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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국민소통운동본부 CCCC|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대한 국민<가족>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소망합니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동서남북 소통행정<소통정치>를 하실 줄 압니다. <<미래창조과학기술부 소관 주관하에>>.
나에게 의식주 문제를 담당한 분이 누구인지를 아시나요 ?<부모형제처자> 나의 건강 생명 사랑의 주관자 누구인지 아시나요?<조물주=창조주 하나님>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C C C C -
평택 소통 김 평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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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SEPTEMBER
9월.
September란 원래는 7월
(sept=seven)이었는데
‘줄리어스 시저’의 July와
‘아우구스투스’의 August가
앞에 들어갔기 때문에 차
례가 밀려서 9월이 되었다.
가을의 개막이다.
9월을 여는 기도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때에도
이슬같은 은혜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사합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복음으로
어떤 슬픔 속에서도 희락의 복음으로
어떤 질고 속에서도 치료의 복음으로
9월처럼 찾아오시는 주님
우리들의 지친 삶에
백로(白露)의 아침과 추분(秋分)의 밤을 주시듯
은혜의 아침과 사랑의 밤을 주셨습니다
학교마다 새학기를 시작하듯
우리도 주님과 새학기를 시작하게 하시고
밤으로는 그 하늘도 바라보게 하시고
낮으로는 저 들판도 바라보게 하소서
6.25로 빼앗겼던 하늘에
다시 펄럭일 깃발을 올린 9.28의 그 하늘
그 하늘처럼 소중한 9월의 하루 하루를
꽃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밝게 아름답게
별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높게 그윽하게
새하늘 새땅의 새벽별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월 : 자, 9월이다!
서늘한 가을이 될 것이다. 맑고 조용한 푸른 하늘이 열려 올 것이다.
들마다 오곡백과가 익어 황금으로 빚나고 거둬들이는 풍요로운 꿈의 계절이 올 것이다.
바람 끝도 2,3일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별로 장마다운 장마도 없이 한달내 가물로 타고 찌고 뒤체기던 태양도 이젠 어쩌는 수 없이 열을 떨구고 대낮에는 한결 카랑카랑한 금빛으로 변하여 간다.
비록 노염이 아직 남아 계속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름의 마지막 고비에 헐떡거리는 숨결에 지나지 않는다.
여름의 미련(未練)은 무심코 떠 오른 담백한 구름 쪽이나 저녁 때 일어나는 서늘한 매미 소리, 길가에 핀 「코스모스」의 하늘한 흔들림 따위로도 쉽게 바위어 나갈 수 있다.
봄의 꽃으로부터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키워 익히고 풍족하게 성취한 여름은 이제 거둬 들이는 가을을 위해 길을 비켜 서야 한다.
그러나 가을은 별이나 해의 것은 아니다. 가을은 지상(地上)의 것이고 우리 자신의 것이다.
들이나 과수원에 충만하는 성숙(成熟)은 우리가 뿌린 씨앗에서 이룩된 것이고 씨를 뿌린 자는 그 씨를 거두어야 한다.
그래서 가을은 차차 익어 가고 강산이 가장 아름다운 물감으로 칠해질 단풍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법석대고 지루하던 여름의 「바캉스」로부터 돌아와 이제 막 집뜰과 책상 머리에 앉게 되었다.
9월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하고 내일의 설계를 하는 때이다.
9월의 탄생석 : 청옥(靑玉 ; sapphire). 대용석은 청금석(靑金石). 중세 때는 사욕을 물리치고 고결한 사상을 가진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진리․성실․견고한 의지를 상징하며, 행복을 지킨다고 한다. 청금석은 배반자의 힘을 약화, 격심한 논쟁을 냉각시켜 가해자를 말살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1월 1일.
9월 3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3장 전문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삼하15:12, 시69:4
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시9:13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② 잠언 3장 전문
○ 지혜를 순종함으로 인한 축복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시111:10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20.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창7:11
21.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잠4:21
22.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23.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시91:12, 사5:27
24.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25.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26.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자의 복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롬13:7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시25:14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오늘의 역사
① 방송의 날 : 한국의 국제무선 부호 ‘HL’로 결정(1947)된 걸 기념하여 제정.
② 세브란스병원 개원(1904) : 9월3일 서울 남대문 밖 복숭아골(지금의 도동)에 세브란스병원이 문을 열었다.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병원 설립 자금 15,000 달러를 기부한 미국 클리블랜드의 재력가 루이 세브란스에게서 따온 것이다.
99년 전 오늘이 세브란스병원의 정식 개원일이기는 하지만, 이 의료기관의 기원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겸 의사 호레이스 앨런이 고종의 도움으로 서울 재동에 세운 왕립 광혜원(王立廣惠院)으로까지 올라간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광혜원은 개원 13일만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 지금의 외교통상부)의 계(啓)에 따라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꾸었는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운영권이 넘어간 제중원의 부속 의학교 초대 교장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의 실질적 설립자다.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 광혜나 뭇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은 의료라는 사회 제도의 윤리적 오리엔테이션을 우아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의사 파업에서도 보았듯, 오늘날 광혜나 제중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의료인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세브란스병원과 거기 딸린 세브란스 의학교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적 의료사. 의학사의 중추를 이룬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거쳐 1957년 연희대학교와 함께 연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연세대 의과대학이 되었고, 세브란스병원은 두 대학 통합 뒤인 1962년 신촌의 현재 자리로 이전해 연세의료원의 핵심이 되었다.
연세대 의과대학과 치과대학의 부속 의료 기관들을 뭉뚱그려 일컫는 연세의료원은 신촌만이 아니라 서울 영동(도곡동), 인천, 경기도 광주와 용인 등지에 흩어져 있는 세브란스병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종석,2003)
③ 연변조선족자치구 설립(1952) : 1952년 9월 3일 중국 지린 성[吉林省] 동남부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말부터 조선족이 개척해 정착한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다.
이후 이 지역은 1948년 3월 '연변전구'로,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로 바뀌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어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가 되었다.
④ 두모진해관(豆毛鎭海關) 설립(1878) : *해관=세관(稅關).
⇨9월 28일.
⑤ 미국 독립전쟁 종식(1783) : 미 영 파리 평화조약 체결! 1783년 9월 3일 미국독립전쟁의 결과로 미국과 영국 사이에 파리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영국은 식민지 주민들을 억압하는 갖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식민지 주민들은 대륙회의를 구성해 영국의 조치에 대항했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식민지 주둔군을 늘리자 1775년 봄 전투가 벌어졌다.
대륙회의는 군대를 모집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새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연합헌장을 제정했다.
내전 형식으로 시작된 전쟁은 1778년에 프랑스, 1779년에 스페인, 1780년에 네덜란드까지 식민지측에 가담함으로써 국제전으로 번졌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를 끝으로 항복했으며, 그 결과 1782년 미․영 예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예비조약은 이듬해 9월 3일 조인된 파리 평화조약에 포함되었다.
파리 평화조약으로 같은 해 11월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미국의 국경은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까지 확대되었다.
⑥ 일본 에도(江戶)를 토오쿄오(東京)로 개칭(1868) : 에도(강호)를 도쿄로 개칭한 때는 1868년, 동경시의 탄생은 메이지 22년(1889년), 1932년(쇼와 7년)에 인접한 5부 82정촌을 합병하여 인구 497만명. 세계 제2위의 도시가 되었다.
그 후 소화 1943년 부터 도제가 실시되어 도쿄도가 세계 유수의 국제도시로서 높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의 얼굴이 되어 있다.
⑦ 제2차 세계 대전 발발(1939) : 1939년부터 1945년까지에 있었던 두 번째의 세계 대전.
1939.9.3 독일이 75개 사단의 병력으로 폴란드를 치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발단하여 1941.12.8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함에 이르러서 전 세계에 미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일본․이탈리아 등의 추축국(樞軸國)에 유리하게 싸움이 전개되었으나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군의 전멸과 동남아 지역에서의 미국군의 총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1945년 5월과 8월에 독일과 일본이 차례로 무조건 항복을 함에 이르러 미국․영국․소련 등 비추축국(非樞軸國)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은 워낙 그 규모가 컸던 만큼 각국은 과학 무기의 연구에 전력을 기울이게되어 그 결과 원자탄같은 새로운 무기가 발명되었다.
⑧ 베트남 여객기 추락 65명 숨져(1997) : 1997년 오늘 !
승객과 승무원 66명을 태운 베트남항공 815편이 캄보디아 프놈펜 국제공항에 추락합니다.
이 사고로 한국인 승객 24명을 포함해 65명이 숨집니다.
사고기는 베트남 호치민을 출발해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향하던 중 악천후를 만났습니다.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첫 착륙에 실패한 뒤 두번째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에서 10km쯤 떨어진 지점에 추락합니다.
사고를 당한 한국인들중엔 캄보디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려던 대학생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⑨ 미국, 이라크 공습(1996) : 미국은 1996년 오늘 이라크 방공 시설에 대한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국의 공격은 이라크군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반군 거점을 침공한데 대한 보복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크루즈 미사일 공격은 오전 10시부터 45분간 계속됩니다.
미사일 공습으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과 군 방공지휘통제시설 레이다 기지등이 피해를 입습니다.
바그다드에서는 크루즈 미사일이 떨어지기에 앞서 공습경고 사이렌이 울렸고 곧이어 대공포화가 하늘을 향해 불을 뿜습니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라크 국영TV방송을 통해 서방측이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은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⑩ 영국 카레이서 세계기록 경신(1935) : 1935년 오늘 !
미국 유타주의 한 자동차 경기장 !
세계적인 카 레이서가 새로운 자동차 속도기록을 수립할지에 관심이 모아집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투기 조종사였던 말콤 캠벨 !
캠벨은 시속 301마일을 기록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속 3백 마일대를 돌파합니다.
1924년부터 11년동안 아홉차례에 걸쳐 세계 자동차 공식기록을 경신한 말콤 캠벨 !
1939년에는 보트를 타고 시속 141마일이 세계기록을 세우기도 합니다.
⑪ 페르부르트(베르워르) 남아공 총리 취임(1958) : 1958년 오늘 헨드
릭 페르부르트(Hendrik Verwoerd)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새 총리로 취임한다.
페르부르트는 전임 스트레이덤 총리의 사망으로 총리 직을 계승하게 됐다.
페르부르트는 인종차별정책의 강력한 신봉자였다.
그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흑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페르부르트 총리는 취임 8년 만인 1966년 의회 회의실 안에서 모잠비크 청년에게 피살된다.
⑫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독가스 처형 시작(1941) : 우리는 흔히 폴란드에 있었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만을 알고 있지만 유태인들은 마이다네크, 베르겐-벨젠, 다하우, 웨스터보르크, 푸아쇼프 등 수 십 군데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수백 만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굶어서, 맞아서, 찔려서, 병에 걸려, 가스실에서, 생체실험으로 죽어갔다.
나치는 비행사들이 입을 비행복을 개발하기 위해 유태인들을 얼음물에 집어넣었고, 인간이 기압에 어느 정도 견디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고압실에 넣어 코피가 터지고 뇌가 부서지면서 죽게 했으며, 온수(溫水) 목욕을 시켜준다고 목욕탕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샤워기에 독가스를 분사하여 유태인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손가락 끝이 문드러지도록 출입문을 긁어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치에 의해 몇 명의 유태인이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2차 대전 전․후 유럽 각국의 유태인 숫자를 파악한 결과 희생자는 약 6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330만에 이르던 유태인중 90%가 학살되어 30만 명만 남았고, 헝가리에서도 80만 명중 60만 명을 화물기차에 짐짝처럼 실어와 모두 가스실 앞에 내려놓았다.
독일에서는 20만 명, 루마니아에서는 28만 명, 네덜란드에서는 10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의 총칼에 죽었다.
이밖에도 프랑스, 소련,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서 유태인들을 끌고 가 이러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학살은 나치에 의해서 자행되었지만 일부 인종차별주의자들도 동참했다.
유태인을 돈 욕심 많고 콧대 높은 민족으로 시기했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때를 만난 듯 이웃에 사는 유태인들을 신고했고, 끌려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럽인 거의 대다수가 수백만의 유태인이 끌려가 학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관했다는 것이다.
몇 천명도 아니고 몇 백 만 명의 동시대 인류가 죽어가고 있음에도 이들은 나치의 군홧발아래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유럽인들의 원죄(原罪)의식은 시작된다.
⑬ 영국의 공위시대(空位時代;Interregnum) : 청교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찰스 1세가 처형된 1649년부터 찰스 2세가 즉위해 왕정이 회복된 1660년까지를 영국사에서는 공위시대(空位時代;Interregnum)라고 부른다.
영국인들이 공화정을 겪어본 유일한 기간이다.
이 기간 중 1653년 이후를 호국경체제(護國卿體制;Protectorate)라고 한다.
혁명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1599~1658.9.3)과 그의 아들 리처드가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기의 영국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영국 의회는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고 4년이 지난 1657년 나라를 안정시켜야 한다며 그에게 왕관을 바쳤다.
그러나 크롬웰은 왕위를 거절했다. 공화정에 대한 개인적 신념도 작용했지만, 군대가 왕정의 부활에 다소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크롬웰은 그러나 왕 이상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였다.
게다가 그는 호국경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했다.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로 국가 원수의 직명을 대통령에서 봉민관(奉民官)으로 고치자는 제안이 나온 적이 있다.
⑭ 왕정치 756홈런으로 세계신기록 수립(1977) : 756호 홈런으로 세계신기록을 달성한 일본 왕정치 선수 !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이 벌어지고 있던 1977년 9월 3일 일본 도쿄 고라쿠엔구장. 요미우리 공격인 3회말 1사후 5만여 관중의 박수 속에 37세의 왕정치가 등장했다.
그는 볼카운트 2-3에서 야쿠르트 선발 스즈키의 제6구를 강타, 오른쪽 스탠드 중단에 꽂히는 라이너성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40호이자 생애 통산 756호. 미국 행크 아론이 세운 홈런 세계기록 755호를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도쿄의 모든 방송들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왕정치의 특집방송을 보냈으며, 경기 후 그라운드에서 있은 기념식에서는 행크 아론의 축하 메시지가 녹음으로 방송됐다.
왕은 "기록은 깨지게 마련이다. 후배들이 이를 능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친 통산 868호 홈런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⑮ 말콤 캠벨, 시속 3백마일 벽 돌파(1935) : 1935년 오늘 미국 유타주의 본빌 솔트 평원(Bonneville Salt Flats)에서 자동차 속도 신기록이 수립된다.
주인공은 속도기록의 대부, 스피드 광으로 유명한 영국인 말콤 캠벨(Malcom Campbell)경!
이때 그의 나이 50살!
그는 이날 롤스로이스 1200마력 엔진을 탑재한 블루버드를 몰아 마의 3백마일 벽을 깬다.
그의 차는 시속 301.13마일을 기록한다.
미터계로 환산하면 484.8km에 이르는 속도로 세계 신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캠벨 경은 이전에도 오토바이와 항공기, 보트로 여러 속도 기록을 세워 기사작위를 받았다.
⑯ 스웨덴 우측통행 실시(1967) : “9월 3일 스웨덴 국민 800만 명과 200만 대의 자동차는 5만8000마일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한꺼번에 이동하게 될 것이다.”
1967년 8월 20일자 미국 뉴욕타임스는 스웨덴의 획기적인 ‘교통 실험’에 주목했다.
스웨덴 정부는 300여 년간 내려온 좌측통행 전통을 우측통행으로 바꾸기로 했다.
우측통행 시행 첫날인 9월 3일을 ‘H 데이’(스웨덴어로 ‘다겐 H’)로 잡았다.
H는 스웨덴어로 우측통행(H¨ogertrafik)’의 머리글자.
일요일인 ‘다겐 H’ 오전 4시 45분.
스웨덴의 모든 도로에서 차량들이 일제히 멈췄다.
5분 후 좌측통행 차선에 있던 자동차들이 조심스럽게 차선을 오른쪽으로 바꿨다.
오전 5시 차량들은 사상 처음 우측통행을 시작했다.
300여 년간 내려온 좌측통행 전통이 바뀌는 데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제도가 1963년 의회를 통과하기까지는 무려 40년이 걸렸다.
스웨덴 정부는 노르웨이 등 이웃 국가들이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는 점과 스웨덴에서 좌측통행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빈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민을 설득했다.
의회의 동의를 얻은 스웨덴 정부는 ‘우측통행위원회’를 만들어 4년간 체계적인 준비를 했다.
심리학자까지 동원해 우측통행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국민을 대상으로 우측통행 홍보에 나섰다.
정부는 ‘H 데이’를 상징하는 알파벳 ‘H’를 응용해 차선 변경을 상징하는 ‘다겐 H’ 로고를 제작하고 각종 기념품까지 배포했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다겐 H’ 로고가 새겨진 여성용 속옷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측통행이 시행된 ‘다겐 H’의 이튿날 스웨덴에서는 130∼196건이 일어나던 월요일 교통사고가 125건으로 줄었다.
평소보다 교통사고가 감소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정책이 수립된다.
하지만 원칙도 계획도 없는 졸속정책이 대부분이다.”
이성용 베인앤컴퍼니코리아 대표는 저서 ‘한국을 찾아라’에서 “한국인들은 ‘대충대충’이라는 문화에 익숙해 완벽하거나 원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민적 합의를 위해 40년간 기다리고, 4년간 철저하게 준비한 스웨덴의 ‘다겐 H’ 프로젝트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2007)
⑰‘더 선(The Sun)’ 창간(1832) : 현대 신문의 시조.
신문으로는 최초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더 선」지가 1833년 오늘
미국 뉴욕에서 창간되었다.
⑱ 우스터(Worcester) 전투 : 1651년 9월3일 잉글랜드 서북부 우스터.
기병대를 앞세운 의회군 1만여명이 왕당파 군대를 향해 달려나갔다.
내전 격화로 아버지 찰스 1세가 참수형을 당한 뒤 스코틀랜드로 피신,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찰스 2세는 승리를 장담했다.
이권을 약속해 용감하기로 소문난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물론 유럽 대륙의 용병까지 1만6,000여명의 군대를 끌고 왔기 때문이다.
결과는 찰스 2세의 기대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정면뿐 아니라 측면과 후방에서도 의회군이 쳐들어왔다.
의회군 총병력은 3만1,000여명. 국왕군의 2배에 가까웠다.
군편제를 대폭 개선해 철기병 또는 신형군으로 불렸던 의회군은 장비에서도 국왕군을 압도했다.
사기도 높았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봉급을 받은 군대라고 평가될 만큼 대우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종결된 전투에서 국왕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전사자 3,000여명에 포로 1만명. 반면 의회군 사상자는 200명에 그쳤다.
완벽한 승리는 1642년부터 시작된 영국내전을 종식시켰다.
우스터 전투는 식민지의 인력난 완화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도 낳았다.
스코틀랜드 포로 8,000명이 일정 기간 종료 후 자유민으로 풀려나는 계약노예 신분으로 뉴잉글랜드 등지에 보내졌으니까.
찰스 2세는 가까스로 프랑스로 도망쳐 의회군을 지휘했던 크롬웰이 사망한 뒤 왕정복고(1660년)까지 망명의 세월을 보냈다.
영국이 9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빠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 국왕이 관직매매와 독점사업권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봉건적 관습으로 되돌아간데다 한시적 세금인 건함세의 확대, 대주교를 앞세운 종교의식 강요가 겹쳐 반란을 불렀다.
온당치 못한 조세정책과 인사ㆍ정책에 대한 불만, 종교적 편향성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권홍우 편집위원.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⑲ 노예해방 선구자 더글러스 탈출(1838) :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갓난아이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7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누군지 몰랐다.
아마 그의 ‘백인 주인’일 거라고 주변에서 쑥덕거릴 뿐이었다.
더글러스는 흑인 노예였다.
농장주는 노예가 가족과 보내는 시간까지 아까워했다.
여러 일터를 전전하던 더글러스가 12세쯤 됐을 무렵, 똘똘한 꼬마를 눈여겨본 안주인으로부터 알파벳을 배웠으나 곧 중단되고 말았다.
노예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글눈 뜬 노예가 처지를 자각하고 자유를 갈망할까 두려웠을 것이다.
영민한 소년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이웃의 백인 아이에게 글을 배웠고 어른이 쓰는 글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내 글을 익힌 더글러스는 신문과 전단, 책에 새겨진 활자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맹을 탈출한 소년에게 새 세상이 열렸다.
더글러스는 자유와 인권을 알게 됐고 노예제에 의문을 품었다.
농장의 주일학교에서 다른 노예에게 신약성서 읽는 법을 가르쳤다.
소문을 듣고 매주 40명이 넘는 학생이 비밀리에 찾아왔다.
그러나 6개월 뒤 들통이 나고 말았고 여러 농장주가 합세해 이 모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문제 노예’로 찍힌 16세의 더글러스는 ‘노예 길들이는 사람’에게 보내졌다.
매일 두들겨 맞으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던 소년은 어느 날 힘으로 대항했다.
노예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것이다.
1838년 9월 3일, 더글러스는 굴레를 벗어났다.
선원 옷을 입고 친분 있는 흑인 수병의 신분증을 빌려 기차에 올라탔다.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노예폐지운동을 벌이는 백인 윌리엄 개리슨을 만난 뒤 노예제 폐지 연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1845년 출간한 자서전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도망친 노예라는 신분이 드러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더글러스는 그곳에서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한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귀국해 노예 해방 운동 신문을 발간하고 남북전쟁 중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노예제 폐지를 건의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 해방을 위해 평생을 보낸 그는 진정한 노예 해방 운동의 선구자였다.
7월 워싱턴포스트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와 150여 년 전 더글러스의 독립기념일 연설을 비교 분석했다.
더글러스는 미국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흑인노예를 언급하며 미국이 민주주의 실험에서 소외됐다는 점을 부각시킨 반면에 오바마 후보는 미국이 조국이며 독립기념일을 함께 기뻐할 시간으로 규정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2008)
⑳ 파리조약 체결로 '미국 13개 주 독립' 획득 : 1781년 영국군이 버지니아주의 요크타운(Yorktown)에서 항복한지 2년 뒤인 1783년 9월 3일 오늘, 영국이 미국 13개 주 식민지의 독립을 정식 승인했다. 이미 7년 전에 독립을 선언했던 '미합중국'은 파리조약으로 영국령 캐나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 사이, 대서양에서부터 미시시피강을 경계로 한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되었다.
독립 신생 국가가 된 13개 주는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저지,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뉴욕, 펜실바니아"이다.
프랑스는 영국 견제를 위해 이미 독립 전쟁 초기인 1778년부터 미합중국을 지원해 왔다.
스페인, 네덜란드, 러시아 역시 독립 전쟁을 후원했으나, '파리조약' 체결로 독립 승인을 이끌어 낸 것은 프랑스였다.
파리조약 체결은 영국과 13개 식민지 모두의 실리 추구의 결과로 보인다.
영국은 알레가니(Allegheny) 산맥과 미시시피강 사이의 '서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분명히 함으로써, 아메리카대륙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했다.
반면 미합중국은 13개 식민지의 독립 승인 이후에도 '영국'의 지원을 확보함으로서, 신생 독립국의 위상 확립과 국내 정치 의 조속한 안정을 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파리조약은 영국과 13개 식민지 대표간의 이러한 사전 조율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파리조약' 당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프랑스의 서인도 제도 일부 그리고 스페인의 플로리다 지배"에 합의한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영국은 '미합중국 독립 승인' 이면에 담긴 본래 의도와 달리, 북미 식민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㉑ 기타 오늘의 역사 ㉒㉓
1758 타보라 음모.포르투갈 왕 요안네스1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그 결과 귀족,예수회 수도사들이 무자비한 박해 를 당함.
1904 세브란스 준공.기독교 실업가,자선사업가,세브란스 병원의 설 립자.제중원 건축때 거액의 건축비를 기부한 공로로 제중원 을 세브란스병원으로 명명함.
1910 레니크 내한.미북장로교 한국선교사.한국명 여라기.경북 안동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임.
1923 박열, 일왕 암살음모로 피검
1941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1946 조선기독교연합회(KNCC) 창립 (회장:김관식)
1947 보선(普選)법 공포
1949 엘살바도르 한국을 정식 승인
1952 미국 B29 폭격기 편대 장진발전소 폭격
1952 뇌염으로 학교, 극장 등 폐쇄
1954 중공군, 금문-마조도에 포격
1959 서울 당인리 화력발전소 발전 개시
1963 자민당 창당 (위원장 김준연, 송요찬, 김재춘 등 참여)
1967 월남 대통령선거에서 쿠웬반티우 당선
1971 카타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1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베를린 협정 조인
1974 원신희, 아시아경기대회 역도서 금메달 3개 획득
1976 미국 바이킹2호 화성에 연착륙
1976 한국주택은행 주택복권 발행 공고
1977 왕정치 일본 프로야구선수, 756홈런으로 미국 행크 아론이 세운 세계기록 755호를 경신
1978 신현확 보사부장관 한국각료론 첫소련 입국,WHO회의 참석
1978 요한 바오로1세 교황에 즉위
1980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상 재개 합의
1981 부마고속도로(43.5km) 개통
1987 한국지구촌선교회 태국선교사역과 함께 창립
1988 북한 및 공산권자료 공개
1993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유명우, 현역에서 은퇴
1996 박재홍 선수,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30(홈런)-30 (도루)' 달성
1997 베트남기 프놈펜에서 추락, 한국인 21명 포함 탑승객 65 명 사망
1998 5대그룹, 8개업종 구조조정안에 최종합의 이형택 선수, US오 픈테니스 16강에 올라
2001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 국회통과
오늘의 인물
① 유길준(兪吉濬 ; 1856 - 1914.9.3) : 개화사상가․정치가.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본관은 기계(杞溪).
서울 출신.
1870년(고종 7) 박규수(朴珪壽)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청년들과 접촉하면서 신문물을 배웠다.
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하였고, 83년에는 미국 더머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84년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1년간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귀국하였으나 개화파의 일원으로 간주, 체포되어 연금생활을 하였다.
이때 최초의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였다.
94년에는 내무총신, 내무협판을 지내면서 개혁에 참여하였고, 95년에는 내부대신에 올라 음력 폐지․종두법 실시․우편개시․건양(建陽) 연호사용․단발령 실시 등을 과감히 추진하는 한편, 《독립신문》 발간에 국고보조를 단행하였다.
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일본에 망명한 뒤, 조선 보수정부의 전복음모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여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 귀국하여 국민경제회․흥사단․한성부민회 등을 조직하는 한편, 계산학교(桂山學校)․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하여 사회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국어학사상 최초의 문법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간행하였다.
저서에는 《서유견문》 《구당시초(矩堂詩抄)》 《노동야학독본》 등이 있다.
② 석금성(石金星 ; 1907.12.3 ~ 1995.9.3) : ⇨12월 3일.
원로배우.
'토월회'의 석씨는 우리 연극 영화의 태동과 발전을 한 눈에 굽어보았던 원로배우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진명여고를 졸업한 씨는 1925년 토월회에 입단. 무대인생을 시작했다.
1937년 무성영화 '심청전'으로 영화계에 데뷔 '춘향전' '단종애사' '장화홍련전' 등 2백여편의 작품에 주로 악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미수(88세)를 앞두고도 SBS드라마 '분례기' 등에 출연하는 등 영원한 배우로서 남고자 했다.
배우로서 성공한 그였지만 무대 밖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20세 때 경성방송국 아나운서이며 무용가 최승희의 친오빠인 최승일과 결혼, 맏딸 로사 등 4남매를 두었지만 남편과 자녀들은 광복 뒤 월북, 그는 이후 50년 가까이 홀로 살아왔다.
1991년 시인이 된 딸 로사와 무용가로 성장한 막내아들 호섭과 극적으로 서신이 닿아 자녀와의 상봉을 손꼽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말년에는 생활고를 겪으며 서울시 남영동 여관을 전전하다가 1991년 드라마 '문례기' 출연으로 알게된 아역배우 홍보경양의 부친 홍무씨의 집에서 지난 4년 동안 함께 살아왔다.
혈육과의 생이별을 고통스레 간직한 채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여우(女優)의 유일한 낙은 하루 3갑씩 피워대던 담배였다.
③ 장일순(張壹淳 ; 1928.9.3 ~ 1994.5.22) : ⇨5월 22일.
한국의 서화가·사회운동가·정치가.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자연복구를 주장하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서예에 뛰어났고 만년에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얼굴 난초' 작업을 했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청강(靑江)·무위당(无爲堂)·일속자(一粟子)이다.
1928년 9월 3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 서예를 배웠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뒤에는 고향인 원주로 내려가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았다.
1953년 원주 대성학원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육운동에 힘쓰던 중 1960년 4·19혁명 직후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직후 줄곧 주장해 오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으로 인해 구속되어 3년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계속 '정치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묶여 군사정권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천주교 원주교구장인 지학순(池學淳), 시인 김지하(金芝河) 등과 함께 강원도 일대의 농촌·광산 지역을 돌며 농민·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1974년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하고 수사기관에 출두하도록 권유하였다.
1970년대 원주 지역이 반독재 투쟁의 주요 거점이 되었던 것도 바로 장일순과 지학순이 있었기 때문인데, 장일순은 정치활동의 전면에는 결코 나서는 법이 없이 항상 뒤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원주의 '한살림운동'을 주도하면서 호를 '한 알의 작은 좁쌀'이라는 뜻의 일속자로 바꾸고 산업문명으로 파괴된 자연의 복구를 주장하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유학·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최시형(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일명 '걷는 동학(東學)'으로 통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1988년 한살림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 개인전을 제외하고는 돈을 받고 작품을 파는 법이 없었다.
서화 가운데서도 특히 난초를 잘 그렸고, 만년에는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 내는 '얼굴 난초'로 유명하였다.
④ 크롬웰(Oliver Cromwell ; 1599.4.25 - 1658.9.3) :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잉글랜드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쇠덩이같은 굳은 의지의 교도로 자라난 그는 하원 의원으로 뽑힌 후, 1642년의 청교도 혁명이 나자 신앙심이 두터운 자작농들을 모아 소위 철기병을 조직, 의회군에 가담하여 용감히 싸운후, 찰즈 1세를 물리치고 공화제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너무 엄한 정치를 하여 백성의 미움을 받았으며,그 가 죽은 후 공화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7월 28일.
⇨4월 25일.
⑤ 호치민(胡志明 ; 1890.5.19 ~ 1969.9.3) : 베트남의 정치가.
프랑스 정부에 반대하여 유색인종 해방 운동을 했으며 2차대전 말에 베트남 공산당을 조직,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대통령에 세 번 당선했다.
북베트남의 최고 지도자 호치민 !
1969년 오늘 심장마비로 일흔 아홉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보름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베트남 통일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채 숨집니다.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였던 호치민 !
호치민은 소년시절부터 프랑스 지배에 대항해 독립운동에 참가하면서 공산당원이 됩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국민 총봉기를 통해 베트남 민주공화국 즉 북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주석에 취임합니다.
1954년 디엔 비앤 푸 등에서의 격전에서도프랑스군에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베트남의 독립을 지킵니다.
호치민이 숨진 뒤 6년만에 베트남은 통일됩니다.
⑥ 설리번(Louis (Henry) Sullivan ; 1856.9.3 - 1924.4.14) : 설리번은 근대건축의 정신적 선구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건축가이다. 초기 마천루 건축미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1879~95년 당크마르 애들러와 동업하면서 유명한 건물들을 설계했다.
설리번과 애들러는 14년을 함께 일하면서 100여 개의 건물을 만들어냈는데, 애들러의 사업가적인 수완과 기술력은 설리번의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
당시에 만든 건물들 가운데 대다수가 미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풍부한 장식미를 건축 속에 끌어들여 시카고에 있는 오디토리움 빌딩(1866~89), 버펄로에 있는 개런티 빌딩(지금의 프루덴셜 빌딩, 1894~95),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웨인라이트 빌딩(1890~91) 등을 설계했다.
그는 건축 설계뿐만 아니라 저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주관적이고 은유적인 내용으로 건축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한편으로는 기계적인 예술이론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저서에 <개념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an Idea>(1924)․<자서전 Autobiography>․<능력 있는 사람의 철학에 따른 건축장식 시스템 A System of Architectural Ornament According with a Philosophy of Man's Powers>(1924) 등이 있다.
사후인 1946년 미국건축가협회(AIA)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⑦ 니콜로 아마티( ; 1596.9.3 - 1684) : 현악기 제작자 니콜로 아마티가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의 역사에서 크레모나라는 지명과 아마티라는 가문은 산실과 산파 역할을 맡았다.
그 이전까지의 현악기들이 16세기 들어와 지금의 바이올린 형태로 개량된 것이 크레모나에서였고, 그런 개량 작업의 중심에 아마티 가문이 있었다.
크레모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비롯한 현악기의 역사에 아마티 가문 못지않게 기여한 구아르네리 가문과 스트라디바리 가문의 본향이기도 하다.
오늘의 주인공 니콜로 아마티의 할아버지 안드레아 아마티의 손을 거치며 지금 형태와 비슷하게 개량된 바이올린은 안드레아의 아들 안토니오와 지롤라모 형제를 통해 더 다듬어졌고, 지롤라모의 아들 니콜로에 이르러 완전한 예술적 명기(名器)가 되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니콜로가 직접 만든 바이올린들은 대(大)아마티로 불렸다.
니콜로 아마티의 공방에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안드레아 구아르네리라는 도제(徒弟)가 있었는데, 이들의 손재주도 스승 못지않게 뛰어나 각자가 이내 독립해 독자적 형태의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특히 작고하기 한 해 전인 92세 때까지 일손을 놓지 않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악기들은 스승의 것보다 더욱 큰 음량과 섬세한 음색을 자랑해 이미 그의 생전부터 명기라는 소문이 높았다.
아마티 가문에서 시작된 크레모나파(派)의 영향은 이내 밀라노.볼로냐.베네치아.나폴리 등 이탈리아 각지로 퍼져나갔다.
세 가문의 장인(匠人)들은 음악이라는 예술을 담아내는 악기 자체를 또 하나의 예술로 만든 사람들이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현악기 연주자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악기 수백 개는 수집가들만이 아니라 일급 연주자들의 군침을 돌게 하고 있다(고종석,2004).
⑧ 장 조레스(Auguste-Marie-Joseph-Jean JaurAs ; 1859.9.3 ~ 1914.7.31) :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가 겸 정치가.
⇨7월 31일.
⑨ 매슈 볼턴(Matthew Boulton ; 1728.9.3 - 1809.8.17) : 영국의 기계기술자 출신 사업가로 볼턴와트상회를 설립하였으며, 산업혁명을 추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버밍엄 출생.
1759년 버밍엄 북쪽에 있는 소호에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을 지어, 1762년부터 각종 금속제품을 제조하였다.
그는 J.와트와 1775년에 볼턴와트상회(商會)를 설립하였으며, 와트의 증기기관의 개량과 증기기관의 특허를 25년간 연장하는 데 힘썼고, 산업혁명을 추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프랭클린의 내방으로 더욱 자극되어, E.다윈, J.프리스틀리, J.웨지우드, J.와트 등 당시의 대표적 과학자 및 산업가를 소호공장 근처에 정기적으로 모이도록 주선하고 ‘루너 소사이어티’를 조직, 지식의 교류를 도모하였다.
⇨8월 17일.
⑩ 투르게니에프(Ivan Sergeevich Turgenyev ; 1818.11.9 - 188 3.9.3) : ⇨11월 9일.
러시아의 소설가.
독일에 유학, 바쿠닌(Bakunin)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寫實的)인 자연묘사,예민한 심리관찰로써 1840~1880년에 걸친 러시아의 모든 사회 문제를 포함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표작은 〈첫사랑〉〈아버지와 아들〉〈처녀지〉<엽인일기(獵人日記)>.
⑪ 포르쉐(Ferdinand Porsche ; 1875.9.3 ~ 1951.1.30) : ⇨1월 30일.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설계자·제작자.
1910년 프린스 헨리 트라이얼에서 그가 설계한 OHC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1, 2, 3위를 독점함으로써 시선을 집중시켰다.
1939년 포르쉐란 이름의 차를 처음으로 제작하였고 포르쉐 365 ·911 ·924 ·928 등 우수한 스포츠카를 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마퍼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말 빈의 로넬사(社)에서 전기자동차의 설계·제조에 성공한 뒤 아우스트로-다임러사로 옮겨 1910년 프린스 헨리 트라이얼에서 그가 설계한 OHC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1, 2, 3위를 독점함으로써 시선을 집중시켰다.
메르세데스슈타이어사로 옮겼다가 1930년 독립하여 폭스바겐 등을 설계하였으며, 1939년 포르쉐란 이름의 차를 처음으로 제작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레이스에는 출전하지 못하였다.
전후 전범으로 프랑스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사이 르노 4CV(프랑스)·치시탈리아(이탈리아)를 설계하였다.
1949년 포르쉐 365를 발표한 이래 911 ·924 ·928 등 우수한 스포츠카를 제작하였다.
⑫ 선다 싱(Sundar Singh ; 1889.9.3 - 1933.4.17) : 선다 싱은 인도가 배출된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로 마음속에 뜨거운 사랑을 가진'맨발의 전도자'라고 불리운다.
그는 1889년 인도 펀자브 주 람푸르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시크교 집안에서 자랐다.
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기독교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러나 1905년 16세때 죽음을 각오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후 기독교를 전파하는 순례 생활을 시작했다.
선다싱은 19세때에 (1908년) 혼자서 티벳선교에 나섰다.
그는 그때부터 1929년까지 약20년 동안이나 혹독한 추위와 주민들의 온갖 박해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티벳선교에 주력하였다.
선다싱은 1929년 그의 나이가 40이었을 때에 티벳 선교중 실종되었다.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시신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최후는 하나님만이 알 뿐이다.
⇨ 4월 17일.
⑬ 기타 오늘의 인물⑭ ⑮
0931 일본의 59대 천황(887-897) 우다 사망
1797 니커슨 출생.미국 감리교 목사.그는 네번이나 총회 대표로 선 출됨.
1818 포겔장 출생.로마가톨릭 교도로서 사회개혁자였던 그의 저술 들은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의 활동과 이념형성에 이바지 함.
1877 프랑스 제3공화국의 창조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티에르 사 망
1885 엄치상 출생.장로교 목사.한국선교사인 럽과 영목사의 어학선 생겸 조사로 활약함.
1913 배우 앨런 랏드 출생
1915 여배우-기수 키티 카리슬리 출생
1926 라이스트 출생.미북장로교 한국 여선교사,간호원.평양 기독병 원에서 간호원으로 병원사업 복음사업에 헌신함.
1941 연극배우 추송웅 출생
1943 여배우 발레리 페렌느 출생
1998 태고종 종정 보성 스님 열반
오늘의 샘터
① 루이스 설리번의 말 : Frank A. Werner가 1919년에 그린 유화(부분) "항상 형태가 기능을 뒤따르기 마련이다."
② 아마티(Amati) : [요약]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가문명.
[본문] 이 집안에서 만든 명기(名器)도 아마티라고 부른다.
아마티가는 초대 안드레아 아마티가 16세기 중엽 아름답고 독특한 모양과 도료를 연구하여 근세 바이올린의 스타일을 정착시켰다.
아마티가 중에서도 니콜라 아마티(1596∼1684)는 최대의 거장(巨匠)으로 알려졌고, 오늘날 아마티의 명기로서 애장되고 있는 것은 니콜라, 즉 대(大)아마티가 만든 것이다.
모양은 별로 크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으며, 음색도 투명 우아하고 아름다워, 실내악 등에서 그 특색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스트라디바리, 구아르네리 같은 거장이 나왔다.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