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은 물론 세종이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연 無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옛 글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했다.(世宗實錄,字倣古篆) 그리고 訓民正音 반포후 이를 적극 반대하던 집현전 학사 최만리등의 상소문을 참고해보면
2. 원시한글이 있었다는 부분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불과 50일만에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이 상소문에 벌써 19개의 언문(諺文)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만약 훈민정음이 사상 초유의 문자였다면 언문이라는 단어대신 ‘훈민정음’ 이라는 단어가 대신 올라 있엇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문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유치한 형태로나마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증거는 최만리등 상소문중 다음 글귀가 증명한다.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3.옛 글자는 단군 3세때 만든 加臨土
* 원시한글인 가림토(또는 加臨多)가 만들어 졌다는 기록은 ‘환단고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학자가 많아 이것만 가지고 원시한글이 있었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인술이 없어 필사본에 의해 전하던 이 기록이 더러 가필의 흔적은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위서라고할 수는 없다.
즉 동립선언서의 원문은 “吾等은 玆에....”인데 국립극장 아래 비석에 “우리는 이에”라고 써 놓았다 하여 그것이 한글세대가 이해하기 좋으라고 써진것이지 위서는 아닌거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림토가 실재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므로 다음글을 보자.
4. 가림토가 있었다는 논리적 증거
* 가림토(加臨土)가 있었다는 기록은 고려말 충정왕을 받들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와서 천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고 홍건적 난으로 서북면 도원수가 되어 활약한 杏村 이암(李嵒)선생이 그간 수집한 고서들을 인용해 찬술한 ‘단군세기’에 있고
* 한편 기림다(加臨多) 라는 말은 위 이암의 현손으로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당하여 유배지에서 우리의 상고사 만을 탐독 하다가 중종때 복위되어 찬수관이 됬으므로 내각에 비장되어있던 수많은 책을 얽어볼 기회를 가졌던 十一堂 主人 이맥(李陌)이 지은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있다.
*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 3세단군 가륵이 삼시랭이 을보륵에게 시켜 만들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점은 가림토와 가림다의 표현이 다르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가림토가 실재 했다는 증거거 된다.
* 즉 이 글들이 모두 위서가 가 쓴 위서라면 가림토건 가림다건 한목소리를 내야 했을것이고 이암의 현손인 이맥이 자기 조상인 이암의 글을 베껴 썻더라도 기림토건 가림다건 한목소리를 내야 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맥은 전술한 바와같이 성격이 강직하여 조상의 글이라고 무조건 베껴쓰지 않고 자기가 본 다른 기록에 의하여 ‘가림다’ 라고 썼을 것이다.
* 그렇다면 이암과 이맥이 본 기록들은 서로 다른것인데 바로 이것이 가림토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이유는 다음을 보자.
5.가림토와 가림다는 같은 말이다.
* 필자는 어떤 학위는 없지만 20여년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 우리말과 한글은 결국 하느님의 선물인 천부인으로 만들었다는 제자 원리의 이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1940년 안동 이한걸의 집에서 나타난 유네스코 보존물이며 우리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이 해례본은 사실상 우리 한글이 중국의 성리학이나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정인지등이 해례본을 썻지만 이는 사실상 한글을 모독하는 글이므로 그 해례본은 국보에서 폐기되야 한다.
* 세종대왕은 옛 글자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 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音까지는 분명히 취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의미는 취하지를 못했다.
즉, ㄱ ㄴ ㄷ ...ㅎ 속에는 그져 발음기호 노릇밖에 못하는 알파벳과는 달리 분명한 의미가 들어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현재 엉터리인 우리 한글의 맞춤법 교정은 물론 고대에서 쓰던 말 까지도 복원해야 우리 말이 제대로 살아난다는 엄청난 사건이다.(엉터리라는 현재 맞춤법의 이론은 홈페지 에서)
* 우선 ‘ㄱ’속에는 갓(邊)의 뜻이 있다. 우리말에 ㄱ 으로 발음되는 말들은 모두 ‘갓’ 가장자리의 뜻밖에 들어있지 않아 가죽, 가지(나무 줄기의 갓), 가시, 기시네(男을 알맹이 女를 껍데기로본... 女는 원래 겨집여, 훈몽자회) 겨(왕겨,알맹이의 갓) 겉(外) .....등 또 겨울은 여름을 알맹이로 보는 원시에서 껍데기 계절. 게으르다는 “겨울이다”에서 나온말... 하여간 기름(油)까지도 ‘갓’에서 진화한 말이다 (더이상 설명 생략)
* 위를 근거로 가림토나 가림다를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보자.
우선 ‘가림’부터 본다. 위에서 ‘가’는 가지(枝),또는 가람(川)은 가지를 치고 그 가지가 커지면
가랑이(가지랭이)처럼 갈라지게 되어 원 줄기와 비교하게 되는데 이것을 ‘比較,分別’ 한다고 하여 ‘앞가림’ 이나 아기가 대소면을 ‘가린다’, 낯가림을 한다, 말이있다.
* 한편 이 분별과 비교는 ‘대신’한다는 말로도 쓰여져 “이것으로 인사말을 가름 하겠습니다” 한다면 인사말을 대신 한다는 말이 된다.
* 이상으로 위 가림토와 가림다의 ‘가림’은 분별, 비교, 대신의 뜻이 들어잇다. 그러면 土와 多 가 다르고 그렇다면 어느것이 맞는말인가?
이는 둘다 같은 말인데 우리 말로는 ‘다’가 맞는다.
즉 土는 土臺 그러니까 땅이다.
‘다’는... 현재 地는 따지 이지만 소주가 쏘주가 되고 번데기가 뻔데기가 되듯 말이 강해진 연유이므로 훈민정음 배포 100년만에 쓰여진 최세진의 한자사전 訓蒙字會 만 하더라도 ‘따지’가 아니라 ‘다지’이다
그러니까 결국 다(多)는 “많다”가 아니라 땅이다.
* 결론은 위 加臨土나 加臨多는 둘다 무엇 무엇을 가림 한다는 토대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림 했을까? 이는 말이나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분별 비교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가림다’ 라는 말은 한자가 생기기전 즉 文字라는 말이 있기도전 그 말이나 사건을 대신, 분별 한다는 우리의 순수한 말이다.
이것이 후에 우리 가림다는 없어지고 한자로 적자니 가림은 그래로 加臨이라 음을따고 加臨土의 土는 땅의 의미를 딴것이며 ‘다’는 음까지 그대로 한자로 기록하여 加臨多라 한것이다.
* 이 좋은 가림다가 왜 없어졌는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으로 인한 한자 사용이다. 즉,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도 우리 민족이 한글을 제대로 쓴 것은 6.25 이후로 불과 50년 남짖인데 지금 한글은 어느새 영어로 대치되어 길거리의 간판이나 상장주식 회사 모두 영어이고 언론계나 학자 정치가 교수 작가 모두가 영어를 쓰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니 써붙인 글씨도 “개업”이 아니라 “open" 이라 써 붙였고 천철간 비디오 카메라 선전문구에는 한글은 한마디도 없다.
필자가 단언 하건데 한글을 만들어 50년 썻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50년 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그래도 가림토는 단군때 만들어지고 4천년이 지난 세종때까지는 가림토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위대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우리 한글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100년 500년 후에는 타임캡술 속에서나 찾아야 하다.
* 다음 가림토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는 가림토 가림다의 기록이 있다고 쓴 이암이나 이맥도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보지 않은한 가림토의 의미를 몰랐을 것인데 어느 위서가들이 이 모르는 소리를 위서로 쓴다는 말인가?
* 이외 실증적 증거로 중국 山東省 桓台市에서 출토된 BC1580년후로 추정되는 뼈에 새겨진 가림토 문자의 사진이 있고 부산일보에서 2003.3/31자로 발표된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성에 암각화된 가림토와 경남 산청군 단속사 터에서 발견된 가림토 비석 사진이 있다.
* 그러므로 가림토는 3세단군 加勒 46년(BC2181) 당시 별직의 제사장 으로 두었던 화랭이 乙普勒을 시켜 만든 것이 확실한데 요는 이 글자를 3세 단군과 삼시랭이 을보륵이 창제 했느냐는 것이다.
* 이는 세종의 한글이 완전 창작이 아니고 모방 이드시 이 3세 단군도 1대 단군(단군은 개인 이름이 아니라 ‘밝은 잇큼’ > 밝은 임금을 후세에 한자로 檀君으로 표시한 왕의 명칭. 단군은 고조선때 48분이 통치했음)이나 그 아버님 황웅때부터 원시적으로 전해지던 말고 글자를 보강 정리 했음이 어원뿌리로 보면 밝혀지는데
* 여기서 필자가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었다는 근거 한가지만 예를 든다. 즉, 석가래, 사타구니, 손가락, 쑥, 삼(인삼) ....등등의 말들은 전혀 그 뜻이 상관없고 세종이 만든 말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쓸려면 반드시 ‘ㅅ’을 써야 한다. 이는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또하나의 증거도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한글이 표음문자 이면서도 상형문자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말한 서가래 사타구니.등은 그모양이 ㅅ 같고 손가락이나 쑥 등도 그 사이가 ㅅ 같다.
* 이 ㅅ은 위로 솟는 것 같아 ‘솟다’ 라고도 쓰고 한편 서(立) 잇을수도 있어 ‘사람’ 등에도 ‘ㅅ’을 쓴다. (생략)
이는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증거이다.
* 결론- 이렇게 우리 말과 우리 한글은 우리 단군과 그 조상님인 환웅, 환인 하느님께 까지 올라가고 우리는 지금 그 말과 글자를 쓰고 있다.
*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현재 옷을 여호아에게 빼앗겻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하느님이 누구냐고? 아마 십중팔구 여호아 라고 대답할거이다.
이러다가는 먼저 말했드시 “동해물과 백두산이....여호아가 보우하사....”가 될것이다.
* 이렇게 자기 민족의 뿌리를 짤라버린 일부 종교에서는 단군을 거론하면 특정종교 선전이라고 비판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 한글학회에서는 대통령 갈릴때마다 달라지는 맞춤법 몇 개만 가지고 따질것이 아니라 우리 한글의 원류를 찾아 우리 말과 우리 뿌리부터 확립해야 할 것이다. 즉, 고정관녕에 사로잡힌 기존 이론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이론도 받아드려 함께 연구해 활기찬 한글학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