이 틀려도 오직 참는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입에 작크를 달고 사시였다 아버지 말씀 하나 하나는 법이였고 어머니는 무조건 순종하는것으로 알고 계셨다
요지음 사람들은 여자가 애낳는 공장이냐고 말할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최소한 다섯정도는 보통이고 많게는 아홉이나 심지어 열이넘게 까지 낳은 집도 있었다 옛날에는 나이 열대여섯만 되도 장가가고 시집가기에 아마도 현대와 달리 출산 기간이 길은것도 이유일 것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병원이 그리 없고 산아제한이라는 생소한 말을 몰랐으며 낙태가 없던 시절이라 생기는대로 낳다보니 집집마다 보통 여나믄 식구들이 들썩거리었다
- 다 먹고 살것은 달고 태어나는거여 - 옛날 어른들은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 무슨 신의 내림인양 무조건 믿고 있었다 하기야 산 목숨에 거미줄치랴 하지만 작은농토에 많은 입이 살다보니 대부분은 빈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항상 허덕이였다 항시 거덜대고 항시 배고프게 살았지만 그래도 콩하나면 한쪽씩 나누어 먹는것이 당연한 일로 알고 살았기 때문에 그많은 형제 자매간에도 서로 다툴줄 모르고 장손은 부모와 같다는 장유유서의 깍듯한 질서속에서 오직 우애를 최선으로 여기고 살았다
십여리 머나먼 학교길을 가노라면 좁은 등교길은 아이들로 빽빽했고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만 하드라도 졸업당시 학생이 996명이나 되었는데 오랜세월을 거듭 하면서 지금은 학생이 없어 폐교되었다 참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요 세상사 무상이라고 아니할수없다
내가 서른 한살 되든해 아내를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전 그당시엔 노총각이였다 약삭빠른 친구녀석들은 벌써 두세명이나 초등학교 보내고 있을 나이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여자하나 제대로 거두지 못할처지에 어떻게 장가가느냐가 이유였다 솔직히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장가가는 친구들이 부러웁기도 한것만은 사실이다 한때는 5.16혁명을 거치면서 배고픔에 찌든 이들로부터 새로운 의식이 서서히 바뀌었다 [둘만낳자] 는 구호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세째부터는 세제혜택은 물론 직장에서 주는 학비혜택 조차받지 못하였고 드디어 [하나낳아 잘기르자 ]는 구호까지 등장하였다 어느덧 세월이 변하면서 조혼早婚이 만혼晩婚으로 바뀌였고 심지어 요지음에는 사십에서 오십 육십 노처녀 노총각들은 결혼 조차 못하고 늙어가고있다 게다가 사회가 실업과 물가고의 회오리 바람속으로 빠지면서 결혼 기피증은 더더욱 심화되고 드디어 인구절벽 시대로 오면서 인구는 서서히 내리막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예 예식장이 썰렁하게 텅빌지경 이려니와 [하나낳아 잘기르자 ]에서 [무자식 상팔자 ]로 변하드니 아에 싱글이 대세이다 시쳇말로 생산공장이 속속들이 문을 닫고 있는것이다
이따금은 70여년전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당시만해도 이웃과 이웃은 남남이 아닌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비록 먹을게 부족하드라도 어쩌다 고깃국이나 떡한덩이만 생겨도 울타리 너머로 이웃과 같이나누었다 혼자서 먹을수가 없는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도덕적 양심이 뿌리깊히 밖혀있던 시절이였다 아버지 생신날이면 으례 새벽일찍 동네 한바퀴 돌며 [어르신들 아침은 저의 집에 오셔서 드십사] 하고 전령이 되였다 비록 넉넉지 못하드라도 밥 한그릇 막걸리 한잔에 아침밥상은 떠들석하고 화기애애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 큰 자식놈들 이야기가 나오고 맛장구가 잘 맞으면 또다시 사돈이 생기기도 했다
천생 연분은 작은 동네에서도 이따금 있었지만 신랑신부가 같은 생일날은 처음 보았다는 면사무소 호적계직원의 말이 벌써 한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나의 뇌리속 깊히 뿌리가 되어 밖혀있어 이따금은 부모님 생각이 난다 더우기 요지음 불황속에서도 풍요로움에 살다보니 막걸리 한잔 들어가게되면 마음이 심란해질때가 있다 - 악의악식惡衣惡食이라도 무화장복無禍長福인겨 - 막걸리 한잔이라도 들어가시면 떠들석 하시던 그분들에게 떳떳하게 술한잔 밥한끼 제대로 대접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나무가 고요하고저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려해도 어버이가 가다리지 않는다 수욕정이풍불지樹欲靜而風不止요 자욕양이친불대子欲養而親不待라는 명언이 망치가 되어 이따금 나의 뒤퉁수를 호되게 내려 치는것같다
조석으로 거울앞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서 그분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월의 무상함이 입김으로 변해 거울에 흐미한 자국이 서리발처럼 남는다 다만 긴세월의 짧은 이야기이기에 그저 멍할따름이다
-회 한 悔 恨-
첫닭울음 소리에 하루를 여시는 어머니 ! 하얀 옥사발에 첫샘물 길어다가 장독대에 올리신 그 의미를 그때는 몰랐슴니다
보리고개 힘든시절 당신의 밥그릇은 늘 우리 칠남매의 것보다 작았슴니다 항상 밥맛이 없다시던 그말씀 어머니는 늘 그러신줄 알았슴니다
시골장날 시장길에 고등어라도 사오시는날엔 비린내 그맛이 싫으시다고 자식들 앞으로 밀치시고 나물을 좋아 하시던 어머니 그때는 정말 그러신줄 알았슴니다
늘 고우시던 젊음을 자식을 위하여 헌신 하시고 힘없으신 육신에 치매라니 세상살이가 다 원망스러워 다 망각해 버리시고 철없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신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은 사는게 바쁘다고 그흔한 효도관광 한번 못시켜 드렸는데 평생을 갚아도 못다할 은혜 억장이 무너지는 간절함만 남았슴니다 이 불효자는 웁니다
누군가의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내내 가슴이 아프다 누군가도 모두다 부모가 되는것을 ! 눈물이 슬며시 흘러내려 양볼을 적신다 하지만 못다한 부모님에 대한 한스러운 마음은 녹아 내리지 않고 가슴에 눈덩이 처럼 굳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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