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작열(灼熱)하는 한여름
관악산 문원폭포를 다녀와서!
가을이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인 어제 인터넷 카페 5060아름다운세상의 산행동호인들이
일요산행을 하는 날 관악산 육봉 밑 문원폭포를 간다기에 갈까말까 망서리다가 집에 있으면 더위
와 싸우지만 폭포수 아래 있으면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하철로 두 시간을 달려야만 닿는
과천정부청사역에 도착하니 10:10분 하루라도 안보면 그리워지는 님들을 만나니 더위를 피하며
세상 이야기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미소가 가득 담긴 모습으로 스스럼 없는 정담(情談)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오늘도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역을 나와서 산행 들머리의
공원에서 인원점검을 하니 26명 오붓한 가족같은 느낌으로 둘레길을 가다가 산으로 올라 폭포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목마다의 계곡엔 연일 불볕더위 때문인지 바싹 말라있어서 과연 폭포수를
볼 수 있을까라는 실망감이 없지않았지만 오르고 또 오르니 육봉아래 문원폭포는 비가 오던 장마 때
보다는 물이 많지 않지만 더위를 피하기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옷을 입은 채로 물 웅덩이에 풍덩 머리
까지 물속에 감췄다가 솟구쳐 내놓은 그 맛은 삼복더위 때 물놀의 진수(眞隨)였습니다. 음식 맛이 땡기는
굴풋한 시간에 물가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배낭에 든 먹거리를 꺼내 차려놓으니 그야말로 진수성찬
(珍羞盛饌)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물놀이를 하다가 오후 세시에 하산하여 정부청사들이 있는
동네에 내려와 호프집에 가서 션한 맥주 둬 잔을 마시고 나오는데 또 빙수집에 안내가 되어서 옛날 빙수는 땀을 식히기
위해 먹는 빙수라면 요즘 빙수는 션한 맛에다가 고소한 맛 쫄깃한 맛에다가 땡기는 맛이 더해지니
세월지나 추억의 맛으로 기억되는 빙수가 될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다정한 시간을 함께한 님들과
헤어져 집에오니 밤 여덟시 사십분이었습니다..
전해오는 관악산 연주암
연주대 청권사 이야기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는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남쪽 과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연주암이 있다. 1396년에 연주암을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워 중건하였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연주대는 조선 초기에 '염주대(念主臺)
'로 칭해졌다고 하는데 '군주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염주대의 명칭이 입으로 전해 지면서 연주대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높이
4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것도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태종의 사랑이 충녕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효령대군
에게도 또한 지극한 사랑을 주었고 실제 그는 국정을
운영할 기본적인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효령대군에게 결정적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는 것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조선초기에 해마다 몇 차례씩
조선에 찾아오는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는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국왕들과 크게
취하도록 마시며 조선의 국왕을
시험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술 한잔도 할 수 없는 효령이 조선의 국왕이 된다면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결국
세자의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기록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결정에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동생인 충녕대군이 조선의
국왕이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큰 격려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대인의 풍모였다는 평이다.
그동안 있었던 왕자의 난으로 보아 왕위를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어
세종을 흔들었으면 조선 문화의 황금기 시대라는 세종
시대는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같은 효령대군의 결단과
지원이 없었다면 성군 세종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상당한 설득력을 만들어 주고 있다.
실제로 이같은 단초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편집한 『조야휘언』필사본에는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데 효령대군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당시 왕실의 형제간
우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太宗)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이 '나의 형(효령대군)이 곧 청권
'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조(正祖) 대에 이르러 효령
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하였다. 효령
대군의 사당과 묘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권(淸權)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령대군은 조선 초기 불교를 진흥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1429년(세종 11) 관악사를
건립하고, 월출산 무위사의 중창을 지도하고,
만덕산 백련사 중창의 시주가 되었다. 1997년
부터진 행된 양주 회암사지의 발굴 현장에서 효령
대군의 시주에 의해 건립된 전각의 기왓장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기왓장에는 효령대군이라는
명문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볼 때 효령대군의 불교진흥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고 결국,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영험함이
뛰어나다는 연주대와 연주암은 효령대군의 공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별의 성당고개
손인호(1955년 오아시스)
꽃님이 떨어지는 낯설은 타관 쓸쓸한밤에
달빛을 바라보니 잊었던 고향생각 또다시 떠오르네
성당 고개언덕 한모퉁에서 말없이 눈물흘리던
열아홉살 가락머리가 다시 그리워
♥
산설고 물도설은 타향살이에 흐르는세월
해마다 꽃은피고 산에서 새는우나 청춘도 시드누나
성당 고개언덕 봄꽃이피면 그대가 꽃한송이를
내가슴에 꽂은 시절이 다시 그리워
2016-08-08 작성자 청해명파